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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라는 게 때론 지울 수 없는 낙인같아 살아가는 게 나를 죄인으로 만드네-
루시드 폴의 ‘바람, 어디에서 부는지’의 마지막 소절을 듣고 우는 스물 몇 살의 내가 있고,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죄가 너무 많아 이마를 바닥에 찧으며 우는 열여덟살의 ‘그’가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필연이었을 것이다.『더러운 책상』을 3주에 걸쳐서 야금야금 결국은 다 읽은 것은. 또 이렇게 리뷰를 쓰고 있는 것도.
지난 여름, 고모가 울먹거리며 나에게 전화를 했다. 고모의 아들, 나의 고종사촌이 늦은 나이에(7수정도 되려나) 들어간 교대를 다니지 않겠다고 했단다. 고모는 나한테 ‘부탁’한다. 잘 말해주라고. 내가 그냥 대학도 다니고, 회사도 다녀보고 했지만, 선생님만한 직업이 없다고. 남들이 들으면 공부 열심히 했구나, 할만한 일반대학도 자퇴한 녀석이 지금 그 나이에 무엇을 어떻게 하려는 거냐고. 이제 거의 60이 다 되어가는 고모의 울음이 묻어나는 부탁 아닌 부탁을 받으며, 나는 그러고마 했다. 그러나 결국, 그 녀석은 2학기 등록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정말 그만 두다니. 그 아이라고 쉬운 결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스물 중반의 그 아이의 마음 속에 어떤 격랑이 있었던 걸까. 곱게 자라서 철이 없는 것은 아닐까, 솔직히 이런 생각도 약간 했던 나는, 『더러운 책상』을 읽고 나선 어쩌면 그 녀석의 마음 속에 어떤 ‘책상’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이 세상으로부터 오롯이 지켜내고 싶은 ‘깨끗한 책상’.
사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책상’은 나에게 가구 그 이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런 연고 없는 지방으로 다시 학생이란 신분으로 덜컥 오게 된 후, 책상은 곧 나의 ‘생활터전’이 되었다. 컴퓨터를 하고, 영화도 보고, 메신저를 하고, 편지를 쓰고, 띄엄띄엄 공부도 하고, 아침 저녁으로 밥을 먹는 곳. 그리고 아주 가끔은 일기장을 볼펜으로 벅벅 그어버리기도 하는 곳.
그러나 나의 책상은 이 소설의 제목처럼 더럽지는 않다. 이유를 정확하게 말할 수는 없으나, 책상마저 더러워지면 안 될 것 같았다. 깨끗하고 깔끔한 상태를 늘 유지하고 싶었다. 서울 집에서는 늘 엉망이던 책상을 이곳에서는 매일매일 쓸고 닦았다. 그리곤 안도하곤 했던 것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깨끗하고 깔끔하게, 잘하고 있다고. 눈 앞의 책상이 정리되고 깨끗하다고 안도하다니. 어쩌면 나 역시, 소설 속 쉰여섯의 ‘나’처럼 삶의 효용성에 대한 정보를 너무 많이 갖고 있으며, 세상에 완전히 편입해버린 것은 아닐까.
어쨌든, 옆에 있는 친구를 내가 눌러야할 대상으로 여겨야만 기본은 할 수 있는 이 곳에서(하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곳 중 이렇지 않은 데가 있을까.) 나의 외딴 자취방은, 책상은 왠지 내가 지켜내야만 할 곳 같았다. 내가 밥을 먹고 컴퓨터를 하고 공부도 가끔 하고 일기도 쓰는 책상. 그 위에 ‘치열하게’란 문구를 적어 보이는 곳에 두고, 친구와 찍은 사진을 유리 밑에 밀어 넣고, 바다 풍경의 엽서를 머리 맡에 붙이고, 동생이 준 인형을 올려 놓는다.
그렇다. 은연 중에 나는 책상에 내 자신을 투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의 사람들, 기억들, 각오, 꿈, 외로움 그리고 두려움까지도. 마치 분신처럼. 그렇기에 그토록 깨끗하게 유지하고 싶어 하던 나의 책상 역시 수많은 영혼이 깃들어진, 굴껍질 같은 것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해초들이 엉겨붙어 있는 ‘더러운 책상’이었던 것이다. 그럴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면 나의 책상은 곧 나,이므로.
