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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이렇게 좋은 책에 리뷰 한 편이 없다니! 검색해 보다가 황당했다. 이러면 괜히 시키지도 않았는데 나라도 리뷰를 남겨야겠다라는 사명감이 든다. 불끈.
이 책은 현재 한국 사회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발언하고 있는 6인의 페미니스트들이 각자의 '페미니스트 모먼트'를 이야기하는 글을 모았다. 그렇게 6장이 구성되고 마지막에 다함께 모여 대담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 6인이란 권김현영, 손희정, 한채윤, 나영정, 김홍미리, 전희경 선생님이다. 이들 또래로 같이 1990년대에 20대를 보내며 이들의 활약을 신문기사로, 이들의 저서로 읽어온 나로서는 본문 내용이 다 와닿고 다 내 고민 이야기같았다.
첫 글 '질문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다(권김현영)'부터 가슴을 울린다. 저자는 세계에 대해 질문을, 그것도 '좋은' 질문을 던지려는 태도가 왜 중요한지를 말한다. 햐, 이거 요약 소개가 어렵네. 그냥 인용해 놓겠다.
질문에는 나쁜 질문과 좋은 질문, 쉬운 질문과 어려운 질문이 있다. 나쁜 질문은 사실 대부분 질문이라기보다는 주장에 가깝다. "왜 그때 가만히 있었니?" 같은 질문은 사실 "가만히 있었기 때문에 네가 문제다"라는 주장이다. - 본문 34~35쪽. 권김현영
나는 '선언'은 말의 내용이 아니라 태도로서만 의미 있다고 생각한다. 이제부터 말을 시작하겠다는 선언, 침묵하지 않겠다는 선언, 생각하고 변화를 모색해 보겠다는 태도로서의 선언 말이다. 그러니 자신이 하는 말의 내용을 곧 진리라고 선언하지는 말자. (중략) 그 말들의 사회 의미를 함께 만들어 가는 '좋은 질문들'이 필요하다. - 37쪽. 권김현영
누가 이 상황을 참아 내고 있는지 모를 수 있는 것, 이 모든 것을 자연스러운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특권을 가진 이들에게만 가능하다. 서 있는 위치를 바꾸어 보기만 하면 얼마든지 다른 질문이 만들어지고, 다른 질문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안내해 간다. - 39쪽. 권김현영
나는 그 시간들의 중첩을 나의 '각성의 순간' 혹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라고 생각한다. 누군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극적으로 변해 가는 시간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겼던, 세상을 지배하는 법칙에 질문을 던지기 시작하는 시간들. - 52쪽. 손희정
세번째 글인 '페미니스트이기보단, 페미니스트가 아니고 싶지 않은 (한채윤)'은 성소수자 인권운동가인 저자의 지난 고민을 담고 있다. 동성애자와 페미니스트, 어떻게 불리든 저자는 성평등한 삶을 위해 페미니스트가 아닌 존재는 되지 않을 각오로 연대에 나선다.
페미니스트라는 것 자체가 어떤 불온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고, 타자화되는 것이잖아요. - 233쪽, 대담 중 나영정
다섯번째와 여섯번째글인 ‘페미니즘 고딕체 권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법(김홍미리)'과 '계속, 끝까지, 페미니스트로(전희경)'는 가부장제에 질문을 던지는 순간을 '페미니스트 모먼트'로 겪은 이야기를 풀었다. 90년대에 20대를 보내며 반성폭력 현장에서 활약하여 '영페미니스트'라고 불린 이들의 역사와 고민이 현재에도 이어지는 것을 읽게 되어서 좋았다. 운동권 성폭력 사태를 고발한 <오빠는 필요없다>의 저자 시타 전희경이 살림의료협동조햡의 그 전희경 선생님이라니. 나는 깜짝 놀랐다. 역시 '페미니즘은 지금도 진화하고 있(210쪽)'구나.
그때의 영페미니스트들은 가시적으로 드러지 않을 뿐 현재에도 나름의 방식으로 페미니즘을 실천하며 살고 있다. - 150쪽. 김홍미리
사실 '같은 여자'(동일한 여험)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조앤 스콧이 통찰했듯이, 경험은 특정한 세계관 속에서만 '같은 경험'으로 해석되며 그 경험에 기반하여 어떤 행동으로 나아가는가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 192쪽 전희경
근대 정치의 기본 구조가 아버지를 죽이고 형제들의 질서를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면, 우리는 형제들의 질서에 의문을 제기하는 딸들이었다. - 199쪽 전희경
6인의 저자들이 겪은 '페미니스트 모먼트'는 각각 다르다. 동일한 피지배 여성은 없고 동일한 피해 경험도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누가 진짜 페미니스트인지를 판별하려거나 내가 진짜 원조 영페미라고 내세우지도 않는다. 단지 나와 우리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쯤 머물러 활동하고 어느 가치를 향하고 있는지를 고민하며 세계에 질문할 뿐이다. 저자들의 이런 자세가 좋았다. . 지배와 피지배 구조가 한치의 틈새 없이 모든 개인들의 삶에 그대로 적용되는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이미 모두 알고 있다시피 역사는 그런 식으로 진행되지 않는다. 경험은 해석 없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절대 여성학을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 - 15쪽 권김현영
페미니즘 입문서로 좋은 에세이다. 오래 고민하고 각자의 현장에서 오래 싸워오신 분들이다. 모든 분께 한번 읽어보시기를 강력히 권한다. 아무리 말해줘도 페미나치 어쩌구하는 인간들에게는 먹히지 않지만, 페미니스트들이 원하는 것은 남성 혐오와 남성 지배가 아니라 보다 평등하고 정의로운 세상이다. 그렇다면 어떤 세상을 만들어가야 할까. 우리는 함께 어떤 질문을 해야 할까. 그 첫 질문이 시작되는 때가 바로 당신의 '페미니스트 모먼트'가 되지 않을까.
코르셋 벗은 이들의 분노는 남성에 대한 혐오로 이동한 것이 아니라 이 세계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지는 중이다. - 163쪽 전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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