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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오나르도 다 빈치는 수많은 스케치 자료를 남겼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절반이 채 되지 않으며 그나마도 뒤죽박죽 뒤섞여 뿔뿔히 흩어져 있다. 다 빈치의 기록을 물려받은 제자 멜치는 스케치 자료를 소중히 보관했지만, 멜치의 상속인이 다 빈치의 스케치를 돈과 마구잡이로 맞바꾼 것이다. 다 빈치의 유명세 때문에 그의 스케치를 구하려는 시도는 끊이지 않았고, 인기가 많아질수록 다빈치의 스케치 자료는 여기저기서 굴려지며 훼손당했다. 이와 반대로 방대한 자료를 남겼지만 당대에는 무시당하며 창고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다가, 훗날 가치를 인정받았을 때 온전하게 보존된 모습으로 세상에 선보이게 된 사례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라토의 중세 상인>의 주인공인 상인 다티니의 편지 모음이다.
중세 프라토 지방에서 살던 다티니는 상인으로서는 나름대로 번창하며 일가를 이루었지만, 수많은 지역 상인 중의 한 명일 뿐 별다른 역사적 족적을 남기지는 못했다. 하지만 현재 다티니는 중세 역사를 연구하는 데 빠질 수 없는 존재가 되었다. 다티니는 평생 동안 상업을 위해 수많은 서신을 썼고, 수많은 상업 관련 서류를 작성하고 결재했는데, 이 자료를 고스란히 보관해 두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가족과 친지들과도 수많은 서신을 교환했는데, 이 서간들도 같이 보관했다. 다티니의 서간과 서류는 모두 10만여 점에 이르며, 다티니 사후 완벽하게 잊혀진 덕에 외부인의 훼손 없이 온전히 보존될 수 있었다.
다티니의 서간집은 개인의 일기보다 훨씬 풍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기에는 아무래도 특별하다고 여겨진 일을 중심으로 기록되기 마련인데, 다티니의 서간집에는 일상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도 많이 담겨 있는 것이다. 아내에게 식사, 하인 관리 등 집안일에 대해 조언하는 것이나, 갓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지들에게 사회생활에 대해 구체적인 충고를 하는 편지를 살펴보면, 당대 사회의 한 단면이 생생하게 눈앞에 그려진다. 게다가 다티니는 상인인지라 집을 떠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의례적인 인사치레나 일상적인 대화도 편지로 주고받는 일이 종종 있었다. 덕분에 웬만해서는 사람들이 굳이 글로 쓸 가치가 없다고 여겼을 사회 일상에 대해서도 많은 기록이 남아 있게 되었다. 이처럼 다티니가 남긴 편지들은
<프라토의 중세 상인>은 이 편지들을 주제별로 묶어, 알기 쉬운 문체로 엮어냈다. 단순히 편지를 번역한 것이 아니라, 서간집을 바탕으로 복원한 다티니의 삶과 중세 사회의 모습을 주제별 옴니버스 형식으로 묶어냈다. 책을 읽다 보면 다티니의 방대한 서간 자료 못지 않게, 십만여 통의 편지를 분석하며 그 내용을 재조립하여 하나의 구조물로 쌓아올린 연구자의 노력에도 경의를 표하게 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처럼, 아무리 방대한 자료도 체계적인 연구가 없다면 산만한 편지 더미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프라토의 중세 상인>이 다티니의 서간집을 통해 복원한 다티니의 삶은 자세하며, 생생하고 활기가 넘친다. 공식 문서가 아니라 개인의 편지를 바탕으로 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름 없는 개인의 일기도 꼼꼼히 기록하면 훗날 훌륭한 미시사 연구자료가 되는 법인데, 다티니처럼 일상적인 주제를 전방위적으로 다룬 서간집임에야 더 말해 무엇할까.
진화론을 발표했던 찰스 다윈은 평생 동안 자신이 받은 편지를 모두 보관해 두었고, 자신이 보냈던 편지도 모두 사본을 만들어 보관했다고 한다. 덕분이 다윈의 편지들은 다윈의 삶과 학문세계뿐만 아니라, 당대 영국 학계의 학문 경향을 알아보는 데에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이처럼 다티니가 남긴 편지들도 작게는 중세 상인 사회를, 크게는 중세 사회와 개인의 일상생활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당대에는 소소한 소일거리가 후대에는 귀중한 역사적 사료로 평가받는 일이 종종 일어나는데, 다티니의 편지는 그 대표적인 사례 중 하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