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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은 본래 "강남"과는 태생적으로 유리된 지역입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무학대사이건 정도전이건 "산지남 수지북"의 분명한 도그마를 염두에 두고 새 수도의 입지를 정했는데, "강의 남쪽"이 대체 웬말입니까. 본디 도성은 사대문 안 일대만을 뜻했고, 그 외 지역은 형편이 어려운 이들이나 격지의 농민들과 다를 바 없는 신분, 처지의 이들이 모여 살던 곳에 불과했으며, 현재 강남이라 일컫는 곳은 허허벌판, 과수원, 농지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불과 사십여년 전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포털 재게시 주소 |
| 사마씨가 자기들끼리 정권다툼을 벌이다가 나라를 망치고 남쪽으로 피난와서도 역시 정신을 못차리고 귀족놀음을 하던 무렵 이후의 시대가 바로 이 책의 시대적인 배경이다. 거듭 나라의 주인이 바뀌어도 그들 귀족들에겐 외투 바꾸어 입는 것 이상의 의미가 없었다고 한다. 주인만 바뀔 뿐 귀족들 입장에서 손해보는 것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내세울 것 없는 가문에서 병권을 쥐고 황제가 된 사람과 그 후손들도 귀족들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가문의 명망 때문에 무덤을 호화롭게 한다거나 자기 멋대로 방탕의 극을 달리는 생활을 했다. 남조가 평화기를 맞았던 것도 북조 정권이 혼란기였기 때문이라는데 그 사이 힘을 길러 북벌을 시도했다면 상황이 달라졌을텐데. 대부분 사람들이 죽림칠현도 고상한 사람들의 지조있는 이야기인줄 알았지만 이 책을 읽고보면 결코 그렇지 않다. 사실만 늘어놓으면 역사가 아니다. 사실에 대한 저자의 해석이 따라붙어야 한다. 그걸 읽고 독자도 저자의 해석을 따를 건지 다른 견해를 가질 것인지를 생각하게 된다. 저자는 강남시대를 통해 현재 우리들의 삶과 많이 견주고 있다. 책에 보면 저자가 그렇게 보고싶어 애태우던 장소가 여러 군데 등장한다. 다른 사람에겐 아무 의미없는 곳이지만 당사자에겐 꼭 가보고싶은 곳이 될 수도 있다. 저자의 견해가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강남시대와 지금 우리 모습을 비교해 보려는 시도는 충분히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특히 남조의 엉터리 황제들이 나라를 망치는 동안 침묵하고 있던 귀족들 이야기는 우리에게도 큰 교훈을 준다. 일반 백성들보다 일부에 지나지않지만 귀족들의 행동이 나라의 운명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이 책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이 남의 나라 중국의 이야기만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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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이 쓴 중국판 문화유산 답사기라 할수있다. 저자가 배낭을 메고 잊혀진 왕조의 현장이나, 사건의 현장, 잡초속에 파묻혀 있는 분묘를 찾아 답사여행을 하고 그 시대가 남긴 기억과 생각들을 적어 놓았다.
총 3권으로 되어 있으며 2권은 동진, 남조시대를 그렸다.
도교의 성지인 사천에서 50-60년대 한국의 정겨운 모습을 발견하고 죽림은 사라지고 술과 마약과 기행으로 세월을 보낸 칠현의 이름만 남아있는 여산 동림사 중국문명을 낳고 키워온 황하의 중류에 있는 삼문협 장강이 젖먹여 키운 강남의 보석 남경 등
강남의 낭만은 비극을 잉태한다. '낭만이란 낭만 그 자체로 끝나지 않는다. 누린만큼 그 댓가를 지불하기 마련이다. 남조의 끝이 그러했다. 폐허가 된 건강성을 둘러본 옛시인은 말했다. 이 가을 옛보루는 쓸쓸하고 갈대만 무성 하구나.'
