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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도는 연애의 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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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문을 반쯤 열어 두고 가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일 뿐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들이었다. 길갓집이라 밤에는 문을 열어 둘 수 없었다. 낮 동안 문을 열 수 있는 동안 최대한 바람을 끌어모으며 방의 열기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땀에 젖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밤에는 형광등을 켜 놓기가 두려웠다. 골목을 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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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방에서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문을 반쯤 열어 두고 가끔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는 일 뿐이었다. 여름 방학이었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날들이었다. 길갓집이라 밤에는 문을 열어 둘 수 없었다. 낮 동안 문을 열 수 있는 동안 최대한 바람을 끌어모으며 방의 열기가 가라앉길 기다리는 동안, 땀에 젖은 손가락으로 책장을 넘겼다. 밤에는 형광등을 켜 놓기가 두려웠다. 골목을 걸어 다니는 사람들 중 누군가는 창문 너머로 방 안을 엿보곤 했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잠금쇠 없는 창문의 반이 열려 있기도 했다. 문 쪽으로 앉아서 책을 읽고 있으면 낯선 사내들이 들어와 한 쪽 팔만으로 물건을 들이밀었다. 안 사요. 말해도 쉽게 가지 않고 방 쪽을 흘겨보았다.

  그해 여름 방학 바람을 기다리며 읽은 책 중 지금도 가슴이 뜨거워지는 책이 있다. 이청준 선생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서 방학 숙제도 하지 않았지만 다른 아이들처럼 가족끼리 놀러 가지도 않았지만 어쩐지 쓸쓸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시간이었다. 어떤 책들과의 만남은 운명이라고 거창하게 부르고 싶다. 한 권의 책이 당신 인생을 바꾼다. 실감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내 경우 책을 읽으면서 아무도 아닌 나의 존재를 견딜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이청준 선생을 만나 수업을 듣고 먼 자리에 앉아 밥을 먹고 글과 다르게 어눌한 선생을 말을 더 잘 들고 싶어서 귀를 쫑긋 세우고 이게 말이 되는 일인지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한 시간들을 보냈다. 가진 책에 사인을 받고 힘이 돼 주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책에 써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최인호와 조해일의 단편들을 추천받아 읽기도 했다. 

  잘 넘어가지 않는 문장들이 있었다. 잘 넘어가지 않아 천천히 읽게 되는 문장들이었다. 땀을 흘리며 책을 읽었다.  『당신들의 천국』을 읽고 남도 연작을 읽고 중편들을 찾아 읽었다. 이야기를 만들어 내야 하는 이유를 담고 있는 소설들이었다. 한 편의 소설을 읽고 나면 잘 짜인 소설적 세계란 이런 것이다, 허투루 쓰는 이야기란 없다는 명징한 당위를 담고 있었다. 열림원에서 나온 이청준 문학 전집을 모으면서 이야기꾼의 운명은 자신을 깎아 소리를 내야 하는 소리꾼의 운명과 모든 인간은 떠돌이의 운명을 타고나는 태생적 한계를 실감하곤 했다.

  이 별에서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은 너무도 빨리 다른 별로 이사를 떠난다. 이 별의 자리는 좁고 시간은 신속하게 흐르니까. 

  『사랑을 앓는 철새들』은 이청준 선생이 돌아가시고 문학과 지성사에서 나온 전집의 최신판이다. 1973년 4월 2일부터 12월 2일까지 서울신문에 천경자 화백의 삽화와 함께 연재된 소설을 처음으로 책으로 묶어 냈다. 신문에 연재된 탓일까. 소설은 이청준식 문장에서 한 발 비껴 나 있다. 단문과 대화로 소설이 이루어져 있다. 읽기 어려운 문장의 중첩은 찾아 볼 수 없다. 

  유지연은 호남선 특급 열차에 앉아 옆에 앉은 백기윤과 이야기를 주고받기 시작한다. 어디서 본 듯한 그 사내의 옆모습이 자꾸 신경 쓰여 말을 걸게 만든다. 연애 소설 같은 시작이라니. 이럴 수가. 소설은 쉽고 빠르게 읽힌다. 신문 연재 특성에 맞게 각 장은 다음 편을 기다리게 만드는 궁금함과 초조함을 남겨 둔 채 끝이 난다. 

