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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스퀼로스 / 소포클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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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킐로스/소포클레스 비극을 읽고 - * 피에타스 인문토론 모임 후 남겼던 글 (2018. 9. 1)   우리는 모두 비극을 살고 있습니다.  아가멤논  - 전쟁을 떠나면서, 딸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잠깐은 갈등을 느낍니다. 하지만 곧 그는 명예를 생각합니다. 딸을 희생할 정도의 위대한 군주라는 찬사를 듣고 싶었습니다. 대의를 위한 일이니 정당하지 않냐고 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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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이스킐로스/소포클레스 비극을 읽고 -

* 피에타스 인문토론 모임 후 남겼던 글 (2018. 9. 1)

 

우리는 모두 비극을 살고 있습니다. 

아가멤논 

- 전쟁을 떠나면서, 딸을 제물로 바칩니다. 이 일을 결정하기 전에 잠깐은 갈등을 느낍니다. 하지만 곧 그는 명예를 생각합니다. 딸을 희생할 정도의 위대한 군주라는 찬사를 듣고 싶었습니다. 대의를 위한 일이니 정당하지 않냐고 스스로를 합리화합니다. 바다의 바람이 방향을 바꾸듯 그의 마음의 바람도 방향이 바뀐 것입니다(아가멤논. 219행). 

10년을 전쟁하고 온 후, 그는 냉담합니다. 클뤼타임네스트라의 눈을 회피합니다. 그녀와 눈을 마주치면, 이피게네이아가 원망하던 눈을 함께 떠올려야 하니까요. 딸의 울부짖던 소리는, 전쟁의 소란한 소리에 묻어두고 돌아왔습니다. 직면해야 할 문제를 오랜 시간 회피했을 때, 그의 마음은 돌처럼 굳어졌습니다. 해결되지 않은 죄책감, 이것이 비극입니다. 죽음을 맞던 순간에서야, 그는 10년 만에 딸의 눈을 바로 볼 수 있었을 것도 같습니다. 죄에 대한 빚을 갚을 때에, 비극을 벗고 자유를 입게 됩니다. 

 

클뤼타임네스트라

- 남편이 딸 이피게네이아를 전쟁을 위한 제물로 바칩니다. 그 이후 그녀는 가장 좋아했던 모든 것들을 가장 혐호하게 되었습니다. 딸의 희생을 방관했던 시민들을 증오했고, 남편을 빼닮은 아들 오레스테스도 꼴보기 싫습니다. 자신의 자매가 죽었는데도 여전히 아가멤논을 좋아하는 엘렉트라에게도 정이 떨어졌습니다. 자기 자신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은 분노로 변합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에 대한 분노의 독화살로, 결국 아가멤논을 겨냥합니다. 한 여자(헬레네)를 위해 10년을 전쟁하면서, 정작 자신의 딸은 잔인하게 죽인 남편의 이중성에 분노가 생깁니다. 10년간 그녀는 매일 그를 죽여 왔습니다. 그래서 실행에 옮기는 날에, 그녀는 머뭇거리지 않고 범죄를 저지를 수 있었습니다. 

아가멤논을 죽이면 내면의 분노가 해결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 날 이후 그녀는 억제했던 분노를 화산처럼 더 쏟아 냅니다. 아들을 버리고 엘렉트라를 학대합니다. 아가멤논을 죽이던 날, 클뤼타임네스트라 자신도 죽은 것입니다. 선하고 아름다운 것을 추구하는 것이, 사는 것(생명)입니다. 그렇지 않은 삶은, 악한 것이 이끄는 대로 그냥 가는 것(죽음)입니다. 그녀는 절제하지 못하는 분노와 복수에 대한 두려움이 이끄는 대로 그냥 갑니다. 오레스테스가 죽이기 전에, 그녀는 이미 죽은 상태였습니다. 그녀 안에 아름다운 것이 하나도 남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타인을 스스로 심판하고 복수하는 일은 오히려 부작용을 낳는 처방이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을 죽이는 일입니다. 분노에 휩싸여서, 인간으로서 누려야 할 아름다운 것을 상실하는 것은 비극의 결말인 죽음과 같습니다. 

