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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
"[운명]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 내용보기
임레케르테스의 소설은 운명-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기도-좌절 순으로 출판됐고, 근간에 자절이 출판됨으로써 다른 우리출판사에서 출판하기로 했던 임레케리테스의 소설은 모두 출판됐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운명다음으로 출판된 겁니다. 우선 이책을 읽기전에 운명을 읽으시는게 책을 읽은 뒤에 여운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제목을 운명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라
"[운명]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 내용보기
임레케르테스의 소설은 운명-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기도-좌절 순으로 출판됐고, 근간에 자절이 출판됨으로써 다른 우리출판사에서 출판하기로 했던 임레케리테스의 소설은 모두 출판됐습니다.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는 운명다음으로 출판된 겁니다. 우선 이책을 읽기전에 운명을 읽으시는게 책을 읽은 뒤에 여운이 훨씬 크기 때문에 제목을 운명을 읽으신 분들을 위해라고 지었습니다. 운명이 저자가 강제 수용소에서의 힘들었던 경험을 자신의 세계로 끌어들여와서 이해하고 용납하는 반면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는 오히려 이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자신을 성찰하게 됩니다. 비슷하지만 조금은 다르죠. 이제 어른이되어서 한번의 결혼, 한번의이혼도 경험한 저자는 운명에서 나오는 저자와는 한층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그러한 모습들이 성숙했다고 표현하기에는 맞지 않는 표현이고 분명 변화하였습니다. 운명에서는 저자가 2차 세계대전하에서 맞는 강제 수용소의 경험을 그다지 불행하거나 고통스러운 것으로 기억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을 상상하기는 쉬워도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운명속의 문구처럼 저자는 힘들고 지친 역경도 자신의 결정이며 선택이라고 생각하고있습니다. 자신이 딛는 한발이 운명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오히려 운명이 없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죠. 반면에 태어나지 않은 아이를 위한 기도에서는 자신이 부인했던 혹은 부정했던 것들이 자신의 것들이 되는 상황속에서의 갈등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한 예로...보통 양성평등에 입각하여 여자가 담배를 피는 것은 괜찮아라고 대부분의 남자가 생각하지만 실제로 자기여자친구 자기 가족이 그러는 것은 용납 못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죠... 제가 이 책에서 본 가장 주된 포인트는 바로 이 부분입니다. 부조리한 상황속에서 자신이 속해있는 범주를 여집합으로 규정하고 쉽지만...부분집합인 것을 극복할 수 없는 저자는 이러한 모순적인 갈등을 겪는 것입니다. 유대인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어느새 유대인이 되어 거울앞에 서는 자신의 모습을 보고 저자는 더욱 그것을 인지하게되죠. 좌절을 신청한 상태입니다. 그리고 좌절에서는 변화된 저자의 모습이 나타날 것입니다. 분명 세권의 책을 거치면서 우리는 한 인간이 자신이 속해있는 사회와 어떤 통로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지 다양한 모습을 보게 될것입니다. 그리고 그 각각의 통로 속에서 우리들은 우리들의 본모습 중의 하나를 보게 되겠죠... 그 모습들을 확인해나가는 즐거움을 찾으시길...^^ 좌절 와서 다 읽으면 더 자세하게 세권을 한번 비교하여 리뷰 써보죠...이번 리뷰는 좀 추상적인데...다음엔 구체적으로.. 허접한 리뷰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i***8 2003.07.20. 신고 공감 7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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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오!"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아니오!"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내용보기
"아니오!"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본능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사이 우리의 본능이 실제의 본능대로가 아니라 본능과는 반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반본능적인 것이 본능을 대신해 작동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위의 문장으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그리
""아니오!"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내용보기

"아니오!"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 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본능적'이라고 표현한 것은, 그 사이 우리의 본능이 실제의 본능대로가 아니라 본능과는 반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주 자연스러워졌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우리들의 반본능적인 것이 본능을 대신해 작동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위의 문장으로 이 작품은 시작한다. 그리고 위의 문장은 이 작품 전체를 거쳐서 끊임없이 계속 나타난다.