중국역사에 숨어있던 고도들을 찾아 그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모습이 사진과 더불어 실려있다. 고도(古都)를 찾아 읽는 역사서라 해도 무방할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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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림칠현의 사상과 행동은 한마디로 기존의 권위와 질서에 대한 철저한 반항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들의 행위를 일컬어 마음 가는 대로 자유롭게 행동한다는 의미의 광달불기 혹은 마음을 자유롭게 해방시킨다는 의미의 방달이라 한다. 당시의 모든 법과 규율을 무시하고 예속에 구애되지 않고 그 틀에서 벗어나고자 하였던 것이다. 당시 그들을 짓누르던 기존 질서란 바로 한 대 이래 정치를 지탱해 온 체제 교학인 유교였다. 당시 지식인들의 일화를 집대성한 세설신어 임탄편은 타인에게 전혀 구애받지 않고 자행한 방탕한 행동들을 주로 소개하고 있는데, 그 첫머리에 “칠인은 늘상 죽림 하에 모여 마음껏 즐겁게 술을 마셨기 때문에 세간에 죽림칠현이라 한다”고 하였다. 그들은 당시 유교적 도덕 내지 제도를 예 혹은 예교라 지칭하고, 그것은 속된 것으로 간주하고, 그것에서 벗어남 즉 탈속의 행동을 몸소 실천했던 것이다. 75쪽 후한말의 태학생이나 소위 청류파가 그러했다. 그들이 주도한 반정부 운동 소위 청류 운동의 화려함 뒤에 숨겨진 위선성이다. 순수하지 않은 반정부 운동은 또 다른 엽관 운동인 것이다. 그들의 언동은 부화하기 이를 데 없고, 그들의 모임은 구합 교회에 불과한 것이어서 한마디로 외화내빈이었다. 명절적인 행동이 사리로 곧바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76쪽 동진의 대서예가 왕희지도 관직에서 물러난 후 양생술을 익혔다. 만년에는 약물 중독 고통으로 시달리다 죽었다. 왕희지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는데, 특히 넷째 아들 휘지는 죽기 전에 등이 썩어서 갈라지는 한식산 중독 증세를 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게 명사들은 모두 술과 마약에 중독되어 있었다. 한식산은 그 약재가 매우 비싸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고 부유한 사람이 아니면 먹을 수가 없었다. 한식산을 먹지 않으면 명사가 될 수 없었으니 일반 사람들이 모방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식산을 먹은 후에 나타나는 증상을 남들 앞에 일부러 드러내 보임으로써 자기의 신분을 과시하려는 풍조까지 나타났다. … 위로는 정권을 주무르는 조정 대신이 마약을 복용하여 정신불열 증세를 나타내고, 아래로는 지위나 재력으로 볼 때, 복용할 능력이 없는 일반인조차 억지로 약물을 복용하거나 복용한 것처럼 행세해야 하는 세상이 바로 이 위진 남조 시대의 풍경이었던 것이다. 물론 북조의 북위에서도 한식산 복용이 있었고, 특히 태조 도무제 말년 그를 돌보던 태의가 죽자 발작 증세를 보여 대신들을 살해하기에 이르기도 했다. 그러나 북위 사회는 전반적으로 동진 남조에 비해 건전한 편이었다. 85쪽 진인각의 주장을 요약하면 첫째, 기존 학계에서 믿어 왔던 것처럼 도화원이 현재의 호북성 장가계 근방의 무릉 지역이 아니라 지금의 섬서성 동관 근방 홍농 혹은 상락에 있었다는 것이다. 둘째, 도화원에 살던 사람들의 조상은 진 나라 때 피난 온 사람들이 아니라 오호십육국의 전진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즉 당시 전진 왕 부생의 가혹한 정치와 부견이 일으킨 비수의 전쟁으로 피난해 온 사람들이었다고 본다. 