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표지에 한 여자가 있다. 물 위를 부유하는 듯도 하고 추락하고 있는 듯도 하다. 배경은 온통 흑색이지만 슬프거나 불안해보이지는 않다. 표정이 평온하다. 꿈을 꾸고 있는 듯 두 눈을 감고 있다. 투명한 하얀 원피스가 살결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쉬폰 원피스일까? 물결치는듯한 탐스러운 검은 머리와 붉은 입술이 아름답다. 이 소녀의 이름은 에밀리다. 시드니에 살고 있다. 어려서 입양을 온 건지 아니면 부모를 따라 이민을 온 건지 알 수 없지만 한국어를 배우고 있다. 고운 얼굴과는 달리 거친 욕들을 입에 달고 살고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모른다. 타인의 감정도 느끼지 못한다. 마치 자폐증을 앓고 있듯이. 이 아이에게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 궁금증을 일게 만드는 표지이다. 이 아이의 사연을 모르더라도. 이 소설집은 어둡지만 밝고, 가볍지만 무거운 표지의 느낌같은 그런 책이다. 표지는 표제작인 ‘젤리피쉬’에서 영감을 얻는 듯한데, 작품의 이미지를 잘 보여준다. 저 원피스, 자꾸 보다보면 정말 젤리피쉬인 것처럼 보인다. 독을 품고 있어 누군가를 쏘면 엄청난 아픔을 주지만 그 자체로는 평화롭게 바닷속을 유영하고 있는 젤리피쉬 말이다. 해이수는 요즘 한국의 어떤 소설이 빠져 있는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러운 치장과 과도한 스타일에 홀리지 않고 흡사 삶의 구체를 중계하는 듯한 생생한 현장감 쪽을 택한다. 그의 인물들이 대부분 길 위에 있는 것은 그 때문이고 그 길이 인간을 떠올리게 하는 것 또한 그 때문이다. 소설의 소재를 확대하기 위한 그의 ‘몸’의 움직임은 건강하고 바르고 심지어 도덕적이기까지 하다. 넓고 먼 것을 뜻한다는 탕탕(蕩蕩)과 높고 큰 모양을 의미한다는 외외(巍巍)의 일면을 그의 소설은 지향한다. 그의 탕탕과 외외가 다만 추상이 아니라 인간의 인간에 대한 배려를 바탕에 깔고 있으니 믿음직스럽다. 우리가 그를 부러워하며 격려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소설가 이숭우씨의 추천사인데 사실 이 짧은 글 속에 내가 이 소설집을 읽고 느꼈던 모든 것들이 다 들어가 있다. 이미 이렇게 멋지게 작품을 설명한 글이 있는데 굳이 거기에 뭔가를 첨언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진지하고 집요한 시선. 그러나 관념적으로 흐르지 않고 삶의 구체성을 획득하고 있다. 모든 문제의식이 스스로에게서 나온 듯 실질적이다. 그렇기에 공감할 수 있고 몰입할 수 있다. 결코 현학적이거나 어려운 문체를 사용하지는 않지만, 그가 던진 질문을 곰곰히 생각하게 된다. 이 작품집에는 지면과 온라인을 통해 발표됐던 일곱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세 편은 네팔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두 편은 시드니를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한 편은 케냐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어머, 합하면 6이잖아요. 하나가 모자라요. 네, 맞습니다. 하나가 왜 빠졌는지는 읽어보시면 알아요). 그의 인물들은 모두 길 위에 있다. 길 위에서 사유하고 (구체적인) 삶을 산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성찰과 극복을 위해 여장을 꾸린 경험이 있거나 삶을 궁구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특히 젤리피쉬처럼 부유하는 20대 친구들에게. 관계 맺는 것에 서툴고 가야할 바도 알지 못해 어찌할 줄 몰라하는 사람들에게. 물론 그의 작품 속 인물들은 어찌 보면 갈등을 회피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갈등이 등장하지않아 심심하고 밋밋할 수도 있지만 그것이 바로 이 작가가 추구하는 어떤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깐 갈등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위해 침묵하거나 기다리고 있다는 느낌. ‘경쟁’과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모든 인간들의 삶의 모토가 되어버린 이 시대에 느리지만 둔중하고, 둔중하지만 멀리 퍼지는 종소리 같은 삶을 추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니깐 그(혹은 그의 작품 속 사람들)가 갈등을 원하지 않고 갈등을 회피하며 착하디 착한 것처럼 보이는 것은 순진해서가 아니라 순수하기 때문인 것이다. 