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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신앙이 불교라고 말할 순 없지만 항상 불교에 관심이 많았고 스님께서 쓴 책을 즐겨 읽는 편이다. 올해초 실연의 상처를 달래고자(?) 한 스님께 가르침을 받았으나 내자신의 게으름 때문인지 스님에 대한 믿음 부족에서인지 여전히 마음은 산란스럽고 갈피를 못잡고 있었다. 불교에 대한 약간의 회의가 들 무렵 이책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고 부족한 내자신에 대해 반성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어느 스님의 충고가 가슴에 뼈저리게 남는다. "사람들은 돈이 들고나는 금전가계부는 잘 챙기지만 복이 들고나는 인생가계부는 소홀히 한다." 그렇다. 미련한 중생인 나 역시 이해관계,금전관계에만 온통 신경을 쓸 뿐이지 정작 내인생의 가계부에는 도통 신경쓰지 못했다. 종교를 단지 복을 빌고 나혼자 편하자고 믿어 왔으니 이미 할말 다 한거 아닌가?
새해가 오면 흔하디 흔한 인사"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너무나 식상하고 뻔한 말을 이제는 좀 바꿔야 하지 않을까? "새해 복 많이 지으세요" 로 말이다.
복이라는 무형의 자산은 그냥 오지 않음을 이책에서 확실히 느끼게 될 거다. 모든 것이 자기가 짓는 업에서 나오는 것을 왜 아직까지 깨닫지 못하고 헤매었을까?
세상살이,인간관계에 찌든 마음의 떼를 깨끗이 씻어줄 책으로 강추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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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륜 스님의 책 <붓다에게 물들다>를 재미있게, 감동적으로 읽은 기억이 있어 이번에 나온 그 두번째 책도 읽게 되었다. 역시 법륜 스님의 단순하면서도 힘이 있는 말씀은 변함이 없었다. 특히 부처의 전생 이야기들은 참으로 흥미로웠다. 옛날 이야기처럼 재미 있으면서도 생각할 거리를 주는 글이었다. 그 중, 한가지를 적어보겠다. 부처가 명상을 하고 있을 때 매로부터 도망치던 비둘기 한 마리가 날아와 살려달라고 한다. 부처가 품 속에 비둘기를 숨겨주자 매가 와서 어서 비둘기를 내놓으라고 한다. 부처는 살생하지 말라고 매에게 이르지만 매는 그 비둘기를 잡아 먹지 않으면 내가 죽는데 그것은 괜찮느냐, 어차피 누군가 하나는 죽을 수밖에 없는 모순에 처해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매는 "꼭 비둘기를 먹어야 하는 건 아니고 그 만큼의 고기로 배를 채우면 된다"고 한다. 그러자 부처는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내어 저울에 올려놓는다. 보기엔 충분히 비둘기와 평형을 이룰 것 같은데 비둘기가 여전히 무거웠다. 다시 엉덩이살을 떼어 저울에 올려보지만 역시 저울은 하나도 기울지 않았다. 급기야는 팔과 다리마저 다 잘라올렸지만 그래도 변함이 없자, 부처는 자신의 온 몸을 저울의 반대쪽에 올려놓는다. 그러자 저울이 평형을 이루었다는 이야기다. 어떤 미물도 생명이라는 무게는 다 같다는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얘기들을 어린아이들과 함께 나누어도 참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한편 한 편의 글이 감칠맛나고, 생각할 거리도 주면서 무겁지 않게 불교의 교리나 사상을 알 수 있어 좋았다. 뿐만 아니라 불교적이면서도 지금의 나에게 주는 교훈들이 고리타분하거나 빤한 교훈이 아니라서 더욱 좋았다. 즉문즉설을 통해 만났던 법륜 스님의 날카롭고 명쾌한 해법들이 이 안에도 곳곳에 숨어 있어 불자가 아니지만 읽기에 편안하고 길찾기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 가을에 붓다에게 물들어 보는 것, 단풍 놀이 이상으로 좋지 않을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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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리석음을 깨쳐주는 부처님의 이야기들... 재미난다. 책에 그려진 부처님 얼굴이 영국박물관에 보관된 부처님 40대에 가장 근접한 얼굴모습이라고 하던데, 환희롭고 경건해진다. 근데, 정말 잘 생기셨다. ㅎㅎ
어리석음을 깨우쳐 주시는 분, 진작에 부처님을 알았다면 어리석음으로 내가 겪은 수많은 괴로움, 고통 당하지 않아도 됐을텐데, 붓다에게 물들다를 읽고, 다시금 그분의 지혜를 배운다. 감사감사!~~
많은 사람들이 널리널리 읽고, 지혜를 배웠으면 좋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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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독자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아 온 정토회 법륜 스님의《붓다, 나를 흔들다》에 이어, 붓다를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두 번째 책이다. 법륜 스님은 이번 책에서도 특유의 위트와 구수한 입담, 정곡을 찌르는 어법으로,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그 가르침에 물들어버린 사람들의 이야기를 마치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처럼 생생하게 들려준다. 2,500여 년 전 경전 속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의 내 삶을 변화시키고 내 삶을 통째로 물들여버리는 살아있는 이야기가 이 책 속에서 흥미진진하게 전개되고 있다.
