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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수상작품집은 나름대로의 느낌과 이야기의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 황순원 문학상은 그 취지가 황순원 문학과의 연관이 중시되고 있다고 한다 어떤 좁은 범위에서의 특징보다 오히려 시간의 흐름과 시대의 변화에 따른 능동적이고 적극적인 자기 변모로 파악할대 황순원 문학의 진가가 더 잘 드러날 것이라고 한다. 그러한 취지를 생각해보며 이야기들을 읽으니 또한 아~~ 그러한가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 작품집의 이야기들을 읽었던 시간은, 낯익은 작가들이었지만 모두 그들의 이름값(?)을 하는 그렇지만 진부하지 않고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던 즐거운 시간이었다.
<근처>라는 제목의 대상수상작은 박미규의 작품으로 그의 예전의 소설의 재치나 활발 얼마전에 읽었던 이상문학상의 <용용용용>과는 또다른 삶을 정리하는 한 남자의 이야기가 과거의 친구들과 묻어두었던 타임캡슐과 함께 펼쳐진다.
김숨의 <간과 쓸개>도 그의 다른이야기였던 <철><백치들>과는 또 다른 느낌으로, 근처와 비슷하게 간암말기 환자인 한 남자의 자식과 자신의 친구들 그리고 친지들과의 관계를 조용히 그리고 있는 이야기도 좋았다.
은희경의 <다른 모든 눈송이과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눈오는 크리스마스를 기다리는 기원에서 비롯한 두 소녀의 이야기
김경욱의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또한 그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는, 성폭행 당한 손녀와 그것을 응징하려는 당뇨병 걸린 늙은 할아버지 신에게 항상 간곡히 기도하고 답을 구하는 그의 절규..
그외에도 낯설지만 좋은 작가들을 만날 수 있어서 좋았다
누군가가 그렇게 써 놓은 것을 본 듯 하다 문학상 작품집을 놓고 있으면 그 안에 맛있는 것이 들어 있는 종합선물세트 상자를 앞에 놓고 있는 듯 하다고 무엇부터 먹을 것인가 그리고 다 맛있는 것만 모아 놓은 종합선물세트,
나도 그러한 기분으로 좋아하던 , 그래서 더 먹고 싶었던 것도 있고 처음 보는 신제품이지만 먹어보니 맛있었던 것도 있는...
그들의 다른 이야기를 읽을 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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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문학상이든 수상집을 읽은 것은 즐거운 일이다. 이름만으로 익숙한 작가들의 단편을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소설을 직접 만나보지 못하고 소문이나 평론에 의존하기도 한다. 그런 소문만으로 때로 편견에 빠지기도 한다. 2009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자인 박민규에 대해서도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워낙 그의 소설에 대한 호평이 많아 수상작 단편<근처>에 대해 궁금증과 기대도 컸다. 결과를 말하자면, 기대 이상이었다.
수상작 <근처>는 제목을 먼저 정해놓고 쓴 소설이라고 했다. 주인공 호연은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소위 성공을 이룬 남자다. 마흔이 되도록 결혼도 하지 않고 정신없이 바쁘게 살아온 그에게 삶은 암을 선고했다. 간암 말기, 어떤한 치료도 시도하지 않고, 삶의 끝을 향해 걸어가게 된 것이다. 그는 고향으로 향했고, 근처에 살고 있는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게 된다.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지금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는 친구들의 하루과 호현의 하루는 달랐다.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호연의 마음이 담담하게 잘 표현된 소설이다. 악착같이 삶을 부여잡고 싶은 욕망, 신에 대한 원망, 그 어떤 절규도 없었다. 그래서 더 슬펐고, 더 여운이 많이 남는 소설이었다.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 명의 자식이 있다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 나는 비로소 흔들림을 멈춘 나침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할 인간일 뿐이다. p 39
산다는 것은, 어떠한 삶의 근처를 배회하고 있든지 결국엔 ‘혼자’ 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과정은 아닐까 싶다. 그러나 혼자라는 것이 절대 외롭거나 슬픈 일이 아님을 확인 시켜주는 것도 삶이다.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며 살고 있지만, 삶은 그 자체가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기 때문에.
