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세기 유럽에는 주홍글자가 있었고 우리나라에는 백정의 표식이 있었다. 여인의 가슴팍에 달린, 빨간 헝겊위에 수놓인 A글자. 그리고 가족 구성원 모두 검은 천 조각을 달고 살아야 하는 신분의 백정 소설과 현실 모두 타인에게서 자신의 쾌락을 찾았다. 타인을 무너뜨릴 때 비로소 완성되는 자기세계. 이 검은 표지의 펭귄클래식 주홍글자를 새로 읽어 나가면서 현대인의 삶이 과거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절실히 깨닫는다.
여인의 딸 ‘펄’을 통해 용서의 방법과 이해의 관계를 되짚어 본다.
|
|
너새니얼 호손, 그의 세가지 사랑
우리가 책장을 덮고나면 이제 우리는 너새니얼 호손에 우리의 정절(우리가 늘상 관습을 향하여 바치던)을 바칠 수 밖에 없다.
이 작품에는 그만큼 당대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불평등의 문제, 관습이었기에 우리가 습관적으로 행하고 또 당해오고 있는 문제에 관하여 신랄하게 말하고 있다. 낯뜨겁도록 그가 파헤치고 있는 그 문제는 크게 세가지로 볼 수있다. 민중을 교화시킨다는 목적 아래에 법집행자들과 종교인으로 이루어진 권력자들이 휘두르는 폭력과 위협이 첫째이며, 억압받는 사랑의 문제가 그 둘째이며, 여인에게 가해지는 불평등이 세번째 문제이다.
그는 우리가 가진 낡은 설교집 앞부분에 찍힌 거무스름한 초상화와 흡사한 모습이었다. 그런 초상화 중 하나가 지금 그가 하듯 앞으로 나서서 인간의 죄악이나 정욕 혹은 고뇌 따위의 문제에 간섭할 권한이 없듯이, 이 목사에게도 그런 권리는 없었다. p.87
그렇다.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서 각자가 다르게 가지고 있는 욕망과 이에 수반하는 죄의식에 동참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그들은 법과 교리라는 휘장을 두르고 자신들이 그러한 내밀한 문제에 관하여 모두 알고 있다는 듯이 신과 같이 군림하려고 한다. 본래 권력이 필요한 이유는 힘의 크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기능의 문제에 있다. 일정부분 악랄한 범죄를 관리할지언정 그들이 모든 인간의 사정과 내부의 문제를 다 안다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체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죄인을 엄격하게 설정하고 민중에게 이로 위협하기 위하여 잔인하도록 기발한 낙인을 발명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 긴 세월동안 그녀는 자신의 개성을 잃어버리고 설교자나 도덕주의자들이 보기에 여자의 나약함과 죄 많은 정열을 생생하게 나타내는 보편적인 상징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순결한 젊은이들은 가슴에서 주홍 글자가 불타고 있는 그녀를, 즉 점잖은 부모의 딸인 그녀를, 장차 한 여인으로 성장할 아기의 엄마인 그녀를, 한때는 순결했던 그녀를, 죄의 상징이자 육체이자 실체로서 바라보라고 교육받을 것이다. p.105
우리 역시 지극히 문명화되었다고 믿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실은 이처럼 권력자들의 암묵적인 위협 아래에 살고 있다. 사회를 유지하기 위하여 필요했다던 것은 어느새 권력자의 힘을 위해 쓰여지고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주홍 글자>가 쓰여진지 200여년이 지난 후에도 반복되고 있다.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는 한 민중을 향한 권력에의 위협은 바뀌지 않는 것일까.
너새니얼 호손의 <주홍 글자>가 씌여졌던 당시는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였다. 가문과 재력을 맞추어 결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시대였다. 그러나 슬프게도 어떤 연인들은 그들만의 사랑을 꿈꾸었다.
헤스터는 보다 밝은 시대가 도래하면, 즉 이 세상이 하나님의 뜻에 맞게 성숙해지게 되면 새로운 진리가 계시되어 남녀의 모든 관계가 서로의 행복이라는 보다 굳건한 토대 위에 수립될 수 있을 것이라는 저 자신의 확고한 믿음을 그들에게도 심어주었다. p.351
이 점에 있어서는 더 나은 시대가 되었다. 그러나 오히려 사랑을 추구하지 못하게 된 점은, 인간이 스스로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사랑을 포기했다는 점이다.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상품화 시켜 더 나은 결혼 상대를 찾는데에 급급한 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 점에 있어서 헤스터와 딤즈데일은 자신들의 숭고한 사랑을 위해 많은 희생을 기꺼이 해왔다. 좀 더 시간이 흐른 뒤 레드클리프 홀의 <고독의 우물>이나 E.M.포스터의 <모리스> 에서는 성소수자들의 사랑도 그려지는데, 그들 역시 호손으로부터 이어받은 숭고한 사랑의 희생정신이 빛을 발한다.