보석을 도둑맞고 쫓아가다가 붓다를 만나 진짜로 잃어버린 것은 보석이 아니라 자기 자신임을 깨달아 그 자리에서 제자가 되기로 결심한 귀족의 자제들, 아이를 잃고 헤매던 중 아무도 죽은 적 없는 집에 가서 겨자씨를 가져오라는 붓다의 말씀을 듣고 온 동네를 다니다가 사람이 죽지 않은 집이 없음을 알고 단박에 삶과 죽음의 진리를 깨우친 여인, 당대의 성인으로 추앙받으며 스스로 ‘안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오만함에 빠져 있었지만 붓다의 가르침을 받고 ‘안다’는 생각이 오히려 진리의 길을 방해한다는 것을 깨닫고 붓다의 제자가 된 가섭 형제들, 자신의 값비싼 재물보다는 가난한 여인의 등불 하나가 보시의 공덕이 더 큼을 깨우친 프라세나짓 왕 등 신분이나 성별에 상관없이 붓다를 만나 그에게 감화되어 버린 수많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이 책에 가득하다.
법륜 스님은 “세상에는 네 종류의 사람이 있다. 첫째, 환경에 물드는 사람, 둘째, 환경에 물들지 않기 위해 그 환경을 멀리하는 사람, 셋째, 그 환경 안에 머물면서도 거기에 물들지 않는 사람, 넷째, 환경 안에 있으면서 그 환경 자체를 물들여버리는 사람. 보통의 사람들이 환경에 물드는 사람이라면, 붓다는 그 환경을 물들여버리는 사람이다”라고 말한다.
불법을 깨친 뒤 붓다는 자신에게 좋은 환경인지 아닌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을 진리의 길로 이끌었다. 심지어는 먹으면 죽게 되리란 것을 알면서도 춘다가 바친 공양을 물리치지 않고 받기까지 했다. 그러면서도 춘다의 공양을 찬양하고 그를 비방하던 사람들까지 감화시켰다. 그런 붓다의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그 향기에 취하고 그 말씀에 물들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어렵다고만 생각했던 깨달음, 정말 이렇게 쉬운 것이었나요?” 그러나 법륜 스님은 이 책에서 붓다가 어떻게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진리로 이끌었는지 이야기하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그보다는 붓다와 대면한 사람들이 어떻게 붓다의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고 그것으로 자기 삶을 변화시켰는지에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법륜 스님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쥐가 쥐약을 먹고 괴로워 몸부림치면서 생각합니다. 첫째는, ‘내가 하느님을 안 믿었더니 하느님이 나를 벌을 주는구나.’ 둘째는, ‘내가 사주팔자를 잘못 타고났구나.’ 셋째는,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과보를 받는구나.’ 넷째는, ‘그것이 쥐약인 줄 몰랐구나.’ 어느 쪽이 진실입니까? 전생에 죄가 많아서 쥐약을 먹었나요? 하느님한테 벌 받아서 쥐약을 먹었나요?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나빠서 쥐약을 먹었나요? 쥐약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먹은 거지요. 무지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고苦의 근원은 무지입니다.”
붓다를 찾았다가 붓다에게 물들어버린 사람들은 하나같이 고통 속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붓다의 말씀을 듣고 자신들의 고통이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이라는 탐진치 삼독에 있음을 깨닫고 붓다의 길, 진리의 길을 따라 살기로 스스로 발원한 사람들이다. 더 이상 자신의 삶을 고통 속에 방치하지 않기로 마음을 내고 용기를 내었기에 그들은 자신들을 변화시킬 수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깨달음에 이를 수 있었다.
삶의 주인자리를 욕심과 분노와 어리석음에 내어주고 그것들에 꺼들리며 사는 동안은 삶은 고통뿐이었다. 그들은 인생과 우주의 거창한 진리를 찾아서라기보다는 그러한 고통을 하소연하고 벗어나기 위해 붓다를 찾아왔다. 붓다가 가르친 것은 고통의 원인도 자신 안에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열쇠도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이었다. 슬픔에서 벗어나는 법, 고통에서 벗어나는 법, 집착에서 놓여나는 법,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헛된 것에 의지하지 않는 법, 분노를 내려놓는 법, 깨달음에 이르는 법, 남을 도와주는 법, 타인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지 않는 법, 나아가 윤회의 고리를 끊는 법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었다.
법륜 스님이 들려주는 붓다의 가르침은 이렇게 아주 쉽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전하는 법륜 스님의 표현 방식도 참 쉽고 재미있다. 우리는 흔히 진리란 참 어렵고 복잡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깨우침이 깊은 사람일수록 그 가르침은 간단하고 쉽다. 너무나 쉬워서 좀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것이 이 책이 연륜이나 지식, 직위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쉽게 다가설 수 있는 이유일 것이다.
당신의 인생을 물들인 사람이 있나요?