 이 작품의 원제 커디쉬(Kaddis)란 원래 유대인들이 장례식장에서 죽은 이의 영혼을 야훼께 부탁한다는 의미로 부르는 노래이다. 작품속에서 케르테스가 부르는 커디쉬는 아직 태어나지 않았지만, 결국 자신이 "아니오"라고 거부했기 때문에 죽인 자기 자식의 영혼을 위해 노래한다는 아이러니를 담고 있다.

 지구상의 모든 생명체는 자신의 생존을 목표로 살아간다. 그런데 '생존'이란 무엇인가? 아무리 열심히 '생존' 하더라도 결국 나이가 들면 죽는다. '생존'이란 순수하게 '생존'을 생각하는 자기 자신의 '생존'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유전자의 '생존' 즉, 대가 끊기지 않고 후손이 계속하여 '생존'하는 것을 의미한다.  케르테스는 자신의 생존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재를 '청산'하고자 한다. 그리고 자기 존재의 '청산'의 방법으로 자신의 자식의 생존을 거부한다. 짧은 결혼생활을 가졌던 케르테스의 아내는 케르테스가 스스로를 청산하지 않고, 삶의 길로 인도하기 위하여 아이를 가지자고 말하지만 케르테스의 반본능이 외치는 '아니오' 라는 단호한 외침에 결국 케르테스를 포기하고 스스로 살아가기 위해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

 

이것이 이 작품의 전체적인 줄거리다. 그렇다면, 케르테스는 왜 자기자신을 '청산'하고자 하는가? 책의 끝의 작품해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 커디쉬는 자기 자신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며, 유대인의 죽음에 대한 선언이고 동시에 전 인류의 죽음에 대한 선포다. 케르테스는 아우슈비츠를 인간 타락의 극치이며 인류 역사의 종착역으로 보고있다. 따라서 인류 역사의 끝을 선언한 케르테스에게 있어서 '생육하고 번성하라.'라는 야훼의 명령에 대한 거부는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는 아우슈비츠에 대한 선입견에서 생겨난 해석에 불과하다.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사건을 겪었기 때문에 인류가 타락하였고, 따라서 절멸되어야 한다는 것은 터무니 없이 유치한 생각이다. 게다가, 정작 케르테스는 애초에 '운명'에서부터 아우슈비츠에도 행복이 있었다고, 그리고 '기도'에서는 아우슈비츠에서도 아이들이 태어났었다고 이야기한다. 또한 '운명'에 대한 한 인터뷰에서는 '아우슈비츠는 오늘날에도 존재하고 있으며 독일인들은 언제든지 돌아올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케르테스가 생각하고 있는 바는 간단하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의 광기가 극에달한 특별한 대재앙이 아니다. 아우슈비츠는 역사상에서 일어나는 일반적인 사건이며, 언제나 일어날 수 있고 앞으로도 일어날 사건이다. 따라서 '아우슈비츠'라는 사건은 케르테스에게는 다른 사람들에게 불러일으키는 엄청난 공포심만큼의 의미는 없다. 단지 인간사의 일반적인 진실을 보는 중요한 체험이 되었다는 것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아우슈비츠는 1940~45년까지 약 5년간 100~250만명 가량의 유태인과 집시족을 몰아넣고 살해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는 불과 3달전 건물옥상에 사람들을 몰아넣고 테러리스트라면서 불에 태워 죽였다. 용산참사는 일시적인 '사고'일 뿐이라고? 그렇다면 지금 이순간에도 굶주리며 죽어가고 있는 독거노인들은 어떤가? 생활고에 못이겨서, 혹은 학업부담으로 인하여 자살하는 일일평균 40명의 사람들은 어떠한가?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결국 '사회시스템'에 의하여 죽음으로 몰린 것이다. 물론 당신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아우슈비츠는 단지 유태인 이라는 이유만으로 사람들을 잡아서 직접적으로 죽인 것이고, 가난한 사람들이 죽거나 하는 것은 사회에서 낙오한(혹은 사회시스템의 부분적인 실패로 인하여)사람들이 안타깝게 죽은 것이기 때문에 조직적이고 계획적으로 유태인을 살해한 아우슈비츠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그렇다 물론 안타깝게 사회시스템에서 사람들이 튕겨나가게 되는 기준은 분명히 있다. "가난" 이라던지, "사업실패", "스트레스 조절 능력 부족"등등... 확실히 아우슈비츠의 "유태인"이라는 간단한 기준보다는 훨씬 복잡해 보인다. 그러나 그들은 아우슈비츠만큼 간결하고 잔인하진 않더라도 아우슈비츠와 마찬가지로 '특정한 사회의 기준'에 의하여 죽음으로 내몰려지는것은 마찬가지이다. 아우슈비츠가 겨우 5년동안 100~250만명을 죽였으니, 기껏해야 연간 1만4천명정도 자살하는 우리나라의 사회시스템은 전혀 다르다고? 아우슈비츠는 5년만에 사라졌지만 낙오자를 만드는 사회시스템은 수백년동안 존속하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면 희생자는 어느쪽이 더 많겠는가?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서 아우슈비츠 때문이 아니라면 케르테스는 도대체 왜 스스로를 '청산'하려고 하는가? 여기에 또다른 케르테스의 날카로운 문장이 있다.

