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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버지니아울프를 그린 영화<디 아워스>에 버지니아의 언니가 동생을 보며 이런 말을 한다. "버지니아는 참 좋겠다. 두 개의 인생을 살잖니. 하나는 실제에서, 또 하나는 소설 속에서." 생각보다 많은 이들은 두 개의 자아를 갖고 있다. 대부분은 선천적인 자아에서 이루지 못하는 것들이나 꿈꾸는 삶의 인격을 부여하여 형성되는 것이 자신의 두 번째 자아인 후천적 자아가 된다. 예술적 감각이 풍부한 이들은 이를 예술적 표현으로 승화시켜 자신의 글, 그림 혹은 노래 등을 통해 또 하나의 나와 마주한다. 후천적 자아는 또 하나의 나인 동시에 나의 선천적 자아를 비추는 거울의 역할을 한다. 그리고 지금 소개할 벨기에 출신의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저서 <샴페인 친구>에도 그녀의 '친구'가 등장한다. 자신이 글을 짓기 위해서 빌린 그녀의 샴페인 '친구'인 '페트로니유 팡토'. 처음엔 아멜리를 놀래키고, 그 다음엔 그녀를 흠모하게 하고, 경악케 하고 마지막엔 감탄케 했던 페트로니유. 달짝지근한 그녀들의 이야기에 이제 목을 축여보자.
알딸딸한 샴페인 찬가로 서문을 여는 <샴페인 친구>는 아멜리가 그녀의 사인회에서 만난 여성팬 '페트로니유'를 만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 책이다. 실제는 동료소설가 '스테파니 오셰'에게서 '페트로니유'의 캐릭터를 빌렸다는 본 저서는 아멜리가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는 그녀만큼 대담한 풍미의 샴페인을 함께 즐길만한 '샴페인 친구'를 찾던 중, 자신의 팬임을 자처하며 팬레터를 주고받던 팬(페트로니유)과 아멜리의 사인회에서의 만남을 시작으로 친구가 되고 그 둘이 어울리며 겪는 이야기를 나열하여 마치 아멜리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듯한 기분이 들게끔 한다.
아멜리는 페트로니유를 처음 봤을 떄 무심결에 이렇게 말한다.
엘리자베스 시대의 문학을 전공한 페트로니유는 훗날 자신이 좋아하던 작가 아멜리처럼 소설가가 되고 평론가계의 주목도 받으며 대여섯권이 넘는 작품을 펴낸다. 그녀의 팬들도 생기고 소설가로서의 입지도 굳힌 것 같다만 그녀는 '다른 글쟁이들처럼 되고 싶지 않다'며 훌쩍 자신을 찾으려는지 1년동안 사하라 사막을 횡단하러 떠난다. 아직 출판사에 부치지도 않은 소설을 아멜리에게 훌쩍 맡기고서 말이다. 그리고 1년 후 구릿빛 피부가 되어 돌아온 페트로니유는 녹록치 않은 인세로 인해 신약생동성실험에 자신의 몸을, 밤에 어둠의 러시안룰렛쇼에 자신의 머리를 갖다바친다. 이는 모두 글쟁이의 삶을 연명하기 위한 그녀 식대로의 응급처치였다. 후에, 아멜리는 페트로니유의 이런 모습을 보고 경악하며 그녀를 멈추려 하자 페트로니유는 이렇게 답한다. "너는 글만 쓰면서 먹고 살 수 있는 몇 안되는 소설가라는 걸 명심해야 해" <샴페인 친구>의 서문은 이렇게 시작한다.