나는 지금 내 인생의 가장 큰 갈림길에서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이 있다. 대학 1학년때 동아리선배~ 그는 온전히 나 만을 아는 이기적인 인간을 남을 생각하고 세상에 대해 폭넓은 안목을 갖게 해준 스승같은 존재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대학다닐때 그런 선배 한 명 쯤 있겠지만, 나에게도 그저 그런 선배중의 한 명이라고 할 수 있다. 뭐 그리 특별하게 사연을 소개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의 나를 만든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때 그 선배와 나는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다. 그래서 그 선배를 원망하기도 했지만 내 인생의 한가운데서 나를 부정하는 그런 원망은 아니었다. 단지 왜 '당신은 그 길을 가지 않는가?'하는 푸념같은 원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그 모양은 다를지라도 같은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것은 무엇을 하고 사느냐 하는 문제가 아니라 어떻게 살고 있는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붓다가 제자들에게 말하기를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공양은 두 가지다. 하나는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고, 다른 하나는 붓다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라고 한다. 붓다가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올린 공양은 누구나 올리고 싶어하고, 그러한 영광을 얻기를 원하지만 붓다가 마지막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 즉 그 공양을 끝으로 열반에 들게 된다면 세상 사람들의 원망을 고스란히 받아야 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가장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런 춘다의 마지막 공양에 대해 제자들과 사람들이 원망할때 붓다는 춘다를 가장 위대한 공양을 올린 사람으로 평가해서 그 원망을 한 순간에 사라지게 만든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박힐때도 "주여, 저들을 용서하소서. 다만 저들은 저들이 지은 죄를 모를뿐입니다"라고 한 것과 같은 내용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붓다와 예수는 성인으로 존경받는것이 아닌가 한다.
<붓다에게 물들다> 이 가을 세상이 물들때, 우리들의 인생을 송두리째 물들게 하는 스승을 만난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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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붓다를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부제로, 2005년 출간된 '붓다, 나를 흔들다'의 시리즈 책으로 위 부제에서 알 수 있듯, 경전에 기록된 붓다와 관련한 에피소드 몇 가지를 쉽게 풀어 설명해주는 책이다.
아직, '붓다, 나를 흔들다'는 읽지 못 했다. 이 책을 읽으며, 중간중간 우리는 상상도 못 할 엄청난 성인의 삶의 태도를 보고 울컥울컥 눈물이 올라오는 것을 겨우 참았다. 그러고 보니 그냥 울면 되는데 왜 참았는지는 나도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도 그렇게 울컥 올라와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데, 성인의 삶이란 정말... 너무나 큰 울림을 주는 것 같다. 몇 가지 인상적인 부분을 이곳에 옮긴다. -------------------------------- 부처님이 살아계시던 때에는 부처님의 법문을 게송으로 만들어 기억했습니다. 게송으로 만들어놓으면 언제든 기억해서 복습할 수가 있지요. 문자로 기록하거나 소리를 녹음해 둘 수 없었으니 기억에 의존하는 수밖에요. 그래서 지금도 남방 불교에서는 경전을 모두 암송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부처님의 말씀인 경, 부처님의 실천 지침인 율, 그리고 경율에 대한 고승들의 해석이나 요약서인 논, 이것을 합해서 삼장이라 합니다. 이 삼장을 다 암송하는 사람을 삼장법사라고 하지요. 문자가 없으면 인간의 기억력은 비상해집니다. 그만큼 훈련을 하게 되니까요. -------------------------------- 자! 이 글을 읽음으로써 우리 손오공과 함께한 삼장법사가 왜 삼장법사인지 깨달은 사람 많을 것이다. 사람은 배워야 한다. 너무나 재미있다. 한마디로 손오공을 손바닥 아래 다루신 삼장법사님은 어리숙해 보여도 삼장을 다 암송하는 엄청난 내공의 스님이었던 것이다. 그러니 손오공을 손바닥 아래 다뤘겠지.