이 책은 등단한지 삼십년이 넘은 중견 작가 박범신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도 불리운)다. 나는 성장소설을 좋아한다. ‘사람은 평생 성장하는 거 아냐? 그런데 왜 특별히 성장소설이라는 장르를 따로 만들어 명명해야 하는거지?’ 이런 식으로 딴지를 (충분히) 걸 수 있는 나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적으로 성장소설이라고 불리우는 그 소설들을 좋아한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내가 성장기란 바로 그 시기를 남부럽지 않게 아파하면서 보냈기 때문인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유독 관심이 가고, 공감이 가고. 아마 그랬을 것이다. 이 소설의 책장이 쉬이 넘어가지 않았던 것은.
단장으로 되어 있는 소설은 원래 읽기 편하다고 생각했었으나, 이렇다 할 기승전결의 구조로 전개되지 않는 이 작품은 결코 그렇지만은 않다. 수십개에 달하는 단장은 마치 그의 고뇌에서 뜯겨져 나간 살점 같았고, 그 불연속성은 방황하고 괴로워하는 청춘의 혈흔 같았다. 이 소설을 이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이해되었기에 내 마음은 덜컹거렸다.
이 책의 주인공은 열여섯부터 스무 살의 ‘그’와 작가가 된 ‘나’ 두명, 혹은 한명이다. 작가는 사춘기, 청년기 시절의 자신을 ‘그’라는 3인칭으로 묘사하면서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는 인물에 대한 객관성을 확보하게 하고, 괴로움에서 파생될 수 있는 감정의 과잉을 방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고뇌, 역겨움이 느껴져 더 힘들다.
끝없이 현실과 자아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민하고, 회의하는 ‘그’. 그리고 분리하지 않고선 자신의 깨끗한 책상을 더 이상 볼 수 없는 ‘나’. 그 ‘나’가 평생 가장 사랑했고, 또 가장 미워했던 ‘그’. 어쩌면 우리 모두에게도 열여섯살의 ‘그’가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나는 ‘그’를 잊지 않고 사는 작가가 부러워졌다.
이 사람 정말 아파해 본 적이 있구나, 느껴지는 글이 있다.(적어도 나에겐) 이 소설을 읽고 작가 박범신이란 ‘사람’에게도 관심이 갔다. 그는 이 작품으로 18회 만해문학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아파했거나 아파하고 있는 청춘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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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박범신님의 소설은 처음이었다. 처음 어느 분의 리뷰를 보고 읽을 맘이 생겨 구입했다가 처음 몇 장을 읽고는 '한없이 가볍고 싶은 내 마음'과는 너무 먼 이야기어서 한동안 팽개쳐두었다가 최근에 '알 수 없는 가벼움의 끝'에 질려 다시 보게 되었다.
보통 책을 읽으면 맘에 드는 구절들을 따로 표시해두었다가 별도로 정리를 해두는 습관이 있는데... 이 책은 다 읽을 때까지 아무런 표시도 할 수 없었다. 특별히 인상깊은 구절이 없다고 말하기도 그렇지만, 그렇다고 모든 부분이 인상적이어서 어디에 표시를 해야할지 몰라서라구 거짓말을 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문장 하나하나가 가지는 그 세련됨의 가치보다 그것이 어우러져서 만드는 무언가의 인상이 훨씬 강렬하다고 해야 하나... 표현력의 한계를 가지고 있는 나로서는 그 느낌을 정확하게 전달할 자신은 없지만 '암튼 대단한 소설이야'라고는 소신있게 말할 수 있겠다.
책을 읽어가는 중에 이 소설을 장편소설이라 부르는게 맞는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좀처럼 눈에 쉬이 안들어오는 문장을 반복해 읽어가면서, 그 문장 하나하나가 가진 배경의 광범위함에 한번 놀라고, 또 그 의미의 함축성에 두번 놀라며 이건 그냥 단순한 소설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일종의 서사시(敍事詩)다' 라는 표현이 내게는 이 소설의 정체성에 더 그럴듯해 보인다.
