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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엄 촘스키의 책을 처음 접한 것은 1999년도 였습니다. (촘스키, 끝없는 도전 / 1999, 그린비) 이책은 그 당시 웨스턴 온타리오대학 영어과 조교수였던 로버트 F.바스키에 의해 쓰여졌지요. 전기 형식을 빌린 이 책엔 언어학, 정치학, 인지심리학과 철학의 핵심인물인 노엄 촘스키의 지적, 정치적 성장배경이 충실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또한 지난 수십 년 사이의 중요 정치사인 스페인 내전이라든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투하, 펜타곤 행진 등의 역사적 사건들이 수록되어 있습니다.
10여년 만에 이 책(The Chomsky Effect)을 통해 만난 노엄 촘스키는 여전히 행동하는 지식인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는 2005년에 실시된 한 투표에서 현대의 가장 중요한 지식인으로 선정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다른 여론 조사에서도 역시 중요한 대중 지식인(상아탑 밖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발언하는)으로 꼽혔습니다.
이 책의 저자는 저명한 노엄 촘스키 연구가입니다. 책을 통해 노엄 촘스키를 분석, 소개하면서 자칫 이 책이 노엄 촘스키를 숭배하는 분위기로 흐르지 않을까 조심하고 있습니다. 물론 저자의 기우입니다. 저자는 책의 서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노엄 촘스키를 비롯해 여러 사람들이 상아탑 바깥에서 윤리적이고 책임 있는 행동을 주장하는 것은 보람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긍정적인 변화가 오로지 노엄 촘스키를 비롯한 그 사람들의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보아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이런 시각을 갖고 있다면 그건 우려스러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건 개인숭배의 컬트 혹은 고정관념의 도그마에 대한 집착 등을 의미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두 파트, 체제에 대한 저항과 구체적인 문제들로 나뉘어집니다. 촘스키는 상아탑너머에서 활발하게 운동을 벌인 나머지 칭찬, 비난, 중상, 무시, 오해, 검열 또는 대중적 미디어의 표적이 되기도 했습니다. 촘스키의 활동은 주로 현대 사회를 급진적으로 개조해야 한다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지난 여러 해 동안 촘스키의 사상에 동조하는 사람들이 급격히 늘어났지요. 그리고 이제 그 여파가 대중문화 영역, 특히 펑크 음악과 록음악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1996년 5월 24일, [탐파 트리뷴]의 기자 마이크 오닐은 “촘스키는 학계의 엘비스”라고 한 보노의 말을 인용했습니다. 그룹 REM은 순회공연을 떠나면서 그들의 쇼 시작에 앞서 간단히 연설을 해달라고 촘스키에게 요청했지만 촘스키는 정중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촘스키는 1992년 마크 아크바와 피터 원토닉과 함께 영화 [여론조작: 촘스키와 언론]를 제작했고, 2003년에는 윌 파스코와 함께 [쉼 없는 반항자]를 제작하면서 빅 스크린에도 등장했습니다. 이 두 영화는 전 세계적으로 인기가 높았지요. 1950년대의 아이디어들인 분배주의, 행동주의, 구조주의는 촘스키 혁명에 의해 퇴행적인 것이 되어버렸거나 주변적인 것으로 밀려나기도 했습니다. 그가 대학원생 시절부터 해온 이러한 활동의 위력 덕분에 충분한 인지도와 지위를 얻었고 그 때문에 대중적 관심사들에 대하여 책임 있는 지식인으로서 발언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촘스키의 급진적인 사상과 학계나 상아탑 바깥에서 열정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옹호하는 태도 때문에 그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에 못지않게 그를 혐오스럽고, 사악하고, 파괴적이고, 위험한 인물로 여기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데, 그 반박이라는 것이 때로 앞뒤가 안 맞는 경우가 많고, 어떤 한 줄의 캐치프레이즈를 갖고 인본주의적 저작 전체를 무시하려는 경향도 있다는 평가도 받습니다. 물론 안티의 입장에서 보면 명백하게 그가 잘못된 생각이나, 부적절한 입장표명을 한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가 중차대한 범죄행위나 그 자신의 개인적 이익을 위해 한 것이 아닌 이상 그만큼 그가 주목을 받고 있다는 것으로 해석해야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권위에 대한 저항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우리는 어떤 법에 저항할 것인지 어떻게 결정할 수 있는가 ? 법률의 타당성을 결정하기 위해 어떤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가? 정책입안자들과 실행자들의 잘못된 생각과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그 집행자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나아가서는 잘못 결정된 부분이 가시적인 행위에 들어가기 전에 막아야합니다. 이 과정 중에서 많은 이들의 희생이 뒤따르기도 합니다. 이러한 경우에 촘스키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요?