 

오이디푸스

- 오이디푸스는 인간을 두 부류로 나누었습니다. 내 편과 반대편. 내 편은 철저하게 지키고, 아닌 편에겐 앞뒤 가리지 않고 대항합니다. 그것이 그가 자기 힘을 사용하는 방법이었습니다. 결국 그 힘으로 통치자의 자리에까지 오릅니다. 그는 눈을 더 날카롭게 떠서, 세상을 더 잘 판단하려 했습니다. 모든 사람이 내 힘의 통제하에 있어야 안심했습니다. 테이레시아스가 호의적으로 대하지 않자, 그는 분노합니다. 오이디푸스는 자기 판단과 자기 육체에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는 마음이 눈 먼 사람이었습니다. 마음이 잠들면 눈이 밝아지고, 오히려 앞을 내다보지 못하게 됩니다(자비로운 여신들. 104-105행). 

테이레시아스의 힘은 <진리>에 있었습니다(오이디푸스 왕. 356행). 그래서 그는 비록 소경이지만, 사람들을 인도할 수 있는 힘을 발휘합니다. 귀도 지혜도 눈도 멀었고(371행) 영원한 어둠 속에 사는 사람(374행)은, 테이레시아스가 아니라 오이디푸스 자신이었습니다. 

시력을 잃은 후, 오이디푸스는 이제 소리로 세상을 봅니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39행). 남의 눈으로 걷습니다. 신탁에 귀를 기울일 줄도 압니다. 그토록 의지했던 신체의 힘도 쇠퇴하고, 자기 힘으로 지켜낼 수 있다고 장담했던 가족과 도시도 전능한 시간 앞에서 쓰러진다는 것을 이해합니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609-620행). 비극을 사는 우리는,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서야, 안식으로 인도하는 전능한 시간을 만날 수 있습니다. 

 

안티고네

- 그녀는 자신의 행동을 불문법에 호소합니다. 사람의 양심 속에 태초부터 새겨진 도덕률입니다. 그 도덕률을 거스르는 크레온의 법을 그녀는 양심의 가책 없이 거스릅니다. 사회의 조율과 질서를 위해, 악법도 지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공법에 대항하는 것을 애틋한 감정으로 정당화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감정이 아니라 더 큰 법에 자신의 정당성을 호소합니다. 그것은 영원 전부터 살아 있고(안티고네. 457행), 태어나자마자 밝고 높은 하늘에 가득 찬(오이디푸스 왕. 866행) 지고한 법입니다.

양심을 거슬러 행동하면 양심은 우리를 고소합니다. 그리고 죄책감의 멍에를 지게 합니다. 죄책감에서 자유할 수 없는 것, 그것이 비극입니다. 그래서 실상 비극은, 안티고네가 아니라 이스메네의 생인지도 모릅니다. 

안티고네의 마음판에 새겨진 법과 양심은 그녀 자신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녀의 죽음은 우리에게는 비극이지만, 자기에게는 명예이고 영광입니다. 



크레온

- 크레온은 자기 안에 심판관를 두었습니다. 그는 정의가 무엇인지 그 심관관에게 늘 묻습니다. 그는 불의와 무질서가 싫습니다. 누구보다 순수하고 고결한 도덕주의자가 되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그의 정의이고, 통치자로서의 명예이고, 도시를 세우는 길이라 믿습니다. 그 정의가 안티고네를 죽입니다.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방치합니다. 그 칼 같은 정의 앞에 시민들은 따뜻한 숨을 쉴 수 없습니다. 법 앞에 순응은 하지만, 마음은 식어갑니다. 결국 아들과 아내가, 차갑게 돌아 선 마음을 죽음으로 표현합니다. 그들의 죽음은, 자기 말이 곧 법이라는 오만한 군주에게 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입니다. 