열여섯부터 스므살까지의 스스로의 경험을 바탕으로 전개된 이 '서사시'는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의 여러 현실과 어우러지다보니 다소 슬픈 정서가 깔려있다. 개발이라는 미명하 자행된 인권유린과 가난한자에 대한 공권적 착취, 그리고 그러한 찌든 현실을 어떻게든 살아남으려 발버둥치는 서민들의 땀냄새와 때냄새가 배어있다. 그래서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인 듯한 그의 서사에서 우리는 측은하고 또 약간은 민망한 눈길로 아버니, 어머니, 형이나 누나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 소설의 전개 방식은 독특하다. 현재의 '나'와 1960년대 후반의 '그', 이렇게 2개의 시점에서 이야기가 전개된다. 물론 1960년대의 '그'는 현재의 '나'이다. 현재의 '나'는 시인인 '그'를 스므살에 죽이고 새롭게 태어난 '나'이다. 스므살까지의 '그'의 이력은 어떤 '단절'이 없고는 현재의 '나'를 한없이 아프게 한다. 현재의 '나' 역시 스므살까지의 '그'와 연결되면 '그'의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의 청춘을 부질없는 바보짓으로 만들 필연적 잔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기에 시인인 '그'는 어둠속에서 쓴 소설 한편을 바다에 던지고 스므살에 열차에 몸을 던졌고, 소설가인 '나'는 그 열차에 몸을 실어 그와는 다른 이력을 품은 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을 '성장소설'로 구분하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본인 생각엔 별로 성장소설은 아니지 싶다. 성장소설이라하기엔 내적 성장의 과정이 지나치게 단편적이고 도발적이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죽음으로 인한 '단절'이 필요할 정도였을까...
읽는 내내 나는 한번도 살아보지 못한 시대가 무슨 추억이나 되는 것처럼 머리속에 선연한 영상으로 다가왔다. 구체적인 묘사가 두드러지는 소설이 아닌데다가 그 시절에 대한 사전지식이 많았던 것이 아닌데도 그런 영상들을 떠올릴 수 있게 만드는 위력이 현재의 작가 박범신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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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자살하려던 그는 또 하나의 나일까? 나와 그는 다른 사람일까? 이 책을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서도 확신을 할 수가 없었다. 나와 그는 과연 똑같은 인격을 갖춘 한 사람일까? 아님 다른 사람일까? 아니면 인격도 사람도 다른 별개의 두 사람일까? 의문을 가지면서도 쉽게 단언하여 이야기할 수 없었다. 나도 학창시절 자살을 하려고 시도했었다. 이 책에 나온 그가 죽은 것처럼 그 때의 열일곱의 나도 죽은 것일까? 단언할 수는 없지만 죽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서른아홉의 내가 지금 살아 숨 쉬고 있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 속 쉰일곱의 삶이 살기 위해서는 열일곱 아니 스무 살의 죽음은 반드시 거쳐야 하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또 하나의 세계를 깨는 일이 아닐까. 그 죽음을 통해 다른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건 아닐까 싶다. 우리는 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그 죽음을 통해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글의 처음 부분에 보면 화자인 그는 아직 자궁 안에 있다고 했다. 그리고 태어나는 순간 “제발 절 죽이지 마세요. 엄마” 라고 외쳐댄다. 엄마는 자궁 안에 있는 그를 죽였기에 그에게 새 생명을 준 것이었다. 그래서일까 화자인 그는 엄마를 무서워해서 자살을 시도하고 “집이 싫어요. 엄마가 싫어요.” 라고 울면서 이야기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의 모든 엄마는 살인자가 아닐까? 자신의 분신이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려는 살인자가 아닐까. 머리카락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있다. 머리카락은 죽은 단백질의 덩어리에 불과하다는 이야기. 그래서 머리카락은 살아 있는 듯 보이는 것인지도 모른다. 또한 “가난의 고통은 싸는 것이다”라는 부분에서도 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똥은 우리에겐 죽은 것들이다. 