셋째, 남조 유송을 창업한 유유가 동진 의희 13년(417) 북벌하여 관중에 들어갈 때, 종군했던 대연지 등이 당시 백성들이 자위를 위해 집단적으로 깊은 산 속을 찾아 새로운 촌락 공동체를 세운 소위 오보이야기를 소재로 지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진나라가 있었다는 사실도 모른다고 하였다고 한 것은 은사 유지기가 형산에 들어가 약초를 캤다는 당시에 유행한 고사를 끌어다 햡쳐서 만드는 과정에서 나온 것일 뿐, 실제 영진과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수당제도연원략논고, 수당정치사술론고).… 그런데 그의 논문에도 상당한 허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려 준 논문을 발견하게 되었으니 바로 또 다른 석학인 당장유의 논문이었다. 그는 진인각의 설을 정면으로 반박하고 나섰다. 그에 의하면 도화원의 고사는 본래 동진-유송 교체 시기 남방 형상 지방의 민간에 유행하는 전설로서 도연명이 그것에 근거하여 이상화시켜 완성한 문학 작품잉라는 것이다. 이 전설을 듣고 기록한 것은 도연명만이 아니었다. 같은 시대 사람인 유경숙이 지은 이원이라는 책에도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나온다. 즉 유송 원가 초에 무릉의 만인이 사슴을 쫓다가 바위 구멍으로 들어가 신세계를 발견한 이야기가 그것이다. 도연명이나 유경숙이 모두 당시 이 고사를 듣고 서술을 남겼지만 도연명은 자기의 이상한 가탁하고 예술적인 가공을 가했던 것인 데 비해, 유경숙은 첨가한 것이 없다는 차이일 뿐이라는 것이 당장유의 진인각에 대한 반박이다. 사실 도가서인 운급칠점의 신선감우전과 태평어람에 인용된무릉기 등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나온다. 뿐만 아니라 도연명은 강릉에 가서 한 시기를 보냈고 유경숙도 의희 7년(411) 강릉 남방 남평국의 낭중령을 지냈으며 유자기가 살았던 양기도 무릉과 가까운 곳이기 때문에 무릉 지방의 전설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당장유의 주장도 매우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115-119쪽 중국을 남북으로 가르는 경계는 회수~진령산맥으로 연결되는 동서선이다. 사실 선진시대의 초오월은 동방의 조선과 마찬가지로 다른 나라였던 것이다. 당시의 중국은 현재의 북중국 즉 중원만이었다. 엄격히 말해서 한 대까지도 중국에는 남북 문제가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 대에 “관동에 재상이 나고, 관서에 장군이 난다”는 말이 있지만 산(화산)과 관(함곡관)이 동서를 구분하고 있었을 뿐이다. 한 대 이전은 만이의 땅 그 자체였다. 남북의 구분이 있었다면 문명과 야만의 차이일 뿐이다. 북중국이 굳이 스스로를 문명이라 자칭하지 않아도 초오월 등의 여러 왕들은 스스로 만이임을 자인했다. 이런 문명과 야만의 구별이 일대 변국을 가져온 사건이 바로 4세기 초에 일어난 영가의 난과 그것이 유발시킨 서진 왕실의 남도였다. … 영가의 난 후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호족의 지배 하에 남겨졌던 한족은 갖은 모욕과 학대를 받았다. 북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호한 간의 갈등이었다. 북중국의 가장 큰 문제는 호한 간의 갈등이었다. 새외 유목 민족 출신 지배자들은 한족을 “개와 다름없는 한인(한구)” 혹은 “1전 밖에 안 되는 놈들(일전한)”이라고 불렀다. 요즈음에도 사용하는 파렴치한, 무뢰한의 한이라는 말이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남중국도 많이 달라졌다. 종래 야만의 땅이라 매도했던 곳에 피난살이를 시작한 한족 교민들은 동진 송 제 양 진 등 왕조를 이어가면서 지속적으로 한족 출신 천자를 세웠고, 그들이 정치를 주도해 나갔다. 이들이 소위 교민 그룹이다. 피난의 땅 강남에는 한족과는 다른 족속들이 이미 살고 있었다. 만이라 불리는 이민족도 있었지만, 오래 전 그곳으로 이주해 온 한족도 있었다. 이들 토착 세력을 구민이라 일컫는데, 이 두 그룹 사이에서도 갈등이 표출되었다. 교민과 구민 간의 즉 교구 갈등이다.… 내부 갈등은 점차 불식되었지만, 대신 남북간의 대립이 심화되었다. 