<근처>외에도 반가운 소설이 많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은희경의<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는 크리스마스와 눈을 기다리는 누구에게나 간직하고 싶은 추억을 꺼내보게 한다. 점점 더 좋아지는 작가 김숨의 <간과 쓸개>는 죽음이라는 소재가 <근처>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언제나 새로운 김경욱의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도 좋았다. 단편 c1+y=:[8]: 를 통해 처음 만나는 김중혁도 인상적이었다. 여기선 만난 단편들은 김숨의 <철>, 김중혁의 <펭귄뉴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로 향하는 설레임의 시작이다.
마지막으로 박민규에 대해 한 번 더 말하고 싶다. 내게 그와의 첫 만남은 난로 같았다. 그에게서 따뜻한 온기가 나온다. 그의 다른 소설을 만나는 시간이 생각보다 빨라질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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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기보다 가벼워 보이는 깃털 하나가 팔랑 팔랑 내려와 한 남자의 발치에 떨어진다. 의자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던 그 남자는 옆에 앉은 할머니를 향해 이런 말을 했다.
"엄마는 항상 인생은 초콜릿 상자같은거라고 했어요. 어느것을 잡을지 모르기 때문이죠."
직사각형의 초콜릿 상자 속에는 겉으로 보기엔 모두 똑같아 보이는 초콜릿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그러나 어느 초콜릿을 집느냐에 따라 달콤함을 맛볼 수도 있고, 때로는 조금 씁쓸한 맛을 느낄 때도 있는 것이다.
기대했던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을 받아들었을 때 나는 영화 '포레스트 검프' 중 이 장면, 이 대사가 떠올랐다. 하나를 골라 살살 녹여 먹어 보기 전에는 그 맛을 알 수 없는 열 가지 종류의 초콜릿들이 담긴 선물 상자와도 같은 책이 바로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이었다. 그럼, 뭐 부터 맛볼까... 고민도 잠시... 어느 것을 먹어도 맛있을 것 같지만, 그 맛이 제일 궁금한 것부터 집어들었다. 나는 박민규의 <근처>를 선택했다.
최근에서야 접하게 된 박민규 작가의 작품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간 본 적 없는 파격적인 문단 구성과 현실을 꿰뚫어 보는 그의 시선, 그리고 이것을 그의 언어로 표현해 내는 것까지 그의 작품은 처음 읽을 때보다 반복해서 읽을 때 더 좋은 것 같았다. 평범함에 길들여진 내 입맛에 박민규 작가의 작품은 낯설어서 어색함 그 자체였지만,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의 영광을 안으며 첫 작품으로 실린 그의 글을 읽자마자 그새 그의 글에 빠져들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불혹의 나이에 말기 간암 환자가 되어 고향을 다시 찾은 '나'. 그는 그 곳에서 그의 어린시절을 추억하고, 그 추억을 함께 나눴던 친구들의 현재와 마주한다. 외롭고 외로운 인생. 사십년을 살았지만, 그가 살아온 삶이란 그가 주인공인 삶이 아니었다. 그 반대로 그의 삶이 그를 이끄는 대로 그는 살아온 것뿐임을 깨닫는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 (중략) ...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박민규 作 근처 p.39)
죽음의 순간이 점점 가까워져 오고, 삶을 스스로 정리하라고 하는데 내 삶이 마치 내 것같지 않은 기분. 죽음에 직면하지 않은 나도 가끔은 그런 기분이 들 때가 있었다. 그러나 금새 그런 생각을 털어버리고 또 일상에 섞여 들어 간다.
잠시 감상에 젖었다가 일상으로 복귀하는 나와 달리, 주인공 '호연'은 더 깊은 허무를 느꼈을 것이다. 그가 이제와서 삶의 근처가 아닌 중심에 선 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아니, 그가 서 있는 그 곳이 어디인들 과연 의미가 있었을까? 그래서 늘 그렇듯 삶도... 죽음도... 다만 이 근처 어디에 있을 것이란 짐작만으로 살아가는 '호연'의 인생이 곧 우리의 인생 모습과 닮아 보였다.
이 후의 작품들도 모자이크처럼 알록달록 제 빛을 내고 있었다.
강영숙 「그린란드」 에서는 모든 책임을 아내에게 떠넘기고 사라져 버린 남편이란 사람들의 무책임함에 할 말을 잃었다.