그것들을 버려야만 우리는 살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매일 매일 우리는 우리 자신을 죽임으로써, 버림으로써 살 수 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의 마지막 부분에 “1965년 여름의 수도 서울에선 일단, 싸야 한다.” 라고 했지만 2009년도 여름의 수도 서울에서도 일단, 싸야 살 수 있는 것이라고 이야기해주고 화자인 그에게 해주고 싶었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 『데미안』을 통해 새는 알을 깨고 나온다… 라는 문장과 만난다. 물론 속 쉰일곱의 내가 바라본 열일곱의 죽음 전의 이야기이리라. 여기서 말하는 알의 의미도 죽음의 관이 아닐까 싶다. 죽어있는 관 속에서 그 죽음을 뚫고 나왔기에 새는 삶을 쟁취한 새로써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삶과 죽음에 대해 이야기한 헤르만 헤세, “죽음을 제외하고선 아무것도 진정 우리 것이라 할 수 없다…… 라고 이야기한 세익스피어의 말 속에서,”죽음에 의하여 우리들은 무엇 하나 잃어버리지 않는다…… 라고 이야기한 쇼펜하우어의 말 속에서도 우리는 죽음과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글이 있다. “열여섯 살의 그가 사용한 자신의 관뚜껑은, 말하자 면 녹슨 함석판이다./ 관뚜껑 닫고 나면…… 그가 없다.” 라고. 새롭게 탄생한 그가 있을 뿐이기에 기존에 그가 없다. 라고 이야기한 것은 아닐까. 더러운 책상을 통해 나는 나 자신의 삶과 죽음에 대해 깊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우리 모두는 늘 죽었다가 다시 태어나야만 하는 존재들이다. 그 죽음은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정신적 자아가 - 새가 자신을 가둔 알을 깨듯 -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정신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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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들어 부쩍 성장소설이 유행을 하는 것 같다. 과거에 대한 향수 때문일까? 60, 70년대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들이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이 책도 자칫 잘못하면 그 카테고리에 포함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내 생각은 전혀 아니다. 그냥 그렇게 넘어 가기엔 주인공의 삶이 기고하다. 방황의 연속이다.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열여섯 살의 나와 쉰여섯 살의 나는 다른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을 그는 모른다. 하지만 그의 혼돈은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그것이 내가 말하고 싶은 젊은 날의 초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나이를 먹는 것은 추상적인 것들에 리얼리티를 주는 것이다라는 말에 쉽게 공감하는 것이 이상하기는 하지만... [인상깊은구절] "살아온 날들이 축척해 놓은 기억의 총체 속엔 열여섯 살의 그가 미처 예감하지 못했던 많은 편견과 고정관념과 강고해진 이데올로기 따위가 깃들여 있다. 그것들은 물론 상처의 다른 가면이다. 상처는 필연적으로 금기를 만들고, 금기들은 시간의 세례를 받으면서 체계화되며, 체계화된 금기의 총량은 대개 살아온 날들의 축적과 비례한다. 한가지 중요한 상이점을 말하자면, 모든 사물에 대한 시선의 사실성일 것이다. 열여섯 살의 그보다는 쉰여섯 살의 내 시선이 물론 훨씬 리얼리티를 확보하고 있다." |
| - 열여섯살의 책상: 열여섯살. 어두운 자의식의 골방에 엎드린 그에게 기차는 떠나는 것보다 오히려 갇히는 것이고 섞이는 것보다 오히려 홀로 되는 것. - 열일곱, 열여덟 살의 책상: 그의 내면엔 분노하는 절망하는 슬픈 연민의 수많은 다른 젊은 그가 함께 있다. - 열아홉살의 책상: 나의 영혼...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책꽂이나 서랍처럼 나뉘지 않고 나뉘지 않으면서 책꽂이나 서랍보다 훨씬 더 다양하다. - 스무살의 책상: 나는 마침내 1966년 스무살이 되었으나 얼음같이 찬 세상의 한켠에서 나의 스무살은 속절없이 부서지고 있는 걸 느낀다. 돌아가야해 라고 나는 이윽고 중얼거린다. 어느날 문득 깨닫게 되는 자아와 세계라는 것을 알게되고 자신의 낯설어 지고 자신이 처한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며 그 감정들을 친근하게 바라보게 되는 고독의 감각이 자신을 후비는 칼이 될때 세상이 너무도 강하고 실패하기도 한다. 우리가 알고 있던 작가의 문학적 전통의 관심이 그 자신의 문학청년을 끌어내 기억을 더듬어 열여섯살에서 열아홉살까지의 삶을 엮어내고 있다. 강렬하고 극단적인 개념의 삶을 유도하기도 하고 그가 걸어가는 길들은 순례자의 길과도 비교할수 있다. 물론 '그'는 '나'이며 젊은 시절의 소설가 자신이기도 하다. 성장했거나 퇴영한 형식의 그가 아닌 우리가 상상할수 있는 한 가장 먼곳에 각기 자기 책상을 두고 있는 그들이다. 소설가는 이 이야기를 현재형으로 썼다. 놀랍고도 끔찍한 경험이 아닐수 없는 60년대 정신사를 그는 풍속과 문화를 근원으로 '그'가'나'를 만나기 직전에 분리되기를 반복하며 참으로 기막힌 말솜씨로 표현하고 있다. 광기가 느껴지는 나의 내부를 들여다볼수 있는 굉장한 경험이었다. |