이 소설집의 작품들은 그런 순수한 얼굴을 가진 한 남자가 36.5도만큼의 온기로 인간의 인간됨을 느끼게 해주는 그런 ‘맑음’과 ‘투명함’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해이수라는 작가와 그의 작품들이 가지고 있는 미덕이다. 이 소설집은 여행이 줄 수 있는 어떤 것들을 소설을 통해 경험하게 해준다. 지금 길을 떠나는 한 사람, 이미 길을 떠난 한 사람, 길에서 돌아온 한 사람을 위로하고 감싸줄 수 있는 작품이다. 당신이 만약 삶의 연약함과 쓸쓸함에 흔들리는 단독자의 진술에 귀기울이는 심성을 가진 독자라면 이 작품에 깊이 공명할 수 있을 것다. [덧붙임] Jellyfish. 예전에 이런 아이디를 썼던 블로거가 있었다. 신춘문예를 위해 소설을 쓰는. 그 친구는 등단을 했을까? 이 책은 그 친구가 가져다준 인연이다. 덧붙이자면 이 아이디가 눈에 들어오게 했던 동명의 영화가 가져다준 인연이기도 하고. 아직 이 영화를 못 보신 분이 있다면 영화 역시 추천한다. Jellyfis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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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열흘동안 지구를 몇 바퀴 돌고 온 느낌이다.
쿰부 히말라야를 오르다 고산병을 경험하고, 폐쇄된 루클라 공항에도 머
물렀던 것 같다. 그리고 룸비니로 갔을까.
멀리 케냐와 시드니의 뒷골목에서 낯선 사람을 만나기도 했다.
해이수의 '젤리피쉬'는 낯선 공간으로 나를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그 낯
선 공간이 주는 불안을 경험하게 했고 그 불안을 통해 나를 보게 해 주
었다.
나는 그의 유려한 문장을 따라갔을 뿐인데 낯선 공간에 놓인 낯선 나를
만났다.
그 경험을 나를 행복하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내 안엔 얼마나 많은 '나'가 있는 걸까?
행복한 책읽기란 이런 것을 두고 한 말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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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테두리 안에서 삶을 살아간다. 정해진 테두리가 크든 작든 간에 그 속에서 책임지워졌다고 생각하거나 소명되어졌다고 생각하는역할을 하면서 죽음을 향해서 걸어간다. 사람들의 행동은 작은 편린이 되어 아퀴에 맞게 돌아간다. 시간은 그 많은 편린들이 산개해서 줄지어선 것의 거대한 통칭이다. 시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약간의 변주 가능한 사람의 삶들이 즐비하다.
사람의 삶이란 삶과 죽음이라는 큰 테두리 안에서 약간의 변주가 가능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상 사람들이 대중적으로 지향하고 싶은 삶이 있을것이고 대중적으로 지양하고 싶은 삶들이 변주 가능한 폭에서 일어난다. 이러한 변주를 읽는 것은 테두리 속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테두리는 집단적 환상성을 가지고 있거나 집단 최면이다. 부조리라는 것은 다수의 암묵적인 동의에 의해서 묵인 되는 곳이다. 자기가 살아가는 곳에 대한 성찰은 테두리를 벗어나 절시(竊視)하는 이안(異眼)이 필요하다.
<젤리피쉬>에서 해이수는 전작 <캥거루가 있는 사막>에서 진행했던 일련의 글쓰기를 통해서 환상성과 추상적 몰이미지 속에 가려진 사람들의 삶을 복원해 낸다. 일종의 이미지의 파괴이다. 환상성이 배제된 사실의 서사는 행복한 삶과는 거리가 있다. 여기도 거기도 사람이 사는 곳이었고 사람이 사는 방식에는 별다른 차이가 없다. 해이수의 이번 글들은 전작에서 보여준 서사에서 한 발 앞으로 나가서 외면을 읽고 다시 그 내면으로 침참해간다.