-------------------------------- 쥐가 쥐약을 먹고 괴로워 몸부림치면서 생각합니다. '내가 왜 쥐약을 먹게 되었을까?' 첫째는, '내가 하느님을 안 믿었더니 하느님이 나를 벌하는구나.' 둘째는, '내가 사주팔자를 잘못 타고났구나.' 셋째는, '내가 전생에 죄를 많이 지어서 과보를 받는구나.' 넷째는, '그것이 쥐약인 줄 몰랐구나.' 어느 쪽이 진실입니까? 전생에 죄가 많아서 쥐가 쥐약을 먹었나요? 하느님한테 벌 받아서 쥐약을 먹었나요? 태어나는 생년월일시가 나빠서 쥐약을 먹었나요? 아닙니다. 쥐약인 줄을 몰랐기 때문에 먹은 거지요. 무지했기 때문이에요. 모든 고의 근원은 무지입니다. 한 부부가 갈등을 겪다가 도저히 같이 못 살겠다는 상황에 이르렀어요. 왜 그럴까요? 전생에 철천지원수라서? 궁합이 맞지 않아서? 신의 노여움을 사서? 아니에요. 자기 생각에 빠져서, 어리석어서 그런 겁니다. 사주팔자가 나빠서 그렇거나 전생 때문에 그렇거나 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런 거라면 자기가 어떻게 할 수 없겠지요. 그러나 어리석어서 그런 것이라면 깨치면 돼요. 그래서 수행은 사주팔자를 고치는 것이고, 전생을 좋게 바꾸는 것이고, 신의 축복을 받는 길로 나아가는 거예요. -------------------------------- -------------------------------- 우리는 악한 인연을 지어놓고 그 과보는 받기 싫어합니다. 또 선한 인연은 짓지 않고 그 과보는 받으려고 하지요. 복을 비는 기복 불교가 잘못됐다고 하는 것은 복을 받으려고 하기 때문에 잘못이라는 뜻이 아니에요. 복을 비는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복을 빌고 복에 매달리는 것은 인과를 부정하는 거예요. 복을 받을 인연은 짓지 않고 복만 받겠다고 하니까 인과법을 부정하는 거 아니겠어요? 또 나쁜 인연을 지었으면 당연히 과보가 있는데 그 과보를 받지 않게 해달라고 비니까 이 또한 인과법을 부정하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자가 부처님께 복을 비는 행위는 스스로 인과법을 부정하는 행위가 되기 쉽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인과법을 믿는 불자라면 복을 빌기 전에 복을 지어야 합니다. 이것이 불자가 가야 할 길이에요. 또 나쁜 인연을 지었을 때에는 그것을 피하려 하지 말고 그 과보를 기꺼이 받을 태도를 취해야 합니다. 이것이 불자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어리석은 범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농사꾼으로 비유한다면 가을에 추수를 하려면 봄에 밭을 갈고 씨를 뿌려야 하고, 여름에 김을 매고 거름을 주어야 하는데, 어리석은 농부는 봄에 밭도 갈지 않고 씨도 뿌리지 않습니다. 왜 이 꽃 피고 따뜻한 봄날에 따분하게 밭이나 갈고 씨를 뿌리며 사느냐, 벚꽃놀이 가고 들놀이 가자고 합니다. 여름에는 또 어떻습니까? 가만히 있어도 더운데 일하면 얼마나 무더우냐, 그러면서 김매고 거름 주는 일을 하지 않습니다. 그래 놓고는 가을 들녘에 나가서 다른 집 수확물을 보고 부러워합니다. 왜 저 사람들은 저런 복을 받느냐, 왜 나만 복이 없느냐, 왜 우리 집 논과 밭에만 아무런 곡식이 없느냐, 이렇게 한탄하는 것과 같다는 겁니다. 그러니 현명한 사람은 봄이 되면 꽃놀이 가고 싶지만 가을을 생각해서 밭 갈고 씨 뿌리고, 여름에는 덥지만 김매고 거름을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 가을에 수확할 것이 있습니다. 이게 바로 지은 인연의 과보라는 거예요. 그런데 이 정도만 해서는 수행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수행자인 보살은 인연을 짓고 과보를 바라지 않습니다. 봄에 밭 갈고 씨 뿌리고 여름에 김매고 거름 주고 가을에 수확했을 때 누군가 와서 도와주시오 하면 그냥 주어버릴 뿐 그 과보를 자기가 차지하지 않아요. 그러면 세상 사람들이 볼 때는 바보 같은 사람이지요. 그 수확을 자기가 갖지 않을 바엔 무엇 때문에 그렇게 열심히 일하느냐는 거예요. 그런데 보살은 이렇게 생각합니다. '봄에 밭 갈고 씨 뿌리는 것이 꽃놀이하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여름에 김매고 거름 주는 것이 그늘 밑에서 노는 것보다 더 재미있다. 그렇게 땀 한번 쫙 흘리고 나서 목욕을 하면 훨씬 더 시원하다.' 그러면서 농사일 그 자체를 즐기는 겁니다. 봄은 봄대로 즐기고 여름은 여름대로 즐겼기 때문에 가을에 수확한 것은 이미 즐기고 남은 찌꺼기라고 보는 거예요. 그것을 결과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쓰고 남은 찌꺼기라고 보는 겁니다. 그래서 그것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기꺼이 주어버리죠. 과보에 집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금강경>에서는 '불수불탐不受不貪'이라고 합니다. 보살은 복을 받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는다는 거예요. 복을 짓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복을 짓되 복을 탐하지 않기 때문에 보살은 복을 받지 않는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중생을 구제하지만 중생을 구제했다는 생각도 없다는 것과 일치하는 것이지요. 자기가 지은 인연의 과보를 자기가 갖지 않고 세상 사람에게 나누어주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향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어떤 행사를 하든지 좋게 지은 인연 과보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만약에 조금의 공덕이라도 있다면 이 공덕을 일체 중생에게 회향합니다. 살아있는 뭇 생명들에게 복이 되게 하고, 죽은 생명들에게는 천상에 태어나거나 극락 세계로 왕생하도록 축원을 하지요. 이것이 바로 불교의 가르침입니다. 여러분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으면 "아, 중생을 위해서 보시를 해서 좋다", 여러분이 사회적 지위가 있으면 "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불법을 펴는 데 이것이 좋은 지위가 되는구나", 또 여러분이 세상에서 인기가 있으면 "아, 이 불법을 전하는 데 아주 유리한 조건이 되는구나", 이렇게 자신이 가진 것을 중생을 이롭게 하는 데 사용합니다. 