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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을 자고 일어나니 투명한 벽이 생겼다. 이 벽 너머 풍경이 보인다. 그곳엔 세수하다 죽은 듯한 노인이나 나무 위에 멈춰선 새 등이 있다. 그들의 모습에서 폼페이의 화석 등을 연상한 것은 죽을 당시 표정이나 동작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평화로운 풍경이다. 하지만 벽 너머의 세계는 죽음으로 가득하고, 그녀가 머무는 벽 속의 세계는 자연 그대로 보전되어 있다. 벽을 따라 혹시 끊어진 곳이 있나 찾아보지만 견고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제 그녀는 살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읽으면서 로빈슨 크루소가 먼저 생각났다. 고립과 외로움과 생존을 위한 노력이 비슷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둘은 다르다. 로빈슨 크루소는 섬 밖의 세계를 그리워하고 살아남아 구조되길 바라는 반면에 그녀는 벽 밖의 풍경 속에서 희망을 잃고 있다. 희망이 없는데 그녀는 삶을 계속한다. 도시인으로 살아온 그녀에게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지구의 종말일지도 모르는 상황 속에서 말이다. 손에 물집이 잡히고, 근육은 당겨지고, 초보 농사꾼으로 살아간다. 대단하다. 삶을 포기하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인지는 모르지만 그 강인한 생명력과 생활력은 단순한 풍경과 상황 속에서 긴장감을 전혀 늦추지 않는다. 작가는 그녀가 홀로 살아갈 수 있는 몇 가지 상황을 만들었다. 먼저 그녀가 사는 산장이 바로 핵전쟁 등이 발생하면 오랫동안 먹고 살 식량을 비축해둔 것이고, 다음으로 그녀의 외로움을 달래줄 동물로 개 룩스와 어미 고양이 한 마리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임신한 암소 한 마리를 주변에 놓아둬 풍부한 우유를 먹을 수 있게 만들었다. 생활에 필요한 의식주 중 의복을 제외한 모든 것이 갖추어진 것이다. 옷이야 추위나 다른 곤충이나 벌레를 막을 정도면 되고, 옷장엔 옷들이 꽤 많다. 보여줄 다른 사람이 없으니 기본 기능만 제대로 되면 문제없다. 이런 기본에 산이란 공간이 지닌 풍부한 열매와 농사를 지을 수 있는 땅이 같이 있다. 비록 그녀가 도시인으로 살아왔다고 하지만 삶을 위해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살려고 하는 의지와 노력이다. 책 속에 다루어지는 시간은 2년 반 정도다. 첫해에 겪었던 시행착오가 되풀이 되는 것도 있지만 점점 적응한다. 다만 풍족하지 못한 음식과 익숙하지 않은 농사일 때문에 고생할 뿐이다. 이것은 어쩔 수 없다. 농사일이란 것이 반복의 연속이다. 새로움도 있지만 땀과 정성으로 일궈지는 것이다. 거기다 그녀 주변에 동물들이 가득하다. 개, 고양이, 암소 등의 가금류뿐만 아니라 고기를 제공할 들짐승도 있다. 고양이와 암소는 임신한 상태고, 새끼를 낳는다. 이 가족이 점점 불어난다. 불어난 가족 덕분에 그녀의 할 일은 점점 많아진다. 쉬고 싶은 순간도 있고, 이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은 마음도 있지만 몸을 이끌고 생활 속으로 들어간다. 자신만이 지구에 홀로 남은 상황에서 그녀가 걱정하는 것은 함께 살고 있는 동물들이다. 과거 속에 만난 수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그녀에게 큰 아픔이나 의미를 주는 것 같지 않다. 단지 하루하루를 힘겹게 살아갈 뿐이다. 작가는 풍경에 대한 묘사와 그 속에 담긴 그녀의 심리와 행동을 섬세하면서도 차분하게 그려낸다. 문장은 간결하다. 감정이입을 강하게 시키지 않고 관찰자의 시선으로 설명한다. 약간 건조할 수도 있지만 덕분에 그녀가 처한 상황을 더 잘 알게 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것은 역시 홀로 남았다는 사실에 좌절하지 않고, 힘들지만 오늘 하루와 내일을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나라면 과연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의문이 생기는데 말이다. 다시 한 번 더 읽어야 될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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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지구상의 모든 사람이 사라지고 나만이 남게 된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소설을 읽는 동안에는 몰랐는데 그러고 보니 2007년 윌 스미스가 주연한 영화 <나는 전설이다>가 떠오른다. 영화 속에서 윌 스미스가 세퍼드 한 마리와 함께 텅빈 도시의 낮을 배회하였다면, 소설 속에서 여자 주인공은 룩스라는 이름의 개를 동반자 삼아서 길고도 지루한 생존자의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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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언젠가 이 책을 신간으로 소개하던 글에서 말이죠, 이런 얘기를 했던 게 기억납니다.
