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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대 수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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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대성박학의 지성과 통찰이 경전을 훑었건만 아직도 더 궁구해야 할 비의가 남았을까 하던 단계에서, 남송의 주희가 혜성처럼 나타나 오히려 기성 유학을 재편하고 더 공고한 근본주의(꼭 좋은 뜻만은 아니지만)을 다지는 포괄적 성취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조류의 개조에 대고 꼭 극존의 호칭을 붙이는 건 아니지만, 유독 그에 대해서만은 "주자"라며 후학들이 그 방대한 천착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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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토록 대성박학의 지성과 통찰이 경전을 훑었건만 아직도 더 궁구해야 할 비의가 남았을까 하던 단계에서, 남송의 주희가 혜성처럼 나타나 오히려 기성 유학을 재편하고 더 공고한 근본주의(꼭 좋은 뜻만은 아니지만)을 다지는 포괄적 성취를 남겼습니다. 새로운 조류의 개조에 대고 꼭 극존의 호칭을 붙이는 건 아니지만, 유독 그에 대해서만은 "주자"라며 후학들이 그 방대한 천착과 정렬의 공적에 대고 최상의 헌정을 바친 바 있죠. 토마스 아퀴나스에 대해 창의적이고 진취적 지성이라며 칭송하는 이는 아무도 없지만, 화끈하게 기성의 가치를 통박하고 자아류의 모토를 내세우기보다는 오히려 차분히 종전의 성과를 집대성하는 작업이 훨씬 (보람도 없으면서) 고된 법입니다.

여튼 이 주자가 표방한 여러 덕목 중 "거경지지"라는 게 있는데, "거경'이라 함은 "경(敬)"에 머문다[居]는 뜻이죠. 이 책의 저자께서는 간단히 "정신 집중"으로 풀이했는데, 뭐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떤 문구나 표현이건 원의(原義)에 일단 주목하여 그 뜻을 탐구할 필요가 있습니다. 무엇이 "경"에 머무는가? 理의 도움을 받지 않고 혼자 발(發)할 수 있는 기(氣)가, 그 갈 길을 찾지 못하고 온갖 잡생각과 타락한 망념 사이를 배회할 때(사실, 지난시절 유생들은 대개가 젊은 나이였으므로 이런 혈기를 억누르고 텍스트에로의 침잠을 이루는 게 무척이나 힘들었을 테니 말입니다), 오로지 난(亂)한 생각을 가라앉히고 그 파란 가득한 에너지를 삼감[敬]에 정착시키는 게 일단 첫째 목표이지 않았겠습니까. 그래서 현대인에게는 저렇게 무색무취무감의 "정신 집중"으로만 새겨지지만, 그 함의를 궁구하다 보면 이처럼이나 살아 움직이는 심상이 포착되는 거죠. 아무튼 실용적(?) 관점에선 간단히 "정신집중"으로 치환되면 일단 충분합니다. 이 책의 1장도 (그런 취지인지는 모르겠으나) 온통 "욕망을 절제하는 방법"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거경"은 곧 "지지(持志)"로 이어집니다. 한번 높은 뜻을 품는 것도 쉽지 않은데, 그 뜻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란 더욱 어렵습니다. 뭐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로 바꾸면 "초심을 지킨다" 정도이겠습니다. 맹자는 처음에 뜻을 받들어 세우는 걸 "상지(尙志)"라고 불렀는데(중학교 때 이 이름을 가진 친구가 생각나네요. 조부님이 얼마나 깊은 사려 끝에 이 소중한 명자를 지어주셨을까요 ㅎ), 이를 지켜[堅] 나가는 걸 특히 "지지"라고 정리했습니다. 이처럼 정신에 바른 뜻이 세워지고 기반을 다지면 "의(義)"가 모이[集]는데, 이 단계를 "집의"라고 표현합니다. 자유자재로 한 가지 일에 전념할 수 있고, 마음 속의 불꽃을 꺼뜨리지 않는 경지라고(이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정리할 수 있겠습니다.

