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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홍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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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에는 주홍글자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백정의 표식이 있었다. 여인의 가슴팍에 달린, 빨간 헝겊위에 수놓인 A글자.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 검은 천 조각을 달고 살아야 하는 신분의 백정 소설과 현실 모두 타인에게서 자신의 쾌락을 찾았다. 타인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세계. 이 검은 표지의 펭귄클래식 주홍글자를 새로 읽어 나가면서 현대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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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유럽에는 주홍글자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백정의 표식이 있었다.

여인의 가슴팍에 달린, 빨간 헝겊위에 수놓인 A글자.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 검은 천 조각을 달고 살아야 하는 신분의 백정

소설과 현실 모두 타인에게서 자신의 쾌락을 찾았다.

타인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세계.

이 검은 표지의 펭귄클래식 주홍글자를 새로 읽어 나가면서 현대인의 삶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여인의 딸 ‘펄’을 통해 용서의 방법과 이해의 관계를 되짚어 본다.



 

g******1 2021.07.22.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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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주홍 글자] 리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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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그의 세가지 사랑       우리가 책장을 덮고나면 이제 우리는 너새니얼 호손에 우리의 정절(우리가 늘상 관습을 향하여 바치던)을 바칠 수 밖에 없다.   이 작품에는 그만큼 당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 관습이었기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또 당해오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낯뜨겁도록 그가 파헤치고 있는 그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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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그의 세가지 사랑

 

 

 

우리가 책장을 덮고나면 이제 우리는 너새니얼 호손에

우리의 정절(우리가 늘상 관습을 향하여 바치던)을 바칠 수 밖에 없다.

 

이 작품에는 그만큼 당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

관습이었기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또 당해오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낯뜨겁도록 그가 파헤치고 있는 그 문제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있다. 민중을 교화시킨다는 목적 아래에 법집행자들과

종교인으로 이루어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폭력과 위협이 첫째이며,

억압받는 사랑의 문제가 그 둘째이며, 여인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이

세번째 문제이다.  

 

그는 우리가 가진 낡은 설교집 앞부분에 찍힌 거무스름한 초상화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런 초상화 중 하나가 지금 그가 하듯 앞으로

나서서 인간의 죄악이나 정욕 혹은 고뇌 따위의 문제에 간섭할

권한이 없듯이, 이 목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었다. p.87

 

그렇다.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서 각자가 다르게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이에 수반하는 죄의식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법과 교리라는 휘장을 두르고 자신들이 그러한 내밀한 문제에

관하여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신과 같이 군림하려고 한다.

본래 권력이 필요한 이유는 힘의 크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에 있다. 일정부분 악랄한 범죄를 관리할지언정 그들이

모든 인간의 사정과 내부의 문제를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죄인을 엄격하게 설정하고 민중에게 이로 위협하기 위하여

잔인하도록 기발한 낙인을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긴 세월동안 그녀는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설교자나

도덕주의자들이 보기에 여자의 나약함과 죄 많은 정열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보편적인 상징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결한 젊은이들은 가슴에서 주홍 글자가 불타고 있는 그녀를,

즉 점잖은 부모의 딸인 그녀를, 장차 한 여인으로 성장할 아기의

엄마인 그녀를, 한때는 순결했던 그녀를, 죄의 상징이자 육체이자

실체로서 바라보라고 교육받을 것이다. p.105  

 

우리 역시 지극히 문명화되었다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은 이처럼 권력자들의 암묵적인 위협 아래에 살고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했다던 것은 어느새 권력자의 힘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주홍 글자>가 쓰여진지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는 한

민중을 향한 권력에의 위협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가 씌여졌던 당시는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가문과 재력을 맞추어 결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시대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떤 연인들은 그들만의 사랑을 꿈꾸었다.

 

헤스터는 보다 밝은 시대가 도래하면, 즉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숙해지게 되면 새로운 진리가 계시되어 남녀의 모든 관계가

서로의 행복이라는 보다 굳건한 토대 위에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그들에게도 심어주었다. p.351  

 

이 점에 있어서는 더 나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사랑을

추구하지 못하게 된 점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상품화 시켜

더 나은 결혼 상대를 찾는데에 급급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자신들의 숭고한 사랑을

위해 많은 희생을 기꺼이 해왔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이나 E.M.포스터의 <모리스>

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사랑도 그려지는데, 그들 역시 호손으로부터

이어받은 숭고한 사랑의 희생정신이 빛을 발한다.