여러편의 이야기가 묶인 소설집인 <젤리피쉬>에서 가장 쉽게 읽혔던 단편은 ' 나의 케냐 이야기'다. 케냐 여행을 하면서 멘토같은 시인과의 대화에서 작중화자는 이미 사라지고 독자에 불과했던 한 사람이 이야기 속에서 질문에 대한 답을 듣고 있었다. '너무 거대한 것은 사람 눈에 보이지 않는다'라는 너무나도 간단하고 명료한 이야기는 '탕탕외외'란 말로 전이되기도 했다.
존재감이 바닥을 치는 놈들일수록 마음 속에서 설산을 품고 산다는 진실을 혹한의 설산에서 한 번쯤 세상을 발 밑에 두고 싶은 욕망에 시달리는 (고산병 입문)것은 당연하다. 존재감이 테두리를 안에서 인지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존재의 부피가 테두리 안을 넘어 거대한 것으로 진행했기 때무이다. 테두리 안의 극소의 것이 극대의 존재로 환원되는 순간이다. '너무 크면 잘 안 보이기 마련'(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시인의 말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얼룩말이 검은 바탕에 흰 무늬인지 흰 바탕에 검은 무늬인지로 설왕설래하는 윤간사의 이야기에서 백인들은 흐니 바탕에 검은 줄이라고 하고 흑인들은 검은 바탕에 흰줄(나의 케냐 이야기)이라는 명징한 답을 끌어낸다. 모든 것이 명료해야하고 명징해야하는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윤간사에게 '각자의 태생과승성이 있는거에요 기린에게 왜 목이 기냐고 묻지 마세요. 철수에게 왜 만년설을 보고 싶으냐고 묻지 마세요 기린은 목이 길게 태어났고 철수는 만년설이 보고싶은 거에요 그런 겁니다.'(나의 케냐 이야기) 라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하지만 아직 아무도 그렇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삶을 살아간다. 동행하던 시인은 '의미를 찾지 말고 부디 재미를 찾게'라는 말을 던진다. 의미란 것은 정형화되고 객관화된 껍질이다. 테두리 안에서는 격식이라는 허울이 인간을 지배한다. 재미없는 세상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관념적인 허구 속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꼴이다. 주객이 전도되었다. '여행을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자만이 자기를 묶고 있는 속박에서 벗어나리라'라고 말했던 헤세의 말처럼 .......... 우리는 떠나야 사는 삶들일 수 밖에 없다. 자기 존재의 허울에서 한 발 떠나보기를 여행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
해이수의 글쓰기에서 살짝 벗어나 있는 작품은 '절정(絶頂)이다. 말그대로 목이 잘리는 순간의 기록이다. 정해지지 않은 공간은 시간을 부정하고 지금이며 과거이기도 했고 앞으로 다가올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모든 것들이 정지하는 존재가 적멸의 순간으로 넘어가는 허무의 시간이다. 전장에서 왕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최대의 투쟁을 묻는 나에게 '인간 최대의 투쟁은 바로 자기와의 대결이네 그 자기와의 대결이 타인을 위한 것이라면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하지 그것이 인가닝 짐승과 다른 유일한 차이점' (절정)이라고 말한다. 왕의 이런 의지는 죽은 다음에도 혈손들에게 유전되었다고 전재지는데 시간이라는 극대의 길을 살아가는 인간에게 존재를 초월하는 것이다. 시간의 영속성에서 인간의 한계성 필멸을 넘어선 것이다.
