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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에는 종교와 신국이라는 악몽에 가위눌리고 억압받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의 귀환이라는 오늘날에도, 종교는 희망 바이러스보다는 공포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사랑이 아니라 증오를 자라나게 하는 사악한 온상이 되고 있다. 과학과 종교의 영역을 막론하고 다시 한번 진정한 계몽의 도래를 예고하는 선지자들의 외침이 우리 귓가를 맴도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종교적 체험이나 삶의 위안이 주된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신을 체험했다는 종교적 체험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현대인이 제도화된 종교를 마치 술을 마시고 음악을 듣고 감기약을 먹는 것처럼 이용하고 있다는 객관적 사실도 부인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이 반대하는 것도 결코 종교적 체험이나 영성이 아니라, 종교적 근본주의와 종교적 문자주의라는 점을 일단 주의해야 한다. 전작 《예수는 신화다》와 《예수와 잃어버린 여신》의 내용을 기초로, 신작 《웃고 있는 예수》는 종교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철학적 지혜와 영지주의적 영성을 설명하고 있다. 이 책은 상당히 흥미진진하며 매우 잘 읽힌다. 종교의 거짓말에서 주로 문제삼고 있는 것은 종교적 문자주의의 독소이다. 성스러운 경전은 오류가 없는 신의 말임을 철석같이 믿는 게 종교적 문자주의다. 저자들은 경전 자구에만 매달리는 그런 편협하고 고지식한 입장을, 독단독선의 근본주의적 태도를 강력하게 비판한다. 「웃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영지주의적 예수의 이미지로 영적 깨달음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서 웃고 있는 예수는 죽음은 부정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은 자각 상태와 저자들이 강조하는「낙관적 믿음의 생성」을 표현한다. 뒤집어 말한다면, 골고타 언덕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예수의 이미지는 권위주의적인 교회의 이미지이다. 웃고 있는 예수는 기존의 기독종교와는 매우 다른 차원의 영적 윤리를 강조하는데, 이를 이해하기 위해선 먼저 저자들이 선택한 영지주의가 무엇인지를 이해해야 한다. 영지주의는 크게 광의와 협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의의 영지주의는 삶 자체가 깨달음의 과정임을 강조하는 신비 사상으로, 모든 종교에 열려 있으며 영지주의적 영성은 모든 존재간의 사랑과 일치를 노래한다. 이런 광의의 영지주의 시각에서, 궁극적 실재의 의미는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협의의 영지주의는 서양 고대 미스터리야 종교에서 기원한 초기 기독교를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와 로마 교회의 대립은 바로 영지주의와 문자주의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이 책은 「문자주의적 종교에 대한 저주 섞인 고발이며, 영지주의적 영성에 대한 열정적인 찬사이다」. 저자들에 따르면, 문자주의 종교는 21세기 세계평화를 가장 위협하는 존재로,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을 재생산하고 있다. 항상 근본주의가 있는 곳에 전쟁과 파괴가 있어 왔다고 강조한다. 책은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의 문자주의 종교를 무지와 분열과 고통의 원천으로 규명하고, 이런 광기 어린 문자주의 종교를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던져버리자고 호소한다. 전작 《예수와 잃어버린 여신》에서도 종교를 악마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라고 규정한 바 있다. 그러나 저자들의 이런 입장이 결코 반종교적인 것은 아니다. 단지 종교적 문자주의와 근본주의에 반대할 뿐이다. 「신약성서는 유대인 탄압을 합법화했으며, 또한 악마의 자식이자 사탄의 교회를 세운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를 죽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유럽의 모든 개신교도들을 파괴하려는 계획과 토착 미국인들의 대량 살상은 구약성서에 의해 합법화되었으며, 구약성서는 선택 받은 민족에게 신성하게 예정된 길을 방해하는 자들을 학살할 것을 명령했다. 