 

어쩌면 사랑을 선택하기엔 자유롭지 못한 그 시대야 말로

진정한 사랑을 더욱 갈구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너무 흔하고 당연한 것이 되는 시대에 와서 그 가치가

조금은 닳아버린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호손의 작품에서 이제 내가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지점과 만난다.

 

사실 모든 여성의 운명에 관해서도 이처럼 암담한 의문이 헤스터의 마음속에 자주 떠올랐다.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헤스터 자신의 개인적 삶에 관한 한, 이미 오래전에 그렇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고 다시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단정해버렸다. 헤스터는 자기 앞길에 놓여 있는 임무가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임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사회조직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새로 새워야만 한다. 그다음으로는 남성의 본성 자체를, 혹은 습관이 오랫동안 쌓여서 본성처럼

되어버린 것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래야만 여성도 공평하고 적절한 지위를

비슷하게나마 가질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이 모든 저해 요소가 다 해결된다 하더라도 여성 당사자가

더 크게 바뀌지 않고는 그러한 예비적인 개혁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감성이 우세를 보이면 그런 문제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p.217~218

 

호손의 인류애가 빛나는 지점이다. 흔히 예술가의 인간애라고 하면 그것은 어쩐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는 19세기라는 현실에서 여성의 인권까지도 생각한 선구자였다.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인권에 관하여 생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대인은, 특히 미술사에서 생각하자면 여자의 나체만을 그리던 시대에서 겨우 벗어나

지금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인권의 문제는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미혼모가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손가락질 받고, 직장에서 임신한 여성이 일에 방해되는

존재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 사회에서 여인들의 가슴에 주홍색 낙인을 찍는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가엾은 모성으로 어린 생명을 지키고, 그 치욕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것이다. 여인의 정절이 깨어지는 것은 남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고 순결한 여자란, 여자가 여자를 향하여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개체의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종의 요구이다. 즉, 동물적이란 뜻이다.

 

이 점을 200년 전에 일찌기 간파한 호손의 통찰력이 빛난다. 우리는 동물로 태어났으나

어디까지나 '인간적'이다. 인간으로서의 이 자격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행해온, 권력에 알아서 기는 행위나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만 두어야하는 것임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한번 절실히 느낀다.


t*****e 2011.11.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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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죄란 무엇일까 그리고 진실이란,주홍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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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죄가 먼저일까 진실이 먼저일까? 간음을 한 여인을 처형대에 세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공개재판하듯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가슴에'간음이란 A' 라는 글자를 달고 다니게 한다. 하지만 그 글자는 그녀에게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글자가 되고 만다.왜, 그녀에게만 밖으로 들어난 '죄값' 을 치르게 한 것일까? 분명히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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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고 했다. 아니 죄가 먼저일까 진실이 먼저일까? 간음을 한 여인을 처형대에 세우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녀를 공개재판하듯 한다. 그리고 그녀에게는 가슴에'간음이란 A' 라는 글자를 달고 다니게 한다. 하지만 그 글자는 그녀에게서 영원히 지울 수 없는 글자가 되고 만다.왜, 그녀에게만 밖으로 들어난 '죄값' 을 치르게 한 것일까? 분명히 함께 간음을 한 상대가 있었을 터인데 소설에서는 밝히지 않고 숨겨 놓는다.아니 암시적으로 드러내지만 좀더 파고 들자면 헤스터와 함께 '그남자' 를 찾아 공개재판을 했어야 하는것 아닌가. 그시대엔 여자란 어떤 존재인지 소설은 잘 말해주고 있다.