김경욱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에서는 최근 벌어진 인면수심의 아동 성폭행 사건과 맞물려 희망 없는 삶을 살아가기가 얼마나 고달픈 것인지 할아버지와 손녀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손녀가 불러주는 크리스마스캐롤이 나는 세상에서 가장 슬픈 아리아로 들렸다.
김사과 「정오의 산책」은 다소 난해한 작품이었다. 삶의 희망을 잃어버린 또 다른 주인공 '한'은 갑자기 어떤 깨달음을 계기로 삶에 초연한 자세를 갖게 되나 그것은 어쩐지 불안하고 파괴적이며, 암울하다. 결국 결말 부분에서는 공포스럽기까지 했던 그래서 따뜻하고 여유로운 제목과는 너무 달랐던 이야기였다.
김 숨 「간과 쓸개」의 주인공 역시 말기 간암환자다. 그에게는 가족이 있지만 없는 것과 같고, 뿌리가 잘리고 가지마저 잘린 나무 즉 죽은 것도 살아 있는 것도 아닌 골목이 곧 그의 인생을 상징한다. 아파서 죽는 것보다 인생의 끝자락에 홀로 남겨진 고독이 그를 더욱 슬프게 했다.
김애란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한 때 누구나 경험해 봤음직한 짝사랑의 감정을 아주 잘 묘사한 작품이었다. 그래서 주인공 '미영'이 느꼈을 모든 감정 쉽게 감정이입하며 재밌게 읽어 나갔다. 특히 마지막 부분에 등장했던 어린시절 '병만'과의 일화가 '선배'와의 사건과 오버랩되며 흥미로웠다.
김중혁 「C1+y=:[8]:」 이 책에 실린 열 가지 이야기 중 가장 제목의 의미가 궁금했던 작품이었다. 그리고 책에서 그 제목의 의미를 알게 됐을 때 그 재밌는 발상에 놀라웠던 한편, 나의 상상력 수준이 바닥을 치고 있음을 알고 실망하기도 했다. 어쨌든 스케이트 보드와 정글에 얽힌 재밌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정말 긴허리아기말원숭이가 생명의 은인이라니... ^^;;
배수아 「올빼미의 없음」 죽음이 가져온 존재의 상실이 <없음>이란 두 글자로 표현된다. "우리가 곧 없음에 불과하다면, 그러면 우리는 왜 지금 여기 있는 것인가."(p.268). 이처럼 <없음>이 결과적으로는 <있음>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은희경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이 이야기에는 안나와 루시아, 요한이 등장한다. 학원에서 처음 만난 안나의 첫사랑 요한. 그러나 그와의 가장 달콤했던 순간은 그녀의 인생에서 가장 지우고 싶은 순간으로 이어진다. 나는 박민규의 작품에서도 '요한'이란 이름의 사내를 만났지만, 그 때는 왜 떠오르지 않았을까? 내가 초등학교 5학년 때 학원에서 만났던 '요한'이란 이름의 아이를 잠시 좋아했었다는 사실이... 안나처럼 나도 과거를 추억할 수 있었고, 은희경 작가의 작품은 언제, 무엇을 읽어도 참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성태 「이미테이션」 이태원에만 가도 진짜보다 더 진짜 같은 짝퉁 명품이 판을 친다. 사람도 짝퉁이 있을 수 있다는 상상을 글로 표현해낸 이 작품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진짜'보다 '가짜'가 더 편해서 '가짜' 인생을 살고, '가짜' 사랑을 하며, '가짜' 가방을 드는 사람들을 이야기 한다. 그리고 가짜가 진짜로 둔갑하는 것은 스스로가 믿고 싶은 대로 믿기 때문에 벌어진다는 것을 말이다.
책의 앞 뒤로 박민규 작가의 수상소감과 인터뷰 내용이 실려 있다. 박민규 작가의 수상소감을 읽으며, '아... 글 잘쓰는 작가의 수상 소감이란 또 다른 작품이구나...' 생각했다. 그리고 인터뷰 글을 통해 박민규란 사람에 대해 알 수 있어서 좋았다.