신은 인종청소를 승낙했다. 성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다!」(32쪽) 영지주의자들은 자각적인 삶을 추구한다. 사랑, 관조와 명상, 일자와 교감, 소통과 대화, 선택, 초월과 변화, 카타르시스 등등, 소크라테스, 플라톤, 에픽테투스, 테오도투스, 루미, 알렌 긴즈버그 등 고금의 수많은 영지주의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설파해온 것이다. 세상은 환상이며 꿈과 미망이며 매트릭스이다, 반대로 깨달음은 부활이요 영지의 체험이자 삶의 진정성의 회복이다. 깨달음이 없는 상태가 죽음이며, 깨달음이 없는 우리는 이미 죽은 자와 매한가지이므로, 진정한 삶을 회복하거나 부활시키려 노력해야 한다. 또한 천국과 지옥은 「현실의 삶을 체험하는 두 가지 방식」으로 정의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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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제목만 보고 웃고있는 예수를 맘대로 상상했었다. 책을 받고 부제목인 종교의 거짓말과 철학적 지혜란 글씨들을 보고 아.. 내가 상상한 책이 아니구나 비로소 생각했다. 내가 늘 이렇게 성격이 급해서 보고싶은것만 뇌리에 팍 박아버리곤한다. 알고보니 <예수는 신화다>를 쓴 저자였던것이다. <예수는 신화다>란 책은 나오자마자 큰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안다. 아마 이단서적(기독교인의 시각에서)의 1순위가 아닐런지... 내가 이 책을 읽고싶었던 이유는 오로지 단 한가지.. 웃는 예수(님)가 상상이 되질 않아서였다. 웃고있는 예수를 쉽게 상상하는 사람이 많지 않은줄로 안다. 늘 나대신 십자가에 못박히셔서 눈물과 피를 함께 쏟아내는 모습이 바로 내가 아는 예수의 모습이다. 교회를 떠난지 언 십년이 다 되었지만 어릴적 각인된 예수의 모습은 아직도 내 주위를 맴돌고 있다. 항상 마음 한구석에 울고있는 그의 모습이 내 마음 한구석에서 늘 존재하기에 난 종교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어릴적엔 무조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하나님이 직접 주신)이기에 그 말씀이 곧 하나님이고 그 말씀을 무조건 믿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교회를 떠나면서 종교때문에 목숨걸고 싸우는 사람들을 이해 할 수 없게 되었고 무조건 믿어야된다는 하나님의 말씀 또한 자꾸 의심이 생기곤 하였다.
책 본문을 보면 솔로몬, 아브라함, 노아 등 성경속 우리가 늘 찬양하던 사람들을 부정하고 문자주의가 잘못됐다는 것을 각종 근거로 요목조목 따지며 문자주의를 탈피할 것을 강조한다. 이 책을 요약하자면 p6 "가장 위험한 생각은 자신만이 옳고,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틀렸다는 독단이다." "우리는 아직 완성된 존재가 아니며 무한히 진화해 나가야만 하는 존재이다." 로 정리가 되어질거 같다.
나도 전적으로 동의하는 바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독단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신만이 유일신이며 나의 신을 믿어야만 천국에 갈 수 있고 안믿는 자는 모두 지옥갈 존재라는 사실.. 성경은 무조건 진실이며 이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사탄의 자식이라는 식..이런 점들이 종교의 가장 위험한 요소인거 같다. 독단에 빠지게 되면 자기와 다른 종교를 가진 사람들을 경멸하고 무시하고 심지어는 죽이려고까지 한다. 저자의 말처럼 우린 이젠 생각하고 깨달음을 얻어서 더이상 죵교의 부정적인 면들이 퍼지지 않도록 해야할 것이다.
하지만 이 책 또한 기독교를 강하게 부정하고 있지만 책 자체가 또 다른 종교를 만들어 내는 거 같다. 결말로 갈수록 그런부분들이 짙어짐을 알 수 있다. 이 또한 모순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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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창시절 불트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현대신학의 다양한 조류를 알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문자 그대로 무오류를 주장하는 가르침을 받으며 성장했던 탓이다. 그 후 다양한 사조를 접하고, 역사적 예수를 찾는 노력을 하는 책들을 읽곤 했었다. 한동안 이런 테마의 책들이 나오지 않는(접하지 못한) 시간들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웃고 있는 예수'라는 역작을 만나게 되었다.