페트로니유는 자신을 '문학'이란 샴페인에 집어던졌다. 문학을 자신의 대학전공에 그치게 하지 않고 인생의 전공에 '문학'을 임명하여 자신을 푹 담근 것이다. 그녀는 이성적으로 '문학'이란 샴페인에 도취된 것이다. 분명, 그녀의 행동은 위험하다. 책에서 그려지는 페트로니유의 행동은 안정이란 안중에도 없는 듯 늘 위험과의 얇은 경계를 두고 아슬아슬한 사이로 지내왔다. 옆에서 지켜본 아멜리도 이를 잘 알고 있지만 한편으론 그녀의 행동에서 자신을 반추해본다. '문학'이란 샴페인에 자신을 용기 있게 집어던진 페트로니유의 몸. 여러 권의 소설을 쓰며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보였지만 '노동자 출신은 이 바닥에서 어려운 거 아시잖아요.'라는 말이나 들으면서도 끝까지 좋아하는 문학을 붙들고 있는 페트로니유의 정신. 펜대가리만 굴리는 펜대운전수들과 다르게 행동으로 보여줬던 문학에 대한 페트로니유의 행동은 아멜리가 가슴 속에서 염원하던 바로 그 '대담함'이었을 것이다. 샴페인의 도취만큼이나 위험한 '문학'이란 샴페인의 도취. 그리고 그 위험함을 쏙 빼닯은 둘. 아멜리는 본 저서를 끝맺으며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 사건에서 아무런 쓸모도 없는 교훈을 얻는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위험하다는 것을, 목숨이 위태롭다는 걸 아무리 알아도 소용 없다는 것을, 매번 걸려들고 마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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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어달간 읽었던 책의 감상을 기록하지 못했다. 누가 시킨것도 아니긴 하지만, 숙제로 남아 있는 7권 정도의 책 때문에 마음 한켠이 답답한게 사실이다. 책에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었는가를 잊는 것보다는 독후 내게 남은 여운과 감정을 남겨두지 못함에 대한 염려가 크다. 가끔 어떤 순간 퍽 단조로운 일상 중에도 '어째서 이런 생각' 혹은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을까 스스로에게 의문을 품곤하는 경우가 있다. 전부 그런 것은 아니지만, 책에서 느꼈던 감정이나 인식이 머릿속이나 가슴속 어딘가에 남겨져 있다가 원인이 되는 것임을 깨닫게 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물론, 전적으로 글귀나 이야기 그속의 캐릭터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다. 주체인 본인이 살아가며 경험하고 인식하고 사고하는 과정에서 책과 교감하고 주고받으며 형성된 가치판단의 기준 때문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감상의 중요성에 집중했고, 남겨두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읽은 양에 비해서 이야기 자체를 기억하는 능력이 무척이나 열악한 스스로를 잘 알기 때문이다. 어쩌면 애정하는 작가 아멜리 노통브의 감상을 기록한다는 허울을 빌어 반성문을 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작가의 이야기를 하는 이 책 '샴페인 친구'는 인류의 중요한 화두인 '관계'와 '연민'에 대해서 다룬다. 맑스와 엥겔스, 셜록과 왓슨, 오성과 한음, 톰소여와 허클베리핀 처럼 특별한 이유나 세속적 견련성 없이 우정으로 맺은 샴페인 친구에 대한 애정 그와 함께한 도전과 모험, 일탈에 관하여 이야기하면서 작가의 연민과 애정이 충분히 느껴졌다. 베푸는 행위는 경제적이고 물리적인 것으로만 형성되지는 않는다. 주고 받는 것에는 그 유형의 제한이 없다. 작가는 페트로니유를 통해 영감을 얻고, 그녀가 사랑하는 샴페인을 보다 아름답게 음미할 수 있게 되었다. 간혹 천방지축 럭비공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이를 받아들이는 이유는 애정과 연민에 기인한 것일 터. 샴페인에 대한 궁금증과 더불어 내게 가장 훌륭한 술친구는 누구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자리를 오래 하고 싶었던 술친구가 있었으며, 함께하기 벅차 혼자 술을 마시게끔 한 친구도 있었고, 함께 시원한 술 한잔을 나누며 평생을 함께하고 싶었던 사람도 기억이 났다. 그들이 내게 선사한 배려와 연민이 나를 있게 했다는 생각을 되새겨본다. '퐁!'하고 가볍고 세련되게 울려퍼지는 기분좋은 소음은 순간을 환상으로 포장해줄 것이다. 샴페인의 마법을 그려보며, 찰박찰박 작은 잔에 담겨 위험하게 흔들리는 소주를 욕구한다. 망상과 이야기만이 떠나지 않는 술 친구가 되어줄 것임을 모른체 하기엔 너무 닳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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샴페인을 먹어 본 적은 있겠지만 즐기는 술은 아니다. 모든 종류의 술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샴페인은 음, 이라고나 할까. 모든 종류의 음악을 듣지만 클래식은 음, 과도 비슷하지만 모든 종류의 책을 읽지만 처세서는 음, 과는 좀 다른 것 같다. 물론 소설의 제목인 샴페인 친구는 꼭 샴페인과 관련된 친구라고는 할 수 없다. 실은 술친구에 가깝다. 소설의 원제인 Pétronille 는 소설 속에서 나의 술친구인 페트로니유 팡토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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