야금 야금 빼먹다 보니 어느새 텅 비어버린 초콜릿 상자.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 열 가지 맛이 전해준 느낌들로 채워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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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을 책이 없어 학교 도서관에 들렀다가 그냥 집어 들었다. 박민규의 '근처'를 읽다보니 2010년도에 읽은 책이었다. 이렇게 기억력이 없어서야. 다행히, 모든 작품이 처음 읽는 것 같았다. 수상작인 박민규의 '근처'가 가장 좋았다. 그런데, 작품 내용보다 박민규는 왜 최근에는 작품을 발표하지 않을까 궁금했다. 발표 하는 데 나만 모르는 것인가? '지구영웅전설'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등등 정말 좋아했던 작가였다. 어느해부턴가 소설을 발표했다는 얘기를 듣지 못 했다. 나이가 먹을 수록 소설을 읽는 재미를 새롭게 느낀다. 왜일까? 특히 한국 소설을 읽는 재미를 새롭게 느끼고 있다. 작가들이 과거보다 작품을 더 잘 쓰기 때문인가? 개인적으로는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그냥 평균적으로 잘 쓴 작품과 못 쓴 작품이 공존하는 것 같은 데, 나는 왜 나이를 먹을 수록 소설 특히 한국 소설에 빠지는 지 모르겠다. 더구나, 이제 시대는 점점 더 종이 책에서 멀어지고 있는데. 이것은 그 이유라고는 할 수 없다. 개인적으로 인문 사회 과학 책들은 빠르게 읽게 되는데, 문학은 최대한 천천히 꼼꼼히 읽게 된다. 이에 따라, 내용보다는 읽는 방식 때문에 문학 특히 소설에 빠지는 것 같기도 하다. 다분히 나만의 경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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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후보작으로 실린 김애란의 '너의 여름은 어떠니'.
김애란 작가는 이 작품으로 얼마 전 김유정 문학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수업 교재이기 때문에 읽은 것이지만 이 작품은 같은 책에 실린 10개의 단편 중 유달리 기억에 남는 단편소설이었다. 교수님이 이 작품에 관해, 그리고 김애란 작가에게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셨을 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으니까.
여자는 친구의 장례식에 입을 옷을 고르던 중, 좋아하던 선배로부터 연락을 받는다. 선배는 여자에게 홍대 인디밴드 문화가 뭔지, 대학로 소극장의 서늘함이 얼마나 기분 좋은 건지 알려준 사람, 어느 집단에나 있는 친절하고 인기 많은 사람, 그리고 '나의 부재를 알아준 사람'이었다.
신입생 환영회 때 여자는 너무 많은 사람들 가운데 누군가 자신의 존재를 알아주길 바랬다. 알 수 없는 우울을 스무살의 전유물인 양 온 몸에 품고서. 그렇게 아이가 응석을 부리듯 무리에서 슬쩍 빠져나온 그녀를 단 한 사람, 선배만이 알아본다. 그것도 그녀의 이름을 부르면서. 그리고 돌아서며 결정적인 한 마디를 날린다. "고개 좀 들고 다녀라, 이 녀석아."
이 한 마디는 여자의 '봄'을 온통 선배로 취하게 만든다. 아름답고 향기로워 자꾸만 보고 싶고 맡고 싶지만 강한 독성을 가진 식물처럼, 가까이 가려 할 수록 여자는 상처를 입었다.
여자는 선배가 자신에게 먼저 연락을 한 것이 자신을 어떠한 인간적 감정을 나눌 상대로서 필요로 한 것이 아니라, 일 때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선배의 부름에 응한다. 친구인 병만이의 장례식을 가지 않고서라도, 이유는 단 하나 선배를 돕고 싶어서. 그러나 선배는 예전처럼 다정한 모습으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주길 기대하는 여자의 실낱 같은 바람을 무참히 깨뜨리고, 끝까지 철저하게 일을 하는 관계로만 여자를 대한다. 그리고 여자의 머릿속을 아득하게 하는 한 마디를 날린다. "고개 좀 들어, 이 녀석아."