사실 이러 책에 대한 리뷰는 쓰는 것이 좀 부담스럽다. 종교마다 일부의 사람들은 그 종교에 대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반하는 책이 나올때마다 분노를 표하기 쉽고, 그 책을 읽고 좋은 인상을 받았다고 하는 글을 쓰는 사람들에 대해서도 공격적으로 나올때가 많기 때문이다. 나는 평화롭게 살고 싶은 사람이고 싸움에 휘말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내가 책을 읽고 느끼는 느낌을 솔직하게 표현하는 자유를 빼앗기면서까지 숨을 죽이고 살고 싶지는 않다.
사실 '사해문서'나 '나그 함마디 문서' 같은 것들에 관한 책들을 볼때마다, 그 문서들을 연구한 결과를 종합한 책들이 나오기를 애타게 기다리곤 했었다. 새로이 발견된 복음서와 문서들을 연구한 종합적인 결과물을 만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최초의 문헌비평에서 부터 많이 발전해 있을 새로운 연구결과가 나타나기를 말이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관한 연구나. 나그 함마디 문서의 발견경위에 대한 책. 사해문서에 관한 책과. 사해문서와 관련되었을 종교적 공동체에 관한 책들을 만날수는 있었으나 이는 전체를 설명하는 것이 되지 못하고, 부분적인 이해를 높이는데 도움이 될 뿐이었다. 결국 이 책이 내가 처으므로 만나는 종합적인 결과물의 형태를 뜬 책인 셈이다.
이 책은 내가 기대했더 것 보다 훠씬 더 과격하고 놀라운 결과물을 보여준다. 문헌비평과 새로운 문헌의 발견에 따라 기존의 설을 가감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완전히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 내는 책이기 때문이다. 나로서는 이 책이 제시하는 내용이 얼마나 학문적인 근거가 있는 것인지는 알수가 없다. 그러나 이 책에 달린 상당한 양의 문헌자료뿐만 아니라. 역자가 이 저자들의 이전의 책들이 엄청난 문헌자료를 제시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나름대로 근거가 있는 내용이라고 할 수는 있을 것 같다.
책의 내용은 일관되고 통일성이 있다. 책 내부에서 서로 모순되는 점을 발견하기는 힘들다. 이 책이 제시하는 내용은 지나칠 정도로 단순하고 또 파격적이다. 그러나 그런 논리의 내부적 오류는 발견되지 않는다. 즉 성경과 예수론, 나아가서는 같은 텍스트를 사용하는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관해 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시각이 제시된 것으로 생각할 수 있겠다.
기독교의 중요한 하나의 분파로 여겨져오던 영지주의가 이 책에서 중심을 이루는 큰 역활을 한다. 사시 기독교의 초기 교회사에 관심이 있다고 하면서도 영지주의 관련 문헌을 하나도 일어보지 못한 지적 게으름이 이 책을 이해하고, 이 책에 대한 나의 입장을 정리하기 힘들게 하고 있다. 이 책은 일관성이 있고, 차근하게 설명을 하기 때문에 이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이 주장하는 내용을 어떻게 받아들이지에 관한 입장을 정리하기 위해서는 주변지식에 대한 독서가 좀 더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놀랍도록 새로운 내용을 전해주고, 상당히 설득력이 있는 주장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다. 신화와 민속학과 구비전승, 권력의 장악과정에 대한 어느 정도의 이해만 있다면 누구라도 읽으면서 충격적이고도 대담한, 그러나 수긍이가고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신선한 내용의 독서가 이뤄질 수 있을 것 같다. 