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흔히들 인생을 흐르는 강물에 비유한다. 삶이란 무상한 시간의 모래 위에 남긴 자취에 불과하다. 만대즉순시(萬代即瞬時), 일만세의 시간도 곧 순식간일 따름이다. 그렇다면 묘비명이란 무엇인가? 덧없는 시간의 모래 위에 남긴 마지막 불멸의 발자국 아닌가. 죽음을 통한 삶의 진정성 회복이라는 '메멘토 모리'의 의미가 자찬묘지명에 깃들어 있다. 그런데《춘추좌씨전》을 보면 사람이 불후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덕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거나 말(言)을 세우라고 했다. 좀더 삐딱해진 시선으로 본다면 묘지명은 말을 세우는 형식으로 일신의 덕과 공을 내용으로 담는 교묘한 방편은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나는 과연 딸깍발이 선비들처럼 아무런 과감없이 솔직하게 일생의 성공과 실패, 장점과 단점,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등을 내 묘비명에 새겨넣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저자의 '기행' 시리즈를 읽을 때마다 매번 느끼는 아쉬움이지만, 책의 목차나 구성이 그리 적절하지는 않다고 생각된다. 가령 이 책은 5부로 구성되어 있는데 각 부 제목과 자찬묘지명의 내용이 그리 썩 잘 어울리지는 않는다. 제1부 '이 사람을 보라', 제2부 '이것으로 만족이다', 제3부 '나 죽은 뒤에 큰 비석을 세우지 말라', 제4부 '웃어나 보련다', 제5부 '죽은 뒤에나 그만두련다'인데 비록 저자가 "선인들이 현실의 폭압성 때문에 좌절을 겪으면서도 외부의 것에 분노하기 보다는 모든 것을 천명에 맡겨 마음을 편안히 지녔으며, 비록 지금이 종결의 시간이라 해도 죽은 뒤에나 그만두겠다는 의지를 다졌다는 사실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라고 변을 늘어 놓지만 이런 구분과 소제목은 너무나 임의적이고 피상적이다.
또 한 가지 사족을 달자면 왜 저자가 우계 성혼(1535-1598)의 <묘지>를 맨 처음에 놓았는지 그 이유도 궁금하다.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었는지 아니면 그저 우연찮게 맨 앞에 놓인 건지 약간의 설명이 필요하진 않을까. 만약 독자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것을 노린다면 폐결핵으로 요절한 천재 언공 금각(1569-1586)의 자찬묘지가 더 좋은 시작이 아니었을까. 독자들에게 교훈적인 것을 전달하고자 한다면 재간노인 임희성(1712-1783)의 묘지명이 더 낫지 않았을까. 28세의 젊은 나이에 자기수양을 위해 지은 <지일십계至日十誡>는 불혹의 나에게도 가르침을 준다. 여기에 그대로 옮겨본다.
1.함부로 말하지 말라. 2.함부로 장난하지 말라. 3.함부로 남의 장단점을 논하지 말라. 4.함부로 조정의 득실을 이야기 말라. 5.함부로 유력가들과 왕래하고 교유하는 짓을 하지 말라. 6.함부로 점을 치고 별자리 운수를 따지지 말라. 7.함부로 남의 시를 논평하고 단정하지 말라. 8.함부로 남의 서적을 엿보지 말라. 9.함부로 잡박한 서책을 보지 말라. 10.함부로 저술의 사업에 뜻을 두지 말라.
|
|
묘비명 글씨기의 양식을 모두 망라하고 한국고전문학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자지, 자명 등의 자료들을 분류 정리하여 총망라함으로써 이방면의 초석을 놓고있다. 원문에 대한 번역뿐아니라 해당 인물들의 생애와 그들의 시대상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옛사람들이 삶과 죽음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 보여준다. 그렇게 하므로써 우리 선조들의 내면세계를 조명해주고 있다.
작가의 문헌을 해석하는 능력과 함께 행간을 읽는 상상력으로 선조들의 내면세계를 살아있고 잡을 수있는 가까운 것으로 복원시켜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의 선조들의 내면을 접하고 교훈을 들을수 있도록 하였다.