크레온은 두려웠습니다. 도시보다 친족을 우선한다는 비난을 듣고 싶지 않았습니다. 명예에 흠집이 나는 걸 견디지 못했습니다. 완벽한통치자로 인정받지 못할까 두려웠습니다. 두려움은 완벽주의를 낳고, 완벽주의는 오만을 낳고, 오만이 비극을 낳습니다. 

정의란 무엇인지 크레온은 묻습니다. 단답을 할 순 없지만, 정의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인간은 억울한 죽음을 기뻐하지 않습니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법의 강행에 감동받지 않습니다. 양심을 따르기 위해 법을 어긴 안티고네에게, 법의 집행과 이해를 같이 베풀었으면 좋을 뻔 했습니다. 이런 유연성이 법을 더 아름답게 만듭니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질 때 함께 고려해야 할 한 가지 기준이 더 있습니다. 이 선택이 과연 아름다운가 하는 것입니다. 아름다운 편을 택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 * *

사람들은 자신의 비극을 말하지 않습니다. SNS에 비극은 없습니다. 여행과 카페를 천진난만하게 즐기는 듯 보입니다. 아픈 일들조차 매력적이고 감상적인 몇 구절로 치장됩니다. 거기에 치유는 없습니다. 치유는 내 인생의 비극을 인정할 때 시작됩니다. 이스메네는 자기 인생의 비극을 잊고 싶었습니다. 가족사의 열등감, 이 비극을 덮어 두고 새 인생을 사는 길은 크레온의 법에 순응하는 것이었습니다. 효율성과 이익을 택하는 것이 성공의 길이라 여겼습니다.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남들처럼 좋은 결혼을 하고 행복하게 보이고 싶었습니다. 안티고네가 죽게 되었을 때에야, 그녀는 울부짖습니다. 냉정하게 덮어 두었던 가족에 대한 감정과 상처가 수면 위로 올라와 마음이 아픕니다. 치유는 그렇게 시작됩니다. 주어진 현실을 내 인생으로 받아들이고, 비극을 인정할 때 가능합니다. 우리 인생에 대해 슬프도다! 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아아, 슬프도다,  불행한 내 결정이여!(안티고네. 1265행), 비참한 내 신세 !(안티고네. 1310행)라고 인정할 때, 크레온은 자기의 오만을 인정하고 정의와 지혜를 깨닫습니다. 그것이 비극의 치유입니다. 

 

우리는 비극을 치유해 줄 견고한 나라를 원합니다. 공의와 사랑이 공존하는 나라입니다. 테세우스의 나라는 정의와 법질서를 존중합니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913행). 또한 그 나라의 왕은 시민이 부를 때, 발이 불편할 정도로 부리나케 달려오기도 합니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890행). 오이디푸스는 이 나라에선 더 이상 자기 힘을 내세울 필요가 없습니다. 테세우스 앞에서 자기 인생을 있는 그대로 서술하지만, 그는 비난받지 않고 오히려 보호받습니다. 비극을 살았던 오이디푸스의 유일한 소망은 이제 안식입니다. 안식은 마냥 쉬는 것이 아닙니다. 관계의 회복입니다. 신과 인간의 관계,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입니다. 인간사가 비극으로 일그러지기 전의 제자리를 찾는 것입니다. 크레온의 나라에서 상처 입은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의 나라에서 안식을 얻습니다. 

 

소포클레스는 테세우스가 다스리는 그 나라가 언제까지나 해를 입지 않고 견고하기를 소망합니다(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64행). 죽음으로 마치는 크레온의 나라는 비극의 공연장이었습니다. 그 비극을 희극의 결말로 고쳐 쓸 수 있는 곳이 테세우스의 나라입니다. 클뤼타임네스트라도 이 나라에서 살 기회가 있었다면, 그녀의 비극도 결말을 달리 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생의 무대에서 크고 작은 비극을 연기하는 우리도, 언젠가는 그 나라에서 함께 안식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YES마니아 : 골드 k*******2 2021.10.14.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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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 2017.02.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