그 결과 남조와 북조 사이에는 정윤 즉 정통과 이단(윤통)의 문제가 야기되었다. 즉 남조는 북조를 배척하여 변발한 오랑캐라 하였고, 북조는 남조를 섬 오랑캐라 부름으로써 서로를 오랑캐라 폄하하고 스스로 중국의 정통 왕조라고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 남북 분열의 시대인 위진 남북조 시대가 종식되고 수당의 전국 통일 후 남북의 문화가 융합될 때 소위 남파와 북파의 차이가 크게 부각되었다. 남북 간의 문화 차이는 이른바 주기와 주정이 그 차이라는 것이다. 북중국인들은 역사적으로 볼 때 이민족을 그다지 배척하지 않는 편이라고 한다. 원대의 경우 소위 북인들이 침략자인 몽고인에 대해 크게 반대하지 않았고, 원나라 멸망 시에도 원나라 조정에 대해 눈에 띄게 이반된 행동을 보이지 않았다. 또 청대를 보아도 북인은 강남인과 달리 만주 정부가 발령한 치발령에 비교적 순종하는 편이었고, 청조 멸망 후에도 최우까지 직예 하남 산동 등의 성들은 독립 선언에 주저했던 것이다. 156-161쪽 오호의 중원 침입, 이른바 영가의 난을 계기로 중국의 남북 구별만 열린 것이 아니라, 그와 동시에 문명과 야만이알는 고래의 등식이 완전 와해되고 오히려 역전되는 단초가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이런 역전이 뚜렷하게 나타난 것은 당과 송대에 이르러서였다. 소위 당송변혁은 남북 우열의 대환위기라 할 수 있다. 동진 이후 북송 말기까지의 약 800년간은 중국 문화 중추의 이동이라는 대전환을 준비하는 과도기였던 것이다. 165쪽 그들은 대대로 고귀한 지위를 고정적으로 독점하면서 국고만 축내는 기생 계층일 뿐이었지만 무장 가문 출신의 황실을 몰문화의 촌놈들로 업신여겼다. 그들은 군인들을 경멸했다. 북방에서는 오호십육국이라는 혼란된 시대를 극복하고 일사불란하게 화북의 모든 역량을 통일시켜 가고 있었는데, 남조는 장강의 자연적인 방어벽만을 믿고 상하가 모두 이 지경에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황실들이 촌놈 출신이라는 열등감에서 끝내 헤어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제나라 창업자 소도성은 송나라 말 어느 귀족에게 보낸 서찰에서 스스로를 “하관상인”으로 자처했고, 죽음에 임하여 남긴 유조에서도 “내 본래 포의소족으로 황제에 오르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고 귀족에 대한 열등감을 토로했다. 지나친 열등감은 기행을 낳고, 그로 하여금 자기 과시에 골몰하게 만든다. 능묘 앞의 거대한 석조물이 등장하게 된 원인의 하나인 것이다. 216-217쪽 안지추는 당나라 때 한서의 주석가로 유명한 안사고의 조부이며, 서법가로 유명한 안진경과 안사의 난 시기의 충신 안고경의 5대 조부이기도 하다. 이 가훈의 영향때문인지 대대로 훌륭한 자손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278쪽 삼문을 통과한 물이 한 군데로 합쳐지는 지점에 암석으로 된 작은 섬이 가로막고 있다. 이 작은 섬을 끼고 물줄기는 천지를 진동하면서 흐른다고 한다. 이 암석의 작은 섬이 지주지험으로 알려진 지주석 혹은 중류지주다. 삼문 가운데 인문의 물살은 험악한 정도가 두 문에 비해 상대적으로 양호하여 역사 시기 이 문을 통해 배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애를 썼다. 그곳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배에 줄을 매달아 수많은 사람들이 끌어올리는 형식을 취할 수 밖에 없었다. 그 과정은 항상 수 많은 사람의 생명을 담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고난의 지주지험 그러나 우리나라 조선 시대 선비들에게 그것은 신념과 의지의 표상물이었다. 어떤 고난이 와도 의리는 반드시 이기는 법이니 불의에 항거해야 한다는 소위 중류지주(난세에 처하여 의연히 절개를 지키는 선비에 비유)라는 용어는 바로 여기에서 연유했던 것이다. 283-284쪽 |