이 책에 대응하는 논리적이고 객관적인 비평서가 나와주면 이 책과 균형을 맞추면서 독자들의 시선을 확장시킬수 있는 좋은 독서의 대상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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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미 '예수는 신화다'라는 책을 통해 고대 지중해 세계에 일반적으로 퍼져 있던 미스테리아들을 비교하고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의 역사를 역추적함으로써 그리스도교의 기원을 밝히는 책을 내 우리에게 알려진 작가이다. 그는 책에서 그리스도교가 본래 자신의 모델이었던 고대 미스테리아를 말살하고 문자주의 종교로 탈바꿈했던 역사의 진실을 퍼즐처럼 맞추어 나간다. 그러면서 고대 미스테리아의 유대인 판본이었던 예수의 이야기가 역사적 사실로 위조·가공되고, 고대의 신비주의 신앙이 권위적이고 독선적인 문자주의 신앙으로 변질되는 과정을 살펴본바가 있다. 이는 어찌보면 예수의 상(像)을 실제 주변의 신화나 이야기를 차용하여 재 편집하여 만든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 반향이 매우커 2002년 첫 출간과 동시에 일부 보수적인 개신교단의 강력한 반발로 강제 절판까지 되었던 그의 전작이 있었기에 이 책에 더욱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저자는 예수 이야기의 원본이 바로 과거 지중해 세계에 광범위하게 퍼져 있던 신비주의 신앙이었다고 주장하며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고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한 나사렛 예수를 부정하는 내용으로 기독교계에서는 금서로 여길정도로 취급한 책이었다. 신간인 이 책 '웃고 있는 예수' 역시 전작과 같은 맥락에서 종교의 거짓말을 폭로하고, 유일신 종교의 경전과 교리의 허구성을 적나라하게 해부하며 철학적 지혜와 영지주의적 영성을 설명하고 있다.
종교의 문제점과 그 극복방안에 대해 다루면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영감을 주었던 종교에 대해 다른 시각에서 접근할 수 있게 해준 책이다.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는 오래 전부터 연구되어 왔다. 종교적 체험이나 삶의 위안이 주된 이유이다. 개인적으로 신을 체험했다는 종교적 체험을 결코 부정하지는 않는다. <예수가 성서의 문자 그대로 존재>했다고 해도, 그 의미가 세퇴할 가능성이 있을 수 있으며 종교적 비합리성이 인류의 발전에 심각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는 가설은 전혀 백해무익한 논쟁이 되는 것일까?라는 의문이 든다. 초기 그리스도교의 원형은 유대인 메시아를 신인으로 내세운 예수 미스테리아였고, 그것이 바로 ’영지(靈知ㆍgnosis)주의적 영성’이다. 영지주의는 우리 스스로 영지를 경험하고 깨어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삶 자체가 깨달음의 과정이라는 것을 이해한다”고 말한다.즉, 영지주의의 목표는 각각의 신도가 입문하여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었다. 또한 영지주의는 크게 광의와 협의 두 가지로 구분된다. 광의의 영지주의는 삶 자체가 깨달음의 과정임을 강조하는 신비 사상으로, 모든 종교에 열려 있으며 영지주의적 영성은 모든 존재간의 사랑과 일치를 노래한다. 이런 광의의 영지주의 시각에서, 궁극적 실재의 의미는 동서양 종교를 막론하고 모두 동일한 의미를 갖는다. 협의의 영지주의는 서양 고대 미스터리야 종교에서 기원한 초기 기독교를 의미한다. 초기 기독교와 로마 교회의 대립은 바로 영지주의와 문자주의 간의 대립과 갈등으로 번역할 수 있다.