저자를 통해 촘스키의 입장을 그려 봅니다 "타당한 법률은 개인들이 사회에서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생긴 것이다. 그런 법률은 개인과 집단의 생존에 도움이 되는, 여러 세대를 거치며 형성되어온 습관들이다". 언론의 자유를 논하면서 촘스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언론의 자유는 심지어 미국에서도 오랫동안 자리잡아온 전통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자유와 비교해보면 상당히 선진적인 자유다.” 자신의 주장을 강화하기 위하여 촘스키는 루돌프 로커를 인용했습니다. “정치적 권리는 의회에서 생겨난 것이 아니다. 그 권리는 외부에서 그들(시민들)에게 강요된 것이다. 그 권리가 법률로 정착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안전하게 살아남는다는 보장은 없다. 한 장의 종이위에 법률로 규정되었다고 해서 그 법이 언제나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들의 오래된 습관이 될 때, 그 습관을 없애려고 하면 대중의 저항을 받게 될 때 비로소 그것이 법률이 되는 것이다.”
교육에 대한 촘스키의 어프로치는 언제나 자상하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실제로 그에게 질문 메일을 보내서 답장을 받지 못한 경우가 거의 없다고 합니다. 촘스키의 성품은 아마도 자상함, 세심함 그리고 담대함으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듭니다. 교육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의 개인적 경험에 바탕을 둔 내 느낌은 이런 것이다. 좋은 교육은 한 개인의 평생을 관통하는 어떤 줄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좋은 교육은 화분에 물을 주는 것 이상이 되어야 한다. 꽃을 위해 화분에 물을 채우는 것이 아니라 꽃이 그 스스로의 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한다. 이러한 일반 원칙들은 아주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이런 원칙을 특정상황에 따라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는 사안에 따라 다르게 평가해야한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아주 겸손한 마음으로 우리가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태도로 임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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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마을에서 대참사가 일어나는 꼴을 보니 한 뉴스가 생각났다. 예전에 노엄 촘스키가 강정마을 주민으로부터 메일을 받고 평소 그가 보여줘온대로 성심성의껏 답변을 주었을 뿐 아니라, 관련 호소문을 기고해줬다는 기사였다.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498756.html 촘스키는 행동하는 지식인이다. 말로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말하지 않는다. 뒷좌석에 앉아 소리만 높여 사회를 비판하면서 실질적인 행동을 취하지는 않는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 촘스키처럼 행동하는 것이 쉬운 것은 아니기에, 행동하지 않는 사람을 나쁘다고 볼 수는 없다. 그저 평범할 뿐이다.
오늘 결정적으로 사단이 난 강정마을 사태를 보면서 나 또한 느끼는 점이 많다. 지난 번 저 멀리에 있는 촘스키까지 호소해주었을 만큼 심각한 문제인데도 나는 시큰둥하게 넘겼다가, 좌빨이니 하는 소리가 너무 역겨워 그냥 다른 링크를 누르며 넘겨버렸었다. 그러다 오늘 충격적인 뉴스를 보고서야 예전 기사들을 뒤적거리며 사태의 심각성을 알아차렸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무슨 행동에 동참한 것도 아니다. 나는 언제나 뒷편에 서서 걱정만 하는 비겁자 같다. 어느 편이든 너무 극단적이라며 피하고 본다. 이번 일은 내가 무엇보다 분개하는 자연환경의 훼손과 관련된 일인데(유네스코와 관련이 있든 없든 인정을 해줘야 보존 가치가 있는 건 아니다) 강정마을은커녕 청계광장에도 나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있다.
나는 그저 촘스키 평전에 가까운 <촘스키 이펙트>를 읽으며 내가 좀더 깨어있고, 의지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라며 한 나절치 에너지를 쏟았다. 이 책은 예전에 노엄 촘스키를 좀 더 알기 위해 구매한 것이다. 그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쓴 책들과 그가 했던 강연 자료를 찾아보는 것이 올바른 방법이겠지만, 그의 수많은 저서 중 번역된 것만 다 읽는 것도 나의 저급 지식과 달리는 열정으로는 역부족이다. 그러니 최소한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가 현대 미국을 중심으로한 사회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비교적 꼼꼼히 살피고 있는 이 책을 보는 것이 최선이다.