얼마전 이 소설을 읽기전에 '마녀로 추정되는 미라 발견' 이란 글을 보았다. 마녀라는 존재가,아니 그렇게 생각하는 존재를 그시대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는지 미라는 모든 것을 말해주듯 턱과 머리 윗부분에는 많은 못이 박혀 있었다는 글을 읽었다. 왜 마녀라는 존재가 그렇게 모두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어야 했을까? 아니 여자들이 어떤 행실을 했기에 마녀로 취급이 되었을까? '세일럼의 마녀' 에 대한 글을 읽어보면 마녀로 지칭된 여자들은 남자들이 주관하던 약초나 허브등을 가지고 병이나 의술을 행하였다. 그러니 당연히 집주변에도 허브나 그외 희귀한 식물들을 심어 놓기도 하고 아픈 사람들이나 산파역할을 했던 그녀들이라 늘 그런 사람들이 들끓었을텐데 그런 그녀들을 마녀로 취급하기도 했다는 이야기, 왜 여자라서일까. 부활을 막기 위하여 죽어서까지 못질을 당하고 똑 같은 죄를 저질렀어도 남자는 숨겨지고 여자만 드러나는 그런 세상에서 진정한 죄란 무엇인지 질문하고 있다.

과연 누가 A의 글자를 달아야 하는가?
누가 과연 죄인일까. 아니 A의 글자를 달아야 할 사람은 진정 누구일까? 죄의 씨앗을 낳은 헤스터 그리고 펄이 주홍글자에 주인공 A일까? 아니면 자신이 간음이라는 죄를 범했으면서 종교라는 허울 아래 숨어 있는 나약한 딤즈테일 목사가 진정한 죄인일까? 그도 아니라면 늙어서 철 모르던 어린 그녀를 아내로 맞이한 성불구자인 칠링워스, 늘 그들의 주변에서 복수를 행하거나 꿈 꾸고 있는 늙은 의사가 진정한 죄인일까? 그도 아니라면 헤스터와 펄을 죄인취급하며 구경거리로 내모는 시민들과 독자가 죄인일까? 헤스터는 간음을 하여 죄인으로 몰리지만 그녀는 펄과 오두막집에 떨어져서도 나약하게 주저 앉아 있지 않고 스스로 강해진다. 그리고 자신이 가진 것을 남에게 베풀고 나누며 봉사를 하기도 하고 펄을 천사처럼 키우기도 한다. 간음의 죄값으로 받은 A라는 글자의 의미는 봉사하는 삶을 통해 천사라는 이미지까지 격상이 되지만 자신들의 죄가 드러나지 않았던 남자인 목사는 스스로 자신을 자책하고 나약하게 주저 앉아 자신의 몸과 마음을 모두 병약하게 만든다. 그런가하면 늙은 의사 또한 복수심에 불타 더욱 혐오스럽고 추해진다.

죄란 무엇인가? 털어서 먼지 안나는 사람 없듯이 '죄가 없는 사람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 라는 뭐 이런 성격의 성경귀절도 있는 것을 보면 죄를 짓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헤스터는 죄값으로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으며 살아간다. 힘들어 하는 목사도 곁에서 지켜보고 자신의 전남편이면서 목사밑에서 그를 증오하며 고통에 떨게 하는 의사를 보면서 결코 숨기는 것이 최선책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는 '비상구'를 찾는다. 그것이 모든 것에서 도망이라는 것이라지만 그녀가 취할 수 있는 길이 아니었나 한다. 자신은 죄를 범했지만 자신의 딸인 펄에게는 그 죄가 돌아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온갖 것으로 치장을 하고 빛이 나게 하는 그녀,역시나 그녀는 어머니였던 것이다. 어머니는 무엇보다 강한 존재이다. 하지만 아버지인 목사는 나약함에 스스로 죽어간다. 만약에 처음 헤스터가 공개재판을 받을 때 딤즈테일 목사가 그 죄값을 달게 받겠다고 자신의 진실을 폭로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늙은 의사 칠링워스가 헤스터의 전남편이라고 밝혔더라면 딤즈테일이 그토록 병약해졌을까? 드러난 죄보다 드러나지 않은 죄가 얼마나 무섭고 큰지 딤즈테일은 여실히 보여준다.