여자의 부재를 알아준 사람(이것도 나중에는 조그마한 반전이 있지만)은 선배였지만, 물에 빠져 하마터면 생의 부재를 경험할 뻔한 걸 구해준 사람은 죽은 병만이었다. 옅게나마 계속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에게서 정신이 멍해지고 가슴이 먹먹해지는 수모를 당하고 돌아온 밤, 한 날의 열대야처럼 죽은 병만이가 찾아온다. 어린아이였던 여자가 살기 위해 꽉 붙잡은 팔, 멍이 시퍼렇게 들어 아팠을텐데도 내색 한 번 하지 않던 병만이, 생사의 문턱에 있는 여자를 유일하게 삶으로 끌어준 아이. 여자는 불현듯 내가 살아 있어, 혹은 사는 동안, 어디선가 누군가 많이 아팠을 거란 생각을 한다.
혹독한 여름이 시작되려 한다. 유난히 더울거라 예상되는 여름과 맞서기 위해 맨손체조를 하고, 괜히 제자리에서 뛰어보고, 이열치열이라며 삼계탕을 먹는다, 누군가는. 하지만 어쩐지 이 모든게 부질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우리가 이렇게 부산을 떨지 않아도 여름은 오게 마련이고 어느일 어느 밤이 되면 열대야가 우리를 휘감고 갈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의 부재를 알아준다는거, 나와 나를 감싸는 모든 것들에 이름을 붙여준 사람은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해마다 돌아오는 여름처럼 내가 존재하는 곳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아서일까? 그게 맞다면 그것이 어떤 형태로 있건,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가치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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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진심을 담아 박민규 작가님의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을 축하드린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책을 접해 보지않았다면 박민규 작가님을, 근처를 이해하는데 좀 복잡했을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 또 반갑고 어떤 감동, 감정의 소용돌이를 불러다줄지 기대했다.
역시, 수상받으실 만한 내공의 소유자시다는걸 새삼 또 느꼈다.
중년의 남자가 그것도 미혼의 남자가 제목 그대로 근처인 삶을 사는... 그리고 죽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모습 속에서, 어떤 말을 전하고 싶었던건지, 타임캡슐과 여러 상황들이 흔한 일상의 인생의 부분같으면서도 흔하지 않은 묘한 전개감 속에 두 눈과 두 귀를 쫑긋거리며 읽었다.
마지막에 던지는 근처의 묘미를 나름 음미해보며 근처를 이렇게 담아내는 능력에 뭐랄까, 신은 인간에게 숨을 쉴수 있는 공기를 주듯, 작가는 한 단어, 한 글자에 생명과 그 단어가 가진 묘한 매력을 발산시켜주는것같다는 생각이 든다.
최종 후보작에 오른 그린란드,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정오의 산책, 너의 여름은 어떠니, 간과 쓸개, 이미테이션, c1+y=:[8]:, 올빼미의 없음, 다른 모든 눈송이와 아주 비슷하게 생긴 단 하나의 눈송이 모두 정말 저런곳이 있을까 싶고 현실을 비추는 곳에서 씁쓸했고, 인생살이에 대해 인간이 가지는 분노, 슬픔, 기쁨 등 모든 감정을 환기시켜주는 너무나 멋진 작품들의 대향연이었던것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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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물다 가는 <근처>의 삶이 아닌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고 눈 뜬 물고기 처럼 맨몸의 중심으로 밀고 나가는 기막힌 <중심>의 삶을 살아가기를 간절히 원한다. 작가는 단어의 이음과 끊음을 반복하며 읽는 속도를 가다듬고, 주요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현미경으로 관찰하며 우리들에게 들려준다. 나는 절친노트에 또 한명의 작가를 올린다.
