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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한편의 연극대본을 읽고 있는 것같다. 현재형의 서술방식때문이 아니라 그렇게 길지 않은 분량에 무대위의 소품 하나하나를 묘사하는 듯한 설명과 인물의 상태를 설정해주는 지시어들이 책을 읽기 시작해 몇장을 넘기지 않았는데 어느 공연장의 객석에 앉아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우리는 한 불행한 여주인공의 기구한 모노로그를 들으러 온 관객들이다.
이 연극, 아니 소설은 커다란 크레센도의 구성으로 이뤄진다. 총알이 박힌채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남편을 간호하는 여주인공은 희멀건 눈을 반쯤 뜨고 설탕물 공급을 위헤 호스를 입에 끼운 가사의 남자에게 어느새 자신의 비밀스런 마음을 하나 둘 털어놓기 시작한다. 누워있는 그 남자는 더이상 죽음을 앞에 둔 그녀의 남편이 아니라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는 모든 비밀을 말해도 된다는 인내의 돌이다. 그런데 이 돌은 신기하게도 어느 정도 비밀이야기의 용량이 포화상태에 이르면 터져버려 비밀을 말한 자를 해방시켜준다는 것이다. 그녀가 마지막 결정적인 비밀을 털어 놓을 때 인내의 돌은 터지고 이야기는 최고의 포르티시시모로 달려간다.
인내의 돌, 싱게 사부르는 고통과 억압에 시달린 자들에게 구원의 상징으로 여겨질 것이다. 양성구조의 유성생식을 하는 동물은 거칠고 공격적인 수컷과 자녀양육에 유리한 수컷을 찾는 암컷의 형태를 이룬다고 한다. 인간역시 생물학적 진화를 거쳐 온 포유동물로서 번식에 있어 성적 기능이 확연히 차이가 난다. 최근에 읽고 있는, 인간본성을 다룬 사회생물학 책에서 얻은 이런 정보는 여성의 억압적 삶에 대한 가슴 먹먹한 이 책을 읽으면서 자꾸 머리속을 맴돌았다. 이미 유전자는 양성의 성적 차이를 강조해 번식하는 것이 인간세상에서는 필요치 않음을 깨닫고 다른 기제를 작동시키려 하고 있지는 않을까.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인간은 유전적 진화의 이상발달의 형태로서 성적 차별을 도구로 연명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슬람 전통에 대한 궁금증으로 접해보았던 꾸란에도 실제로 여성을 억압하게 만드는 어떤 규율도 찾을 수 없었다. 오히려 가족내에서 여성을 돌봐야 한다는 문구들은 여러 곳에 있었던 것같다. 그런데 현실속의 여성의 삶은 율법과 전혀 다르다. 비단 이슬람문화권에서 뿐아니라 지구상 대부분의 곳에서 여성의 삶은 존중받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책표지에 푸른 색 천을 온몸에 두르고 앉아있는 여인의 모습은 그것만으로도 충격적인 메시지를 던진다.작가는 2005년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저주받은 삶을 다룬 시를 쓴 시인 나디아 안주만이 남편에게 야만적으로 살해당했다는 뉴스를 접하고 이 소설을 쓰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여주인공은 자신만의 이야기를 계속하다 마침내 아이들이 남편의 아이가 아니라는 비밀을 말하게 된다. 말하기에 취한 그녀의 비밀은 누워 있던 남편을 일으켜 그녀를 패대기치게 한다. 결국 인내의 돌은 산산조각나 버리고 이제 더이상 그녀는 고통에 짓눌려 살지 않아도 된다. 물론 이 장면은 거의 환상적 기법이랄 수 밖에 없다. 정말 남편이 일어나 그녀의 비밀에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 수 없다. 단지 그녀의 환각속에서 누워있던 남편은 벌떡 일어나 그녀를 모질게 다루고 다시 쓰러져 누운 건지 모른다. 하지만 마지막 페이지에 그려진 불꽃놀이같은, 이렇게 그녀의 싱게 사부르가 터짐으로써 그녀가 구원된다는 설정은 책을 읽는 모든 독자에게 카타르시스가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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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자주 퍽퍽하게 우리에게 다가온다. 누군가의 말처럼 삶이 강물처럼 흘러가면 무슨 맛으로 이 세상 살다 가겠냐고도 하지만, 그래도 가끔씩은 우리의 삶이 강물처럼 순하게 흘러 갔으면 싶을 때도 있다. 인내라든가, 순종이라든가, 희생이라는 말 없이도 살 수 있는 삶이 있다면 가끔씩은 그런 삶을 구걸하고 싶을 때도 있다. 높은 곳보다는 낮은 곳을 보며 살라고 했던가. 낮은 곳을 통해 우리는 만족하는 법을 배운다. 타인의 고통을 통해 나의 만족을 배불리는 것이다.