범부중생은 재물이 없는 것을 두려워하고 소승 수행자는 재물이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지위 있는 것을 두려워하고 인기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보살은 재물이 없어도 좋고 있어도 좋습니다. 재물이 없으면 수행하기 좋고 재물이 있으면 베풀기 좋고, 지위가 낮으면 수행하기 좋고 지위가 높으면 중생을 이롭게 하기가 좋다고 생각합니다. 무엇이 있든지 없든지 상관할 바가 아닙니다. 모든 것들을 다 유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경지를 보살의 경지다, 이렇게 말합니다. -------------------------------- -------------------------------- 불교가 앉은뱅이 종교가 아니라는 것은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설법제일로 알려진 부루나 존자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의 법을 듣고 이해하고 체험하고 나서는 번뇌가 사라지고 마음이 고요해져서 숲 속에서 홀로 정진하는 것을 즐겼습니다. 아무도 없는 빈집이나 나무 아래에 앉아 자세를 바르게 하고 호흡과 느낌을 관찰하곤 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이 세상에 생겨난 것은 모두 사라진다는 것,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 가운데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것을 깊이 관하면서 마음은 고요하고 지혜는 빛나게 되었어요. 그런 수행 생활이 어찌나 기쁜지 부루나 존자는 기원정사로 부처님을 찾아와 자신의 기쁨을 노래했습니다. 부처님께서 그 노래를 들으시고 "착하고 착하구나, 부루나 존자여" 하고 부루나를 칭찬했어요. 그러자 부루나 존자가 부처님께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제가 얻은 이 기쁨을 저 혼자만 간직할 수 없습니다. 이 법을 많은 사람들에게 전하여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서방의 수로나 국 사람들은 아직 부처님의 법을 알지 못합니다. 그곳에 가서 법을 전하여 그들을 깨우치겠습니다." 부처님께서 듣고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장하다, 부루나 존자여. 이 좋은 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다. 그러나 그곳 사람들은 그대를 환영하거나 즐거이 법문을 듣고 이해하려고 들지 않을 것이다. 만약 그곳 사람들이 그대를 욕하고 비난하고 외면한다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수로나 국 사람들은 매우 현명합니다. 설령 그들이 저를 비난하고 욕설하고 외면한다 하더라도 돌을 던지거나 몽둥이로 때리거나 하면서 내쫓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루나 존자여, 나는 그들이 매우 거칠고 사납다고 들었다. 그들은 그대를 돌팔매질하고 몽둥이로 때리며 내쫓을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수로나 국 사람들은 매우 현명합니다. 설령 그들이 돌멩이를 던지고 몽둥이로 때리며 저를 내쫓을지언정 죽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부루나 존자여, 수로나 국 사람들은 매우 사납고 거칠다고 들었다. 그들은 법을 전하는 그대를 칼로 쳐서 죽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어덯게 하겠느냐?" "부처님이시여, 태어난 것은 모두 죽게 마련입니다. 이 몸은 무상한 것입니다. 그들이 자비심으로 방편을 써서 이 몸이 무상한 줄 깨우쳐준다면 저는 기꺼이 열반에 들겠습니다." 이렇게 말하자 부처님께서, "장하다, 부루나여. 그와 같은 마음을 갖고 전법을 한다면 능히 교화되지 않을 사람이 없고, 능히 뛰어넘지 못할 장애가 없을 것이다." 하고 칭찬을 했습니다. 이에 부루나 존자는 기뻐하면서 하직 인사를 하고 멀리 수로나 국으로 홀로 가 수많은 사람들을 교화하다가 그곳에서 열반에 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 설법제일의 제자가 되었어요. ............... 전교에 굉장히 적극적인 종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교 활동을 통해 세력을 얻고 이득을 얻으려 한다거나 전교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지옥에 간다고 저주를 한다면 그것은 올바른 전교가 아닙니다. 상대방이 열 번을 거절해도 그를 미워하거나 원망해서는 안 돼요. 법을 받아들이는 것은 그의 자유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전하는 것이지 나를 위해 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외면하거나 실망할 것이 아니라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이것이 전법의 정신입니다. 이 같은 전법 정신을 보인 대표적인 인물이 부루나 존자예요. 부처님은 부루나 존자가 낯선 곳에 가서 법을 전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알고, 어려움에 닥쳤을 때 부루나 존자가 어떤 마음을 낼까 미리 점검을 한 겁니다. 그리고 부루나 존자가 어떤 경우에도 법에 맞게 임할 줄을 알았기 때문에 그를 칭찬하며 전법사로 파견했고, 부루나 존자는 부처님의 가르침대로 전법을 완수한 것입니다. 그러니 법을 전하고자 할 때는 이런 부루나 존자의 정신과 자세로 이 좋은 법을 주위에 널리 전하시기 바랍니다. --------------------------------