박민규의 소설은 처음이다. 예전 '삼미 슈퍼 스타즈의 마지막 편지'와 '핑퐁' 등의 책 광고를 접하긴 했지만, 그 때의 박민규 소설이라는 것이 허무맹랑한 인물과 사물들의 등장과 이상야릇한 애기들이라 생각하고 읽기를 주저했다. 허나 황순원 문학상 대상작이라는 네온 싸인 앞에 박민규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외모자체가 이 사회와 별개인 듯한 아웃사이더 적인 스타일과 내신 15등급으로 in seoul하여 술만 먹고 졸업한 괴상한 인간이다. 단호히 인터뷰를 일절 거부하고 홀로 춘천의 작업실에서 소설을 쓰는 사내. 팔불출 이상의 마누라에 대한 애정은 공포스럽기도 하다. 가끔 눈을 뜨면 구글을 이용하여 우주 속에서 둥글게 부웅 뜬 지구별을 관찰하고, 무미건조할때면 태평양에 풍덩 빠져 바다 속을 유영한다. 그를 통해 구글 어스라는 우주와 지구별을 관찰할 수 있는 도구가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아무튼 그의 소설은 대상에 빛나는, 빛나는 소설이다 . 소설의 줄거리는 30년 전 국민학교 친구 다섯 명이 가장 아끼는 물건을 철제상자에 넣어 학교 운동장에 묻는다. 주인공 정호연은 군용 나침반을 넣었고, 고향 근처 모서리에서 식당을 하는 박호기는 커다란 매미의 허물을 묻고, 이순임은 여학생답게 잘 말린 꽃을 넣었다.도형이라는 친구는 순임과의 결혼 및 자녀 계획까지 밀봉한채 넣었다. 동구는 봉투 속에 동전을 넣었다. 중년이 된 정호연이라는 주인공은 30년전 소년의 마음으로 타임캡슐을 연다. 30년 전 친구들의 추억이 생각이 나고 다시 30년 후의 중년의 나이에서 다섯 친구들은 다시 만난다. 주인공 정호연이는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선고 받은 간암 말기 환자이다.서울에서 모든 생활을 정리하고 고향을 내려와 마지막 생을 정리하고 있다. 그는 마흔이지만 미혼이며 가족이 없다. 이 세상이 말할 수 있는 외로움의 최절정이다. 그의 모습은 나의 모습이다. 그래서 슬프고 그의 생활과 외로움에 동감한다.
나는 혼자다. 혼자인 것이다. 찾아 나설 아내도 없다. 설사 네 명의 자식이 있다 해도 나는 혼자일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문득 혼자서, 혼자를 위로하는 순간이다. 삶도 죽음도 간단하고 식상하다. 이 삶이 아무것도 아니란 걸, 스스로가 아무것도 아니란 걸, 이 세계가 누구의 것도 아니란 걸, 나는 그저 떠돌며 시간을 보냈을 뿐이란 사실을 나는 혼자 느끼고 또 느낀다. 나는 무엇인가? 이쪽은 삶, 이쪽은 죽음...나는 비로서 흔들림을 멈춘 나춤반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평생을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일 뿐이다.
오피스텔과 직장을 왕복하며 일과 일상사에 묻혀 살아가는 그에게 죽음은 외로움의 종결이고 삶의 진수를 일깨워주는 내면의 시간이다. 반복적이고 지루한 삶을 살다 아무런 이유없이 사형선고를 받고 죽어야만 하는 그의 운명은 인간의 운명을 대변한다. 그렇게 살며 비틀거리다가 사라지고 마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의 존재와 본질을 찾지 못하고 자신의 주변에서 머물다가 사라지는 인생. 그래서 <근처>이다. 그래서 소설의 주된 배경은 <모서리>이다.
정호연이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는 <근처>보다는 <중심>에 대한 역설을 강조하는지도 모른다. 정호연이 내뱉은 독백처럼 '나의 근처를 배회한 인간이 되고 말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나머지 주인공의 주변 인물들은 큰 역할을 하지 못한다. 단지 이순임이라는 여성은 삶의 비루함을 보여준다. 남편과 이혼하고 두 아이를 키우는 싱글맘인 그녀는 항상 생활의 남루함 속에서 살아가는 인물이다. 우연히 정호연이를 만나고 아직까지 미혼이라는 사실에 쉽게 접근한다. 이혼녀와 미혼남의 만남. 끈적끈적한 애정행각 보다는 상처있는 사람끼리 살포시 껴안는 따뜻함이 묻어나오는 관계들이다. 정호연은 어릴적 친구 순임을 통해 외로움을 치유하고 암마저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얻기까지 한다. 사랑의 힘이랄까! 허나 한 번의 섹스를 끝내고 순임이 하는 말
나 돈 좀 빌려줘
반전의 한마디. 중년의 사랑은 이해타산적이며, 남의 호의는 댓가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주인공 정호연은 기꺼이 빌려준다. 죽음을 앞둔 그에게 돈은 돈이 아닌 것이다. 마지막 인간의 정을 느끼게 해준 사람에게 그 정도의 돈은...어쩌랴 싶다. 이순임을 통해 30년 전 순수의 감정은 30년 후의 타산적 본능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각인시켜 준다. 김훈식 표현대로 '인간은 비루하고던적스러운 것'이다. 결국 모든 것은 근처에 머물고 있다. 정호연도 이순임도 박기호도 동구도 도형도. 아니 우리 인간 모두가 그러하다. 작가 박민규는 일상사에 묻혀 반복적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자신이 추구하는 가치가 무엇인지, 우리가 서있는 위치가 어딘지를 자문하는 화두를 던진다.이렇게 말이다.