<인내의 돌>을 왜 읽게 되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아랍권의 문화와 문학에 익숙하지 않아서 책을 읽는 동안 이해하고 받아 들여야 하는 부분들도 많았다. 특히 이 책의 중심적인 흐름이 되는 여자의 삶, 나는 패미니스트도 그 무엇도 아니지만 가끔 나를 패미니스트로 만드는 주변의 삶이 있다. 남성들은 무언가를 얻기 위해 점잖게 있어도 되지만, 여성들은 똑같은 것을 얻기 위해 싸워야 할 때 나는 삶의 슬픔을 느낀다. 이 책의 주인공인 ‘그녀’는, 그렇지만 일반적인 의미의 싸움을 택하지 않는다. 이름조차 없는 ‘그녀’는 싸워야 할 대상을 잃어 버렸고, 그래서 혼자서 그 대상을 향해 말을 건다. 말은 소통의 가장 기본적인 구조이면서 가장 어려운 방법이다. 소통이 되지 않을 경우 많은 사람들은 말보다는 침묵을 택한다. 그러나 ‘그녀’는 총에 맞아 식물인간이 된 남편을 향해 무언가를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식물인간이 된 남편의 곁에서 남편의 호흡수를 센다. 그러다가 가장 남편을 위해 주는 것처럼 굴던 남편의 형제들과 어머니가 그 남편을 버리고 도망을 가고, 친정식구마저 그들을 버렸을 때 그제서야 ‘그녀’는 남편이 온전히 그녀만의 것임을 이해한다. 그 남편을 위해 코란을 암송하고 기도를 한다. 이슬람교 교역자인 몰라는 ‘그녀’의 남편이 낫지 않는 것은 ‘그녀’의 기도가 부족해서라고 그녀를 억압한다. 기도를 통해 생명을 살릴수 있다고 하는 것은 모든 종교의 특성인가 보다. 불완전자이면서 완전자인 신이 되기 위해 갈구하는 인간은, 탄생은 신의 능력이라고 인정하면서 죽음에는 스스로 개입하고 싶어하는 모순에 빠진다. 모두가 욕망 때문이다. 신이 되고 싶은 욕망.
그러나 ‘그녀’는 어느 순간 남편이 일어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기도가 부족해서가 아닐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면서 속에 쌓인 말들, 이슬람의 여자로 살아가면서 뱉어 내지 못하고 속에 쌓아 두었던 말들을 식물인간인 남편을 향해 쏟아 내기 시작한다. 전쟁영웅이었던 남편이 전쟁터에서 돌아오지 않아 사진결혼식을 올렸던 일, 시어머니의 구박, 형제들의 배신, 어린 나이에 시집 와서 유일하게 말이 통했던 시아버지는 이제 돌아가셨고, 그녀는 의식이 없는 남편에게 자신이 시아버지에게 욕망을 느꼈음을 고백한다. 더 나아가 그녀는 남편이 멀쩡했더라면 절대 말하지 못했을 자신의 몸의 욕망과 가족들을 보며 느꼈던 울분들을 털어 놓고 창녀가 되어 있는 고모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인다.
수시로 집에는 무기를 든 남자들이 들어와 감시를 하는 와중에 ‘그녀’는 혼자서 뭘로 먹고 사느냐는 한 남자의 말에 자신은 몸을 파는 창녀라고 말한다. 더럽다고 저주를 퍼붓는 남자의 뒤에서 통쾌하게 웃어대는 ‘그녀’는 커튼 뒤에 숨겨놓은 남편의 옆에서 젊은 남자와 정을 통한다. 첫경험인 남자를 안아 주면서 ‘그녀’는 남편을 떠올리고, 모든 것에 서툴렀던 남편을 그 남자를 통해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물론 그녀의 고백은 독백이다. 알아 듣는지 못 알아 듣는지 의식이 없는 남편은 그녀에게는 ‘생게 사부르(인내의 돌)이다. 생게 사부르는 페르시아 신화에서 말 못할 비밀을 털어 놓은 사람을 해방시켜 준다는 의미를 가진 돌인데 그 말들이 포화 상태에 이르러 그 돌이 깨어지면 비로소 그 사람을 해방시켜 준다는 것이다. ‘그녀’의 생게 사브르였던 남편에게 그녀는 처음에는 남편을 살려 달라는 간절한 기도를 했지만 점점 세상을 향한 분노의 말을 쏟아 놓는다. 결국 남편은 생게 사부르처럼 벌떡 일어나 그녀의 가슴에 칼을 꽂는데 그럼으로써 그녀는 의식의 해방을 맞이하는 것이다.