꼼지락.
기억을 꺼내는 중. 아, 네 여기있군요. 후,후. 먼지가 좀 쌓이긴 했지만 그런대로 알아볼만은 합니다. 이렇게 써 있어요. 문학동네에서 광고비 절감 차원에 희생당한,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소설 중에서 종종, 왕건이를 하나씩 만난다고 말입니다. 찾아보니 말이 좀 바뀐 것 같다고요? 아따 참, 이 냥반 까칠하시네. 본래 말이란 게 한 다리 건너면 바뀌고 그러는 거요. 오늘 다르고 내일 다르고 그런거지 무얼. 어쨌든, 그 예로 제가 필립 베송의 <이런 사랑>을 들었었는데요, 오늘 거기에 이 작품도 추가시키게 되었습니다. 네. 그래요. 이 작품 아주 좋아요. 확실히 괜찮다의 수준은 훌쩍 넘습니다.
플롯은 약간 로빈슨 크루소 타입입니다. 여자 홀로 이 세상에 남게 된 거지요. 그런데 그 남겨지는 과정이 참 이색적이고, 이후 여자가 살아내는 과정이 매우 리얼할뿐더러 대단한 흡인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지인들과 함께 산장에 놀러 간 이튿날, 모두가 시내로 나가고 여자 홀로 남았던 그날 갑자기 사방에 벽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 벽이 눈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이예요. 가까이 가서 만져봐야 알 수 있는 벽이죠. 네, 여자는 그 벽의 존재를 부딪혀서 알게 됩니다. 열라 쿵, 혹도 생기고. 그런데 이 투명한 벽이 어느 한 스팟 정도의 규모는 아니고 상당 영역을 주욱, 마치 병풍처럼 둘러서 생긴 게 아닐까 싶습니다. 정확히 어느 영역까지라는 말이 소설에 등장하지는 않지만 읽으면서 상상하니까 그렇더란 얘기이죠. 재미있는 건 벽 너머로 보이는 세상은 그대로 존재한다는 겁니다. 단지, 모든 생명이 박제되어버린 것처럼 정지해 있는 거죠. 오로지 식물만, 그러니까 풀만 자랍니다. 비도 오던가? 하여튼 새는 못 지나갑니다. 열라 날다 부딪혀서 코피 팡, 터지고 그러니까요.