<촘스키 이펙트>는 촘스키가 정치와 언어학에 끼친 영향만 다루지 않는다. 음악, 영화, 포스트모더니즘, 문학, 교육 등 다양한 분야를 아우르며 퍼진 그의 영향을 살핀다. 주로 촘스키의 글과 인터뷰 내용을 인용하고 있는데,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의 의견도 한 챕터에 걸쳐 다룬다. 물론 저자는 노엄 촘스키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촘스키를 옹호하는 변론까지 제시한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객관적으로 오간 말들을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딱히 촘스키가 반유대주의자나 나치수정주의 옹호자일 리는 없어 보였다. 상식적으로 생각할 때, 촘스키가 그간 해온 말들이나 저술들을 보면 아무리 급진적인 변화를 그의 사상에서 일어났다고 해도 그건 말이 안 되는 듯하다. 글이 어렵지는 않다. 3장인 촘스키와 관련된 사상가들을 다루는 내용은 너무 낯설어서 지루한 감이 있지만, 다른 부분들은 무척 흥미롭다. 8컷짜리 만화가 10개 실려 있는데 이것도 꽤 깨알같다. 촘스키에 대해 접근해보고 싶은 사람이라면 용기내어 도전해볼 만한 듯.
촘스키는 분명 엄청난 영향력을 지닌 현존하는 지식인이다. 이 책을 통해 전해지는 촘스키라는 인물은 다소 강경하게 자신의 입장을 견지하는 진보적 지식인일 뿐, 스포츠를 멸시하는 태도에서 보였던 것만큼 거만하진 않은 것 같다. 자신이 동조하지 않는 흐름이나 의견에 대해 분개하는 정도가 무척 강해서 꽤 편협한 인상을 주기도 하지만, 생각을 나누는 것 자체에 대해서는 아주 열린 마음을 가진 인자한 노인처럼 보이기도 한다. 상당히 유머러스하고 매력적인 할아버지 같기도 하다. 특히, 나는 그가 자신이 옳은지에 대해 분명히 확신하지 않는 점에서 그의 믿음을 옳다고 믿게 되는 것 같다. 자신이 믿는 것을 밀어부치는 것으로는 일인자라 할 만하지만, 자신이 정답일 거라고 확신하지 않는 태도야 말로 진짜 지식인다운 면모 아닐까. 촘스키는 좀 고집센 미친 노인네같은 구석이 있긴 하지만, 고집 센 행동력에서까지 촘스키와 꽤 비슷했던 버트란드 러셀 또한 미치광이 노인으로 폄하되었던 걸 떠올리면 문제될 것 없겠다.
나는 촘스키가 말하는 힘있는 대중이 될 수 있을까. 아무리 촘스키를 읽어도 여전히 이대로 잠자코 무색무취 인간으로 살고 싶긴 하지만, 괜히 떠들다가 입진보 될까봐 그게 더 무섭다. 몰라. 그냥 깨어 있다 보면 결정적인 순간에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남북 가르듯 편가르기를 시키는 사회 같아서 울렁거린다. 사실 어느 편에 붙기에는 옳다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어느 쪽도 옳지 않아 보이니까 말이다. 아, 최인훈의 <광장> 속 명준의 처지가 남 얘기가 아닌 것 같다.