| 이 책을 읽고 나면, 열여섯 살의 나에게 편지라도 쓰고 싶어진다. 그 시절에는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거리에서 스치면 알아보기라도 할지, 혹, 서로 인사를 나눈다면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서로 나눈 짧은 이야기에서, 열여섯의 내게, 꼭 그만큼 나이를 더 먹은 내게 행여 실망이라도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한 것이다. 지금 56살인 작가는 무려 40년의 간극을 넘어 열여섯이라는 그리운 나이의 자신을 되돌아본다. 열여섯에서 스물까지, 서랍을 감추고 있지만, 노출될 수 밖에 없는 책상 아래 숨은 그 시절의 자신을, 작가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아끼면서도, 56살의 자신과 16살의 자신이 서로 만나는 걸 원치 않는 것 같다. 그 둘은 같으면서도 다르고, 한 몸이면서 다른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오랜만에 마음 따뜻해지는, 아주 좋은 소설을 읽었다. |
| 성장과 쇄퇴를 구분하는 가장 명확한 구분을 어찌 규명해야할지, 나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고찰함에 분리된 자아를 통한 통렬한 비판이 가능한지를 스스로 시험해보게하는 시간이었기에 충분했다. 서두에서부터 막연한 추측으로 그와 화자("나")의 관계를 규명하기에 급급한 독자(나), 내적 자아의 성장시기와 현재의 나 사이의 시대의 차별성을 배제한 공감대의 형성과 2002년을 살고있는 현재의 나와 60년대를 살고있는 그와의 분리를 통한 자의식의 성장과정,, 쉰을 넘긴 2002년을 살고있는 "나"에 의해 회고되는 16살의 그와 60년대를 살고있는 "그"에 의해 고찰되는 쉰을 넘긴 "나" 많은것을 생각케 한다. 작가의 의도를 나 스스로 이해컨데,,오늘을 살기에 내일의 나를 상상할수 없지만, 분명 내일의 나는 어제의 나와 어떤부분에서 타협하고 거부하고 , 부정하고 인정하게 될지 잠들기전 곰곰히 생각해보게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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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시처럼, 좋은 문장으로 이루어진 것은 알겠는데 너무 난해하지 않은가, 하는 것이 이 작품을 읽으면서의, 그리고 또 읽고 나서의 가장 큰 소감입니다. 만약 제가 이 작품을 박범신 선생님의 문장에 반하지 않은 상황에서 접했더라도 과연 좋다, 하고 느끼며 읽었을까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고요. 아마도, 그렇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어느 한때, 한국 문학이 정말 싫다고 생각하던 때에 주류를 이루던 그 구질구질한 분위기를 고스란히 지닌 소설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도 없는 문장들이, 단지 시적인 표현이라는 욕망에 사로잡혀 구사되고 있는 터라 지루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넷이나 날아간 이유는 첫째, 저는 이미 <은교>를 통해서 박범신 선생님의 문장에 냉정하기 여러운 상태이며, 둘째, 과연 구질구질한 한국 문학의 답습인가 하는 점에서의 의문도 살짝 있기 때문입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이 작품은 난해하고 어두운 내용입니다만 단지 그렇다고만 말하기엔 뭔가 오묘한 면이 없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령, 한 문장의 정확한 의미가 구체적으로 잡히지는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므로 당연히 짜증이 나야 함에도 뭔가 이끌리듯 계속 읽게되는 좀 오묘한 면이 분명히 있거든요. 그리고 책을 덮고 얼마가 지나면 다시 읽고 싶은 생각이 든다니까요. 그게 뭘까, 하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건 아마도 전적으로 문장과 그 문장의 호흡이 저와 잘 맞는다는 두 가지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니까 내용이 무엇이든 그 자체만으로도 어떤 즐거움이 되어주었다고 해야할지, 뭐 그렇습니다.