 

 그러한 상황들의 좋고 나쁨에 대하여 논하고, 그 현존하는 상황들이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하등 쓸모가 없는 짓이라고 나는 외쳤다. 오직 우리의 결심만이, 두가지 결심만이 시도해볼 만한 것일 뿐이다. (아니 이것은 심지어 우리의 의무라고 할 수 있다.)즉 우리의 삶에는 완전하고 전면적인 동화를 이루고자 하는 결심과 동화를 전면적으로 거부하고자 하는 결심, 둘 중의 하나만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나는 소리쳤다. 하지만 확실히 나의 목소리는 현저히 잦아들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전면적인 동화를 이룰 수 있는 능력이나, 그 반대로 동화를 거부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없는지를 면밀히 판단해야만 하는 것도 우리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동화되는 일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나 자신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기존의 것에, 그리고 바로 삶에 동화되는 일에 무능력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존재할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라고 외쳤다. 그러나 나는 이미 동화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는 동화되지 않는 순간보다 내가 동화되는 순간 바로 죽임을 당할 것을 명확하게 안 것이다. 물론 동화되지 않는 상황도 똑같이 나에게는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도 이미 깨닫고 있다.

 

 

 동화란 무엇인가? 결국 사회의 다른 구성원들의 일반적인 기준과 관점을 공유하며 함께 공감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케르테스에게는 태어날 때부터 (본능적으로) 동화할 능력이 없었다. 스스로의 (본능을) 거부하며 억지로 동화를 시도하는 것은 결국 스스로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동화를 못하는 것은 결국 영원히 아웃사이더로서, 사회에서 밀려난 인간으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두가지 모두 죽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보면 (젠장 여기에서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큰 이점으로 작용한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내가 유대인이건 비유대인이건 이것은 정말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은가. 바로 이러한 조건에서 (아내가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오로지 이 유일한 관점에서 나는 기꺼이 유대인이 될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있다. 오로지 이러한 관점에서만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행운으로 간주할 것이라고 나는 소리질렀다. 나는 유대인이란 사실을 심지어 유별난 행운, 혹은 하늘의 은총으로 간주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유대인이라는 사실이 곧 하늘의 은총이라는 것은 아니다. 내 현재의 모습, 즉 내가 낙인찍힌 유대인으로서 아우슈비츠에 갔다올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이 바로 하늘의 은총인 것이다. 나는 유대인 정체성 덕택으로 특별한 것을 두루 체험했고 또 두 눈으로 직접 목격했으며 결단코 되돌이킬 수 없는 어떤 특별한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나는 이러한 것으로부터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이것을 버리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윽고 나는 깊은 침묵에 빠져 들었다.