마지막으로 내가 가장 울컥했던 부분을 옮긴다. -------------------------------- 부처님께서 열반에 드시기 전 마지막 여행에 올라 파바 마을에 이르렀을 때입니다. 부처님께서 이 마을의 망고 동산에 머무셨는데 이 망고 숲은 대장장이의 아들 춘다의 것이었어요. 대장장이는 인도에서 천민 계급입니다. 춘다는 자기 망고 숲에 부처님께서 와 계신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숲으로 달려와 인사를 올리고 법을 청해 들었습니다.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춘다는 무척 감동했어요. 기쁨에 가득 차서 내일 아침 자기가 공양을 대접하겠다고 했고, 부처님께서는 침묵으로 승낙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난다 존자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춘다는 공양을 올릴 만한 형편이 못 되지 않습니까?" 하고 여쭙니다. 그해는 극심한 가뭄이 들어서 탁발 나간 스님들이 공양을 얻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부처님의 마지막 한 해의 삶을 기록한 <열반경>에 보면, 부처님의 마지막 여행 때 누구의 공양에 초대받았다는 기록이 거의 없습니다. 암라빨리의 공양에 초대받은 이후로 기록이 없어요. 부처님 한 분만 초대하는 것이 아니고 승가 대중 전체의 공양을 책임져야 하는데 가뭄 때문에 자기들 먹을 것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들 모두에게 공양을 올리기는 힘들었을 겁니다. 그런데 하물며 가난한 대장장이 아들 춘다가 어떻게 공양을 올릴 수 있겠어요? 하지만 부처님께서는 "아난다여, 걱정하지 마라. 춘다는 능히 공양을 준비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튿날 아침, 춘다가 왔어요. "부처님, 공양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 때를 아시옵소서." 부처님과 대중들이 춘다의 집에 갔을 때 춘다는 여러 종류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대중은 춘다가 주는 공양을 받았습니다. 그때 춘다가 특별히 준비한 한 가지 음식을 부처님의 발우에 넣었어요. "춘다야, 이 음식이 무엇인가?" "네. 스카라 맛다바입니다." "춘다야, 이 음식은 누구도 소화할 수가 없다. 그러니 다른 비구들에게는 주지 말아라. 이 음식은 땅을 파고 묻어라." 춘다는 말씀대로 다른 사람들에게는 주지 않았고 그 음식을 땅에 묻었습니다. 식사가 끝나고 부처님께서는 춘다를 위하여 아주 좋은 법문을 해주셨습니다. 그런데 부처님께 아주 심한 복통이 일어났어요. 법문을 마치자마자 "아난다여, 속히 가자" 하면서 서둘러 자리를 떠났습니다. 부처님께서는 가던 길을 멈추고 결국 설사를 하셨는데 피가 함께 쏟아질 정도로 증상이 아주 심했다고 합니다. 대중들은 "춘다가 올린 음식이 잘못되어 부처님께서 큰 병에 걸리셨다. 그러잖아도 연세가 많으신데다 이번 여름에 크게 편찮으셔서 겨우 몸을 이끌고 다니시는데 식중독까지 얻었으니 춘다는 음식을 올렸지만 아무런 공덕이 없다" 하고 수군댔어요. 춘다는 안절부절못했습니다. 자기 나름대로는 잘한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부처님을 심하게 아프게 했으니 자신의 죄가 너무 큰 것 같아서 고개를 숙인 채 대중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 음식이 뭐였을까요? '스카라'는 돼지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스카라 맛다바'를 돼지고기라고도 하고, 일부에서는 돼지버섯이라고도 합니다. 저도 이 지역을 가봤는데 저를 안내한 사람의 설명에 의하면 뱅갈로에서 토란을 '맛다바'라고 불렀다고 해요. 그 설명을 들으면서 퍼뜩 떠오른 것이 있었어요. 우리나라에서 '개살구'라고 할 때 '개'라는 동물의 이름이 붙은 것은 야생이라는 것을 뜻하지 않을까 하는 거였어요. '돼지감자'라 할 때 '돼지'가 붙는 것도 사료용이라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봤을 때 이 스카라 맛다바도 어떤 야생의 식물 이름이 아닐까, 즉 맛다바가 토란이라면 논둑이나 산에 많은 야생 토란이거나 토란이 아니더라도 야생하는 어떤 식물의 뿌리가 아니었을까 짐작을 해봅니다. 춘다는 더구나 가난했기 때문에 제대로 된 식량이 없었을 것이고, 야생하는 풀이나 뿌리 같은 것을 채취해서 요리를 한 게 아니었을까 싶어요. 만약 그것이 야생 토란이라면 그는 밤새 야생 토란을 채취해서 그것을 잘 요리해 드렸을지도 모르지요. 토란도 독성이 있습니다. 토란을 생으로 갈아서 주스처럼 먹는다면 심한 복통이 일어날 거예요. 늘상 먹어온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에 부처님께서는 다른 비구들에게 주지 말라고 하신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런 생각을 하겠죠? 부처님께서는 거기에 독성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는 얘긴데, 왜 드셨을까? 이것이 바로 공양을 받는 태도입니다. 공양을 받을 때 주든지 주지 않든지, 많이 주든지 적게 주든지, 어떤 종류를 주든지 그것은 주는 사람의 마음입니다. 무엇을 달라고 하거나 무엇은 안 된다거나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그것은 이미 욕망에 사로잡혀 있고 욕구에 치우쳐 있는 태도예요. 수행자는 다만 자기 내면을 응시하며 그 집 앞에 서 있을 뿐입니다. 무엇을 주든 받는 사람은 다만 "고맙습니다"하고 받을 뿐입니다. 내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주십시오"라고 말하면 안 됩니다. 그러나 타인을 위해서는 "저분에게는 무엇이 필요하니 그것을 줬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습니다. 부처님 발우에 이미 스카라 맛다바가 담겨져버렸기 때문에 부처님은 주는 대로 받으신 겁니다. 그러나 다른 대중들에게는 주지 말라고 말씀하신 거죠. 