자, 이런 오묘한 느낌의 세상에 갇혀 홀로 남은 여자. 그 기분에 흠칫 몸을 한 번 떨고 나면 말이죠. 이 여자가 기록해나가는 이야기들에 점점 빠져들게 됩니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2년 6개월간의 기록이에요. 말하자면 일기 같은 거죠. 그러나 이 여자가 완전 혼자는 아닙니다. 개 한 마리, 고양이 한 마리, 그리고 소 한 마리. 처음에는 그렇게 함께 남죠. 그러다가 새끼를 낳고 어떤 일 때문에 봉변을 당하고 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그 수가 조금씩 달라지기는 해도 근본적으로 인간은 이 여자 하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물론, 말미에 반전이 하나 등장하긴 하지만 그게 이 작품에 아주 큰 역할을 미치지는 않고요. 작가가 의도하는 페미니즘에는 영향을 미치는 듯 싶더군요. 아니, 이건 페미니즘이 아니지. 혐오인가? 아무튼, 개, 고양이, 소가 하는 행동들이 아우, 완전 몰입됩니다. 마치 제가 그 여자가 된 것 같은, 정말 효과 만땅의 일인칭 시점인지라 그녀가 바라보는 개의 행동, 혹은 고양이의 행동이 마치 제가 바라보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죠. 당연히 몰입이 될 수밖에 없어요. 어느 날 집 나간 고양이가 들어오지 않으면 저도 같이 걱정하고 있는 걸 느낀다니까요? 뻥 아니고. 로빈슨 크루소처럼 살아남기 위해 환경을 개척하는 연약한 이 여자는 기본적으로 인간을 믿지 않는 성향을 가진 사십 대 아줌마입니다. 그런데 만약 이 아줌마의 기록이 버지니아 울프처럼 노상 생각만으로 이루어졌었다면 제 아무리 우주적인 메시지를 지녔다고 할지라도 지루해서 돌아버렸을 겁니다. 그러나 다행히, 매우 다행히 지진부진한 상념보다는 행동 묘사가 많습니다. 아니, 많은 정도가 아니라 대부분이 움직이는 장면을 그려내고 있죠. 게다가 이 아줌마, 굉장히 부지런하거든요. 아줌마가 그러데요, 자기가 본래 부지런한 사람이 아닌데 그렇게 된 이유가 있다, 그건 바로 개, 고양이, 소가 자신을 의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뭐 그런 식의 얘기였죠. 맞아요. 이 여자는 모성애로 삶을 지켜내고 있었던 거였죠.
아주 감동적이거나 하진 않지만 꽤나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이야기가 조곤조곤 차분하고 나직하면서도 마치 살아있는 듯한 생동감이 있어서 읽기에도 아주 편합니다. 그건 리듬감 있는 단문이고 읽기에 좋은 호흡으로 이루어진 문장 때문이기도 하니까, 역시 역자의 공도 크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뜻하지 않게 아주 좋은 작품을 읽을 수 있게 되어서 기쁨이 두 배가 된 이유도 있고요, 역시 책은 독자와 어떤, 알 수 없는 인연으로 함께 움직인다는 말이 생각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인연이 있는 책은 어떤 방식으로든 만나게 된다는 거죠.
오늘 리뷰는 왜 존댓말이냐고요? 나도 모르게 상황이 그렇게 됬다아!
http://blog.naver.com/vitojung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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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이 생겼다. 그 벽을 경계로 한 사람이 세상의 나머지 부분과 갈라져 버렸다. 단절. 완전한 단절이 생겼다. 그러나 삶은 지속된다. 하루. 이틀. 한달. 두달. 일년.... 홀로 남은 그 사람은 어떻게 삶을 살아갈까. 그것이 바로 이 독특한 매력을 가진 책이 말하는 것이다. 제법 두툼한 부피를 가진 상당한 분량이 그 사람이 홀로 살아가는 과정을 표현한다.
세밀한 묘사. 이 책은 놀랍게도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가 한마디도 등장하지 않는다. 정확하게 말하면 대화를 표시하는 " " 표시가 전혀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말은 한다. 홀로 남은 사람이 자신에게, 자신의 주변에 있는 동물들에게. 독백과 다름없는 말이지만 말은 말이다. 그러나 그 말이 정상적인 말일수도 없다. 무려 360페이지를 대화없이 끌어가는 소설이다.
이 책은 약 3년간에 걸친 기간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 그토록 긴 시간을 한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에 어찌 길고 대단한 서사가 존재하지 않을수 있을까. 서사란 많은 군중과 거대한 스케일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것을 이 책은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런 방식의 소설이 존재할 수 있고, 이런 종류의 서사도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흥미로운 발상 뿐만 아니라 소설의 작법에 있어서도 대단히 독특한 매력을 가진 책이 아닐수 없다.
이 텍스트를 두고 사람들은 서로 많은 말들을 하는 것 같다. 책의 말미에 있는 역자의 논문발췌분을 보더라도 '반전 소설' '판타지 문학' '문명비판' '페미니즘 소설' 같은 방식으로 이 책을 읽는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논문의 흐름을 볼때 역자의 입장뿐 아니라, 세간의 대부분의 평단은 이 책을 페미니즘 소설의 부류로 생각하는 것 같다.
