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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시절에 읽었던 어느 성장소설. 나름 괜찮았지만 소설보단 지극히 작가 개인사를 열거해서 후로 성장소설엔 별 흥미를 느끼지 못한 채 어언..십년이 훌쩍 넘어버렸다.
정크노트.
잘 짜여진 한 권의 성장소설을 읽노라니 나의 재미없었던 학창시절이 떠올랐다. 이왕 이렇게 아이낳고 살림하면서 살거면 더 화끈하게, 어떤 일이라도 저질(??)를 것을...^^ 시원한 문장으로 읽는 재미 한 층 깊은 소설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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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정크를 뭐라고 표현했던가. 책을 읽을때는 그토록 신선하게 들리던 내용이 책장을 덮자마자 가물가물해진다. 정크. 정크선, 아편전쟁. 쓰래기. 쓰래기처럼 보이지만 새로운 의미를 가진 것. 쓰레기 같은 그늘 속에서 피어나는 양귀비 꽃처럼 아름다운 생명력의 화신... 이 책에서 말한 정크의 내용과는 다르다. 그러나 이 책을 다 읽고 난 나는 정크라는 단어에 그런 읨미를 붙이고 싶다. '현실은 견고하다. 지긋지긋하게 튼튼하게 버티고 서 있다' 뭐 이런 말도 있었다. 이 책에는. 물론 그 현실을 신나게 헤엄치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TV나 신문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이 시대를 멋지게 살아가는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들이다. 한 사람의 성공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에 비례해서 성공하지 못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을까. 현실에 아파하고, 아픈 현실을 견디고, 묵묵히 하루 하루를 침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 신문에 절대 그들의 속마음이 드러나지 않는 사람들. 그래서 이 책은 그들의 내면을 시나게 대변해주는 책이다. 정크들의 세상. 세상의 온갖 잘나지 못한 사람들이 가슴속에 품고 살아가는 아픔의 대변자... 나는 이 책을 그런 책이라고 말하고 싶다. '정상적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 밝은 미소를 짓고 지나가는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고, 가벼운 이야기와 세상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저녁에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일어나 또 하루를 힘차게 시작하는 사람들, 하루의 일을 위해 지하철로, 버스로, 자동차로 달려가며 또 하루의 보람을 쌓기 위해 새로운 힘을 내는 사람들... 이 책은 묻는다. 발칙하게. 그 사람들의 내면도 정말 그렇게 활기차고 밝은 모습인가라고. 말로 꺼내지 않을 뿐, 얼굴에 표정으로 나타내지 않을뿐, 자신의 자손심을 건드리고 싶지 않아 꽁꽁 감싸서 숨겨 놓고 있을뿐, 사람들의 삶에는 어떤 방식으로든 삶의 그늘과 아픔과 통증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다만 그렇게 보이지 않을려고 노력할 뿐이지, 누구에게나 풀리지 않는 체기 같은 것들이 가슴속 어딘가에 꽉 틀어박혀서 우리의 이성이라는 것이 약간의 경각심을 푸는 그 순간 다시 튀어오르곤 하지 않는가라고. 아무리 자신의 삶이 괞찮은 것이라고 스스로를 속이려고 하더라도, 사실은 당신의 꿈속에서는 그런 모습들이 나타나지 않는가라고. 이 책에 나오는 나, 그리고 확장 된 나. 즉 아버지, 어머니, 큰 어머니, 큰 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무엇보다 언덕집 아저씨, 그리고 그 집에 깃들에 살게 된 개. 모두가 정크 같은 존재들이다. 쓰레기같은 존재의 아픔을 묵묵히 참고, 참다가 견디지 못해 폭팔하는 사람들, 집을 나가고, 말을 하지 않은 부부가 되고, 술에 몸을 망가뜨리고, 또 아편으로 몸과 정신을 놓아버리는 사람들, 이 책은 그런 사람들의 응호자가 된다. 