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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년 전에 염경엽 감독이 히어로즈 구단의 신임 감독으로 임명되었을 때 모두가 의외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염 감독이 "정치의 달인"이라면서 LG에 몸담을 때도 정치 때문에 물의를 일으켰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습니다. 지금은 아니지만 모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염 감독의 이름을 써 놓으면 연관어로 "정치"가 한때 뜰 정도였죠. 이번에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모습을 보면, 달인은 고사하고 순수 지도자로서의 빼어난 실력에 비해 오히려 정치력이 부족한 분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습니다.
우리가 누구더러 "정치를 못한다"고 할 때, 이는 비웃음의 표현일 수도 있고(대체로는, 업무 역량도 부족한 주제에 정치까지 서투르다는 의미에서) 반대로 능력 발휘를 충분히 못하는 데 대한 아쉬움과 격려가 깃든 말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조직이든 정치가 안 끼어드는 곳은 없습니다만, 성원들이 제 할 일은 안 하고 정치에만 몰두하면 그 집단이 제대로 돌아갈 리가 없죠. 그 정도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속 편하게 외부에서 관전하는 이들은 "저기 저거 망조가 들었다"며 손가락질하기 일쑤입니다. 소모적인 정치 불협화음을 싹 걷어낼 수만 있다면, 썩 유능하지 못한 직원들만 가지고도 소기의 목적에 도달하는 조직을 만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이상론에 가까울 뿐이며, 사람이 모인 곳이라면 독재나 전제가 지배하지 않는 한 정치가 없을 수는 없습니다. 1인 세습 지도자가 다스리는 동양식 군주정에서도 심지어 군주의 총애를 놓고 혹심한 파워게임이 벌어졌고, 군주의 세가 약하면 약한 대로 힘의 공백을 놓고 또 정쟁이 발생했죠. 그 양상도 서유럽 같은 데선 상상도 못할 만큼 가공할 책략이 난무했습니다. 유독 동양인이 장기, 바둑 등 전략 게임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내는 건 생각보다 깊은 내력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앞으로 중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건 미국 같은 외부 세력의 견제와 도전이 아니라 지난 수천 년의 역사가 증명하듯 내부의 쟁투와 그 각종 부작용이겠습니다.
당장 우리가 몸 담은 회사에 눈을 돌리면, 대체로 규모가 아주 크거나 반대로 영세하면 그런 데서는 파벌 간의 알력이 덜합니다. 어정쩡한 사이즈나 업무 활성화가 이뤄진 곳에서 정치 때문에 날밤을 새고, 창업주 본인 대(代)보다는 그 후계자가 일을 챙길 때 각종 문제가 생깁니다. 이런 정치도 타고난 감각으로 아 요 빈틈을 바로 파고들면 되겠다며 냄새를 기가막히게 잘 맡는 이가 따로 있습니다. 딱히 지능이 높을 필요도 없고, 배운 게 많아야 할 이유도 없습니다. 어떤 자는 승부에 그리 능하지도 않으면서 분란 조장에만 탁월한 감각을 뽐내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체로 이런 이들은 말만 거창하게 떠들다 자기 발등을 찍고 밀려나는데, 정작 업무 능력은 현저히 떨어지는 게 결정적으로 작용해서입니다.
아부를 걸러내는 건 (저자께서 지적하시듯) 관리자급에서 대단히 필요한 능력입니다. 아부꾼이 나에게 비위를 맞추는 이유가, 조직 안에서 내가 지향하는 가치에 공감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유리한 정치적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얄팍한 방편이며, 장기적으로 (나의) 적대 진영에 좋은 빌미를 제공할 자산을 축적하려는 목적이 있어서죠. 아부를 칼 같이 걷어낼 수 있어야 이 "세작"을 역이용할 수도 있고, 적진에 치명적인 타격을 안길 수도 있습니다.