| 박한제 교수의 역사기행 이라면 이미 먼저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을 통해서 먼저 접한적이 있었다. 그는 많은 중국 여행을 통해서 철저한 고증을 바탕으로 중국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다. 그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마치 중국 위진남북조 시대의 한장면에 서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이번 편은 '사천','절강',강소'의 장강이남의 강남의 역사를 설명하고 있다. 중국에서 강남과 하북은 매우 다른 역사적 배경을 가지고 있는데 이책을 읽기 전에는 그사실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강남은 5호16국 시대 이전만하더라도 야만의 땅이었고 중국의 중심은 하북이었고 강남은 아직 눈을 뜨지 못한채 한마리 와룡으로 잠들고 있었다. 그런데 '영가의 난'이후로 계속된 흉노,선비를 비롯한 여러 호족들의 남하로 하북은 호족들의 땅이 되었고 원래 하북을 지배하던 중국의 정통왕조와 귀족들은 강남으로 몰려왔다. 그때부터 강남은 용이 눈을 뜨듯 그동안 잠들었던 잠재력을 한껏 발휘 한다. 장강을 통해 많은 물자들을 받아들일수 있었고 비옥한 땅때문에 경제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이것들은 귀족들의 사치와 퇴폐풍조로 이어졌고 결국 이모든 것들이 망국의 조짐이 되었다. 이책을 문득읽으며 우리나라의 "강남"을 생각하기도 했다. 우리나라의 부의 상징이자 사치의 퇴폐의 상징, 우리나라의 강남도 먼옛날 역사의 전철을 밟지나 않을까 조심스레 걱정이 된다. |
| 사실 위진남북조의 역사를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전문적으로 다룬 책도 흔치 않거니와 무엇보다 그 시대를 알아야할 이유를 잘 모른다. 1권에 이어 저자는 강남지역을 중심으로 위진남북조의 역사에 대해 설명한다. 그런데 교수라는 신분때문일까. 일반독자들은 생각을 안하고 스스로 취해 강의하는 분위기가 역력하게 느껴진다. 대학생들이라면 알 것이다. 학생들은 공감하지 않는데 앞에선 교수만 혼자 취해 하는 강의가 어떤 것인지를. 또 중간중간 저자의 한국비판은 도대체 왜 한 것인지 이해가 안간다. 50대(정확한 나이를 모르겠다)의 서울대 교수라는 위치때문인가? 너무나 보수적이고 극우적인 시각에 몇번이나 짜증나서 책을 덮었다. 저자의 중국역사 소개도 좋지만 그릇된 시각을 독자에게 전달하면 안된다. 민주주의의 부정과 학벌제도의 유지에 찬동하는 시각의 글을 앞으로는 쓰지 말았으면 한다. |
| 먼저, 이 책이 가지는 본질적인 한계부터 지적해야 겠다. 저자는 처음부터 완결된 책을 저술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일을 시작한 것이 아니고, 어디까지 월간지에 그때 그때 연재한 글을 나중에 다듬은 후에 연관성 있는 것끼리 묶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체제나 구조가 좀 난삽하다. 다시 말해서, 위진남북조사에 대해서 어느 정도 기본 지식이 없으면 제대로 소화하기가 어렵다는 이야기다. 개인적으로는 시오노 나나미 스타일로 부담없게 위진남북조 전체의 역사를 그려가면서 본문에 기행문을 녹여들이는 스타일로 하는 것이 더 좋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 실린 이야기는 하나 하나가 비교적 흥미로운 글들이다. 중국의 고대-중세 전환기에 대해서 의미있는 지식을 쌓을 수 있는 기회이다. 2편은 남조에 관한 이야기가 큰 줄기를 이룬다. 위나라를 멸망시켰던 사마씨의 후손들이 강남에 이주함으로써 이야기는 시작된다. 중국 역사에 문외한이신 분들은 읽기가 지루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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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한제교수님의 중국역사기행 시리즈 1편인 <영웅시대의 빛과 그늘>을 읽고 내처 읽었다.