프랑스 콩쿠르 상을 수상했던 이 작품은 여느 소설과 같은 문장구조를 가지지 않아서 우리가 읽기에 어색하다. 주어와 술어의 간단한 문장, 미사여구가 생략된 문장은 점점 갈수록 문장 자체가 인간의 삶 가까이 다가온다는 느낌을 받는다. 산문은 도구적 사용을 가진다는 점에서 문학이라기보다는 소통적인 언어에 가깝다는 사르트르의 말이 수긍가는 문장들이다. 휘황찬란한 미사여구는 우리의 삶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지만, 이 책의 저자 아티크 라히미가 선택한 문장구조는 미사여구를 생략한 소통의 문장들이다. 아름답지 않아서 오히려 인간의 삶에 가까운 문장들은 뒤로 갈수록 우리의 삶을 직설적으로 찌른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삶에 미사여구가 언제 필요한적이 있었던가. 삶에서 벗어나는 문학적인 삶에서나 필요한 술어들을 라히미는 과감히 생략해 버린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가끔 나에게도 생게 사부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이런저런 말들을 풀어 놓을 수 있는 나의 생게 사부르, 차마 세상을 향해 뱉어내지 못한 말들의 무게가 나를 짓누를때가 있는데 그럴 때 나의 생게 사부르가 있다면 삶은 훨씬 가벼워질지도 모르겠다. 이슬람 여성의 삶을 넘어 어딘지 모르게 그녀들의 삶이 익숙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것인지도 모르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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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살기도 힘들텐데 그 나라 왜 그렇게 싸움질을 계속하고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나라 아프카니스탄! 전쟁은 싸움의 당사자로 참여하는 남자도 불행하게 만들지만 여자를 더 불행하게 만든다. 남아독존의 사고가 팽배한 나라에선 더 더욱 그렇다.
아프가니스탄 여성의 현실에 대한 시를 발표한 여류시인 나디아 안주만이 남편에게 살해당한 사건에서 촉발되어 인내의 돌을 집필한 망명작가 아티크 라히미는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라는 사실을 옮긴이의 말에서 알고서 놀랐다. 인내의 돌을 처음 펼쳐든 느낌은 너무 무미건조하고 지루하기까지 했다. 전쟁에 나갔다가 잘못맞은 총알이 목에 박혀 침대에 누워 간신히 연명하는 남편과 동거하는 두 딸을 둔 그 여자, 거의 대부분의 이야기가 하나의 방안에서 그녀가 읊조리는 탄식조의 넋두리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알-카흐하르를 쉼없이 외고 염주알을 굴리며 남편의 쾌유를 비는 그 여자는 지극정성이다. 오른쪽 눈에 한방울, 두방울, 왼쪽 눈에 한방울 두방울, 그리고 설탕과 물을 혼합한 용액을 보충하고 남편의 목구멍에 호수를 끼우고, 몸을 씻어주는 행위가 그녀가 남편을 위해 하는 일상적인 행위다. 그러나 남편은 아무런 반응도 못하는 물체와도 같은 존재, 그러나 쉴새없이 호흡만은 계속한다. 남편과 자신을 버리고 떠난 시어미와 시동생들에게 분노하는 그녀, 하루 이틀 사흘, 3주일이 지나도 자신의 간절에도 불구하고 알라신은 반응이 없다.
어느 순간 그녀는 자신의 내면 깊숙이 감추두었던 비밀 이야기를 한꺼풀 두꺼풀 쏟아내기 시작한다. 결혼한 여자가 바라는 원초적인 욕망에서부터 남편에 대한 미움, 바램을 아무런 반응을 못하는 남편에게 주절주절된다. 내가 미쳤나 싶을 정도로, 나에게 다른 악마가 깃들어 시키는 것이라고 변명하고 싶을 정도로 제정신인 남편에게는 도저히 내뱉을 수 없는 말과 행위까지도 서슴없이 말한다.
