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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로 꿈꾸는 새로운 시 세상- 이상옥, 『디카시 창작 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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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로 꿈꾸는 새로운 시 세상- 이상옥, 『디카시 창작 입문』      디카시는 디지털 카메라의 줄임말인 ‘디카’와 ‘시’가 합쳐진 말이다. 2004년에 시작된 디카시 운동은 활자 매체에 치중하는 기존의 시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스마트폰’이라는 첨단 기기를 연계한 새로운 시 창작 방법을 지향하고 있다. (디카)시인은 사물에 대한 순간의 감흥을 사진으로 찍고 그 감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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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카시로 꿈꾸는 새로운 시 세상

- 이상옥, 『디카시 창작 입문』

 

 

 

디카시는 디지털 카메라의 줄임말인 디카가 합쳐진 말이다. 2004년에 시작된 디카시 운동은 활자 매체에 치중하는 기존의 시 창작 방식에서 벗어나 스마트폰이라는 첨단 기기를 연계한 새로운 시 창작 방법을 지향하고 있다. (디카)시인은 사물에 대한 순간의 감흥을 사진으로 찍고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한다. 디카시는 그러므로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으로 구성된다. 사진이미지는 시인이 사물에게서 느낀 순간적인 감흥을 이미지로 드러낸 것이고, 언어 표현은 사물의 느낌을 문자로 드러내는 것이다. 사진이미지에서 문자로 이어지는 과정에는 기존의 시 창작과는 다른 디카시 고유의 창작 방식이 담겨 있다. 사진이미지와 문자가 결합되어 한 편의 디카시가 완성된다. 엄밀히 말해 디카시는 디카시자체로서, 달리 말하면 디카가 구분되지 않은 상태로서 규정할 수 있다는 얘기겠다.

 

이상옥이 지은 『누구나 쉽게 배우는 디카시 창작 입문』(북인, 2017)은 다양한 작품들을 사례로 들며 디카시 운동의 발원에서 현재 상황까지 서술하고 있다. 이전에 발간한 『앙코르 디카詩』(국학자료원, 2010)에 이어 이 책은 디카시 이론을 소개하는 두 번째 책에 해당되는 셈이다. 2004년 경남 고성에서 시작된 디카시 운동은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을 복합한 새로운 시 운동으로 거듭나고 있다. 지은이는 우선 디카시에서는 영상과 문자가 결합하여 디카시가 되는 것이지, 영상에 시가 결합된 것은 아니다.”(20)라는 점을 분명히 밝히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다. 디카시는 영상(사진이미지)이 따로 시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영상과 시가 하나로 결합되어 있다. 영상에 치중하면 사진예술이 되고, 언어 표현에 치중하면 문자시가 된다. 디카시는 사진예술이나 문자시와 다른 양식이라는 걸 지은이는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디카시는 무엇보다 미디어환경의 변화와 긴밀하게 이어져 있다. 문자시가 언어로 사물을 표현하는 시대의 산물이라면, 디카시는 스마트폰이 일상이 된 시대의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미디어는 메시지라고 주장한 마셜 맥루한의 말마따나 미디어의 변화는 곧바로 메시지의 변화를 불러낼 수밖에 없다. 문자시는 언어라는 매체에 한정되어 세계를 본다. 언어로 보는 세계는 언어에 갇혀 있다. 똑같은 사물을 봐도 언어로 표현하는 것과 사진(혹은 영상)이미지로 표현하는 것은 아주 다르다. 디카시는 바로 언어가 지닌 한계를 넘어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을 하나로 묶으려고 한다. 돌려 말하면 디카시는 시인이 사물과 마주하는 순간의 감흥을 사진이미지와 언어를 통해 집중적으로 드러낸다. 지은이가 디카시를 극순간을 표현하는 양식으로 규정하는 까닭은 여기서 비롯된다고 하겠다.

 

지은이는 디카시 이론의 근간을 하이데거의 존재시학에서 찾고 있다. 그는 디카시인을 에이전트로 설정하는데, 에이전트로서 디카시인은 사물이 내보이는 언어를 대신 전달하는 존재를 가리킨다. 사물의 언어는 일상 언어와 다르다. 일상 언어는 언어의 한계에 갇혀 사물이 드러내는 존재를 표현할 수 없다. 하이데거를 따르면, 시인은 사물이 순간적으로 내보이는 본질과 하나가 됨으로써 그것을 언어로 표현한다. 시인이 쓰는 언어는 그러므로 사물의 언어와 다르지 않다. 고흐가 그린 구두를 논하면서 하이데거는 구두에 숨어 있는 존재의 흔적을 사물의 언어로 표현한다. 지은이의 말대로라면 뮤즈로부터 받은 영감을 예술가들은 색채로, 언어로 표현한다. ‘영감(靈感)’이라는 낭만주의 용어에 나타나듯, 지은이는 사물의 언어를 사진이미지와 문자로 풀어내는 존재로서 시인을 정의하고 있는 셈이다.

