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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아리스토텔레스의 ‘비극’은 있는데 ‘희극’은 안 보이냐?”는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소설 ‘장미의 이름
(움베르트 에코)’은, 즐거움과 웃음, 기쁨 등의 ‘가벼움’이 신앙과 경건함, 그리고 성찰 등의 ‘무거움’을 방해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한다고 믿어온 기존의 사고방식에 대한 도전을 잘 그려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성당-혹은 여타 종교시설-에서 큰 슬픔을 달래는 것이 큰 웃음을 나누는 것보다 여전히 더 익숙하다고 생각하지요 - 엄숙한 성당에서 문득 마주한 큰 웃음소리에 ‘감히 경건한 성당에서…’라는 생각을 잠깐이라도 했다면, 같은 선입관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입관은 나름 집요합니다 - 종교인분들은 당연히 엄숙함과 경건함, 무거움 등의 이미지에 더 가깝다 생각하고 ‘가벼움’으로 치부되는 즐거움과 웃음, 기쁨 등은 속세의 것으로 생각해버립니다.
허나, 예수님도 많이 웃으셨겠지요,
다만 기록이 없을 뿐. ‘그림일기’는 글과 그림을 통해 무거움과 가벼움의 균형을 찾아갑니다.
‘일기’가 담은 진중한 성찰은, ‘그림’ 속의 큰 눈망울(물론 일본 애니메이션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웃는 입,
또렷이 그려진 다섯개의 손가락, 그리고 존재가 기쁨인 꽃, 풀, 그리고 나무에 맞닿아 있습니다. ‘일기’에서 엿보이는 ‘해야 하는데’의 초조함과 그러지 못한 아쉬움은 ‘그림’ 속의 ‘여전히 그분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꽃, 풀, 그리고 나무-은 참 아름답다’로 다시 균형을 찾습니다. 소명(Calling)과 성찰을 끊임없는 삶의 과정이라 한다면, 그림은 이 지난한 과정이 불완전한 모사로 존재하는 현실이 아닌 그냥 그 자체로도 충분히 아름다운 현실로 그려냅니다. 독자로서는 각각의 ‘일기’와 ‘그림’
사이의 긴장이 얼마나 절박한지 가늠할 수 없습니다만, 성찰이 깊어지고 무게가 더해질수록 ‘일기’와 ‘그림’의 긴장은 더해짐에 틀림없습니다. 그 긴장이야 말로 작가의, 그리고 이 책의 힘입니다. ‘그림일기’가 무거운 성찰만 담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소명으로서의 일상, 아이들과의 일상, 가족으로서의 일상에서 느끼는 감정, 그리고 잠깐의 여유, 이 모든 것들이 ‘일기’와 ‘그림’으로 담겨 있습니다.
중세시대의 필사가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주로 기록했다면, 저자는 예수님의 삶을 사신 알로이시오 신부님의 열매들(수녀님과 아이들 모두)의 생각들과 삶들을, 작가 특유의 언어, 선과 색깔로 오롯이 담고 있습니다.
몇몇 시인들에 대한 동경이나 꽃에 대한 애정을 숨기지 않으며 감사해야 할 일들을 적어둡니다. 그리고, 순간 뿐인 ‘지금 여기’에 선 작가는 영원으로 남을 과거(지나간 ‘지금 여기’)와 매일 새로이 다가올 미래(곧 다가올 ‘지금 여기’) 속에서 느끼는 소명으로서의 일상을 보여줍니다. ‘성직자라 우리와는 다를 거야.’로 시작한 독서는, ‘어, 크게 다르지 않네?’를 거쳐,
‘아, 역시 다르구나.’로 흘러갑니다.
우리는 불완전한 균형을 통해 또 다른 균형을 추구합니다. 기쁨과 슬픔의 선후를 따질 수 없듯이
‘일기’와 ‘그림’의 경중을 따지기 어렵습니다. 이 책이 보여주는 과정을 통해 독자 스스로가 각자 삶의 균형을 찾아가는 계기가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기이기에 담을 수 있는 이야기와,
출판이기에 담지 못한 이야기의 흔적을 감히 짐작하며, 그 짐작을 통해 작가의 삶과 소명에 대해 조금 더 들여다 볼 수 있는 것도 독자의 특권입니다. 그리고, 기록은 기억을 지배하지요
- 아름다운 손글씨의 기록을 보는 것은 이 책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장미의 이름’ 속의 중세 필사가들은 그들의 재능을 오직 하느님의 ‘무거움’만 수동적으로 기록하도록 허용되었지만 ‘지금 이곳’의 작가는 ‘무거움’과 ‘가벼움’을 모두 한권에 책에 자유롭게 담아내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