내 생각은 다르다. 내가 다른 사람들과 달리 생각하는 것은 내가 대단한 평론을 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그냥 나는 내 나름대로 이 책을 읽었고, 그저 나는 이 책에서 다른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하나의 사물을 보고 생각하는 사고의 흐름은 보는 사람에 따라 다를수가 있다. 하나의 사과를 어떤 사람은 빨갛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맛있겠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선이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어떤 영양학자가 보면 항산화 비타민이 풍부하다고 생각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잔류농약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할 수도 있다.
나는 이 소설에서 인간의 존재론적인 질문을 읽었다. 세상이 사라지고 더 이상 나와 아무런 접촉을 하지 않는 설정. 다분히 카프카적인 상황에서 한 사람이 어떤 현실과 마주치게 될까. 꼭 같은 아침이지만 그가 그 아침을 바라보고 대하는 방식에 따라서 그 아침은 다른 아침이 될 것이고, 그 아침이 그에게 미치는 의미도 달라질 것이다.
사람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상. 문명의 혜택을 전혀 받을 수 없는 세상. 그 세상에서 그가 느끼는 것은 무엇일까. 사랑하는 사람의 부재. 문명의 혜택의 부재. 인류가 쌓아왔던 고구한 지성을 빗나게 비추어줄 다른 사람의 존재의 부재. 그런 결핍으로 인한 아픔은 이 책에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사람은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것이기에 책에는 등장하지도 않는 농사일의 기본지식을 모르는 것에 아쉬워한다.
인류가 축적한 지식도 지혜도 찬란한 문명도 오락거리도 모든 것이 결여된 삶이지만 그 삶은 전혀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고통은 힘든 육체노동에서 나온다. 아니다. 그 육체노동을 유발하는 원인은 그 사람이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가 주변에 함께 데리고 있는 동물들을 건사하기 위한 필요하지 않는 노동때문에 요구되는 고통이다. 그 사람은 기꺼이 그 노동의 아픔을 받아들인다. 노동의 힘듬보다 더 절실한 것이 사랑하는 존재(동물)들의 부재이기 떄문이다.
때로 그 사람의 존재양식은 매우 부조리하게 보이기도 한다. 자신 스스로 벽을 넘어가면 먹을 것이 사방이 널려 있거나, 고통없이 즉각적인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느 것을 안다. 그 사람은 죽음에 대해서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다. 힘든 노동을 멈추기 위해서는 간단히 벽을 넘어서기만 하면 된다. 그러나 그는 대화도 되지 않는 동물들과의 삶을 위해 끝없는 노동으로 자신을 몰고 간다. 그리고 그 죽음같은 노동의 중간에서 아무도 없는 자연위에 존재하는 사무치는 아름다움을 느끼고 감동한다.
그렇다. 나는 이 책에서 바로 그런 점을 읽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 생소한 공간에서 존재하는 방식을 통해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 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다른 사람들은 이 책에서 자신이 보고 싶은 다른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풍부한 자양분을 가진 책은 읽는 사람의 요구에 따라 서로 다른 영양분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르게 읽혔던 이 책은 나같은 문외한에게도 이렇게 풍요로운 선물을 주고 있는 것이다. |