마지막을 차지하고 있는 <젤리피쉬>와 <마지막 꽃잎을 불에 던져 넣었다>는 해이수의 소설집 <캥거루가 있는 사막>의 분위기를 잇는 해이수가 해이수일 수 있게 하는 소설들이다. 등장하는 에밀리와 벡스는 상처 투성이다. 젤리피쉬는 해파리다. 아름다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그 안에는 독성을 가진 촉수들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젤리피쉬는 역동성을 지니지 못한 수동성의 존재다. 에밀리의 존재가 딱 그러하다. 존재하고는 있지만 존의 의지에 따라 큰 바다를 유영해야하는 부유하는 존재다. 열 일곱 에밀리에게 삶은 비루하고 남루한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즉흥적이고 즉물적인 순간만이 존재한다. 꿈도 없고 이상도 없으며 그저 존재는 허무한 에밀리다. 벡스는 약에 쩔어 사는 사람이다. 언제나 돈만 모으면 다시 고향인 아프리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한다. 현실을 즉물적으로 살아가는 벡스는 에밀리와 같아 보이지만 벡스에게는 돌아가겠다는 꿈같은 꿈이 마음 한 켠에 자리잡고 있다. 벡스를 지탱하는 것은 그 허망한 꿈이다. 우리는 에밀리이기도 하고 벡스이기도 한 삶을 살아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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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 무언가를 발견하는 여행은, 새로운 풍경을 보는게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가지는 데 있는 것이다. - 나의 케냐 이야기 中 159에서
* 지금 우리는 어떤 눈으로 가지고 세상을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해이수의 소설집 <젤리피쉬>를 읽었다.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외국 소설을 읽을 때면 이런저런 추상적인 문제들에 대해 생각하게 되지만 한국 소설들 을 읽을 때면 내가 있는 자리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그건 같은 장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작가의 이야기를 읽기 때문인 것다. 그런데 해이수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모두 바로 지금 여기에 없다. 해이수의 주인공들은 모두 여행중이거나 이런 저런 이유로 외국에서 유학중이기 때문이다. 일곱편의 단편 중 '고산병 입문''루클라 공항''아웃 오브 룸비니' '나의 케냐 이야기' 네 편은 모두 네팔이나 아프리카등을 여행중이고 '젤리피쉬'와 '마른꽃을 불에 던져 넣었다' 두 편의 이야기는 호주 유학중이며 여행을 떠나지 않은 유일한 이야기'절정'은 아주 오래 전 모호한 어느 한 시대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야기들이 지금 바로 여기 우리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가. 그렇지가 않다. 마치 숲 속에서는 나무들의 모습만 보이지만 멀리 숲을 떠나면 숲의 전체 모습을 찬찬히 살펴 보게 되듯 해이수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자신을 둘러싼 현실에서 떠난 그곳에서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현실을 다시금 살펴보기 때문이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고 드물었던 때에는 외국으로 떠난다는 것이 일종의 대안이나 해결책처럼 여겨질 수 있었다. 하지만 외국여행이나 유학 이민 생활이 흔해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외국으로 떠나는 것만으로 자신이 가진 문제나 현실을 돌파할 수는 없다는 것을 문제의 본질은 전혀 바뀌지 않는 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해이수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험난한 여행에서 관념적인 문제들에 매달리고 자신의 문제의 해답을 찾아보고자 애를 쓰기도 하지만 결국은 여행을 갔다 와도 변하는 것은 하나 없는 자신을 발견하거나 한국에서보다 몇 배 오히려 더 궁핍하고 더 괴로운 현실과 마주하게 될 뿐이다.
소설 속에는 그 어디에 있든 방황하는 자신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의 모습, 더이상 떠밀릴 수 없는 곳까지 떠밀리고 나서야 겨우 자신을 들여다 보게 되는 우리가 그려져 있다. 소설 속의 궁핍함은 몸이 궁핍해져 마음까지 궁핍해지고 만 요즘 우리들의 모습이기도 하다. 자본주의의 변두리로 떠밀린 주인공은 그런 현실에서 벗어나 보고자 어렵게 어렵게 멀리까지 떠나가지만 그 곳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것은 더욱 더 극명하게 드러나는 돈의 위력과 더이상 가난할 수 없는 가난이었다. 마치 자본의 매서운 칼날을 잠시 피해 떠나간 곳에서 되려 그 칼날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소설 속 이야기들은 술술 잘 읽히고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끊임없이 떠올랐다. 서울 변두리나 지방에서 멀리 시드니와 뉴욕 케냐와 아프리카 까지 멀어진 한국 소설의 배경과 그곳에서 마주하는 그들의 질문과 대답들에 대해서, 지금 멀리서 여행, 유학, 이민 생활을 하는 이들에게는 이 책이 어떻게 느껴질까 하는 생각, 아무리 멀리 가도 변하는 것이 없는데 사람들은 왜 멀리 떠나갈까, 왜 우리는 변하는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멀리 떠나가고 싶어하는 것일까,하는 생각들이.
그의 다음 작품에서는 여행을 떠나고 유학을 떠났던 이들이 어떤 질문과 어떤 대답을 가지고 어디로 돌아올런지 문득 궁금해진다. - 다락방에서 허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