환하게 웃고 있는 낯선 얼굴을 바라보며 나는 오오래 그 남자의 삶에 대해 생각해 본다. 그는 어디 있었을까. 그리고 그는 어디로 가는 걸까. 아마도 이 근처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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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단편 소설을 읽었다.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들이다. 10편의 단편이 최종 후보로 올랐고, 영예의 수상은 박민규가 차지했다. 「근처」라는 작품이다.
<2009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중앙북스, 2009년). 황순원 문학상 수상작품집은 처음이다. 그동안 수상작품집은 잘 읽어오지 않았던 탓에 낯설게 느껴졌다. 내게는 생소한 작가들의 이름도 보였다. 너무 무식한 거 아니냐라고 잠시 자책할 뻔 했지만, 마음을 다독였다. 그러니 이번 기회에 이름을 잘 기억해 두자고 애써 위안을 삼았다.
작품을 읽기 전 가장 궁금했던 사실은 황순원 문학상이 선정하는 단편소설의 기준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냥 궁금했다. 심사위원의 변을 보니 고심했음이 엿보였다. 단편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한 번 훑어 봤다. ‘뚜렷한 편향성을 보이는 것이 아닌가’라는 문제제기가 역시 정당했음을 생각했다. 심사위원들이 고뇌했던 것처럼 바람직한 현상만은 분명 아닌 듯하다.
내가 느낀 그 편향성의 방향은 ‘삶의 쓸쓸함’이다.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달려온 앞길에 드리운 검은 그림자, 그리고 소중한 추억을 짓밟는 속된 세상(박민규의 근처), 속된 삶의 지향성들이 역시 소리 소문 없이 사라져가는 세계(강영숙의 그린란드), 돈으로 모든 걸 해결하려는 가진 자들과 자존심을 짓밟히지 않기 위해 가지지 못한 자가 선택한 불합리한 해결의 방식(김경욱의 신에게는 손자가 없다), 헤어날 수없는 도시를 탈출하고픈 슬픈 노동자(정오의 산책), 쓸쓸한 노년의 죽음과 어린 시절이 추억(김숨의 간과 쓸개), 보기 좋게 이용당한 사랑의 추억(김애란의 너의 여름은 어떠니),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문제(전성태의 이미테이션)….
이 ‘삶의 쓸쓸함’은 무엇으로부터 발생하는가. 심사위원들이 문제제기한 ‘오늘날 한국 소설의 객관적 현실의 반영인 것인가’라는 물음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는 없을 것이다. 하루가 다르게 비인간적인 인간의 모습이 회자되는 이 사회에서 오히려 소설은 그나마 낫다.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너무 많은 세상이다.