 

 .... 물론 나도 삐뚤어진 해석을 멈출 수 없다

 결국 케르테스가 아이를 가지지 않음으로써 스스로의 청산을 완성하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가 말하는 대로 유대인으로서의 정체성(즉 아웃사이더의 정체성)이 특별하고, 하늘의 은총이라면 자신의 아이도 아웃사이더로써 그런 특별한 은총을 누리며 살아가면 되지 않는가? 그러나 그는 스스로를 청산하는 것을 선택한다. 이는 결국 그 자신 또한 무의식적으로는 사회와의 '동화'를 원했으며 '동화'를 하지못해 평생 고독하게 살아온 자신의 삶을 불행한 것으로, 따라서 (자신의 아이가)살 가치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스스로를 청산하는 것이다. 

 

YES마니아 : 플래티넘 w*****t 2009.03.3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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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여 이제는 그를 놓아주기를
"역사여 이제는 그를 놓아주기를" 내용보기
시간에는 단절이란 단어가 존재치 않는 듯 하다. 이미 너무도 오랜 과거에 일어난 일인 듯 한 것들도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서 바라보면 현재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특히나 그랬다. 식민지 역사와 전쟁이라는 과거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여전히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숱한 아동학대 가해자의 경우 어린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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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는 단절이란 단어가 존재치 않는 듯 하다. 이미 너무도 오랜 과거에 일어난 일인 듯 한 것들도 어느 한 순간에 멈추어서 바라보면 현재를 가능케 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하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우리 역사는 특히나 그랬다. 식민지 역사와 전쟁이라는 과거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서뿐만 아니라 현실에서도 여전히 그들을 괴롭히고 있다. 숱한 아동학대 가해자의 경우 어린 시절의 학대받은 경험을 지니고 있는 것 역시 그러하다. 어쩌면 인간의 본질은 폭력성의 발현일지도 모르고, 우리 모두는 잠정적인 피해자이자 가해자일지도 모른다. 저저에게도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은 잊을 수 없는 것이고 잊혀져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의 모든 소설은 그곳에서의 경험으로부터 비롯된다. 그가 지닌 모든 창작력의 뿌리, 하지만 그 뿌리를 들추어내는 작업은 그에게 스스로의 치부를 드러내는 괴로움과도 같다. 그는 아우슈비츠에서의 삶을 극도로 불행하진 않은 것으로 묘사했었다. 그는 남자였고 건강했으며 그렇기에 살아남을 수 있었다. 대다수의 여자와 어린 아이들이 바로 죽임을 당했던 것에 비하면 오히려 그는 살아남은 자로서의 행복감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행복감은 조금만 다른 각도에서 쳐다보면 불행이었다. 그는 같은 본질을 지닌 무언가에 전혀 다른 이름을 붙혀줌으로써 스스로에게 존재했던 불행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있었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로서의 삶은 항상 그의 곁에 존재했음을 그는 고백한다. 어린 시절 부모의 이혼으로 경험했던 기숙사, 그곳은 엄격한 규율과 사회의 부조리가 연결된 또 하나의 아우슈비츠였다. 학생들의 식사제공에 쓰여야할 비용들은 항상 학생들에게 쓰여지지 않았다. 학생들은 그들에게 주어진 빵 몇조각에 감사해야만 했고, 수많은 교사들 앞에 어정쩡하게 선 채로 자신의 잘잘못을 따지는 소리를 듣고 있어야만 했다. 외출 금지는 학생의 신분으로서 그들에게 주어질 수 있는 최악의 형벌이었다. 기숙사에서의 삶과 아우슈비츠에서의 경험은 그의 십대 시절의 거의 전부를 차지하고 있다. 그에게 어린 시절은 되돌아가서는 안 되는 끔찍함이었다. 누구보다도 사랑받아야 할 나이에 사랑받지 못한 그의 삶이 불행으로 점철되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론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에게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흘렀을지라도 부인할 수 없는, 유태인이라는 딱지가 붙어 있었다. 헝가리 사회의 일부로서 유태인들은 헝가리의 모든 경제적 불황의 근원으로 여겨졌었다. 부모에게, 가족에게 사랑받을 수 없었던 불행한 역사가 종결되어진 시점에서도 유태인이라는 사실은 항상 누군가로부터 배척당해야만 한다는 표식과도 같았다. 