읽어보직한 책이다. |
|
옛 선조들이 남긴 글과 흔적을 보고 있자면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중에도 그분들의 마지막을 함께한 묘비명에 대해서는 경외감과 함께 호기심이 생기게 된다. 그런면에서 이 책의 제목인 내면기행은 참 멋진 제목이 아닌가 싶다. 돌아가신 분의 인생을 그리며 그분의 묘비명을 보고 있자면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글쓴이의 내면에 대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지 않을까. 조선시대 위인들의 전기를 봐도 빠짐없이 마지막을 장식하는 내용중의 하나가 그분들의 묘비에 어떠한 내용이 적혀있는가 하는 것이 아니던가. 책속에 담겨있는 우리 선조들의 깊은 고뇌와 사색, 아름다운 글쓰기는 지금 읽어봐도 가슴속에 많은 것을 전해주는 느낌이다. 고전이라도 하면 웬지 어렵다는 느낌에 접하기가 꺼려질수도 있겠지만 이 책은 현대적인 언어로 번역을 했기때문에 고전에 조금만 관심이 있다면 어렵지 않게 책을 접하고 그 감동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묘비명이라는 것이 분량으로 보면 그리 길지 않은 글일수도 있지만 그 짧은 글안에 한사람의 인생을 담아낸다는 것이 오죽 힘든일이겠는가. 그래서 이 책안에 담긴 글귀들이 남기는 울림은 더욱 깊은것 같다. 다소 어려운 면이 있지만, 선조들의 정취를 느끼고 싶다면 가을 밤 조용히 혼자 사색을 즐기며 읽기를 추천한다. |
|
..尙友千古라.. 古人들의 墓誌에서 그분들이 후생들에게 전해 주는 멧쎄이지가 강열하였다...
우리 모두가 한 삶을 살고 있지만 언젠가는 인생을 정리할때가 오는데 古人들 처럼 담담하게
자기 일생을 정돈할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좋은 책이 나왔다...자료를 수집하느라고 저자의 수고가 많았을것으로 생각한다..
|
|
죽음이 그 사람을 말해준다 |
|
사람이 한 평생을 살면서 하루기 십년(十年)같다고 한다면 좋은 일만은 아니다. 겉으로 봐서는 70년의 나이를 열배인 700살을 사는 것이지만 그만큼 하루하루가 조용한 날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북송 때의 소식(蘇軾)은 아우 소철(蘇轍)에게 보낸 편지에서 “아무 일없이 조용히 앉아 있으면, 곧 하루가 이틀인 것같이 느껴진다. 만약 이런 식으로 조처할 수 있다면 우리 삶은 늘 매일이 오늘인 듯 느끼게 될 것이니, 일흔 살까지 살 수 있다면 곧 140살을 사는 것이 된다.”고 말했다. 소식에 따르면 70년의 나이를 곱절인 140살로 사는 것이야말로 넉넉하고 편안한 삶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삶과 죽음은 다를 게 없다. 삶이 곧 죽음이요, 죽음이 곧 삶이다. 사마천은『사기』에서 “죽음에 대처하기 어렵다.(處死者難)”를 말했던 것은 다름 아닌 ‘의미 있는 삶을 살아나가야 한다.’는 것을 반추하기 위함이었다. 그리고『춘추좌씨전』을 보면 사람이 불후의 이름을 남기기 위해서는 덕(德),공(功),언(言)을 말했다. 즉 덕을 세우거나 공을 세우거나 말을 세워야 했다.
심경호의『내면기행』을 읽으면서 옛 사람들의 묘비명과 묘지명을 마주하게 되었다. 옛 사람들은 묘도(墓道: 혼령이 다닌다고 여기는 무덤 앞의 길)에 세우는 묘비(墓碑)와 광중(壙中: 무덤의 속)에 묘지(墓誌)를 묻었다. 이러한 묘도문자(墓道文字)는 삶과 죽음에 대한 사색이며 성찰이었다. 그래서 어떤 한 사람의 죽음이 일회적으로 끝나지 않고 역사적으로 살아 숨 쉬었다. 삶과 죽음을 반성하면서 해서는 안 될 일과 해야만 할 일에 대한 뜨거운 가르침을 전해주었다.