나는 바싹 말라가고 있었다. …… 물집이 잡히고 온통 못이 박힌 두 손은 나의 가장 중요한 연장이 되었다. 나는 이미 오래전에 손에서 반지를 빼버렸다. 누가 연장을 금반지로 장식한단 말인가. 내가 전에 했던 일들이 모두 바보 같고 우습게 생각되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나는 전보다 오히려 더 젊어 보였다. 사십대 여자가 갖는 특징들, 웨이브 진 머릿결, 앙증맞은 이중턱, 둥그스름한 엉덩이 같은 것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그와 동시에 여자라는 의식도 사라졌다. 나보다 더 현명한 내 몸이 벌써 환경에 적응하며 여성스러움을 유지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축소해버린 것이다. 나는 내가 여자였다는 사실을 맘 편히 잊을 수 있었다. …… 남자도 여자도 아닌 존재가 되었다. 지금은 그때 가지고 있던 묘한 매력도 다 사라지고 말았다. 나는 더 말랐지만 몸에는 근육질이 생겼고 얼굴에는 온통 잔주름이 잡혔다. …… 과거의 언젠가 나였던 여자를 떠올리면, 그러니까 앙증맞은 이중턱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려고 부단히 애쓰던 여자를 생각하면 아무런 애착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를 엄하게 질책하고 싶지는 않다. 그녀에게는 자신의 삶을 자신의 생각대로 꾸려갈 기회가 없었을 뿐이다. 젊었을 때 아무것도 모른 채 무거운 짐을 덥석 안고 한 가정을 이루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수많은 의무와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여장부였다면 거기서 벗어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녀는 결코 여장부 타입은 아니었고, 평범한 이성을 가진, 과중한 짐을 지고 고통받는 여자에 불과했다. 게다가 그녀는 여자들에게 적대적이며 낯설고 불안한 세상에서 살고 있었다. 별로 아는 것이 없었으며 어떤 것에 대해서는 완전히 무지했다. 머릿속은 끔찍한 혼돈 그 자체였다. 그녀가 살고 있던 사회 역시 그녀와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궁지에 빠졌다.
어느 날 정체를 알 수 없는 벽이 ‘나’를 가로막고 ‘나’는 세계와 분리된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벽이 외부세계 뿐만 아니라 ‘나’와 이전의 ‘나’를 분리한다는 점이다. 벽이 생긴 이후 ‘나’는 변화한다. 우선, ‘나’는 이름을 잊는다. 이는 ‘나’를 어머니, 아내 혹은 여성이라 명명하는 사람이 없음을 말한다. 그렇기에 '나‘는 사회가 요구하는 여성스러움을 유지해야하는 부담감이 줄어들고 나아가 여자라는 의식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나‘는 벽이 생기기 전의 자신을 ’그녀‘라고, 타인처럼 부른다. 또한 ‘나’는 이성의 이름에 가려있던 면모를 발견하게 된다. 여기서 이성은 남성(주류)의 대변으로, 당시 서구사회의 모더니즘에서 말하는 합리주의라 볼 수 있다. ‘나’는 마치 원시인처럼 노동하고 (그녀는 기계의 힘이 아니라 온전히 도구와 자신의 힘으로만 일한다) 자연을 마주하면서 인간인 자신의 덧없음을 깨닫기도 한다. 나아가, ‘나’는 이성이 인간을 악하게 만들고 절망적으로 만들었으며 흉하게 만들고 말았고 진술하는데 이는 이전의 서구 사회가 자연(여성으로 대변되는)을 도구로 보는 관점과 매우 대비적이다. 한편, 변화된 ‘나’를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남성이 없는 환경에서 '나‘는 양성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앙증맞은 이중턱에 나이보다 젊게 보이려하는 여성스러움 대신 근육질의 몸과 노동의 흔적이 보이는 얼굴을 한 ’나‘가 존재하는 한편, 비록 딸들은 아니나 소와 고양이와 개를 양육하는 ’나‘도 공존한다. 이는 버지니아 울프가 생각하는 여성상과도 일치하는데, ‘나’는 성적 대상도 아이를 낳기 위한 도구가 아닌 스스로의 삶을 위해 능동적으로 행동하는 주체가 된다. 다시 말해 '나'는 이전의 남성으로 대변되던 주체성을 획득하고 생활하는 동시에 여성이 가지는 특성(모성) 또한 간직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와 같은 여성(혹은 암컷)인 소와 고양이를 보면 그들은 모두 자신의 욕망대로 행동한다. 소는 자신의 욕정을 울부짖으며 표현하고 고양이는 자기가 낳은 새끼에게 세상이 요구하는 모성을 보여주지는 않는다. 그렇기에 <벽>의 결말에서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성으로 인해 수컷들이 모두 죽고, 고양이와 소 그리고 ‘나’만 남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한 가지 덧붙여, <벽>의 결말 부분에서 앞선 아무런 장치도 없이 갑작스럽게 등장한 남성과 이유도 모른 채 룩스와 송아지를 죽인 남성의 행동은 폭력성과 포악함 광기를 엿보게 했다. 