'이 세상에는 숙명 즉 거역할 수도 뿌리칠 수도 없는 운명적인 힘을 지닌 감정이란 것이 있다.' 죄값을 받으므로 하여 감정을 잘 다스렸던 헤스터와 달리 자신의 감정을 추스르지 못해 무너져버린 딤즈테일, 감정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양심' 에 거짓으로 대할 수 없었음이었을 것이다. 목사라는 옷을 입고 있으면서 자신을 속이고 남을 속여야 했던 허울 좋은 감정이 7년의 긴 세월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으며 스러져 간 목사와 목사의 죽음으로 인해 그 또한 단번에 알맹이가 사라진 쭉정이처럼 되어 버린 늙은 의사 또한 마지막 순간에는 자신들의 양심을 속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복수의 칼날을 갈고 진실을 숨긴 죄책감에 사로잡혔다고 해도 어느 순간 '진실'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다. '진실하라,진실하라,진실하라..' 라는 귀절처럼 청교도라는 허울아래 거짓과 진실이 뒤바뀌어 얼마나 고통을 받고 있는지,인간의 양면이란 것이 때론 얼마나 간사한 것인지.

하지만 따지고 들어가보면 그녀가 간음을 한것일까 아닐까? 성불구자이고 이미 끝이 난 늙은 의사와의 관계,아니 칠링워스가 자신의 신분을 미리 밝혔다면 일은 이렇게 커지진 않았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제일 죄값을 크게 받아야 하는 것은 늙은 의사인 듯 하다. 자신의 신분을 감추고 그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보면서 복수의 칼날만 간 간사한 늙은여우같다. 그가 살아가는 이유는 딤즈테일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지켜 보는 것, 복수가 삶의 의미와 존재이유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의 끝은 얼마나 허망한가.그렇다고 진실을 감추고 거짓으로 살아가는 것 또한 옳다고 볼 수 없지만 거짓과 진실 그리고 복수가 사람의 감정을 어떻게 지배하는지,생과 사에 어떻게 작용을 하는지 그 단면을 오롯이 보여준 듯 하다.'바로 이 애가 저에게는 주홍 글자라는 사실을 모르시겠어요? 제가 사랑하는 건 이 아이 하나뿐이거든요. 따라서 제 아이는 제가 지은 죄를 벌하는 엄청나게 큰 힘을 부여받고 있지요.' 누가 그녀에게 돌을 던질 수 있을까?  고전,우려내면 낼수록 진하게 우러나는 그 맛을 새삼 다시 느껴본다.





y******2 2011.10.05.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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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주홍 글자] - 누가 감히 심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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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누가 감히 심판하는가?             너새니얼 호손의 명작 <주홍글자>를 읽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 작품은 분명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교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치장만을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해석할 때, 그리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인 양 떠들어댈 때 일어날 수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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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 누가 감히 심판하는가?

 

 

 

 

 

 

너새니얼 호손의 명작 <주홍글자>를 읽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 작품은 분명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교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치장만을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해석할 때, 그리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인 양 떠들어댈 때 일어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속박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 리뷰는 <주홍글자>를 철저히 기독교 신학의 측면에서 읽은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 신자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당시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이 하던 일들을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 똑같이 자행하고 만다. 신교를 믿는 사람에게 '악마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당시 가톨릭. 신앙과 국가를 결부시켜 성공회에 대한 신앙과 국왕에 대한 권위를 연결시킨 당시 성공회를 고스란이 배워서, 죄인에게 낙인을 찍고, 신앙에 대한 강요를 통해 지역사회의 지도자 계층을 이룬 성직자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1. "죄인이 죄인에게 주홍 낙인을 찍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에서, 신이 인간에게 강력하게 금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다.

 

인간을 신격화할 수 없는 것은, 신은 오직 야훼(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세 종교 모두 신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기독교 중 일부인 개신교는 이 부분에 극도로 민감해서 1천년 가까이 기독교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성모 마리아 흠숭의 전통까지도 파괴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교리에서 신이 인간에게 강력하게 금지하는 두 번째는 바로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죄에 대한 심판은 오롯이 신에게 속한 영역이다. 이 교리는 모세 5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를 국교로 신봉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생명을 담보로 거르슬 수 없는 심판을 내리는 것, 즉 사형제를 헌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원수 갚는 것은 내(야훼)가 하는 일이니, 내가 갚는다. (성경, 신명기 32:35) - 영화 '복수는 나의 것'의 제목 모티브.