사람들은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 한자락은 가슴에 담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비밀이 심층의식을 지배하는 힘이 강해지면 병적인 상황에 도달한다. 누구에게 툭 털어놓으면 해소되는 그런 비밀이 그녀의 심층심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 찾아온 아버지의 목소리, 아기의 목소리로 예지몽을 꾼다.
생게 사부르.
한 가지의 행복마다 두 가지 불행이 생겨난다. 누군가의 행복은 다른 누군가의 불행을 낳는다. 정상적이지 못한 결혼과 결혼생활, 남성의 의식, 여자면서도 더 옥죄는 시어머니, 싫다. 거부한다는 말을 한번도 내뱉지 못한 그녀의 의식 저변에 깔린 것들~
그 남자와 그 여자
나영양 사건에 대한 반응의 강도에서 드러나는 나와 아내의 차이처럼, 술을 먹은 상태를 심신박약이라 간주하고 12년형을 확정한 한 아이의 아버지일 것 같은 판사의 의식~
그녀의 말은 어느 순간 남자인 나의 심층의식을 호비고 내가 그녀의 남편이 된 것처럼 이런 것 까지도 말하나 싶을 정도로 거부감이 들기도 하다가 아내의 마음으로 들으면 정말 감내하기 힘든 구비를 넘으며 살아왔다는 안쓰러움이 든다. 아주 먼 나라 아프가니탄 여인들이 감내하며 살아야 할 현실이, 전쟁이 빚어내는, 종교가 빚어내는 비정상적인 상황들이 우리들에겐 일어나지 않은 현실이라 참 다행이다 싶지만 그녀들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사회에도 비일비재하게 감추어져 있을지도..
'오 나의 생게 사부르, 여자로 산다는 게 힘들면, 남자로 산다는 것도 마찬가지로 힘들어지는 거야'
책에서
알라의 이름 |
![]() 한편의 영화를 보는듯 했다. 내가 여자여서 였을까...그녀의 심리가 너무나도 와닿았다. 반신불수에 정신도 없이 숨만 쉬며 여인이 주는 소금과 설탕이 들은 물을 관으로 공급받으며 시체같은 모습의 남편은 그녀에겐 인생의 족쇄다. 벗어날수도 없고..돌봐주지 않을수도 없는 하늘과 같은 남편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도 아직까지 뿌리채 없어지지 않은 여성과 남성의 차별... 아프간은 우리보다 더한 나라이니 말안해도 그녀의 답답한 심정이 절로 느껴졌다.
그녀는 시아버지께서 말씀하시던 인내의 돌에 대한 이야기를 떠올리며 남편을 인내의 돌이라고 생각하기로 한다. 모든 비밀을 다 털어놓고....인내의 돌은 추한 비밀,마음등을 들으며 참는다. 더이상 견딜수없을만큼 인내를 하고나며 부서져 버린다는 전설의 인내의 돌.... 그녀는 남편을 인내의 돌이라 생각하기로 하고 모든 이야기를 한다는것이 책의 설정이다.
읽으면서 정말 그녀의 마음이 이해가 되었으며 아프간의 문화에 대해서도 낯설었지만 그 낯선환경덕에 더욱 깊이 빠져들게 하는 매력적인 소설이었다.
책을 읽으며 마지막 부분의 반전덕에 놀랐다. 하지만 그녀의 비밀들은 남자들의 세상안에서의 여성들의 반란자적인 면모를 보는듯해서 은근히 통쾌한 맛이 있었다.
억압받고 살고있는 동시대의 타국의 자국의 여성들이여... 배우고..느끼고...인생을 찾을수 있기를......기원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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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의상인 듯한 천으로 온 몸을 휘감고 있는 인간의 모습. 누군가에게서 자신을 지키기위해 안간힘을 쓰는 모습같기도 하고, 누군가에 의해 억눌림을 강하게 당하고 있는 모습같기도 하여 표지를 보는 순간 이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 사람의 가려진 모습이 강렬함을 온 몸으로 내뿜고 있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책은 억눌림으로 평생을 살아가는 아프칸 여성의 이야기이다. 전쟁이 터져 하루 앞을 내다볼 수없는 나날이 이어지고 있음에도 여성에게 주어진 족쇄같은 삶에는 변화가 없다.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총에 맞아 꼼짝하지 않고 누워만 있는 남편이 있다. 초반에만해도 그녀는 남편 곁에서 그를 보살피며, 그들이 믿는 신에게 때로는 아무런 말이 없는 남편에게 기도를 하고, 그의 쾌유를 빌었다. 하지만 남편은 전혀 반응이 없었다. 가늘게 내쉬던 숨소리마저 희미해지고, 급기야 파리가 입 속으로 들어가도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게 되었다. 총소리, 포탄 소리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들리는 생활에서 아내는 급기야 남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가족들에게 버림받은 고모이야기, 남편에게는 절대 할 수 없었던 자신과 두 딸들에 관한 이야기를. 남편이 평상시처럼 총을 들고 전쟁터를 오갔다면 절대 할 수 없었던 이야기들을 하면서 아내는 자신 속에 웅크리고 있던 스스로를 찾아내고 밖으로 드러내기 시작한다.