이는 남성을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생물로, 온화한 여성의 대척점에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 한편으로 (여성스러움을 버리고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고 마주할 수 있게 된) 여성의 ‘자기만의 방‘에 남성(여기서는 주류를 상징할 수도 있다)과 같은 외부의 침입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 그럼에도 계속해서 자신의 고유성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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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답다 했다. '지금까지의 독서 경험에서 만난 가장 아름다운 책' 이라고 소설가 에바 뎀스키가 말했다. 그런가, 이 책이 그리 아름다운가. 고개를 갸웃한다. <벽>(문학동네.2009)의 첫인상은 아름다움: 화려함, 예쁨, 우아함. 그 어느 느낌도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어느 새 내 입은 아름답다, 고 읊조리고 있었다. 어느 날 벽이 생겼다. 한 여자만이 살아남았다. 룩스(개)와 소와 고양이가 가족이 된다. 영문도 모른 채, 세상이 온통 죽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여자는 살아간다. 소의 젖을 짜고, 풀을 베고, 농사를 짓고, 집을 고치고. 이전까지는 한 번도 해보지 않았을 법한 일들을 척척 해나가며 이 년이란 시간을 보낸다. <벽>은 그 기록이다. _ 난 인간으로 살고싶어 여자는 두려워한다. 먹고 살 일이 걱정되어서, 혹은 혼자 남은 외로움에? 아니다. 보다 근원적인 두려움. 그건 언제까지 내가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이었다. [나는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더러운 냄새를 풍기면서 기어 다니고,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하게 되지 않을까 두려웠던 것 같다. 동물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바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동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 이하로 전락한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최근에 와서는 결국 동물 이하로 전락하고 말 것이 가장 두려웠고, 그러한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이 글을 쓰게 만들었다. p.54] 미래에 대한 삶의 기약조차 없는 상태에서 인간 존재에 대한 갈망이 생길 수 있을까? 적어도 그럴 수 있다면 세상에 혼자 남아도 그 곳이 지옥은 아닐 것이란 사실을 <벽>은 보여준다. 낯선 상황에서도 인간이길 포기하지 않는 여자의 모습은 숭고한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_ 그럼에도 난 살아갈거야 <벽>은 불친절한 책이다. 왜 어느날 갑자기 세계가 죽어버렸는지, 벽이 생겼는지. 전후 사정에 대한 설명은 전혀 없다. 여자 또한 상황을 그대로 받아들인다. 물론 그녀라고 한 순간에 난 괜찮아, 아무 문제없이 살아갈거야, 라고 다짐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나름의 괴로움을 겪어가며 여자는 다짐한다. [나는 탁자 앞에 앉아 더이상 저항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자 근육의 긴장이 풀리고 심장이 서서히 고르게 뛰기 시작하는 것이 느껴졌다. 받아들이기로 결심만 했을 뿐인데도 뭔가 달라진 것 같았다. p.171] 남은 건 적응 뿐. 도시의 부인이 시골의 아낙으로 변하는 건 순간이다. 무섭도록 질긴 삶에 대한 집착. 여자는 병을 이겨내고, 아픔을 치유하며, 하루하루를 충실하게 살아간다. 강인한 아름다움이 빛을 발한다. _ 사랑과 고독 사이 여자가 살아갈 수 있던 건 스스로의 의지 덕분만은 아니었다. 우연히 함께 지내게 된 룩스(개), 소, 고양이들은 그녀를 외로움에서 구해줬다. 돌봐야 할 존재가 있기에 죽지 않고 자신을 다독일 수 있던 것. 대상이 사람에서 동물로 옮겨왔을 뿐, 사람은 사랑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인가보다. 소설은 남은 종이가 없는 순간 끝이 난다. 그러나 그녀에게 소와 고양이가 남아있는 한 계속 살아가리라고 독자들은 믿어 의심치 않는다. 스스로도 그렇게 이야기했으니. [이 산속에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이 하나라도 살아 있는 한 나는 사랑을 할 것이다. 