 

거둘 때가 될 때까지 (밀 알곡과 가라지) 둘 다 함께 자라게 내버려 두어라. 거둘 때에, 내(神)가 일꾼에게, 먼저 가라지를 뽑아 단으로 묶어서 불태워 버리고, 밀은 내 곳간에 거두어들이라고 하겠다. (성경, 마태복음서 13:30) - 밀 알곡: 착한 사람 / 가라지: 악한 사람

 

성경적 맥락에서, 죄인인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자칫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려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청교도는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이라는 표어를 내세울 정도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런데 그 성경에서 심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신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심판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다른 사람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너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보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의인은 없다. 한 사람도 없다" (성경, 로마서 3:10)

 

자기 스스로 죄가 있는 죄인이 다른 사람이 죄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에게 뭐라고 하는 꼴이다. 주홍글자의 불륜 사건의 공범은 딤스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이다. 그 중 딤스데일 목사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를 계속 숨겨왔다는 점에서 헤스터 프린보다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런 자가 헤스터 프린을 심판대(아마도 성경에서 나오는 십자가의 반영?)에 올린 것은 전형적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고 말할 수 있다.

 

 

 

2. 인간의 심판 vs 신의 심판

 

간통 사건이 일어났다. 인지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배가 불러오고 곧 아이를 낳은 헤스터 프린에게 심판한다. 주홍색의 선명한 A를 그녀의 가슴에 박은 것이다.

 

하지만 인지력에 한계가 없는 신은, 펄의 아버지 딤스데일 목사를 심판한다. 딤스데일 목사가 밤중에 심판대 위에 서자 선명한 A를 하늘에 박은 것이다.

 

어느 심판이 더 권위가 있을까 생각해볼 문제다.

 

 

3.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주홍 낙인을 찍어라.

 

예수 그리스도 중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기독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종교다.

 

그렇다면 성직자들은 예수를 닮아야 하는데, 예수 활동 당시에도 불륜 사건이 있었고, 예수 스스로가 그에 대해 판단을 내린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살펴볼 만 하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간음을 하다가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워 놓고,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이 여자가 간음을 하다가, 현장에서 잡혔습니다. 모세는 율법에, 이런 여자들을 돌로 쳐죽이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였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
(...) 그들이 다그쳐 물으니, 예수께서 몸을 일으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 그리고는 다시 몸을 굽혀서, 땅에 무엇인가를 쓰셨다. 이 말씀을 들은 사람들은, 나이가 많은 이로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고, 마침내 예수만 남았다. 그 여자는 그대로 서 있었다. 예수께서 몸을 일으키시고,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여자여, 사람들은 어디에 있느냐? 너를 정죄한 사람이 한 사람도 없느냐?"

 

 

 

4. 주홍 글자의 현대 버전

 

서로 이단 정죄를 일삼는 개신교... 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 말하고 다 똑같이 예배당에는 십자가가 드높은데, 자기만 정통이고 쟤는 이단이고 쟤는 사탄이고 쟤는 구원받지 못한단다. 심지어 자기 신앙의 뿌리인 가톨릭에 대해서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이단 정죄에 가장 앞장 서있는 개신교 교파는 어디인가? 

 

청교도 신앙을 최초로 주창한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 권력을 잡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처형하고 또 고문했다. 어쩌면 '청교도'(淸敎徒: 맑은 신앙의 무리) 는 그 이름 자체에서부터 성경이 말하는 '죄인인 인간'을 부정하고 '우리만 맑다'(淸)는 배타주의를 내재한 것이 아닐까?

 

 

 

5. 너와 나의 가슴엔 같은 죄를 심어 두었네. 그 누가 우릴 용서하고
    그 누가 우릴 심판할텐가

 

'네스티요나'가 부른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며 마친다.