지리적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사람들의 이야기이지만, 이제는 많은 매체를 통해서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를 자주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하루를 살아가는 것처럼 관심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그때그때 보여지는 화면이나 진행자의 말에 따라 때로는 호기심 때로는 안타까움으로 그들의 삶을 살펴보곤 하였다. 그중에서도 여인들의 삶을. 나와 같은 여인이고, 나와 같은 2000년대를 살아가고 있지만 믿고 있는 종교에 따라, 이어져내려오는 전통에 따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여인들. 그녀들의 삶은 "억압"이란 단어에 익숙지 않은 내게 참 "낯선"것이면서 "안타까움" 그 자체였다.
책 속의 주인공 또한 마찬가지였다. 동생을 며느리 삼겠다고 찾아온 시어머니에게 아직 동생은 나이가 어리니 이 아이가 어떻겠느냐는 어머니의 손가락질로 인해 뜻하지 않게 시집을 오게 된 아이. 기껏해야 열몇살 먹은 여자아이가 가족과 떨어져 낯선 공간에서 결혼은 했으되 남편은 전쟁터에 나가 홀로 결혼 생활을 해 나가야했던 아이. 아무리 강한 아이라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여인은 죽은 듯 누워있던 남편에게 그간 하지 못했던, 할 수 없었던 이야기를 하면서 서서히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게 된다. 갇혀있기를 당연시했던 삶인지라 그 과정은 순타지 않다. 여인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다가도 어느 순간 불안감에, 자신에게 악마가 씌였다는 무서움에 몸부림친다. 그녀가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모두 드러낼 수 없었던 것들이기 때문이다. 만약 남편이 총에 맞기 전이었다면, 그 이야기를 하는 즉시 여인이 총에 맞았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
책 속에서 여인은 그렇게 대꾸없는 남편에게 독백을 하듯이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글을 읽다보니 왠지 자연스럽게 무대 위에서, 꺼진 조명 밑에서 조용히 읊조리듯이 말을 하는 여인의 모습이 상상되었다. 딸의 모습, 여인의 모습, 어머니의 모습이 교차하는 듯한 말소리와 얼굴 표정 또한 쉽사리 상상이 되었다. 그러면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졌다.
페이지도 많지 않고, 한 페이지 안에 글자 또한 빽빽하지 않다. 글자를 읽는 다고만 생각한다면 페에지는 금방 금방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의미를 생각한다면 쉽사리 페이지가 넘어가지 않는 책이었다. 또한 살아온 삶의 모습이 너무나도 다르고, 해왔던 생각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책 속의 여인, 아프칸이라는 머나먼 곳에서 살아가고있는 여인들의 삶을 모두 이해되었다고 말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아픔"이 어떠할지 조금은 알게 되었고 느끼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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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성이 끊일 날 없는 아프가니스탄 어느 마을, 코란을 읽고 하루에 하나씩 알라신의 이름을 불러 남편이 깨어 나길 기도 하며 목에 총알이 박힌 채 식물인간이 되어버린 남편을 돌보는 아내가 있었다. 그러나 매일 반복되는 별 소득없는 간호와 비참한 일상에 아내는 점차 지쳐간다. 아내는 돌처럼 누워 있는 남편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 놓기 시작한다. 한번 비밀을 말하고 나서 자신의 마음이 웬지 편해졌음을 느끼게 되자 어릴적 사건, 자신의 몸이 원하던 욕망, 아이 탄생의 비밀 까지 남편이 그렇게 식물인간이 되지 않았다면 절대로 밝히지 못했을 충격적인 비밀을 낱낱이 털어 놓는다. 페르시아의 신화에는 남들에게 차마 말하지 못하는 불행이나 고통,비참한 이야기를 들어 주는 돌, 어느 날 그 돌이 산산조각 깨지면 비밀을 털어놓던 사람을 괴로움에서 해방시켜 준다는 신비의 검은 돌, '생게 사브르'가 나온다. 아내에게 남편은 바로 자신의 '생게 사브르'였다.
