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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이 와닿는 것은 아니다. '1차원적 인간' 1차원이라고 한다면 점, 선에 불과하다. 결국, 어떤 입체적인 것들이 존재하지 않는다. 책 전체를 살펴볼 때 2차원이 최고의 차원으로 나타나는데, 사실 면밀히 따져 본다면 2차원도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의미에서 마르쿠제의 차원에 관한 사고는 결핍 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분열이라는 단어, 그리고 비판, 변증법. 이와 같은 단어들이 2차원을 알리고 있다. 진보라는 의미도 하나의 선이라고 볼 때 과연 2차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을 남긴다. 다원적인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도 2차원을 가지고서는 부족하다. 평면을 가지고 다양한 사상을 전개한다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화 시킨만큼 본서는 마르쿠제의 희망을 반영하고 있다. 결론은 긍정적인 기대로 전망되고 있기 때문이다. 획일화 된 현대의 전체주의 상황에 종속 되버린 인류. 그 인류에게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아 보이는데, 발터 벤야민을 끌어들여 '우리에게 희망이 주어지는 것은 오로지 희망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이다.'라고 맺고 있기 때문이다. '희망이 없는 우리'이기에 희망이 있을 수 있다는 역설적인 말이다. 현대사회의 병폐를 면밀히 지적하면서도 저자는 철학의 긍정적인 의무를 강조한다. 결국, 물리적인 현상이 문제가 아니라 정신적인 문제가 1차원적 인간을 만들어 낸다고 생각한 것이다. 비판하지 않는 인간. 인구론에서 말하 듯이 인간은 생존자원만으로 존재하게 된다는 동물적인 본능의 극복은 철학에 있다고 마르쿠제는 직언하고 있다. 현실은 그 철학이 외면당하고 있을지언정. 글로는 쓰기 싶지만, 행동을 옮겨지기 더 힘든 상황을 저자는 예견하고 있는 듯 하다. 그리고 그 예견이 지금 더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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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미국에서 출간된 산업사회 비판서이다. 1차원적 인간이라는 강렬한 표현으로 관심을 끌었다. 그러나, 책의 내용은 번다하다. 저자의 주장이다. 현대사회는 1차원적이다. 사람들은 현실을 받아들이고 안주한다. 비판적 사유를 하지 못하며 변혁을 꿈꾸지 않는다. 풍요에 만족하고 기술과 합리성, 실증주의를 신봉한다. 상업화된 대중문화와 미디어는 이성을 마비시키고 전체주의를 강화한다. 이상과 진리를 찾는 저항의 사유는 사라지고, 효율성의 증대를 위한 도구적 이성만 작동한다. 그러나, 우리는 자기 스스로 결정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비록 길은 보이지 않지만 저항에 나서야 한다. 저자가 본 변화는 현재도 진행 중이다. 글로벌 산업화로 풍요가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고, 인터넷에 기반하여 미디어가 한층 거대해지고 있다. 반면, 물질문명 자체를 반대하는 목소리는 여전히 미미하다. 우리가 가는 길이 맞는지 한번 생각해 볼 만 하다. 그러나, 우리의 반성에 이 책은 별 도움을 주지 못한다. 단선적이고 섣부른 비판은 숙고를 방해하고 혼란만 가중시킨다. 1960년대가 풍요의 이면에 냉전과 같은 부조리한 상황을 가진 시대라는 것을 고려하더라도, 단순한 논리와 대안없는 거부는 부적절해 보인다.
이해하기 어려웠던 저자의 주장을 몇 개 적어본다. 1차원적 인간은 산업사회의 산물이다. -> 1차원적 인간은 언제 어디에나 있었다. 사회가 안정되면 많고 불안정하면 적었다. 한편, 산업사회는 인간의 정신활동을 풍부하게 했다. 문맹율이 낮아졌고, 각종 문화행사와 정치활동이 늘어났다. 체제가 던진 사유체계를 받아들여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행복의식에 젖어 불행의식이 사라졌다. -> 행복과 불행은 동전의 양면이다. 하나가 없어지면 나머지도 없다. 불행의식이 사라지면 행복의식이 남는 것이 아니라 관련된 의식이 사라진다. 그리고, 행복의식을 사유체계가 지배할 수는 없다. 행복의식은 현실의 상황에 지배된다. 사유체계로 불행을 행복이라고 속이는 것은 잠시 가능할 뿐이다. 합리성과 실증주의가 근본적 비판의식을 마비시킨다. -> 합리성과 실증주의가 근원적 질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다. 수많은 과학자가 신을 믿고 의지한다. 비판의식은 사고를 하느냐 아니냐에 달린 것이지, 어떤 이념을 믿느냐에 달린 것은 아니다. 저자가 꿈꾸는 세계, “자기결정이란, 대중이 모든 선전ㆍ교화ㆍ조종으로부터 해방된 개인으로 해체되어 사실을 인식ㆍ이해하며 선택 가능성을 평가할 수 있게 될 때 진실할 수 있다.” -> 부적절한 꿈이다. 사람들은 다 다르고 관심사가 다기하다. 특정 사실에 대해서는 아는 정도가 다 다르다. 그래서 많이 아는 사람이 적게 아는 사람을 가르치거나, 적게 아는 사람이 많이 아는 사람에게 의지하여 선택한다.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는 꿈이다. 답답하고 길이 보이지 않으나 거부하자. -> 방향이 없으면 찾아야지 거부에 나설 일은 아니다. 길을 모르면서 발을 내딛으면 천길 낭떠러지가 바로 앞에 있을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