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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칸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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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왕자나 연금술사처럼..
어른들을 위한 동화같은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쩐지 아련하기도 한..
북유럽적 정서가 느껴졌다.
에밀처럼 그리고 펠리칸처럼 순수하게 사는 것을 모두 동경하지만
살다보면 인간은 참 그러지 못해서 안타깝다.
많이들 읽고 느끼면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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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은 우리에게 조금 생소한 필란드 작가의 작품이다.핀란드라면 <세계의 신화>라는 책에서 북유럽 신화로 만나본 이후 핀란드의 작가가 직접 쓴 소설을 읽어보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제목<펠리칸맨>과 의인화한 펠리칸의 모습을 그린 표지그림은 핀란드라는 지역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한다. 또한 KBS 『미녀들의 수다 』에 출연했던 핀란드출생의 따루 살미넨님이 번역을 한 작품이라서 더욱 기대된다.저자 레나 크론은 핀란드의 국민작가다.환상,공상,상상,현실,철학적인,우화,동화적인 요소가 한데 어우러져 있는 작품이다.이 작품은 저자가 자연의 시선으로 인간에게 보내는 알레고리적인 메시지라고 할 수 있다. 도시에 이사온지 얼마 안 된 주인공 에밀은 이혼한 엄마와 어렵게 생활한다.밥을 먹으러 간 식당에서 펠리칸모습의 남자를 본다.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그가 펠리칸이라는 것을 모른다.어린 아이와 같은 자만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처럼,오직 어린이인 에밀만이 그 사실을 알아차린다.도시의 이방인 에밀과 인간세계의 인방인 펠리칸맨 휴류라이넨은 두번째 만남부터 서로을 알아 간다. 에밀은 아버지가 있는 ,떠나온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있다.에밀처럼 펠리칸맨도 고향에 대한 진한 향수병이 있다.(누군가에게 심장의 한 쪽을 빼앗겨 덥석 먹혀버린 그런 기분이었습니다. P42) 에밀에게 꿈은 등에 철썩 달라붙은 무거운 짐을 단번에 없애버리는 신비로운 세계다.그래도 에밀이 잠들기 전에 겁이 나는 것은 잠과 죽음이라는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두려움에 대한 동일시 때문일 것이다. 펠리칸맨은 인간이 되고 싶어서 인간적인 것들을 동경하고 사랑하지만,인간들에 대해 많은 실망을 한다.우리가 사물의 본질은 보지 못하고 표상만을 보는, 인간이 저지르는 실수들,남과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냉혹한 인간세계,인간이 그 누구에게 그어버린 경계라는 벽,화폐가 신이 되어버린 인간의 세계,그냥 그렇게 있어왔던 자연을 인간의 욕망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자연에게 얼마나 파괴적이고 폭력을 휘둘렀는지 그는 우리에게 일침을 가한다. 순수한 펠리칸이 사회화되는 과정에서 받아야 하는 그런 상처들에서 우리들의 모습을 본다.때론 웃음이 나오는 글솜씨,어린이만이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은 신선한 시선,새의 눈으로 본 인간 세계에 대한 생생한 묘사, 감정표현력이 뛰어나다.에밀의 성장기의 한때를 그린 것처럼 보이기도 한,에밀과 상상속 친구인 펠리칸맨의 우정,호기심을 아주 재미있게 그려내고 있다. 저자는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질문을 던진다.우리가 왜 인간일 수밖에 없는지,펠리칸을 통해서 우리는 깨달아간다.이 책에는 작가의 깊은 철학사상이 녹아있다.동화나 신화와 같은 북유럽특유의 멋진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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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리칸이 학습 계획표를 장황하게 늘어놓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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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 이걸 왜 펠리칸맨이라 한 건지 대충 이해는 된다. 원제가 너무 노골적인 거 같으니까. '인간의 옷 속에서 - 도시 이야기' 뭐 대충 이런 의미를 지닌 제목인데, 이런 제목을 쓰면 사실상 한국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외면에 치중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와 도매금으로 싸잡아 넘어갈 확률이 너무 높다. 그래서 아마 제목을 '펠리칸맨'이라고 했을 터이다. 적어도 이 소설은 그런 단순한 이야기가 아니니까.
감각 기관에서 받아들이는 정보의 7할은 시각이 담당한다고 한다. 그만큼 '보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어떻게 보이느냐에 큰 영향을 받고, 보이는 것을 가장 신뢰한다. 하지만 보이는 것은 결고 10할이 아니고, 감각 너머에 존재하는 진실과 본질은 보는 것만으로 해결하지 못한다. 사람을 결정짓는 것은 결코 보이는 부분이 아니다. 보이지 않는 부분에 존재하는 5감의 영역 외에 있는 어떠한 것을 우리는 분명히 인지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그곳이 보이지 않는 사각(死角)이자, 인간이 처(處)하는 장소가 된다. 인간은 보이지 않는 곳에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오감을 넘어건 지각을 위해 배우고 자신의 세계를 만든다. 모든 개체가 개별의 세계를 지니는 모습을 보여주는 건 아마도 인간이 유일할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도 인간은 보여진다. 우린 보이고 있다.
하지만 객관적으로 인간에 대한 시각을 보여주는 작품은 많고, 흔하고, 별로 재미도 없다. 너무 뻔한 말을 해서 따분하다. 그래, 우리가 눈으로 사람을 보는게 뭐 어떻단 말이냐. 세상은 어차피 다 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본질을 보는 것? 그런 말은 널리고 널렸잖아? 어떻게 말하는지는 매우 중요하지만 어차피 번역된 마당에 과연 여기에 레나 크룬의 어법이 얼마나 녹아있을까. 애매해진다.
하지만 이 책은 대답을 제시하고 있다. 우리가 왜 거지같은가에 대한 대답을. 인간은 왜 고통받는가.에 대한 대답이 있다. 허생이 말한 것과 똑같다. 인간은 알기 때문에 분란을 만들고 돈이 있기에 욕심이 생기며 종교가 있기에 편을 가르게 된다. 그러니 우린 완전한 무지성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장자가 말하고 노자가 말했던 어떤 것에도 얽메이지 않는 그런 세계로 떠나야 한다. 우리가 배우는 이유는 아무 것도 알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리라.
자연은 영원을 살아간다. 자연 속에 있는 동물도 자연이고, 인간도 사실 자연이다. 하지만 인간은 유한하고 오로지 신만이 무한하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연을 동경하고 추구한다. 그런데 과연 동물은 진정 유한한 것일까? 우리가 이름을 붙이고 분류를 하게 되면 그것은 유한해진다. 내가 이름을 붙여준 개는 죽었고, NGO가 이름 붙여준 사자도 코끼리도 치타도 하이에나도 코뿔소도 물소도 다 죽었다. 하지만 개는 살아있다. 사자도 살아있고 코끼리도 치타도 하이에나도 살아있다. 코뿔소와 물소는 오늘도 달리고 있다. 자연은 죽지 않고 영속한다. 그것은 너와 나를 구별하지 않고 자연이라는 이름으로 함께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나와 너를 구별하지 않고 이름 붙이지 않고 차별하지 않는다면 영속할 수 있을 것이지만 우리에겐 지식이 있어서 죽을 수 밖에 없다. 자연은 자신과 남을 구별하지 않는다. 그렇기에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하루가 영원히 이어지고 내가 자연과 하나가 되어 내가 사라진다면 나는 영원히 살아갈 수 있다.
나는 알기에, 죽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