그러나 내용은 도대체 뭔 얘기 하고자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솔직히 문장을 빼고 내용만 보자면 제가 늘 욕을 해대던 한국 문학의 전형이 아닐까 싶습니다. 어린 노무 자식이 세상 짐은 혼자 다 짊어지고, 왕따 주제에 고독하다며 빌빌거리다가 곰팡내 나는 골방에 앉아 각혈이나 해대면서 마치 진정한 삶울 찾아 헤메는 구도자가 인생에는 오로지 자기 하나뿐인 양 구는, 머리만 크고 팔다리는 절지동물 수준에 가까운 그런 한심한 부류들 말이죠. 들여다보는 것만으로도 짜증나는 인생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뜻하지 않게 무라카미 류 센세의 <69>와 연달아 성장 소설을 읽게 되었는데-이 작품도 성장 소설이라 할 수 있다면 말이죠- 내용과 분위기만 보자면 극명하게 양 끝에 배치된 두 소설입니다. 전자는 행동하며 사고하는 바람직한 10대 상이라면, 후자는 행동은 무슨, 뇌만 살아 움직이는 징그러운 생명체의 삶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좀 다르게 생각해보면 어떤 면에선 또, 문학의 예술적인 면을 보여주는 듯도 싶은 겁니다. 오로지 문장 하나 때문에 말입니다. 소설이라기 보다 시에 가깝게 느껴지는 문장들이 그런 이유인데 그러고보면 말이죠, 이게 한끗발 차이일 수도 있겠다 싶은 겁니다. 좋은 문장이냐 아니냐의 차이 하나로 이 작품이 예술품이냐 아니면 고루한 냄새나 풍기는 한국 문학의 답습이냐의 차이가 벌어진달까요? 어쨌거나 저는 그랬습니다. 전자에 가깝다는 인상이 더 강했어요. 그러니까 이 작품은 말하자면 그런 문장에서의 취향이 본인과 맞아야 읽는 맛이 생길 수 있는 소설이지 않나 싶어요. 그러므로 평이한 소설은 아니고요, 까딱하면 짜증나는 한국 소설 중에 하나로 읽힐 수도 있으니 확실히 이보다는 재미있는 박범신 선생님의 작품을 먼저 보다가, 아아, 나는 이 선생님의 문장이 몹시 좋구나, 하는 분들만 골라 보시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읽다 던져버리는 사태가 일어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그게 아니면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 집은 가난했었고 어머니는 짜장면이 싫다고 하셨고 친구보다는 까뮈의 작품이 더 좋더라, 하는 깝깝한 분들에게도 괜찮게 읽힐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좀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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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촐라체>에서였다. 물론 그 전에 먼저 접한 것이 연극으로 제작된 <촐라체>였다. 아무런 사전 지식 없이 보게 된 그 연극에 나는 압도되었고, 강렬한 느낌과 감동에 그 책을 찾아서 보게 되었다. 그 책을 읽으며 흡인력있는 문장에 전율을 느끼고, 추운 겨울 오싹해지는 손발을 호호 불며 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박범신 님의 2003년 작품, <더러운 책상> 을 읽게 되었다. 이 소설은 현재 쉰여섯 살의 내가, 열여섯, 열일곱열여덟, 열아홉, 스무 살 의 나인 ’그’에 대해, 그리고 현재의 ’나’에 대해 서술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졌다. 작가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라고도 하는 이 책은 작가 자신의 젊은 날의 고뇌를 고스란히 담았다. 담담하고 냉정하게 묘사된 이야기를 보니 뒷골이 당긴다. 결코 유쾌하지 않고 답답함이 묻어나는 문장에서 마음이 편치 않아진다. 새벽이다. 무엇이 그리운지 알지 못하면서, 그러나 무엇인가 지독하게 그리워서 나날이 흐릿하게 흘러가던, 그런 날의 어느 새벽이었을 것이다. (9p) 이 책의 첫 문장에서 나도 젊은 날의 고뇌를 생각해본다. 지금 생각해보면 바보같은 부분이기도 하고, 지금이라면 그렇게 하지는 않았을거란 생각도 들지만, 그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고,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또다시 그렇게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답답함......!!! 