가진 것 하나 없는 춘다가 부처님 법문을 듣고 기뻐서 밤새 노력을 기울여 공양을 준비했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이야기입니까? 그러나 우리가 이렇게 좋은 마음으로 해도 때로는 잘못된 결과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인생사입니다. 그럴 때 부처님께서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신 거예요. 결과가 좋으냐 나쁘냐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얼마 동안 길을 가다가 너무 힘이 들어 쉬었다 갈 것을 청하며, "아난다여, 목이 마르구나. 물을 좀 떠다다오"라고 부탁합니다. 그러자 아난다는 "부처님,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간 뒤라 물이 흐려서 드실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가면 카쿠타 강이 나오니 거기 가서 드십시오." 그런데도 부처님께서는 물을 좀 떠다달라고 하세요. 그러니까 아난다가 똑같은 대답을 합니다. 또 얼마 있으니까 부처님께서 "아난다여, 물을 좀 떠다오. 몹시 목이 마르다"하고 세 번째 요청을 하십니다. 그제서야 아난다가 물을 뜨러 갑니다. 가보니 방금 500대의 수레가 지나갔으니 당연히 흙탕물이어야 하는데 물이 아주 맑은 거예요. 이것을 보면 아난다 존자는 부처님을 오래 시봉했는데도 자기 의견을 고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죠. 자기가 눈으로 본 것만 믿고 부처님 말씀은 믿지 못한 겁니다. 물을 떠오라고 했을 때 "예, 알겠습니다"하고 가서 흙탕물일지언정 받아와서 "이건 못 드실 것 같습니다." 해야 옳은데, 많은 양의 수레가 지나간 뒤이니 물을 먹을 수 없다는 자신의 경험과 판단만으로 고집을 했지요. 우리도 이럴 때가 많습니다. 자기 눈으로 봤거나 들었거나 신문이나 텔레비전에 났다고 하면 진실이라고 확신해 버리는 거죠. 그런 것 가운데에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 많습니다. 어떤 것도 함부로 확신하고 주장해서는 안 돼요. 아무튼 이런 일이 일어난 뒤, 부처님께서는 다시 몸을 추스르고 길을 걸어 카쿠타 강에 이르렀습니다. 이 강은 예나 지금이나 물이 아주 맑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카쿠타의 맑은 물을 드시고 목욕을 하고 나서 강변 망고 나무 아래에 자리를 깔고 누우셨습니다. 그리고 아난다를 부르셨어요. "아난다여, 대중의 여론이 어떤가?" "예. 대중들이 춘다를 비난하고 있습니다." "춘다를 앞으로 오라고 하라." 대중들이 둘러앉은 자리에서 춘다를 데려와 앞에 앉혔습니다. 춘다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죄인처럼 고개를 숙이고 있었어요.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난다여, 우리가 타인에게 공양을 올릴 때 많은 공덕을 짓게 된다. 그 가운데서도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의 공덕이 제일 뛰어나다. 그런데 아난다여, 부처님께 올린 공양 가운데서도 최고로 훌륭한 공덕의 공양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든 공양이다."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기 전에 마지막으로 드신 공양은 수자타의 공양입니다. 부처님께서 6년간 고행하고 몸이 쇠약해져 네란자라 강가에 쓰러져 있을 때 우유를 짜던 소녀 수자타가 우유와 쌀가루로 미음 같은 것을 쑤어서 드렸어요. 부처님께서 그것을 드시고 살아나셨기에 우리는 수자타의 공양을 최고의 공덕 있는 공양으로 칩니다. "그런데 아난다여, 그와 똑같은 공덕의 공양이 또 있다. 그것은 여래가 열반에 들기 직전에 올린 공양이다." 부처님이 깨달음을 얻기 직전에 드신 공양과 부처님이 열반에 들기 직전에 드신 마지막 공양이 최고의 공덕이 있는 공양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니 춘다의 공양이 갑자기 최고의 공양이 되어버렸어요. 세상의 관점에서는 "독살했다"고 평할 수 있는 일인데 완전히 다른 평가를 하신 겁니다. 춘다는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사람으로 기록에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춘다가 부처님께 마지막으로 공양을 올린 그 자리에 기념탑이 세워져 있는데, 이곳을 지나면서 우리는 춘다를 사랑해서 자비심을 베푸셨던 부처님을 떠올리게 됩니다. 음식에 독성이 있는 줄 알고 먹지 않았다든지, 독이 든 음식을 먹었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든지 하는 다른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부처님의 이 일화와 같은 것은 들은 적이 없습니다. 독이 들었음을 알고도 먹고, 독이 든 음식을 공양한 사실 때문에 괴로워할 사람을 위로할 뿐 아니라 그 사람을 비난하는 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부정한 마음까지 풀어주는 이런 일이야말로 기적 중의 기적이 아닐까요? 대자대비심이 무엇인지를 몸소 보여준 이런 일이야말로 우리에게는 기적에 다름 아닐 것입니다. --------------------------------
--------------------------------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남에게 은혜를 입을 때가 있죠. 그러면 우리는 그 은혜를 갚으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갚을 때 어떻게 갚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사람에게 가장 도움이 되게 갚아야죠. 그런데 우리는 은혜를 갚는다고 하면서도 자기 식대로 갚을 때가 있습니다.