(여기서 잠깐, 지난 줄거리 : 1편에서는 저자의 남다른 시선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후한 이후 북조시대를 거치면서 중국역사를 정통한족의 시각만이 아니라 다양한 북방민족의 입장까지 대등하게 다루어 주었기 때문이다. 사실, 진, 한 시대를 거쳐 동진 이후로는 정통 한족만의 중국사란 없지 않느냐. 이 점은, 내가 평소에 다른 중국사 서적을 읽으면서 생각하던 점인데 이론적 배경이 없어 생각만으로 그쳤었다. 그런데 바로, 박한제 교수가 1편에서 그의 '호한체제론'으로 명쾌히 서술해 주셔서 강추를 외치면서 리뷰를 썼었다.)
그러나, 2편을 읽고나니, 내가 1편에서 강추를 외친 것이 실로 경망스러웠다는 반성이 든다.
사실, 왜 우리가 역사서를 읽는가? 중국 역사가 진한위진남북조수당송원명청으로 진행되었다는 거, 다 안다. 그런데 왜 읽는가? 저자만의 그 시대를 해석하는 '사관'을 보고 싶은 것이 아닌가?
그런데, 2편은 이 교수님의 시대 해석과 현재 적용이 너무 예상 외라는 거다.
이 책에서 다루는 시기는 사마씨의 진이 강남으로 피난간 이후의 남조시기이다. 귀족문화에 대한 비판이 주로 나오는데, 여기에서 현재 한국의 정치문화에 대한 언급이 많이 등장한다. 정말 내가 학부생으로 강의실에서 이런 강의를 들었다면 '교수님, 왜 이러세요~'하고 교재로 얼굴가리고 소리질렀을 것 같다.
본문 예를 들자면 : (남조의 청담사상과 죽림칠현 유풍의 문제점을 논하시다가) '배고픈 것'은 참아도 '배 아픈 것'은 참지 못하는 비뚤어진 민주주의 신봉자들은 경쟁력이 있는 학과, 경쟁력이 있는 학교를 더 만들기는 커녕 있던 것마저 끌어내리느라 정신이 없다.국제 경쟁력을 강조하면서도 경쟁 과정 없이 학생을 선발하는 나라가 이 세상에 어디 있단 말인가? 경쟁 없이 선발된 중고등학교 교실에 잠자는 학생이 반이 넘어도 정부는 오불관언이다. 최근 대학마저 하향 평준화 정책으로 치달은 결과 대학에서 우열반을 두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니 이제껏 그나마 경쟁력을 가졌던 대학도 그 존재마저 위협받고 있다. (중략) 우수 대학 육성과 우열반 편성도 평등 실현의 한 방법이라 할 것이다. 역대 정권이 주도해 온 교육 개혁이란 것도 사립학교 교주들을 위한 요란한 잔칫상 차림에 불과하지 않았던가.(이분은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님이시다) - 91쪽
남조의 귀족문화의 문제점을 현 한국사회와 관련지어 논하시려면 박노자씨나 홍세화씨처럼 '노블리스 오블리주' 방향으로 가야 하는 것이 아닌가? 서울대의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말이다.
정말, 교수님, 왜 이러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