어쩌면 사랑을 선택하기엔 자유롭지 못한 그 시대야 말로 진정한 사랑을 더욱 갈구하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사랑이 너무 흔하고 당연한 것이 되는 시대에 와서 그 가치가 조금은 닳아버린 것이 아닌가.
마지막으로 호손의 작품에서 이제 내가 그를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지점과 만난다.
사실 모든 여성의 운명에 관해서도 이처럼 암담한 의문이 헤스터의 마음속에 자주 떠올랐다. 아무리 행복한 여자라 할지라도, 여자의 인생이 과연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까? 헤스터 자신의 개인적 삶에 관한 한, 이미 오래전에 그렇지 않다는 판단을 내렸고 다시 거론할 필요조차 없는 것으로 단정해버렸다. 헤스터는 자기 앞길에 놓여 있는 임무가 희망이라고는 전혀 없는 일임을 알아차린 것인지도 모른다. 첫 번째로 사회조직을 모조리 부숴버리고 새로 새워야만 한다. 그다음으로는 남성의 본성 자체를, 혹은 습관이 오랫동안 쌓여서 본성처럼 되어버린 것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쳐야 한다. 그래야만 여성도 공평하고 적절한 지위를 비슷하게나마 가질 수 있게 된다. 끝으로 이 모든 저해 요소가 다 해결된다 하더라도 여성 당사자가 더 크게 바뀌지 않고는 그러한 예비적인 개혁의 혜택을 충분히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여성의 감성이 우세를 보이면 그런 문제는 모두 사라질 것이다. p.217~218
호손의 인류애가 빛나는 지점이다. 흔히 예술가의 인간애라고 하면 그것은 어쩐지 남자에게만 해당되는 느낌이었는데, 그는 19세기라는 현실에서 여성의 인권까지도 생각한 선구자였다. 우리가 내가 아닌 다른 존재의 인권에 관하여 생각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현대인은, 특히 미술사에서 생각하자면 여자의 나체만을 그리던 시대에서 겨우 벗어나 지금으로 도착했다. 그러나 인권의 문제는 200년 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여전히 미혼모가 성적으로 문란한 여자로 손가락질 받고, 직장에서 임신한 여성이 일에 방해되는 존재로 치부되는 것을 보면, 여전히 이 사회에서 여인들의 가슴에 주홍색 낙인을 찍는 일이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인들은 가엾은 모성으로 어린 생명을 지키고, 그 치욕을 고스란히 감당하는 것이다. 여인의 정절이 깨어지는 것은 남성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요구하는 성적으로 문란하지 않고 순결한 여자란, 여자가 여자를 향하여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날 개체의 구분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종의 요구이다. 즉, 동물적이란 뜻이다.
이 점을 200년 전에 일찌기 간파한 호손의 통찰력이 빛난다. 우리는 동물로 태어났으나 어디까지나 '인간적'이다. 인간으로서의 이 자격을 지키기 위하여 우리는 우리가 관습적으로 행해온, 권력에 알아서 기는 행위나 편견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그만 두어야하는 것임을 이 작품을 통해 다시한번 절실히 느낀다. |
![]()
|
|
너새니얼 호손 <주홍글자>
너새니얼 호손의 명작 <주홍글자>를 읽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지고 있는 나에게 이 작품은 분명 다르게 읽혔을 것이다. 이 작품은 기독교의 교리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겉치장만을 누군가의 입맛에 맞게 해석할 때, 그리고 기독교 성직자들이 자신의 뜻을 신의 뜻인 양 떠들어댈 때 일어날 수 있는 인간에 대한 속박을 전면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이 리뷰는 <주홍글자>를 철저히 기독교 신학의 측면에서 읽은 것이다.
신앙의 자유를 찾아 메이플라워 호에 몸을 싣고 신대륙에 발을 디딘 청교도 신자들.. 그러나 그들이 그토록 떠나고 싶어했던 당시 영국 성공회와 가톨릭이 하던 일들을 청교도들은 신대륙에서 똑같이 자행하고 만다. 신교를 믿는 사람에게 '악마의 자식'이라는 낙인을 찍었던 당시 가톨릭. 신앙과 국가를 결부시켜 성공회에 대한 신앙과 국왕에 대한 권위를 연결시킨 당시 성공회를 고스란이 배워서, 죄인에게 낙인을 찍고, 신앙에 대한 강요를 통해 지역사회의 지도자 계층을 이룬 성직자들의 권위를 세우려고 한 것이다.