 

 

 

 


 

개신교회 전체를 비판하고자 하는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주홍글자에 예시적으로 나타나 있으며, 본 리뷰에서 비판에 대상이 되었던 칼뱅의 개혁주의 신학을 문자 그대로 수용하고 있는 청교도는 오늘날 우리나라는 물론 전 세계에서 극히 드뭅니다.

t*****8 2011.11.06.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주홍글자(너새니얼 호손)'에 들어가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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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종교로부터 해방될 것.                                    : '게'에게도 젖이 있다면.   인문학에 대해 떠들어대고 싶을 땐 겹겹이 겹쳐 입은 종교라는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몹시도 힘들 경우 갖은 표백제를 혼합하여 새하얗게 빨아 버려라. 신념이 오래될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더욱 강력한 세제를 쓰라. 서로 적이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 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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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종교로부터 해방될 것.


                                   : '게'에게도 젖이 있다면.
 
 

 


인문학에 대해 떠들어대고 싶을 땐 겹겹이 겹쳐 입은 종교라는 옷을 과감히 벗어버리는 편이 좋을 것이다. 이것이 몹시도 힘들 경우 갖은 표백제를 혼합하여 새하얗게 빨아 버려라. 신념이 오래될수록 그것에 비례하여 더욱 강력한 세제를 쓰라. 서로 적이되라는 말은 결코 아니니 오해 마시길. 완독 후에 호손 그리고 헤스터의 령靈을 -시간이 허락한다면 딤즈데일의 것도- 거리낌 없이 몸에 한껏 실어보고 청교도를 볼 줄 아는 시각에 정통하는 정도면 딱 좋지 아니한가. (작두까지 타겠다는 과한 리액션을 말리지는 않겠으나 부디 당장의 논점을 벗어나서는 안 될 일이다.) 

 


인문학이 바라는 것은 절 보살과 교회 쟁이가 만나 어떠한 종교적 논박없이 다정히 술을 나누며 인생의 신파를 공유하는 것일 게다. 게다. 게다.



부디 ‘게(의)젖 같은 소리’ 하지 말아달라. 혹시 그 게가 실은 ‘개’가 아니냐 수정을 요하고자 한다면 -설마 게에게도 젖이 있냐고 두 손 모아 진심을 다해 되묻는다면- 나 그대 두 눈을 슬쩍 흘겨 웃어 보일 것이다. 도무지 모르겠다면 명동 한복판 예수천당 불신지옥을 무려 3개 국어로 목청껏 외치는 그 분 앞에 서서 이 문장을 귀가 째지도록 여러 번 반복하여 외쳐 보아라. (칼국수 집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 그대에게 무작정 돌진하여 삥 뜯으려는 땡추중도 나쁘지 않은 상대다.) 이후 곧 주변 이들의 환호로 들썩인다면 그것이 구하고자 하는 정답일 테다. 그대 만일 소심한 기질을 제대로 살려 어설프게 발음 했다면 -그래서 머지 않아 상대방의 치켜드는 손바닥에 눈알이 화르르 타올라 화염방사기가 필요할 지경에 이르렀기에 지나가던 일본인 관광객의 몹쓸 한국어 발음보다도 못한 분노와 당황 섞인 혀 놀림으로 분노의 랩질아닌 랩질을 아니하지 아니할 수 밖에 없었다면(이것은 유머다.)- 그것 또한 정답이리라.



우리가 앞으로 해나가고자 할 이야기는 이처럼 무모한 말장난 같지만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언제나 벌어지는 웃지 못할 –그리고 몹시도 닮아있는- 신파에 관한 것이다. 하여 우리는 성장한다. 자아를 마주하고 뺨을 후려친다. 상기된 두 뺨은 본래 제 색을 곧잘 찾기 마련이다. 그리고 우리는 조금 더 성장한다. 이것이 인문학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이고 한정적인 나의 이해다. 이에 적극적인 유감 표시를 환영한다. 두 달치 급여와 퇴직금을 떼먹고 도망 중인 이씨라는 성을 가진 쓰레기 사장마냥 상도덕도 모른 채 쏟아 붓는 무조건적인 비난이 아니라면 어떠한 반감도 수락한다. 너와 나는 같으면서도 다를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우리들에게서 보여지는 미묘한 간극이란 마치 ‘글씨’와 ‘글자’의 차이이기도 하다. 핵심은 A라는 글자의 모양(글씨)’이 아니라 그것이 하나의 부호(글자)’라는 데 있다. 펭귄클래식코리아 편집자들의 제목 선택에 상당한 긍정을 표하는 바이다. 이는 호손이 글자 A를 가슴팍에 대고 느꼈다던 ‘시뻘겋게 달아오는 무쇠’의 열기를 충실히 전달해주는데 많은 도움이 됐다. 
 