그리히여 정말로 아무것도 찾을 수 없게 되는 날, 나는 삶을 멈출 것이다. p.210] 우리가 보기에 벽 이편의 세상은 쓸쓸하고 절박해보이지만, 어쩌면 사랑할 존재가 있는 그 세상이 여자에겐 천국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여자와 동물들이 만들어내는 편안한 분위기가 화려함과는 다른 부드러운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어느 날 벽이 문득 생겼듯, 이야기도 불현듯 끝나버린다. 앞으로 어찌 되리란 한 마디 말도 없이. 언젠가는 여자도 죽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키고 있던 시간과 함께. 그러나 적어도 독자들의 머리와 마음 속에선 낯선 아름다움을 밝히며 살아가지 않을까란 생각이 든다. 아주 오랫동안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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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갑자기, 이 세상에 유일하게 살아있는 사람이 '나'뿐이라면? 자...생각을 해보자. 이런 어처구니없고 황당하며 공포스러운 상황에서 어떻게 할 것인가? 의외로 답은 간단할 수 있다. '살아가는 것'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그 과정을 추리해보기는 쉽지 않다. 몇 일도 아닌 몇 년의 시간을 상상력만으로 그려내기엔 지나치게 경험밖의 일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기 전 기대하고 설레였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리라.
40대의 여주인공은 사촌부부를 따라 주말여행을 떠나 산장에 머물던 어느날 엄청난 일을 겪게 된다. 산장 주변에 투명하고 딱딱한 벽과도 같은 장애물이 세워진 것이다. 만질 순 있지만 보이진 않는 존재. 그 존재 너머로 보이는 세계엔 움직이는 생명체라곤 없다. 모두 화석처럼 굳어버린 것이다.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의외로 담담하다. 그녀는 강했다. 주변을 이해하고 정리하며 차분히 계획을 세운다. 누군가 자신을 구하러 올때까지. 어쩌면,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는 상황일지도 모를 사태를. 다행히 그녀에겐 친구가 있다. 어미소와 개와 고양이. 그녀가 돌봐야하는 부담인 동시에 외로움과 두려움을 나눌 친구들이다. '동물과 사람 사이의 벽은 쉽게 헐린다. 우리 모두는 결국 커다란 가족의 일원이며, 외롭고 불행해지면 아주 먼 친척들 사이에도 우정이 생기는 법이다.' 벽이 생기기 이전의 그녀는 삶이 주는 무게로 벅차고 힘들었다. 오히려 혼자인 지금이 더 편한지도 모르겠다며 그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만큼. 그녀의 지난 날의 삶은 지금 '나'의 삶과도 많이 닮아있다. 이땅의 평범한 주부들의 모습과 닮은 것이다. 가정과 자식이 주는 버거운 의무감에서 해방되고 싶다는 바람. 그래서, 그녀가 처한 고독을 경험하고 싶다. 하지만, 그 안엔 해결해야할 생계문제가 있었다. 계절이 바뀌고, 식량이 줄고,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과 같은 풀기 어려운 문제들. 그녀와 함께 밭을 일구고, 소를 돌보고, 개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며 반복적인 시간들을 살다보니 어느새 지루하기 시작했다. '내가' 중심이 되어 사는 삶이지만 그 또한 내마음에 쏙 드는 상황은 아니다. 어느 것도 '살아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없다. 산속에서 홀로 지낸 2년 여의 세월을 그녀는 잘 꾸려 나간다. 감자와 콩은 제 때에 수확을 했고, 어미소는 수소를 낳았고, 여전히 발랄한 개는 졸졸 따라 다니고, 고양이는 세 번이나 출산을 했으니 이들의 세상은 평화롭다. 그런데, 그런 가족의 평화를 짓밟는 인간, 남자가 등장한다. 느닷없이 나타나 그녀의 개와 송아지를 죽인 한 남자. 벽이 생기고 2년이 넘는 시간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는 인간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망설이지 않고 방아쇠를 당겼다. 이상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다른 생존자가 아니던가. 어쩌면 안정적인 그녀의 삶에 파란을 일으킬 존재 이상은 아니라고 판단했을 것이다. 자신의 세상에 들어와 자신의 사랑하는 가족을 헤치는 인간은 이제 '적'일뿐이다. 남자에 대한 미련도 아쉬움도 궁금함도 없다. 이미 그녀의 세상에선 필요하지 않기에...