이 책을 보면 뼈 속 깊이 새겨지는 문장들을 만날 수 있다. 김광수(金光遂)는「상고자김광수생광지(尙古子金光遂生壙誌)」에서 “늙은 이 몸은 죽음과 종이 한 장 사이이니 뼈야 썩어도 좋다만 궁극에 이르기 어렵기에 안타깝다.”고 토로했다. 그리고 김종수(金鍾秀)는「자표(字表)」에서 “행적이 우뚝하고 마음이 허허로워 탕탕(蕩蕩)한 사람이 아닌가?”라고 하면서 내가 죽을 때에 비석을 세우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런가 하면 이황(李滉)은「자명(自銘)」에서 “시름 가운데 즐거움 있고, 즐거움 속에 시름 있도다.”라고 말했다. 노수신(盧守愼)은「암실선생자명(暗室先生自銘)」에서 “대의가 분명하기에 스스로 믿어 부끄럼이 없도다.”라고 하면서 자신의 비석에 암실(살아있을 때 만든 자기 무덤)이라고 적었다. 끝으로 박세당(朴世堂)은「서계초수묘표(西溪樵叟墓表)」에서 “이 세상에 태어났으므로 이 세상 사람답게 살면서 남들로부터 좋은 사람이라고 여겨지면 그걸로 옳다고 하는 자에게는 끝내 머리 숙이지 않겠으며 마음으로 항복하지 않겠다고 여겼다.”고 했다.
저자는 이 책을 불퇴전(不退轉)을 결심한 사람과 같은 심경으로 엮었다고 했다. 옛 선인들의 묘도문자에는 시대를 넘나드는 삶의 지혜와 세심한 당부를 표현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날 성공이라는 물질만을 바쁘게 쫓아가는 우리들에게 『내면기행』은 뜻 깊은 인생수업으로 자기 성찰의 기회를 갖게 해주었다.
|
|
묘비명 하면 "우물쭈물하다 내 이럴 줄 알았지"라는 쇼펜하우어의 묘비명을 떠올리는 게 고작이었는데, 옛 선조들이 스스로 지은 묘비명,이라는 말에 끌렸다.
쉽지 않고 쇼펜하우어의 묘비명처럼 짧지도 않은 묘비명들을 하나씩 읽어가면서, 어느 순간 ‘선비라는 사람’이 이해되었다. 단순한 사상으로서의 유학을 넘어서 ‘체화된 유학’을 알 것 같아졌다. 삶의 짧은 순간, 작은 결정에도 그것이 대의와 명분에 합당한지, 끝없이 고민하고 스스로 검열하는 선비들이 보였다. 충격적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자살에 이어, 예상했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김대중 전 대통령의 죽음 그리고 뒤이은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와 상황을 되짚어보면서,
“이래서 사람은 ‘잘살아야’ 하는구나” “살아서보다 죽어서의 평가가 더 무섭구나”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죽어서 제대로 알 수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들로 참 묘한 심정이었다.
이 책이 단순히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넘어서 지금 시대에 깊은 사색과 위로를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한다.
|
|
옛사람들은 죽음이 가져올 내 존재의 무화를 극복하려면 영원히 썩지 않을 세가지를 이루라고 했다.덕과 공과 언.하지만 어느 하나도 쉽지 않기에 죽음을 사색하며 삶의 의미와 자신의 본래성을 추구했다고 한다.자기의 묘표와 묘지를 적고 자기의 만시를 지으며 죽음이 가져올 통절한 아픔과 슬픔을 가상체험함으로써 자기성찰의 빛을 찾아내어 어둠의 죽음으로 부터 살아돌아왔다.
내 묘비명엔 무엇을 쓸까? 뜻은 짧은데 명은 기니 운명이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