예수 이야기는 은밀하고 신비한 가르침을 암호화한 하나의 비유일 뿐이고, 깨달음을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초기의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의 죄를 대신해서 고통 받았던 인간, 즉 역사에 실존했던 인간으로 보지 않았다. 그들은 예수를 상징적이고 교훈적인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화적인 영웅으로 보았을 뿐이며, 만일 우리가 깨달음을 얻고, 사랑을 실천하는 삶을 산다면 삶이 얼마나 훌륭할 수 있는가를 알고, 이러한 삶에 고취된 사람들이었다. 유대인 민족주의와 파벌주의가 교묘하게 삽입되어 있으며 중세에는 종교와 신국이라는 악몽에 가위눌리고 억압받는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중세의 귀환이라는 오늘날에도, 종교는 희망 바이러스보다는 공포 바이러스를 퍼뜨리고 사랑이 아니라 증오를 자라나게 하는 사악한 온상이 되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듯이 가장 위험한 생각은 자신만이 옳고 나 이외의 모든 사람은 틀렸다고 생각하는 독단을 경계해야 할것이다. 절대적인 진리는 인간의 인식한계를 벗어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지만 진화해 나가는 우리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은 합리적 사고에 바탕을 둔 과학과 인문학적 지식도 쌓아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문자신봉주의를 벗어나서 진정한 영지, 깨달음을 얻으려면 철학적 훈련이 필요하다고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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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기독교인이다. 그래서 기독교 서적은 많이 읽어 보았는데 이번에 읽게 된 서적은 모라 표현해야 할까? 우선 과격하다. 그리고 예민한 사항에 대해 정면으로 반박을 한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많은 혼란이 왔다. 기독교인이라고 살아 온지가 벌써18년이다. 내가 태어나서 성인이 될 때까지 반 이상을 믿고 의지한 종교 그중에서도 성경에 나오는 선지자들과 예수가 실제 인물이 될 수 없다는 저자들에 주장이 많은 혼란을 주었다. 주일학교나 중고등학교때 뿐만 아니라 성경공부를 하면서도 자주 언급되는 예수 하지만 저자는 어디에서도 예수에 대한 언급을 찾지 못했다고 주장을 한다. 그럼 내가 알고 있던 예수는 대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걸까? 그럼 나는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신화적인 사람을 믿고 있다는 말인가? 분명 이 책은 많은 혼란을 준다. 그렇다고 해서 저자들을 이상하게 보는 것은 아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지키고자 하는 것 중 하나가 그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예의이다. 내가 이것을 믿고 있다고 해서 꼭 그 사람도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저자는 문자주의에 대해 강역하게 비판한다. 이 말에 대해 나도 공감은 한다. 텍스트로 인해 오는 피해는 현대에서도 많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성경에 나와 있는 선지자들이나 예수에 대해서도 분명 와전된 부분이 있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예수에 대해 언급한 문헌을 찾지 못하였다면 그것에 대해 할 말은 없다. 저자는 9.11사건에 대해서도 언급을 한다. 하지만 코란을 읽고 그 종교를 믿는 다고해서 다 그렇게 행동하는 것은 아니다. 코란을 읽고 그 종교를 믿는 사람 중 일부분에 행당하는 사람들일뿐이다. 영지주의<그노시즘>란 그리스어로 앎, 깨달음 비밀스런 지식을 소유한 사람등 으로 해석이 된다고 한다. 저번에 읽은 “그리스도 철학자”라는 책과 계속 비교를 하게 되는데 영지주의를 믿는 사람들은 예수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스도 철학자에서는 조금 어렵게 설명하여 개인적으로 찾아보았다.) 하지만 본질은 같다고 생각한다. 무슬림, 유대교, 가톨릭, 기독교, 힌두교, 등 많은 종교에 중심에는 신이란 매개체가 있다. 그런데 왜 공통점이 있는 되도 매일 같이 종교로 인해 싸우는 것일까? 솔직히 나는 저자가 주장하는 영지주의자들도 같다고 생각한다. 성경이나 코란이나 각자에 종교에서 읽고 있는 성서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고 그중 더 중요한 사실은 자기가 믿고 있는 영지주의에 대해 appeal을 하는 것 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이런 생각을 한다. 종교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개인에 선택이다. 그럼 당연히 그 선택을 존중해주어야 하는 것이 의무이며 그 종교를 개종하려고 해서도 안 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것은 그 사람에 선택이기 때문이다. 이런 예의만 지킨다면 종교싸움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을 자주한다. 당연히 살인을 한다거나 사람들에게 해가 되는 행동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큰 문제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종교를 믿고 있는 사람들을다 예의주시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그 문장들을 고대로 해석해서 행동한 사람에 책임이기 때문이다. 문자주의자들에게 분명히 문제는 있다. 하지만 텍스트로 인해 심적으로 도움을 받고 신에게 더 가까이 갈수 있는 도움을 받는 다면 그것은 그들에게 도움을 주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내용이 신화적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전적으로 이 저자들이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동의 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오랜만에 반론을 펼칠 수 있는 책을 만나서 조금은 흥분을 하면서 읽은 책이기도 하지만 혼란을 많이 준책이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