2년 반 동안 홀로 산속에서 지낸 일들을 기록한 이 일기는 경험할 수 없는 범주의 공포와 암담함을 차분하게 풀어가며 동참하게 해주었다. 그녀와 함께 벽의 존재를 궁금해하고, 동물들을 걱정하며, 밭을 일구고 풀을 베고, 매서운 날씨를 견뎌내며 어느새 강인한 여자가 된 것 같다. 책을 읽는 동안 보다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 감동이 밀려드는 소설이었다. 다시 곱씹어 볼 수록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바로 이런 책 때문에 책을 읽는 행위를 멈출 수 없다, 하루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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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이 되는 것이 두려웠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결코 동물이 될 수 없다. 인간은 동물 이하로 전락한다. 나는 그런 일이 나에게 일어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 본문 54에서
* 그렇다. 인간이 인간이기 포기했을 때 우리는 동물보다도 못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종종 뉴스에서 나오는 끔찍한 사건들은 그 말이 유효함을 깨닫게 한다. 그렇지 않은가.
책은 인간이라는 존재의 어리석음과 그럼에도 인간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 혹은 살아갈 수 있게 하는 이유, 그리고 인간의 이성과 마음으로 인해 생겨나는 고독과 허무와 슬픔과 두려움에 대해 차분하고 조용하게 그러나 분명하게 이이야기하고 있다. 사촌부부를 따라 산장에 갔다가 혼자 살아남게 된 '나' 의 이야기이다. 나는 사십대의 여성이고 참사가 왜 일어났는지 어떻게 일어났는지 왜 홀로 산 속에서 살아남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벽 너머 세상은 화석으로 변해 있고 나는 살아있다는 것 뿐. 그 혼란과 고독과 허무 속에서 나는 묵묵히 고되 노동을 하며 하루하루를 나와 함께 살아남은 개, 고양이, 소를 돌보며 살아간다. 그 세상은 분명 종말 이후에 찾아온 절망의 세계여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유토피아를 건설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것은 종말 이전의 세상이 그 속에서의 삶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반증이다. 나는 알 수 없는 '벽'에 의해 세상과 단절되고 고립되었지만 그 벽으로 인해 이제껏 내가 살아온 세상의 간섭과 침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렇게 본다면 그 벽은 고립이면서 또한 보호이기도 한 이중적인 존재이다. 나는 벽과 함께 이제껏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과의 이별을 맞이한다. 온갖 제도와 관습, 여자라는 성별과 가족 , 남을 의식한 태도와 예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도덕과 윤리 그 속에서 형성된 성격과 외모,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 그 모든 것들은 벽이 생긴 후 아무런 의미도 없어진다. 더이상 후덕한 어머니도 아니고 연약한 여자도 아니다.
1957년에 씌여진 이야기 마를렌 하우스 호퍼의 '벽'. 시대별로 종말의 이유도 형태도 살아남는 방법도 각기 다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종말과 살아남는 것에 관한 이야기는 세상이 규정하는 그 모든 것들이 다 없어진 이후에도 나는 여전히 나일 수 있는지 묻는다. 인간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모든 것들이 사라진 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는지 묻는다. 책의 해설은 이 책을 페미니즘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지만 그 생각에 동의하든 아니든 여러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야기다. 책을 읽으면서 나는 주인공처럼 철저한 고독 속에서 허무와 슬픔과 두려움이 수시로 찾아오는 고립된 세상에서 나 외에는 누구도 나에게 그 무엇도 그 어떤 것도 강요하지 않는 곳에서도 여전히 나는 나일 수 있을까? 살아갈 수는 있을까? 하고 묻게 된다. 대답은 알 수 없다. 나는 지금 여기 다른 사람들과 함께 인간이 만들어 놓은 모든 문명과 관습과 관계 속에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고 있으니까. - 다락방서 허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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