이 책을 다 읽고 든 생각은 그런 것이었다. 다른 사람의 인생을 두고 그런 판단을 한다는 것 자체가 오만한 것이고, 마음에 들지 않지만, 내가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보고 든 생각은 솔직히 답답함이었다. 누군가 나의 인생을 보고 답답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다지 기분이 좋지 않겠지만, 그래도 다들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을까? 사람 사는 모습이 다 거기서 거기고, 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은 휴일이 되어버렸다. |
| 열여섯에서 스물... 관념으로 팽배한 자의식의 극치를 보이는 시기, 거기에 육체적 성징의 파렴치한 도발이 가득한 시기가 바로 열여섯에서 스물 사이가 아닐까. 오늘밤은 세상의 진중함에 눌려 눈을 감고, 또 다음날에는 세상의 사소함에 놀라며 눈을 뜨는 척박한 하루하루가 모여 있는 진창같은 시기가 바로 이 소설의 소재이다. 박범신은 바로 이러한 시기의 ‘그’를 주인공으로 삼아, 또 그로부터 사십여년이 흐른 시점의 스스로를 ‘나’로 삼아 소설을 이어간다. (이 부분에서 작가에게 점수를 주고 싶다. 자전적 성장소설의 꼴을 띠되 그저 이 형식에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자의식의 형성의 시점과 그로부터 사십여년이 지난 지금의 시점을 적절히 교배시킴으로써 과거와 현재를 교묘하게 연결시키고 또한 분리시키는 데에 성공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니까 그와 나는 동일인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시간의 간격쯤은 내게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예컨대, 나는 지금 2002년 정월의 잔뜩 흐린 하늘을 내 서재의 창으로 보고 있는데, 그는 교복 차림 그대로 1964년 늦가을의 부용미용실에 앉아 젖이 큰 우유통 창녀2와 육백 치기를 하고 있다.” 소설은 모두 네 개의 챕터로 되어 있다. 열여섯 살과 열일곱 열여덟, 그리고 열아홉과 스무 살의 책상으로 구성된 각각의 챕터는 공간적으로는 강경에서 이리, 전주, 여수, 서울, 부산을 넘나든다. 그의 생각을 따라잡는 일은 관념적이고 복잡하지만 그의 행적을 따라다니는 일은 의외로 재밌다. 강경에서 재클린이라고 이름 붙인 고아원 소녀와의 만남, 자살을 시도한 후 이리 자취방을 드나드는 네 명의 친구, 이리 철인동의 창녀들, 전주 사밤대에서 만난 불루의 배신, 여수의 여심여인숙의 여주인, 서울 모래내 천변동네의 화장실, 밀실에서의 고문, 부산 유곽에서의 강경 재클린과의 재회... 제목인 더러운 책상은 “가봐. 가서, 더러운 책상을 갈고 닦아. 미친 세상으로 미쳐서 나아갈 준비를 하는 거야...”라는 대목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세상과의 타협을 위한 준비물로서 주인공을 비위 상하게 하는 무엇의 상징 즈음이다. 이후 조금씩 책상에 대한 묘사가 조금씩 바뀌기는 하지만, 이러한 전제는 바뀌지 않는다. 대신 세상과 타협할 줄 모르는 그가 찾는 것은 보다 생동감 있는 현실이며, 오묘한 진리이다. “...열일곱의 그가 눈물에 젖어, 그러나 결단코 찬스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나리 누나의 왼쪽 젖꼭지를 죽어라 빨 때, 철인동의 방, 방, 방으로 나뉜 부스럼투성이 유곽을 둘러싼 거리엔, 사막 같은 여름이 침몰하고 있다. 여름은 쓰러져도 더 넓어진 사막은 지구에 남을 것이다...” 젊은 작가들이 보여주는 위트 만점의 성장소설과는 또다른 묘미를 주는 소설이라고나 할까. 작가가 설정한 현재의 나의 나이(오십대 중반)만큼이나 진득한 세월이 흐른 후(물론 작가 지망생이었던 문청의 시기를 간직한 오십대 중반이라면 더할나위없다) 돌이켜 짚어 보면 그 하나하나가 눈에 밟힐만한 소설이다. 아득하게 멀어, 그것이 정말 나였는지조차 가물거리는 과거의 ‘나’, ‘그’를 정말 ‘나’라고 불러야 할지 아니면 ‘그’라는 삼인칭으로 불러야 할지 모를 정도의 시간이 흐른 다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으로의 자전적 소설을 떠오르게 만들어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