  해가 지는 이리 역에서 내린 유지연은 백기윤이 가려는 전주로 뒤따라 가고 만다. 단 한 번의 대화나 눈빛으로 사람들은 곧잘 사랑에 빠진다. 연애란 착각이 불러일으키는 사랑의 환각으로 시작된다. 묘한 이야기를 들려준 백기윤의 흔적을 찾아 전주로 간 유지연은 오아시스라는 다방에 자리를 잡는다. 곧 그와 다시 만나면서 이상한 부탁을 받은 유지연은 송정화의 소리 내력을 알게 된다. 

  실상 유지연은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는 산업화와 근대화에 떠 밀려 어디에서도 터를 잡지 못하는 당시 암울한 시대를 사람들의 운명을 대변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송정화를 소리꾼으로서 지켜 주지 못하자 유지연은 다시 길을 떠난다. 시인과 화가들이 득실댄다는 광주로 거처를 옮겨간다.


  "이번엔 내가 좀 설교를 해야겠구먼. 예술이란, 사실은 대상에 대한 자기 욕망의 절제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랍니다. 무슨 말인고 하면 우리들의 욕망이란 아무 곳에서 나 함부로 눈을 뜨게 마련이죠. 하지만 그 욕망대로 대상을 소유해 버린다면 그건 예술이 될 수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자신의 욕망의 절제, 바꾸어 말하면 실제 대상을 가만 놔둔 채 그 욕망을 승화시켜 자기 속에 또 하나의 대상을, 아니 실제 대상보다도 더 완벽한 아름다움의 실체를 창조해 가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이 예술입니다. 하니까 대상에 대한 사랑이 크면 클수록 소유 욕망도 커지고, 그것은 예술가의 자기 절제에 의한 창조력을 자극하는 원동력이 되는 거라고 할 수 있어요."


  광주에서 만난 화가 허철은 여자의 나체를 그린다. 소설에서 유지연은 내내 벗기기의 추궁을 당한다. 알몸을 드러내는 것 외에 자신의 실체를 발가 벗기기를 강요받는다. 자신의 아픔이나 내력을 드러내지 않은 채 떠돌이의 삶을 살아가는 유지연에게 화가 허철은 예술의 욕망이란 결국 자신의 알몸을 타인에게 보일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라 말한다. 예술의 소유는 일어나서는 안되는 일이며 예술가의 사유도 아니라는 것이다. 유지연의 나체를 그리고 그녀가 결국 자신의 내력이나 실체 따위를 보이지 않음으로써 허철은 그녀를 그린 그림들을 태우고 만다. 

  유지연이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삶을 향한 광기를 보이고 삶과 사랑에 심각한 열병을 앓는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름을 나눠 쓰는 한혁민이나 이복동생의 소리를 지켜주고 싶은 백기윤, 예술의 소유에 대한 갈망을 끊임없이 드러내는 허철, 말 무당 나영욱, 이름이 없지만 유지연이 가지고 있는 삶의 굴레를 지적해내고 환기시키는 사내. 그들은 1970년대를 살아가고 지나가야 할 영혼을 시대에 저당 잡힌 빈자들이다.   소설로써 끊임없이 소설 쓰기를 강요받았던 이청준 선생의 글쓰기는 2008년에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이제 이 별에서는 이청준 선생의 소설을 읽을 수 없으리란 철저한 패배감에 휩싸여 있었다. 생전 선생이 책으로 펴내지 않았던 작품이 있을 줄이야, 생각지도 못한 위로와 격려를 받은 기분으로  『사랑을 앓는 철새들』을 읽었다. 그해 여름 소록도의 기막힌 사연을 소설로써 접한 무덥고 무서웠던 여름에서 시간은 게으름 피우지 않고 이곳까지 흘러왔다. 

  연애의 불가능성의 문제를 다룬 『이제, 우리들의 잔을』,  『젊은 날의 이별』,  『사랑을 앓는 철새들』 의 작품의 연속성을 따라기 위한 새로운 여정을 모두 시작해 보아야 할 것이다. 작가는 다른 별로 이주해 갔지만 그의 작품들은 이 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말도 안 되는 오늘을 위로하고 날조될 거짓의 내일을, 더러웠던 어제의 굴레를 벗겨 줄 것이다. 


s*****m 2017.02.13.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