비천한 돼지의 경우 이런 궁극의 단계를 아예 모릅니다. 우리는 자주는 아니라도 얼굴에 김치조각이나 김 부스러기를 붙이고 다니는 얼빠진 사람을 보곤 하는데, 이런 꼴을 보면 우습다기보다 비참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거울을 안 보는 사람은 대개 겸손하다거나 가식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 반대로 자기 반성의 기제가 태생적으로, DNA상으로 결핍되어서일 가능성이 큽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사물과 단어의 뜻을 정반대로 알고 버젓이 간판에 걸어 놓고도 부끄러운 줄을 모를까요? 하루가 지났으면 누가 지적해 주는 사람이라도 있어서 수정이 된 줄 알았는데, 유유상종이라고 똑같은 인간들만 모여 아무 내용도 없는 객담만 소음처럼 교환하니 이게 "눈먼 자들의 토굴"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돼지꼴을 면하기란 이처럼이나 힘들며, 아니 무슨 생전에 돈푼이나 쥐고 투자란 걸 해봤어야지 세상 돌아가는 감을 잡을 거 아닙니까. 맞는 텍스트를 읽어도 그게 어디 적용되는 줄을 몰라 그 좁고좁은 자기 세계에 도로 떨어지는 퇴행반복을 일삼으니, 뭘 읽어도 결국은 맨날 하는 똑같은 앵무새 소리에 머물게 마련이죠.

실패하는 인간의 공통점은 하나같이 환경을 탓한다는 것입니다. "눈을 가리고 맷돌을 돌리는 당나귀는 자신이 어디를 걷고 있는지 알지 못한다."라는 구절이 이 책에 나오는데, 어설픈 투자론도 마찬가지입니다. 과거 호황기에 사놓기만 하면 오르던 시절 큰 재미를 본 이들이, 과연 지금 같은 세상에 이처럼이나 바뀐 분위기를 파악 못해서 또 같은 패턴으로 투자를 되풀이할까요? 늙은 낙오자가 백날천날 당첨질에 중독되어 시간을 낭비하는 동안(그나마 낙첨. 잘하는 건 오로지 시간조작질), 그 사람들은 개별 요지와 노른자땅의 가치 변화 추이를 연구하고 지형과 트렌드를 살핍니다. 이러니까 남들이 제자리도 못 지킬 때 그 사람들은 재산을 불려나가는 겁니다. 나이 든 사람이 혹 과거의 저런 "퇴행적응적 패턴"에 머물러 뭐만 사 두면 그냥 알아서 오르겠지 기대를 가진다면, 그 사람은 실제 돈을 벌어 본 사람이 아니라 남들 (그런 식으로) 돈 벌 때 부러운 눈으로 쳐다만 본 사람이죠. 책을 읽어도 저렇게 거꾸로 읽고, 우물 안 돼지처럼 고착된 사고 방식에 머물러 그 꼴을 면하지 못하니 이 얼마나 가련합니까. 자진해서 거지 인증을 하고 앉은 셈(과거 어느 한 순간에도 풍요를 못 누려봤단 소리).

책에는 거지의 현재가 아닌 미래를 그린 화가 이야기가 나오지만, 해마가 파괴되어 과거의 헛발질을 파멸적으로 답습하는 인간이야 현재건 미래건 거지로 주저앉을 수밖에 없습니다. 대개 먹이를 구하는 환경이 척박해지면, 긴 부리(bill)를 가진 새가 짧은 부리를 가진 종보다 유리한 게 당연합니다. 헌데 현실의 변화란 참으로 예측 불가의 것이어서, 기존의 패턴이 채 예측하지 못한 랜덤의 격변을 태연히 가까운 미래에 풀어 놓기도 하죠. 눈치 빠르고 영악한 이들이 이 변화하는 세태를 날카로운 눈으로 캐치하여 기존의 축적된 부를 더욱 불려나갈 때, 어리석은 낙오자는 추상적인 구호만 되풀이(그것도 오독한 후)할 뿐입니다. "서생의 문제의식, 상인의 현실감각"이란 말이 있지만, 거경지지의 심원한 의미를 모르는 비극적 중생에게 어떤 현실 타개의 빛이 보일 리가 만무하죠. 수신(修身)은 그래서 인재와 군자의 처신을 두고 그 시작이자 종착점으로 삼아질 만합니다.

v*****7 2017.02.1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