그렇기에 그는 다른 이들이 자신을 무시한다는 생각에서부터 헤어날 수 밖에 없었고, 어느 누구에게도 유태인이라는 지위(?)를 물려주어서는 안 된다고 믿게 된다. 그의 내면은 자기 자신, 유태인들을 향한 멸시와 폭력성이 살아 숨쉬고 있었기에, 그는 어느 누구도 사랑할 수 없었고 자기 자신이라 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의 결혼 생활을 불행으로 몰아갔던 그 사고는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와서 되돌아보아도 변화되어질 수 없는,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 본능은 비정상적인 역사 속에서 양성된 반본능이기도 했다. 그는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본능들을 거절할 수 없었다. 그에게 너무 깊이 뿌리박힌 그 본능들을 거절하는 그 순간은 바로 자신을 버리는 것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럴 수 없었다. 50년이 흘러간 지금에서도 여전히 그는 과거를 이야기하고 그 과거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모습을 찾아내는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수많은 대중들의 입맛에 맞는 무언가를 써내는 바보 같은 작가로서 살면서 느꼈던 비애감이 싫어 다시 자기안으로 파고 들었지만, 그 안에는 그가 그토록 저주했던 지난 기억들이 여전히 너무도 생생하게 살아있었다. 그는 홀로코스트여서는 안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홀로코스트는 그에게 존재하는 수많은 불행 중 하나일 뿐이다. 그의 역사는 여전히 진행중이며 그 스스로가 그 역사를 놓아버리지 않는 이상 닭장과도 같은 그의 아파트는 또 다른 이름의 아우슈비츠일 테니 말이다.
q*****2 2004.03.0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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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능과 반본능,유대인과 비유대인...
"본능과 반본능,유대인과 비유대인..." 내용보기
나 역시 케르테스의 을 읽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고 그 책이 시리즈의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 책을 찾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시간이나 책의 흐름상이나 이 책은 시리즈의 마지막권이며 얼마전 이 책의 이전에 해당되는 이 번역출간되었음을 알았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해 제대로된 감상을 쓰자면 과 을 읽고 난후,다시 이 책을 읽고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첫 인상이
"본능과 반본능,유대인과 비유대인..." 내용보기
나 역시 케르테스의 <운명>을 읽고 강렬한 충격을 받았고 그 책이 시리즈의 처음이라는 것을 알고 그 다음 책을 찾아 이 책을 읽게 되었다 시간이나 책의 흐름상이나 이 책은 시리즈의 마지막권이며 얼마전 이 책의 이전에 해당되는 <좌절>이 번역출간되었음을 알았다 아마도 이 책에 대해 제대로된 감상을 쓰자면 <운명>과 <좌절>을 읽고 난후,다시 이 책을 읽고나서야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일단 첫 인상이란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그 기록을 남기고 싶은 마음에 이 리뷰를 쓰기로 결정했다 인간의 삶에서 자신의 유전자를 가진 후손을 남긴다는 것이 어떤의미를 지니는가에 대해 곰곰히 생각하게 한다 아내가 자신의 아이를 가지고 싶다는 말에 "안돼"라고 외치는 주인공을 과연 어떻게 받아들이고,이해하여야하는 것일가... 반본능이 본능처럼 작용한다는 주인공에 대해 인간에 있어서 원초적인 본능과 자유의지,혹은 이성의 작용이 얼마만큼의 영향력을 행사하는지 역시 반복적으로 되새겨 볼만한 이슈인듯하다 임레 케르테스의 글은 어렵다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많은 것에 대한,자신의 존재 근원을 지탱하는 것들에 대해 의문을 품게하고...돌이켜 생각하게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필독서이다

[인상깊은구절]
"우리의 삶 전체를 뒤흔들 수 있는 질문에 대한 온전한 해답은 단지 하나의 방법으로만 생각할 수 있어요 왜냐하면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는 어떤 추상적 온전성도,그 유일하고 군더더기 없으며 실제 존재하는 온전성을 대신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당신의 아이를 갖고 싶어요" "안돼!" 나는 순간적으로 즉시,망설이지 않고 말했다 거의 본능적으로 튀어나온 말이었다
r***y 2003.11.12.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