 

디카시는 극순간의 양식이다. 디카시야말로 현대시가 점점 잃어가고 있는 순간의 양식에 충일한 것이라고 강조해두고자 한다. 디카시가 서정시의 본질에 맞닿아 있는 것이 시적 세계관에서도 그렇고 순간의 양식을 넘어 극순간의 양식이라는 데에서도 더욱 그렇다. 여기서 이라는 접두사를 들고 나온 것은 현대시가 잃어가고 있는 서정시의 본질에 디카시가 충실하고 있다는 것의 강조적 표현으로 봐도 좋다.

오늘의 현대시가 복잡다단한 생을 드러내려다 보니, 시의 길이도 점점 길어지고 있는바, 이는 어쩔 수 없는 현상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디카시가 극순간의 양식으로 문자의 길이를 최소한으로 제한하고자 하는 것은 시의 본질에 충실하기 위해서이다. 이런 점에서 디카시는 5행도 길다고 하겠다. (80~81)

 

서정은 시인과 대상의 동일성을 전제로 형성되는 말이다. 모더니즘 이후로 시인과 대상은 더 이상 동일화될 수 없는 파편화된 세계에 직면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시인들은 여전히 동일성을 지향하는 서정을 꿈꾸고 있다. 파편화된 세계를 인식하는 것 자체에 이미 파편화된 세계를 넘어서려는 마음이 내포되어 있지 않은가. 지은이는 디카시의 서정을 극순간의 양식이라는 어구로 표현한다. 순간의 양식을 넘어서는 극순간의 양식을 통해 지은이는 디카시에 내재된 서정성의 맥락에 다가선다. ‘극순간은 사실 디카시에서는 사진이미지로 구현된다. 사진이란 무엇인가? 사물의 한 순간을 포착하는 예술이 아닌가. 사진은 움직임을 배제한다. 움직임이 사라진 채 한 공간에 고정된 이미지를 사진은 드러낸다. 말 그대로 극순간이다. 카메라 기술의 발달로 우리는 물방울이 튀는 장면마저도 극순간으로 볼 수 있다. 언어로 순간을 표현하는 일과 사진으로 ()순간을 표현하는 일을 한번 비교해 보라. 지은이는 디카시에 내포된 이 극순간의 이미지로 사물과 마주하는 찰나를 표현하려고 하는 셈이다.

 

사진이미지로 묘사가 이루어지므로 디카시는 당연히 짧은 시를 지향할 수밖에 없다. 지은이는 한 줄도 너무 길다는 하이쿠(일본 시)의 특성을 디카시에도 그대로 적용하고 있다. 순간의 감흥을 언어로 표현하는 게 디카시의 본질이라는 데서 디카시 언어는 순간의 깨달음을 언어로 표현하는 선시(禪詩)와도 맞닿아 있다. 대중성을 지향하는 디카시가 문화산업에서 이야기하는 대중성과는 거리를 두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사물을 보고 느끼는 순간의 감흥을 디카로 찍고, 그 감흥을 언어로 표현하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없는 사람들은 없다시피 하니 디카시는 문자시보다 대중성의 영역에서 확실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시 공부를 싫어하는 아이들이 디카시 공부에는 흥미를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디어가 메시지라는 말에서 그 이유를 새삼 찾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누구나 즐기는 디카시라는 말로 디카시에 내포된 예술성을 모두 담아내긴 힘들다. 누구나 부처가 될 가능성이 있지만 아무나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디카시 또한 마찬가지다. 똑같은 사물(상황)을 봐도 저마다 표현하는 방식은 다르지 않을 수 없다. 사진이미지에 일상 언어를 접합하면 과연 디카시가 될 수 있을까? 지은이는 이 책에서 시학 전통을 근거로 디카시를 설명하거나, 통화 체계로 디카시를 분석하기도 한다. 디카시에 드러나는 비유와 상징을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디카시라는 말에 가 붙어 있는 한, 디카시는 시 양식이 지닌 특성을 벗어날 수 없다. 시인을 에이전트=뮤즈로 설정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디카시 언어는 일상 언어의 바깥에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가 아니겠는가? 디카시의 성패는 결국 사진이미지와 결합된 언어 표현의 탁월함으로 평가될 수 있는 셈이다.

 

 

  

기린 무늬 길이다.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

아프리카로 초원으로 뻗어가고 싶은 길이다.