술잔이 바닥을 보이고 정신마저 맑아온다. 술기운에 의지해 가만히 잘 붙어있던 사지가 제멋대로 들썩이기 시작한다. 마지막으로 마감 일정을 지키라며 엉덩이를 힘껏 차준 개리 무어Garry Moore의 ‘Back To The Blues’ 앨범에 감사를 표한다. You Upset Me Baby가 플레이 되는 순간 헤스터가 능글맞지만 강렬한 눈빛으로 담배연기 자욱한 펍엘 씩씩하게 들어가 병맥을 거칠게 흡수하며 아이 젖을 물리는 상상을 했다. (이런 몹쓸 녀자.) 

 


그나저나 어미 게에게도 헤스터처럼 가슴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제 자식에게 젖을 물려 키울 수 없는 것도 모자라 어미 그도 실은 젖 냄새 조차 못 맡고 외로이 성장해야만 했던 그 기구한 팔자 대물림에 헛헛한 유감을 표하며. (한 편의 동화같다는 건 나만의 착각.) 간장게장을 더 이상 먹지 못하게 된 요 심술쟁이는 내일 면접 걱정은 미루고 한 잔 더 하고난 뒤 급히 잠들어 버려야 겠다. 


 

s********8 2011.10.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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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자체가 주홍빛『주홍 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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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눈치 받는 임신한 여사원처럼 가슴에 주홍 글자를 안고 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딤즈데일 목사와는 달리 놀라운 정신력을 유지한 헤스터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살아간다’이다.어른이 되면 그런 게 저절로 가슴에 달라붙지 않을까? (펄의 대사, p.243)발칙하게만 보이는 펄의 이 한마디는 『주홍 글자』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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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에서 눈치 받는 임신한 여사원처럼 가슴에 주홍 글자를 안고 사는 이들은 너무나도 많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했던가. 딤즈데일 목사와는 달리 놀라운 정신력을 유지한 헤스터의 마지막은 ‘그럼에도 살아간다’이다.


어른이 되면 그런 게 저절로 가슴에 달라붙지 않을까? (펄의 대사, p.243)


발칙하게만 보이는 펄의 이 한마디는 『주홍 글자』를 관통한다고 할 수 있다. 영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The Bridges of Madison County)》의 로버트와 프란체스카처럼 아름답고 쓸쓸한 결말은 아닐지라도 ‘모든 인간의 주홍 글자’를 보여주기 위해 호손은 소설 속의 헤스터에게 분주하고, 강하며, 신비스러운 사명을 부여했다. 이러한 자연스럽고도 당연한 사명은 다시 한 번 펄의 대사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 말장난처럼 한마디를 덧붙이자면 주홍빛 A는 폭력적 사회를 대변하는 이미지에서 아서(Arthur) 딤즈데일의 A를 거쳐 아우라(Aura)의 A가 되었다고 본다. 그러나 로저의 역할이 보여주는 딤즈데일에의 가히 악마적이라고도 할 수 있는 파멸적 시선으로 인해, 그와 헤스터의 불륜에서 다소간 동정과 연민의 분위기가 연출된다는 점에서는 《매디슨 카운티의 다리》에서 느껴지지 않았던 조금은 억지스런 미화도 엿보인다. 로저가 영화 《밀양》의 신애(전도연)처럼 기막힌 일을 당했다고는 볼 수 없는 것인가? 그의 시선으로는 헤스터와 딤즈데일의 작태가 뻔뻔스럽기 그지없는 것이 아니던가? 이런 면에서 나는 로저의 시선으로 해석되는 『주홍 글자』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u******o 2011.10.1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