1. "죄인이 죄인에게 주홍 낙인을 찍다"
기독교 교리의 핵심에서, 신이 인간에게 강력하게 금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을 신격화 하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이다.
인간을 신격화할 수 없는 것은, 신은 오직 야훼(여호와) 한 분 뿐이라는 아브라함 계열 종교(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모두에 공통된 것이다. 세 종교 모두 신과 인간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차원의 벽이 있다고 가르친다. 특히 기독교 중 일부인 개신교는 이 부분에 극도로 민감해서 1천년 가까이 기독교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던 성모 마리아 흠숭의 전통까지도 파괴하기에 이른다.
기독교 교리에서 신이 인간에게 강력하게 금지하는 두 번째는 바로 "인간은 인간을 심판할 수 없다."는 부분이다. 죄에 대한 심판은 오롯이 신에게 속한 영역이다. 이 교리는 모세 5경의 '이에는 이, 눈에는 눈'보다 앞서는 것이기 때문에, 유대교를 국교로 신봉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는 생명을 담보로 거르슬 수 없는 심판을 내리는 것, 즉 사형제를 헌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성경적 맥락에서, 죄인인 인간이 인간을 심판하는 것은 자칫 인간이 신의 위치에 서려 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청교도는 'Sola Scriptura'(오직 성경) 이라는 표어를 내세울 정도로 성경의 권위를 강조한다. 그런데 그 성경에서 심판하지 말라고 말한다. 성경에서 신이 인간에 대한 인간의 심판을 금지한 이유는 무엇일까? 간단히 말해서 다른 사람한테 뭐라고 하기 전에 너 자신부터 살펴보라는 뜻이다. 성경에서 보는 모든 인간은 죄인이다.
자기 스스로 죄가 있는 죄인이 다른 사람이 죄있다고 비난하는 것은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에게 뭐라고 하는 꼴이다. 주홍글자의 불륜 사건의 공범은 딤스데일 목사와 헤스터 프린이다. 그 중 딤스데일 목사는 더 높은 수준의 도덕적 모범을 보여야 하는 목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었는데, 죄를 계속 숨겨왔다는 점에서 헤스터 프린보다 더 비난받아 마땅하다. 이런 자가 헤스터 프린을 심판대(아마도 성경에서 나오는 십자가의 반영?)에 올린 것은 전형적인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를 나무란다'라고 말할 수 있다.
2. 인간의 심판 vs 신의 심판
간통 사건이 일어났다. 인지력에 한계가 있는 인간들은, 눈에 보이는 대로 배가 불러오고 곧 아이를 낳은 헤스터 프린에게 심판한다. 주홍색의 선명한 A를 그녀의 가슴에 박은 것이다.
하지만 인지력에 한계가 없는 신은, 펄의 아버지 딤스데일 목사를 심판한다. 딤스데일 목사가 밤중에 심판대 위에 서자 선명한 A를 하늘에 박은 것이다.
어느 심판이 더 권위가 있을까 생각해볼 문제다.
3. 너희 가운데서 죄가 없는 사람이 주홍 낙인을 찍어라.
예수 그리스도 중 그리스도를 한자로 음역한 것이 기독이고, 따라서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닮겠다는 종교다.
그렇다면 성직자들은 예수를 닮아야 하는데, 예수 활동 당시에도 불륜 사건이 있었고, 예수 스스로가 그에 대해 판단을 내린 에피소드가 있다는 점은 분명히 살펴볼 만 하다.
4. 주홍 글자의 현대 버전
서로 이단 정죄를 일삼는 개신교... 다 똑같이 예수를 믿는다 말하고 다 똑같이 예배당에는 십자가가 드높은데, 자기만 정통이고 쟤는 이단이고 쟤는 사탄이고 쟤는 구원받지 못한단다. 심지어 자기 신앙의 뿌리인 가톨릭에 대해서도 이단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이단 정죄에 가장 앞장 서있는 개신교 교파는 어디인가?
청교도 신앙을 최초로 주창한 칼뱅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종교 권력을 잡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이단으로 정죄하며 처형하고 또 고문했다. 어쩌면 '청교도'(淸敎徒: 맑은 신앙의 무리) 는 그 이름 자체에서부터 성경이 말하는 '죄인인 인간'을 부정하고 '우리만 맑다'(淸)는 배타주의를 내재한 것이 아닐까?
5. 너와 나의 가슴엔 같은 죄를 심어 두었네. 그 누가 우릴 용서하고
'네스티요나'가 부른 <돌이킬 수 없는>이라는 노래를 소개하며 마친다.
|
|
일단 종교로부터 해방될 것.
: '게'에게도 젖이 있다면.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