촘스키는 연설회와 거기에 들어간 에너지를 가지고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르는 것이다. 그는 강연하는 것으로 끝내는 것이 아니라 행사가 끝난 뒤에도 사람들과 대화를 더 나누고 싶어 하고, 하나라도 질문을 더 받으려 하고, 시민단체 하나라도 더 알려 하고, 밤늦게까지 호프집에 남아 있는 청중들을 위해 맥주를 한 잔이라도 더 마시려 하는 강연자로 기억되고 있다. 이런 청중과 단체들을 위해 그는 지적 영웅이요, 유능하면서도 용감한 전사다. 각종 형태의 압제에 맞서 투쟁하는 싸움에서 그 자신의 에너지, 시간, 목숨까지도 기꺼이 내주려 하는 것이다. (44쪽)
촘스키가 기꺼이 그의 연설을 들어주려는 사람들에게 미치는 또다른 효과는 이런 것이다. 우리가 현재 살고있는 사회는 우리의 생각처럼 자유주의의 메카가 아니다. 현대 정치인들이 추진하는 '기분만 좋게 하는' 정책들이나 대중문화의 다양한 버전들(특히 미국은 일방적으로 착한 나라라고 선전하는 영화)은 그것을 교묘하게 은폐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예리한 지적이 모든 시민들의 마음을 만족시키는 것은 아닌데, 일부 시민들은 자신이 정부의 운영에 일정한 발언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부는 자기에게 권력을 밀어준 세력들의 이익을 챙기려는 경향이 있고 실제로 그렇게 하고 있다. 우리가 실제로는 눈이 가려지고, 입에 재갈이 물려지고, 모래더미에 머리를 처박힌 상태인데도, 그러한 세상이 더 안전하고 더 자유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이다. (91~92쪽)
우리는 촘스키가 현대 정치와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에 있어서 영원히 이성의 목소리로 남아 있으리라고 기대할 수 없다. 또 그가 우리를 위해 이 역할을 계속 해줄 것이라고 볼 수도 없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직접 그 역할을 떠맡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다.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가장 긴급한 메시지 중 하나는 우리 자신이 스스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하고, 그걸 바탕으로 견고하면서도 지속적인 가치관을 형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196쪽)
촘스키가 가장 빈번하게 비판당하는 이유는 국제법 위반의 사례가 다른 나라에서도 흔히 발견되는데(때로는 더 심한 경우도 있는데) 유독 미국만 물고 늘어진다는 것이다. 하지만 촘스키는 미국이 국제법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하고서 그것을 위반하기 때문에 문제라고 지적한다. (291쪽)
촘스키가 볼 때 교육은 과학적 통찰로부터 흘러나와야 하고, 양육의 환경 속에서 수행되어야 하고, 인간의 두뇌 속에 들어 있는 것을 꺼내주는 촉매가 되어야 하고, 창조성의 산파가 되어야 한다. 동시에 교육은 시민들을 오도하여 다른 목적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을 막아주어야 한다. 특히 대중을 오도하려는 노력이 아주 광범위하고 조직적으로 진행되는 오늘날에는 더욱 그렇다. (364쪽)
언어를 통하여 지식을 전달한다는 문제는 그의 언어학 연구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언어학 관련 지식을 적어놓으면 그 분야의 전문가들이 그걸 읽게되므로 전문가들기리 직접 지식을 전달하는 형태가 된다. 하지만 미디어나 정치 분야에서 언어의 역할은 그렇지 않다. 촘스키는 이 문제를 아주 첨예하게 생각하는데, 이 분야에서는 간단한 언어(단어)도 실은 어떤 이익, 관심사, 제약 등을 감추려는 더 큰 프로젝트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381쪽)
웃음이 좀더 높은 어떤 것을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에테르처럼 영기를 띈 것을 인간화하고 우리의 머리 위에서 권력을 얻는 어떤 것을 '지상으로 끌어내리기' 때문이다. 촘스키는 권력자들을 상대로 바로 이런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동시에 권력자들이 유권자들과 아주 가까이 있다는 이미지를 꾸미기 위해 동일한 전략을 구사한다는 것도 폭로한다. (479쪽)
상아탑 바깥의 지역에서 기여하고자 하는 지식인의 노력에는 다양한 정당화와 동기가 따른다. 그가 상대하는 이슈와 개인의 전문지식 등에 따라서 대응방식도 달라진다. 가장 이상적인 어프로치는 아이디어 자체가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지식인이 그 유익한 지식을 널리 퍼트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학자들이 지식 원천에 대하여 독특한 접근권을 갖고 있고 그래서 대중과 소통하기 좋은 도구를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 만큼 학자는 중요한 문제들에 개입해야 할 책임이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런 책임을 떠안고 또 성공하는 지식인들이 있으므로 아이디어(사상) 그 자체보다는 그런 아이디어를 전달하는 사람들에게 더 관심을 갖게 된다. 이 지식인이 어떻게 활동하느냐에 따라 그가 지지하는 대의에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방해를 할 수도 있다. 그러한 참여 활동의 개인적 측면도 방정식의 중요한 한 부분이다. 특히 그 지식인이 자신의 명성, 출세, 안전 등을 위협하는 입장을 취할 때는 더욱 그렇다. (495~49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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