그들을 찬양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은 주장한다. 모든 잘난 것들이 만들어 놓은 금지. 그 금지를 금지하라고. 금지르 금지하여. 금지하지 않고 자유로이 사는 세상이 되도록 하라고.... 화려하게 춤추는 양귀비 꽃의 아름다움은 정크 속에 피어나는 꿈의 상징과도 같다. 아편속에 해답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아편을 만들어내는 양귀비가 커나가는 것 처럼, 아픔속에도 그 아픔을 치료하는 아픔이 있고, 또 쓰레기 속에서도 아름답게 피어나는 꿈이 있다고. 그래서, 정크라는 것, 우리에게 주어진 삶과 생명이 있다는 것을 다시 한번 더 기억해 보라고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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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은 세상을 기름지게 한다’! 1장의 제목부터 걸쭉하다. 아편을 만들 양으로 키우는 양귀비를 숨긴 비닐하우스 안에서 소년은 자신을 정원사인지 농군인지 알 수 없는 직책으로 고용한 아저씨와 관찰 중이다. 심히 수상하다. 아편을 키우는 일을 하며 돈을 받는 아르바이트를 즐기는 소년과 이런 불법적인 일에 소년을 끼어들게 만들고 심지어 ‘쿤사’라고 부르는 언덕집에 세든 아저씨. 이 일이 소년의 부업이라면 할머니가 시키는 가지가지의 집안일 밭일이 소년의 주업이다. 빨래하기, 고추밭에 모종심기... 주업은 노동의 댓가가 무상이다. 그리고 병원에 누워있는 한쪽발이 감각이 없는 것 같다는 아버지도 소년에게 일거리를 만들어 줄 뿐, 도무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소년은 이런 환경 속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그들을 보호해야한다는 책임감을 가지고 생활한다. 그런가하면 그 어른들은 뻔뻔스럽게도 소년의 노동력을 착취하고 소년의 어설픈 책임감을 충동질하면서도 당연하게 여긴다. 소년은 비닐하우스 속에서 불법적으로 자라는 양귀비처럼 여느 소년들과 다르게 불량한 환경 속에 갇혀있다. 마약이 없이는 기운을 차리지 못하는 아저씨, 술을 마시고 음주운전을 하며 스물다섯살짜리 베트남처녀를 새색시로 얻을 생각을 하는 아버지, 압력솥 뚜껑을 여는 법 조차 모르는 할머니. 그리고 소년을 이러한 환경에 두고 도망친 엄마. 소년은 이 불량한 환경 속에서 용케도 스스로 실속 있는 삶의 모습을 깨닫는다. 그러기에 똥은 세상을 기름지게 한다는 말을 저자는 맨 첫머리에 언급한 것일까? 도무지 이로울 것이 없을 것 같은 똥 같은 환경 속에서 소년은 역경을 딛고 곧게 자라는 길을 택한다. 그들의 추하고 비겁한 모습을 너무나 가까이에서 보고 말았으므로. 책은 혈기왕성한 소년의 육체적 충동을 좀 심하다 싶게 묘사하면서 가끔은 엉뚱한 방향으로 빠지기도 한다. 양귀비의 꽃대와 양귀비의 수액이 그러한 묘사와 비유적 동질성을 비추는 데까지는 좋은데 더 나아간 부분은 너무나 직설적이서 저속해진다. 소년의 상황을 바닥까지 끌어내리기 위한 저자의 장치인지 단순히 흥미를 끌기 위함인지 의심스러운 대목이다. 양귀비꽃을 숨긴 비닐하우스가 태풍에 무너지고, 소년은 자신이 싹틔우고 키운 양귀비에 강한 집착을 보이며 포기하지 않으려 애쓴다. 그리고 이듬해에 소년은 자신이 아무런 정성을 기울이지 않았어도 저절로 싹을 틔우고 자라나 있는 양귀비를 본다. 소년은 그제서야 깨닫는다. 양귀비는 양귀비 스스로 싹을 틔우고 자라날 힘이 있다는 것을. 소년이 이 사실을 깨닫는 순간 독자도 깨닫는다. 소년도 양귀비처럼 척박한 토양 속에서 스스로의 힘으로 부쩍 성장해있다는 것을. 이 책을 성장소설이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성장소설이라하면 대부분 청소년독자를 염두해두고 쓴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이 작품은 청소년이 읽기에는 해가 될 것이 너무 많은 것 같다. 이 모든 정크들을 걸러서 받아들일 내공이 있는 청소년이라면 상관없겠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