반대로 쓴소리하는 사람을 곁에 붙여 두는 건 "정치적으로" 좋은 홍보가 되기도 하고("남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란 이미지 확산), 이런 소리 저런 아이디어 일단은 다 귀담아 들을 필요가 있는 국면에서 전략 설계의 좋은 자원이 되기도 합니다. 당 태종이 위징을 곁에 둔 건 어떤 유교적 인격의 도야 노력 그 일환이 아니라, 죽고사는 문제에서 정확한 상황 판단을 위한 지침을 마련하려는 현실적 선택이기도 했습니다. 위징도 이를 알았기에 태업을 벌이지 않고, 그 좋은 머리에서 나오는 최상의 아이디어를 (차라리 속편하게, 눈치 안 보고) 즉각 군주에게 직언했을 것입니다(오히려 적당히 비위를 맞추려 들면 용도 폐기됨. 가뜩이나 이전에 감정도 안 좋았겠다). 생사의 고비를 여러 번 넘긴 당 태종은, 듣기 싫은 소리를 참고 듣는 편이, 그릇된 판단으로 목숨을 잃는 편보다 훨씬 싸게 먹히는 불편임을 젊은 나이부터 깨달았을 겁니다.
세상 살면서 적을 만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특히 한국처럼 사회 모든 구석이 속고 속이는 전쟁터처럼 변한 사회에서는, 가급적이면 적을 만들지 않되 불가피한 경우 선제 공격을 통해 제압을 하는 게 역시 비용이 덜 드는 현명한 옵션입니다. 언젠가 일본인이 쓴 "적을 만들지 말라"는 취지의 책을 읽은 적 있는데, 일본은 우리하고 사회가 돌아가는 근본 양식부터가 다른 사회죠. 거기는 출생 성분에 따라 분수와 직역이 주어져 있고, 사내 정치건 뭐건 전투에 참여할 자격부터가 제한된 마당입니다. 어차피 싸움이 불가피하다면 무조건 이기는 쪽으로 밀고가는 게 유일한 선택지일 뿐입니다.
예전에 스탈린이 비웃듯이 "교황에게는 사단이 몇이나 있소?"라고 물었다는 말이 있지만, 믿을 건 자신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병력뿐이라는 충고는 그래서 언제나 유효합니다. 이렇게 자기 세력이 확고히 구축되면 그때부터는 "중립의 리스크"를 떠안고 고민할 필요가 없죠. 증거서류(경우에 따라 캡처 화면)의 존재는 언제나 그의 소지자에게 압도적으로 유리한 지위를 부여합니다. 세상에 증거만큼 확실히 자측을 응원하는 직속 부대가 또 없죠. 이때 중요한 건, 의사 결정 과정에 있어 결코 "감정"을 개입시키지 말라는 원칙입니다. 냉정히 감정을 통제하면, 적측이 결코 상상하지 못할 방법으로 불시에 기습하는 게 가능합니다.
말은 언제나 못 믿을 표현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건 무의식 중에 노출되는 신체 반응이죠. 요즘 인기 있는 미국 수사 드라마는 언제나 반사적 반응을 읽어내는 대가들을 끌어들여 시청자의 흥미를 돋웁니다. 순간적으로 뜬금없는 질문을 던져 눈동자가 얼마나 침착히 반응하는지 캐치하고, 바로 나올 수 있는 대답을 단 몇 초라도 지연, 계산 고안된 대답을 한다면 이미 이건 거짓말이라 짚고 넘겨도 무난할 것입니다.
책 말미에는 "퇴사자의 변"이 실려 있는데 업무 부적응도 부적응이지만 많은 경우 사내 정치에서 확실히 밀린 사람은 도저히 그 자리를 못 지킨다는 게 만고불변 진리 같습니다. 반대로 이런 치열한 사내 정치에서 결국 승자가 된 이는, 별까지 다 달고 퇴직을 하건 명예롭게 독립하건 이후의 진로가 오히려 더 볼만하더라는 게 제가 개인적으로 지켜본 예들의 공통점이었습니다. 확실히 청장년기에는 규모 큰 회사에 다니면서, 스트레스 심한 사내정치건 살인적인 업무 할당이건 다 겪어 봐야 인물 자체가 성장을 합니다. 또 그런 과정을 겪어 낸 이들에게라서야 뭘 배워도 배울 게 있겠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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