책머리에 저자는 '남편의 손에 야만적으로 살해된 아프가니스탄 시인을 추모하면서' 이 글을 썼다고 밝히고 있다. 그래서 였을까? <인내의 돌>에서 저자는 이슬람의 율법과 남성이 의해 비인간적인 대우를 받아 온 이슬람 여성의 오랜 고통을 토해 내고 있다 산송장이 되어 누워 있는 남편을 향해 그토록 지키고자 하던 이슬람 남자의 명예는 땅에 떨어진 고깃덩어리에 불과하고 이슬람 남자들이 추앙해 마지 않던 영혼은 하찮게 여기던 육체에 갇혀 고통을 당하는 꼴이 되었다며, "당신 명예가 당신 영혼을 한 방 먹이고" "당신 몸이 당신 영혼을 심판하는 것"이라고 아내의 목소리를 빌어 저자는 분노했다. 또한 여성에게 신처럼 굴림하는 이슬람 남성들을 향해 그녀들의 분노와 절규를 듣기 위해서는 ' '코란'속에서 ' 인내하는 자'라 불리우는 마지막 아흔 아홉번째 신이거나 신비의 돌인 '생게 사브르'가 되어야 한다고 외치고 있다.
소설<인내의 돌>은 마치 한편의 연극을 본 듯한 느낌이 들게 하는 작품이다. 군소리 없는 간결한 문장이나 단순한 행동 표현도 그렇고, 주인공의 퇴장과 등장에 따라 무대 조명인 듯 밤과 낮이 교차되는 것도 그렇다. 아내가 남편의 가슴에 단검을 꽂는 마지막 장면은 "행복한 결말을 위한 조건은 체념하고 희생해야 하며 자기애, 아버지의 법, 어머니의 도덕, 이 세가지를 포기해야 한다"는 남편 아버지의 말씀을 따른 것일까?, 아니면 오직 '어머니의 도덕'으로 남편을 응징한 것일까? 산산조각이 나는 '생게 사브르그'를 표현한 것일까? 관객으로 하여금 그 의미를 고심해 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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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프랑스 <공쿠르상> 수상작이라는 책 표지 띠를 보고 고른 작품이었다. 외국출신 작가가 쓴 작품에 대 <공쿠르상>을 수여하다니... 솔직히 얼마나 잘 쓴 작품인가 하는 호기심이 일어서 선택한 일면도 없지 않았다. 단숨에 읽고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나서 한참동안 <아티크 라히미>의 문학적 진지성에 매료되어서 밀려드는 감동에 내 마음을 놓아버린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는 여성의 이야기라는 것은 한낱 배경에 불과할 뿐 이다. 인간의 존재와 구원에 관한 성찰을 이토록 진지하면서도 속도감 있게 밀어부친 작가의 역량이 서슬 푸르게 돋보였다. 참으로 오랫만에 드물게 만나본 문학성 짙은 작품이었다. 이런 책을 소개해주신 현대문학 출판사에게도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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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몇 년간 독서가 너무 편향된 것 같아서 기분 전환 삼아 "절대로 안 읽을 것 같은" 책을 읽어봤다. 전쟁 중의 이슬람 여인의 자기 고백과 성찰, 하나의 인간으로써의 각성 어쩌고 저쩌고 하는 광고 문구는 절대로 내 취향이 아니기 때문에, 그리고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이라는 공쿠르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프랑스 녀석들이 좋아하면 틀림없이 아스트랄할테지!(......) 라는 이유로 이 책을 선택했다.
예상했던 그대로 취향이 아니었고, 나의 가장 좋아하는 책 목록에 들어갈 일은 아마 없겠지만 여운이 남는 책이다. 보다 더 시간을 들여서 찬찬히 읽었더라면 더 좋았을 책이다. 나중에 다시 한번 공들여서 꼼꼼하게 읽어보고 싶다. 가볍게 잘 읽히지만, 쉽게 읽을 글은 아닌 것 같다.
되는 데로 선택한 책 치고는 상당히 만족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