by 꽃다지, 2009년 11월 17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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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불편한 진실과 편리한 거짓 사이에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 것인가 하는 주제였다. 그 때 예로 든 것은 "만일 내가 입양아라면 부모가 그 이야기를 해줄 것을 바랄 것인가. 아닌가." "만일 애인에게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그것을 알고 싶을까, 그냥 모르는 채가 나을까." 하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가장 많은 논란이 된 것은 "만약 내가 죽을 병에 걸려서 남은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고 싶을까, 모르고 싶을까 "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싶다."에 한 표를 던졌다. 만약 자신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면 그것을 알고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싶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제 9회 황순원문학상 수상작인 박민규의 소설 <근처>는 바로 그 이야기를 우리에게 하고 있다. 주인공 호연은 고향 마을에 들어왔다. 부모의 불운으로 어린 시절 숙부의 집에 맡겨져서 자란 그에게 이 곳은 고향과 다름이 없다. 호연은 다가올 끝을 시작한 곳에서 만나고 싶었는지 모른다. 평생을 직장 밖에 모르고 살아온 그에게 기대는 가족은 없다. 그야말로 홀홀단신인 호연. 그가 남기고 가는 것이 거의 없으므로 그다지 이승에 미련이 남지 않는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사람이라는 게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애써 피하는 것이 다만 여기에 남을 가족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만은 아닐 듯 싶다. 그럼 과연 무엇일까? 우리의 두려움의 색깔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언젠가는 가야할 그 곳이 어디인지, 어떤 곳인지 모르므로 두려워하는 것일까? 가 보지 않은 낯선 곳에 대한 두려움? 아니면 남기고 떠나는 것들에 대한 아쉬움? 호연은 어린 시절을 보낸 그 마을에서 어릴 때의 친구들과 만난다. 그들과 함께 했던 타임캡슐을 열어보고 그 때를 추억하면서 이제서야 의미를 깨닫기도 하고, 너무도 달라진 그 친구들과 새로운 만남에 살짝 설레기도 한다. 잊고 지냈던 따뜻한 기억들을 되살리면서 호연은 미진한 숙제를 하듯이 마음을 정리하는 듯 싶었다. 나이를 한 살 두 살 먹어가면서 내가 이런 경우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작가의 나이가 나와 비슷한 연배여서 동질감을 느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만약 나라면 나는 어떻게 해야할까. 나는 어디서 어떻게 내 인생을 정리할 것인가. 호연과 다르게 이승에서 맺은 인연이 많은 나는 어쩌면 더 할 일이 많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들 그런 말들을 했나보다. 가진 게 많을 수록 삶이 더욱 무겁다고들 말이다. 무엇부터 내려 놓아야 인생이 가벼워질까? 물질일까. 사람일까. 아니면 혹시 나의 마음 속의 욕심들일까? 박민규의 이 소설은 그런 고민을 하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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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란 무엇인가? 주인공 ‘나’는 퇴직하면서부터 모든 생활이 버거워졌다. 퇴직 후 데생을 배우기도 했고, 기원을 오가고, 아주 잠깐 철학 강의를 듣기도 했지만 생산적이지 않은 삶은 곧 무력감을 느끼게 했다. 자괴감, 쓸모없는 인간이 되었다는 허무감…… 평생을 자식을 위해 일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살뜰한 보살핌이 아닌 외면과 방관이었다. 아내의 죽음 앞에서도 재산부터 챙기는 자식들에 대한 배신감. 며느리에게 요실금까지 고백했건만 끝끝내 집으로 오시란 얘기를 듣지 못한다. 친구의 장례식에서 아들들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자식이란 결코 의지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고락을 함께 했던 아내는 자궁을 들어낸 채 가스검침 조차도 할 줄 모르는 자신을 홀로 남기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나’는 아내로부터 버림 받았음을 느낀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더 두려운 것은 혼자 살아가야 한다는 것. 아내 없이 단 하루조차 어떻게 살아야할지…… 퇴직과 아내의 죽음, 자식들에 대한 실망감, 늙고 병듬……순차적으로 찾아오는 일련의 ‘고려장’ 과정, 준비없이 사회로부터 격리되는 과정을 혼자 남아 겪어야 한다는 것이 더 두렵다. 그러나 작가는 이 노인을 그냥 외롭게 방치하지 않는다. ‘나’는 고향의 요양원을 찾아가서 같은 처지의 동창들을 만나 같은 공간에서 밥을 먹고 TV를 보고 산책을 하고 잠을 잔다. 치매에 걸린 여자 동창과의 때 아닌 로맨스로 새삼 남자임을 느껴보기도 한다. 어찌 보면 이러한 스스로의 고려장 과정은 우리 모두의 일일 것이다. 앞으로 우리 사회에서 이러한 현상을 아주 보편적인 일이 될 것이다. 경제적인 능력이 있든 없든 자식에게서 ‘분리’되어 스스로의 삶을 택하고 가족이 아닌 제2가족, 친구들과 노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작가는 우리의 미래를 이렇게 제시했다. ‘나’는 비록 의미 있는 대화를 나누지 못했지만 여자 동창과 한 가족이 되면서 위안을 얻고 ‘행복’하게 영원한 낮잠을 자게 된다. 이것이 우리가 추구하게 될 ‘유토피아’라고 하면 너무 억지스러울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