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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멧돼지나 고라니가 애써 가꾸어 놓은 농장을 짓밟고, 농작물을 먹어 치운다 해도 기꺼이 친구로 대할 수 있을까? 만일 넝쿨식물과 관목류가 슬금슬금 경계를 넘어 누군가의 뜰과 삶의 영역을 허락 없이 잠식해 들어온다고 해도 이들을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수용할 수 있을까?
폴란이 꿈꾸었던 정원은 늘 꽃이 만발해 있으며 해충도 없고 잡초도 없는, 자연이 늘 요구에 순응하고 완벽하리만치 편안함을 느끼게 해주는 곳이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당근과 옥수수, 강낭콩은 끊임없이 너구리와 우드척, 사슴, 두더지 들의 공격을 받고, 꽃으로 아름다운 광경을 꿈꿨던 정원은 해충과 온갖 잡초로 고통받는다. 그럼에도 소로의 충실한 제자임을 자처했던 초보 정원사인 저자는 우드척에게 엽총을 쏘거나 살충제로 해충을 박멸하거나, 채소밭 주변에 전기 철조망 따위를 설치하는 것은 지나칠 뿐만 아니라 무책임한 짓이라 생각한다. 야생에서 스스로 자라난 잡초들도 애써 꽃들의 친척으로 대접하려 한다.
하지만 끊임없는 야생동물의 공격과 넝쿨들로 질식해 가는 화초들을 보며 정원으로 쳐들어 오는 이 무뢰한들을 물리치기 위해 결국 전기 담장을 두르고 잡초를 제거하기로 한다. 자연에 배반 당한 처절한 심정으로. 『오랜 정원의 역사 속에서 서로 다른 여러 문화가 출몰했지만, 정원에 담장을 친다는 것은 퍽이나 보편화된 개념이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유명한 저술가이자 환경운동가인 저자에게는 잡초를 제거하는 데에도 그럴듯한 명분이 필요했음이 분명했던 것 같다. 잡초에 대한 수긍할 만한 정의를 내리기 위해 관련 서적과 안내서를 살펴보고 잡초를 제거할 결정적인 약점을 찾아내 정원에서의 잡초 제거를 정당화한다.
『그렇다면 관연 잡초란 무엇일까? 더 나가 잡초를 통해 은근히 내비치고 있는 자연에 대한 생각을 읽어 볼 수 있다. 우리가 '원래 그대로의 자연'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모호하다는 것이다. 현재 야생 상태의 자연은 겨우 몇 백 년 전 유럽인들과 함께 들어온 유럽의 잡초들이 본래의 토종 풀들을 몰아내면서 자신들의 영역을 넓혀 간 오늘의 모습일 수도 있고, 더욱 먼 과거로 확장해 본다면 현재 숲이었던 공간은 공룡이 뛰어놀던 시절엔 대초원이었을 수도, 빙하기에는 빙하에 쓸려 나간 황무지였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잡초의 개념을 인간의 교란에 적응해서 생존해나가는 이쯤에서 저자의 논지를 섣불리 예단할 위험성이 있다. "인간 역시 다른 생명체 속에서 평등한 존재의 하나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주장 같은 결론 말이다. 그러나 저자는 인간이 다른 동물과 똑같이 행동하는 순간부터 지구의 상태는 악화되기 시작할 것이라는 다소 의외의 경고를 한다. 지구상의 모든 동물은 자기 영역의 확장과 종족 번식의 본능에 따라 행동하는데 막강한 창조력과 문명화된 기술을 소유한 인간마저 그러한 본능에 따라 충실히 행동할 때, 나타날 수 있는 비극적인 상황을 우려한 듯하다. 『우리는 이 지구를 경작하는 정원사이면서 지구의 잡초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저자가 하고 싶었던 핵심 이야기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무분별하고 과도한 개발은 피하되 일방적인 자연 숭배주의로 자연을 방치하면 안되며, 상처 받은 자연은 정원을 가꾸듯 인간이 돌봐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자연과 인간의 조화로운 공존이라는 것 말이다.
이 책의 소재는 단순하며 결말은 명료하다. 하지만 이 책을 읽는 독자 입장에서 이것이 전부는 아니다. 미국에서 잔디가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역사, 재래 장미와 교배 장미가 등장하는 장미정원, 두엄 만들기와 나무 심기에 이르기까지 저자가 펼치고 있는 이야기의 진폭은 넓고 전문적 식견은 깊다. 현란한 글 솜씨로 펼치는 지적 파노라마에 잘못 빠져들면 끝도 없이 헤맬 수 있다. 『땅을 경작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고 오직 자신의 몸을 부지런히 움직이고 정성을 다한 마음으로 땅을 일구고, 자연이 주는 혜택에 따라 정직하게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농부들에게 합당히 돌아가야 할 이런 말을 발견하는 것은 정말 기쁜 일이다. 오랜만에 밑줄을 그으며 읽은 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