- 김왕노, 길의 꿈

 

2회 디카시작품상을 수상한 김왕노의 길의 꿈(이 책 20쪽에 실려 있다)은 디카시가 지향하는 길을 예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미지는 특별하지 않다. 우리가 일상에서 보는 돌길이다. 길에 깔린 돌 모양이 기린 무늬를 떠올리게 하는 것 정도가 이채롭다면 이채롭다. 시인은 일상에서 흔히 보는 이 이미지로 한 편의 디카시를 만들어내고 있다. 시인은 일상을 일반인들과는 다른 눈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린 무늬 길이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 시에서 시인은 제목처럼 길의 꿈을 노래한다. 길은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이다.”에 그 꿈의 내용이 담겨 있다. 길은 무생물이다. 무생물인 길이 기린이라는 생물이 되고 싶어 한다. 특별하지 않은 일상에서 특별함을 보는 시인의 눈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다.

 

기린 무늬를 가진 길은 기린을 꿈꾼다. 그리고 길은 기린이 된다. 꿈꾸는 일만으로 기린이 된다고? 그렇다. 꿈꾸는 일만으로 길은 기린이 된다. 상상이 곧 현실이 되는 세계를 시인은 디카시 양식으로 표현하고 있다. 시인은 기린 무늬 길을 보고 기린을 상상한다. 기린 무늬 길은 시인을 따라 기린을 상상한다. 길이 원하는 소망을 시인을 상상으로 이룬다. 상상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이미지로 표현한다. “기린 무늬 길이라는 날시’(사진으로 찍기 이전에 시인이 현실에서 본 사물 이미지)를 보는 순간 시인은 기린이 되고 싶은 길의 욕망을 발견한다. 길이라고 해서 꿈을 꾸지 않을 리 없다. 일상 언어로는 그 꿈을 표현할 수 없지만 사물의 언어라면, 다시 말해 길의 언어라면 충분히 그 꿈을 표현할 수 있다.

 

기린 무늬 길은 기린이 되어 아프리카 초원으로뻗어간다. 시인은 뻗어가고 싶은 길이다.”라고 쓰고 있지만, 시에서는 뻗어가고 싶은 길이 곧바로 뻗어가는 길이 되어버린다. 길이 꾸는 꿈은 상상의 공간 속에서 어김없이 이루어진다. 상상이 현실이 되는 이 공간을 시인은 사진이미지와 언어 표현을 결합하여 구현하고 있다. 이 시는 사진이미지만으로 시가 되기 힘들다. 마찬가지로 언어 표현만으로도 시가 되기는 힘들다. 사진이미지가 언어 표현으로 흘러가는 자리, 정확히 말하면 사진이미지가 언어 표현과 맞물리는 자리에서 이 시는 비로소 디카시가 된다.

 

지은이 말마따나 이 시는 어디에나 있는 산책길의 풍경에서 일약 아프리카 대초원으로 전개되는 감각의 생동감을 내재화함으로써, 불확정적인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로 하여금 강한 생명력과 정신의 자유를 꿈꾸게 했다.”(21~22) 말이 많다고 의미가 풍부해지는 것은 아니다. 의미는 사물의 핵심을 제대로 건드릴 때 수없이 많은 갈래로 뻗어나간다. 이미지들은 끊임없이 우리 주변을 떠돌고 있다. 디카시()는 그런 이미지들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사진이미지와 문자로 표현한다. 시가 일상화되는 자리를 디카시는 확연히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지은이는 디카시에서 디지털 시대에도 여전히 살아있는 상상(=무의식)의 가능성을 보고 있다. 디지털 사회를 향한 긍정적, 부정적 전망이 들끓는 상황에서 디카시는 디지털 기기로 펼쳐지는 또 다른 인문의 세상을 그리고 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디스토피아가 와도 기계는 절대로 인간의 상상력을 따라잡을 수 없다. 돌길이 기린이 되어 아프리카로 달려가는 상상은 오로지 언어를 비유와 상징으로 사용하는 인간만이 가능하다. 문자시가 점점 위축되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디카시는 미디어와 메시지가 하나로 통합되는 예술의 영역을 예시하고 있다. 언어가 살아있는 한 인간은 어떤 상황에서도 꿈을 꿀 수밖에 없다. 디카시는 어찌 보면 인간이 언어로 꾸는 꿈이 디지털 기기와 만나 확장되는 어떤 순간을 보여주는 양식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언어는 이제 미디어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미디어와 더불어 새롭게 꾸는 시 세상이 디카시라는 양식에 아름드리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o*****s 2018.02.05. 신고 공감 3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