제가 한때 어떤 절에서 부목 생활을 한 적이 있었어요. 저로서는 한 철을 부목으로 살면서, 불 때고 장작 패고 일하면서 살아보겠다, 그리고 돈 한푼 없이, 또 세 끼 밥 외에는 간식도 먹지 않고 검소하게, 주어진 대로 살아보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부목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절에 성지 순례를 하러 온 많은 분들이 제가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장작을 패고 있으면 "거사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이러면서 저에게 빵이나 탄산음료, 요구르트 같은 것을 비닐봉지에 넣어 가져다줍니다. 저는 그런 것을 안 먹기로 결심하고 수행하는데 먹으라고 가져다주는 거예요. 또 어떤 분들은 돈을 호주머니에 넣어줍니다. 절 안내를 해줬거나 그분들에게 필요한 것을 도와줬을 때 고마우니까 그 마음을 나름대로 표시하고 싶고, 또 고생하는 제가 안타까워 보여서 그런 거겠지요. 그러나 제가 세워놓은 원이 있고, 그것을 지키면서 공부하고 싶은데 그분들의 행동은 제 공부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겁니다. 고마움을 표현하는 게 오히려 제 공부를 방해한 셈이 된 거죠. 그때 저는 이런 것을 깨달았어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 좋은 의도마저도 항상 자기 중심이구나 하는 것입니다. 저 역시 내가 남을 위해 일한다, 봉사한다 할 때 나에게 속고 있었구나 하는 것을 깨달았어요. 사실은 자신의 욕구, 자신의 견해, 자신의 욕망...... 이런 것에 따라 행했던 거죠. 그나마 자신이 행하는 것이 자기 욕망에 따라 행하는 것임을 아는 사람은 현명한 사람이에요. 그 사실을 모른 채 내가 너를 위해, 세상을 위해 이렇게 하고 있다는 착각을 하고 있으면, 나중에 그것을 알아주지 않을 경우 실망하거나 배신당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남을 위해서, 세상을 위해서 일한다는 생각을 버리지 않는 한, 이 생각 때문에 실망하고, 실망하기 때문에 괴롭게 됩니다. --------------------------------
-------------------------------- 차를 몰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나서 사람이 다쳤어요. 그럴 때 다친 사람 걱정합니까, 자기 걱정합니까. 그때도 자기 걱정합니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저 사람을 어느 병원으로 데리고 가야 바가지를 안 쓰나 이렇게 자기 걱정을 합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나는 내 걱정밖에 할 줄 모르는 인간이다'라는 사실을 정확하게 모른다는 데 있어요. 우리가 그런 존재라는 걸 알면 다른 사람이 똑같이 행동할 때 욕을 하지 않겠죠. 저놈은 자기밖에 모른다, 이런 소리를 하지 않겠지요. 이게 바로 중생입니다. 그런데 자기 걱정밖에 할 줄 모르면서 마치 자기가 남을 생각하고 걱정하고 배려하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런데 당신은 왜 그 모양이냐면서 원망하고 미워합니다. -------------------------------- -------------------------------- 배고픈 사람은 먼저 먹어야 합니다. 목마른 자에게는 물부터 주고, 병든 자는 치료부터 해줘야 합니다. 불교 믿으면 물 줄게, 불교 믿으면 치료해 줄게, 이렇게 하면 안 됩니다. 그래서 정토회에서는 인도나 북한, 아프가니스탄, 필리핀등지에 가서 먹이고 치료해 주고 학교 짓는 일을 하면서도 불교를 믿으라고 하지 않고, 아무런 조건 없이 지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와서 물어요. "왜 포교는 하지 않고 이런 일만 합니까?" 그것은 그들이 지금 법을 들을 귀가 준비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그렇게 10년쯤 하니까 이제 저에게 법문을 해달라는 요청이 들어옵니다. 지금까지는 밥 달라, 옷 달라 하는 요청뿐이었지요. 10년이 지나니까 불교가 뭔데 저런 일을 할까 궁금증을 갖기 시작한 거예요. 다시 말해 10년이 지나서야 겨우 법을 들을 마음을 내기 시작한 겁니다. 아무리 좋은 것도 받는 쪽이 필요로 해야 줄 수 있습니다. -------------------------------- 학교 다닐 때 주변에 물어보면, 아 우리학교는 크리스찬 학교라 예배 수업이 있어.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걸 참 흔히 듣곤 했는데.... 군대에서도 이등병 때 먹을 게 없고 힘들기 때문에 모두 종교행사에 가고, 그렇게 종교행사를 가면 천주교, 개신교, 불교 가리지 않고 달달한 먹을 것을 줬었다. 아마 우리 조상님들도 교육이든 의료든, 먹을 것이든 그렇게 도움받으면서 서양 종교를 접했겠지. 그것은 어려운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하고 싶은 말을 전할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렇게 하는 게 나쁘다는 게 아니다. 본인이 생각하는 옳은 말씀을 전하며 도와주기까지 하니 당연히 전혀 돕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은 선한 행동이다. 하지만 도우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 하지 않고, 어떠한 댓가도 없이 이렇게 한다는 것이 정말 쉽지 않은 일이라 생각한다. 참으로 존경스럽다.
아래는 목차 -------------------- 책머리에/ 붓다처럼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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