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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pen your ey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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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보다는 비극을 사랑한다. 신파는 싫어하지만 비극은 사랑한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의 힘을 믿으며, 인간은 웃음보다 눈물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두 명의 아버지를 동시에 지녔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그토록 괴로워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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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보다는 비극을 사랑한다. 신파는 싫어하지만 비극은 사랑한다. 그것이 가져다주는 카타르시스의 힘을 믿으며, 인간은 웃음보다 눈물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고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프로이트 이론에 의하면 오이디푸스는 서로 다른 차원에 속해 있으면서 서로 다른 역할을 하는 두 명의 아버지를 동시에 지녔기 때문에 아버지를 죽이고 그토록 괴로워했던 것이라고 한다. 자신을 아버지의 남근과 동일시하던(그리하여 어머니에게 그것을 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던) 아들은 아버지에게서 거세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자아를 무의식 속으로 억압하고 아버지의 질서에 따른다. 따라서 아버지는 거세자이자 일종의 살인자가 된다. 하지만 그와는 다른 아버지가 또 있다. 이 아버지는 살인자이며 거세자가 아니라, '죽음의 상징화된 형태'인 자신의 이름을 아들에게 물려주면서 아들을 키워주는 자이다(아버지가 죽고 난 뒤에도 그 이름은 아들의 이름으로 이어지며 아버지는 그 속에 남는다). 아들이 자신을 키워준 아버지를 진정한 아버지로 여기지 못하는 경우 아버지의 이름은 영원히 허위로 드러나며, 이때 진정한 아버지를 찾아야 한다는 욕망이 (대부분 강박관념의 형태로) 생겨난다. 아들은 계속 살기 위해 키워준 아버지를 죽여야 한다는 욕망을 무의식 속으로 억압한다. 그리고 운이 좋으면 잊을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않다. 어떤 계기에 의해 자아의 눈가리개가 벗겨지는 순간이 있다. 그때 아들은 '조사'에의 욕망을 느낀다. 사실 오이디푸스가 자신의 과거를, 자신이 진짜 누구인가를, 자신이 죽인 사람이 누구인가를, 자신이 같이 잔 여자가 실은 누구인가를 '조사'하지 않았다면 이 모든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다. <스캔들>의 조원 식으로 말하자면, 오이디푸스의 죄는 "궁금증을 느낀 죄, 조사한 죄, 덮어둘 기회를 줬는데도 덮어두지 않은 죄"였다. 눈을 감고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 식으로 살아가고 있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그는 테이레시아스의 말을 무시하지 못했다. 세계에는 그가 모르는 게 너무 많이 있었다.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어, 모든 인간을 파멸로부터 구원하고, 인간에 관해서는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인간으로 여겨졌던 지혜의 소유자였던 그가, 자신에 대해서는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그래서 그토록 고통스러운 조사를 시작한다. 자신의 본성에 대한 조사를, 꼭 해야 하는 것일까? 가엾게도 오이디푸스가 살던 시대에는 이토록 번화한 도시의 밤거리가 없었다. 할리우드도, TV도, CF도, 눈을 감게 해주고 잊게 해줄 수많은 눈가리개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눈을 뜨고, 이윽고 보아서는 안될 것을 보았으며, 그리하여 스스로 두 눈을 파내야 했다. 그렇지만 눈을 잃은 후 그는 눈을 뜨고는 볼 수 없었던 수많은 것들을 보게 되었으며, 많은 화가들은 그래서 눈을 잃은 그의 모습을 즐겨 그렸다. 오이디푸스 이야기는 시대에 따라 끝없이 변화해 왔으며 각 시대마다 그 시대가 요구하는 바에 맞게 조금씩 윤색되어 왔다. 20세기 이후 오이디푸스의 영역은 확장되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흔해빠진 말이 이제는 퀴즈쇼에나 등장하듯 이 시대에는 누구나 오이디푸스이고,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정신병자이고, 누구나 미궁 속에 있다. 도시는 그 자체가 미궁이며 본질적으로 우리의 눈을 멀게 해주니까. 살아가다 가끔씩 고통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곧 눈감아버리고 다시 모른 체 살아가거나, 눈을 파낼 정도로 고통스러운 조사를 계속하거나, 우리는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대부분 전자를 택할 것이다. 나 또한 전자에 익숙한 인간이다. 그리고 그게 옳은 일이라고 믿고 산다. 또한 오이디푸스이던 우리들은 모두 조금씩 테세우스로 진화했다. 오이디푸스는 테세우스에게, 그리스를 상징하는 도시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지혜와 유연함을 가르쳐주었다. 테세우스는 섬세하며 훌륭한 지도자이며, 현대적 인간이다. 그는 아테네의 왕이자 합리적인 왕의 미래상이며, '신과의 대결 혹은 복종'이라는 피비린내나는 투쟁 대신 인간적인 것에서 희망과 정통성을 찾아 백성들을 현명하게 다스린다. 사실 테세우스로 진화하는 지혜를 갖는 것도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는 순전히 개인적인 감상이었고, <오이디푸스>에는 이런 것들 말고도 오이디푸스에 대한 다양한 각도에서의 분석과 오이디푸스 신화의 진화 과정이 가득하다. 특히 '오이디푸스의 정치적 의미' 부분은 오이디푸스를 국가 체제의 발전과정과 연관지어 바라보고 있는데, 매우 신선했다. '회화 속의 오이디푸스'는 매혹적이다. 화가들은 오이디푸스를 다룰 때 종종 그 자신이 오이디푸스가 되어 괴로워했다고 한다. 그의 이야기는 1차원적이고 단면적인 '회화'라는 장르에 담아내기에는 너무 어려운 것이었으니까. 특히 책 표지의 저 그림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의 시선. 그는 지금 스핑크스가 낸 수수께끼를 풀고 있는 중인데, 존재 자체가 '수수께끼'인 스핑크스의 유두가 자신을 향해 뾰족하게 곤두섰을 때에도 정신이 혼미해지거나 유혹되지 않고 끝없이 생각, 생각한다. 그리고 수수께끼를 푼다. 한쪽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킨다. 그는 자신에 대해 생각하고 조사하고 궁금해한다. 흔히 예술가는 현실과 유리되어 꿈을 좇는 사람으로 여겨지지만, 꿈에 눈이 멀어버리고 신화에 종속되어 버리는 사람은 예술가가 될 수 없다. 보이는 것을 넘어서 다른 것을 볼 수 있어야 진정한 예술가가 될 수 있다. 예술은 신화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니까. 끝부분으로 갈수록 현대화된 오이디푸스 신화들이 등장하는데, 현대의 변주된 오이디푸스 신화들은 역시 좀 시시하고 농담같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멀어질수록, 비극은 옅어지고 잘게 나뉘어진다. 60억이 넘는 사람들의 가슴 속에, 누구에게나, 어디에나, 비극은 각각 다른 색깔과 명도와 채도로 들어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느끼는 비극의 절대량이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 그것이 진짜 비극이 아닐까.
i****2 2003.10.22. 신고 공감 2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