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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류 과학자이면서 동시에 정력적인 사회행동가가 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일까? 저자의 버클리 시절 지도 교수인 아서 파디는 과학자의 인생을 열기구에 비유하면서 과학 외의 활동은 모래주머니같아서 밖으로 내버리지 않는다면 열기구가 위로 상승할 수 없다고 역설했다고 한다. 하지만 저자는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어서 성공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고자 하는 그런 상승의 욕망도 없었을 뿐 아니라 그의 젊은 시절인 1960년대는 저항문화와 베트남전 반대운동 등의 진보적 사회운동과 그 반작용인 매카시열풍이 불었던 시대였다. 과학자라고 해도 그들의 일상적인 삶은 과학 바깥의 사회와 관계를 맺을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과학자들이 사회적 책임을 느끼고 비판적 행동을 보여주었던 역사적 사건은 원폭개발에 참여했던 오펜하이머가 원폭에 대한 최초의 비판자로 변신한 것이다. 저자도 1969년 유전자 분리라는 과학적 성과를 이루어 <네이처>지에 논문이 출판되기로 확정되자 기자회견을 열어서 "모두가 알다시피, 과학자들은 대중에게 사회와 격리된 연구 현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려서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게 될 의사결정에 대한 통제력을 요구하게 만들 의무가 있다."고 발표하면서 유전학 연구의 잠재적인 사회적 영향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환기시켰다. 유전자 분리가 유전자 조작에 이용될 수 있다는 위험을 경고한 것인데 이 사건으로 인해 과학계에 물의를 일으키고 동료 과학자들로 부터 반역자로 취급되면서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되지만 이 기자회견이 과학자로서의 삶과 사회행동가로서의 그의 삶을 결합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오펜하이머>
![]() <존 벡위드>
그가 과학자이자 사회행동가로서 했던 주요한 활동은 우생학과 사회생물학에 대한 비판과 인간게놈프로젝트의 윤리적 문제제기라고 생각된다. 우생학자들은 좋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수를 늘이고 결함있는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의 수를 줄여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상류계급 인사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강제 불임수술과 이민억제 정책 등이 시행되었다. 우생학적 논의가 옳지 않은 것을 알고 있었던 유전학자들 조차 이런 부적절한 쇼의 참여자가 되고 싶어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으로 퍼진 잘못된 생각들을 적극적으로 정정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다. 몇년 전 우리나라도 <황우석 사건>으로 온 나라가 흥분하여 광풍에 휩싸였던 기억이 있다. <사이언스>지가 가진 권위때문에 아무도 연구의 진위를 의심하지 않았고 윤리적, 과학적 문제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매도되었었다. 아마도 지금까지 의학, 과학계에는 그 때의 트라우마가 남아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데이비드 윌슨이 제창한 <사회생물학>은 개미에서 원숭이까지 사회적 동물의 행동을 연구하여 인간의 행동을 생물학적 진화에 바탕을 둔 추론으로 설명하는 것인데 대중들의 열광적인 관심을 받게 되었고, 저자는 이에 반대해 <민중을 위한 과학>이라는 그룹을 조직하여 활동하게 된다. 사회생물학의 가정들과 사례 선택들은 세계에 대한 특정한 사회적 관점에 의해서 영향받은 것이며 "윌슨은 생물학 결정론자들의 긴 행렬에 합류하고 있는데, 이들의 작업은 그들이 마땅히 지녀야할 사회 문제들에 대한 책임감을 면제시켜 줌으로써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의 기구들을 공고히 하는데 기여해 왔다"고 결론을 지었다. 사회생물학이 성의 역할, 계급과 인종에 대한 논의에 집중되면서 <통속사회생물학>이라는 이름까지 얻었고, 인간 행동에 대한 이론화의 많은 부분은 이론 구축자의 편견들을 반영하고 있는 데이터를 취사선택한 것이라는 그의 설명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저자는 과학에서의 사회적 책임에 대한 학생들의 관심이 증가하자 하버드 의대에 <생물학에서의 사회적 쟁점들>이라는 강의를 개설했고 점점 더 많은 학생들의 관심을 얻고 있다고 한다. 과학에서 사회적 쟁점을 적극적으로 제기한 과학자들이 사회적 피해를 예방하는데 성공을 거둔 적이 있는지는 의문으로 남지만 "오늘날 과거 원자물리학자들이 직면했던 위기 인식은 더 이상 과학자들의 마음에 새롭게 다가오지 않는다. 과학 교육이 과학의 사회적 영향을 둘러싼 논쟁을 다루지 않기 때문에, 과학을 전공하는 학생들은 그들의 역사의 일부를 상실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내 견해로, 그들이 잃고 있는 것은 그들의 인간성의 한 부분이다."
물론 과학의 오용이 우려된다고 해서 과학발전을 억제할 수는 없다. 과학을 공부하는 학생들이 역사와 사회에 대한 인문학적 교양을 쌓을 수 있는 교과과정이 마련되고,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연구결과가 사회에 미칠 영향에 대해 고려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중적인 활동을 하는 과학자들을 연구업적이 시들해지는 사람들이라고 과학계에서 폄하하는 것도 사실이지만 일군의 과학자들은 강연과 저술을 통해 대중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려고 노력해야할 것이다. 저자는 과학자이자 사회행동가로서의 이력을 성공적으로 이룬 행복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의 버클리 시절 은사였던 아서 파디의 말처럼 그가 사회행동가라는 모래주머니를 밖으로 내던졌더라면 그의 열기구는 노벨상이라는 성공에까지 틀림없이 상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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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바드대학의 존 벡위드 교수가 쓴 <과학과 사회운동 사이에서>는 강양구 기자의 서평에 끌려 사게 된 책입니다. 강양구기자가 소개하는 것처럼 벡위드교수는 과학자이자 적극적인 사회주의 운동가라고 합니다. 흔히 실험실에서 연구에 쏟는 시간이 부족하여 잠을 줄이고 개인생활을 희생하는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습니다만, 연구하는 시간을 쪼개서 사회문제에 천착하는 과학자에 관한 이야기는 많이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강양구기자는 벡위드가 사회운동에 눈을 돌리게 된 배경역사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 같습니다. 즉 벡위드가 젊은 시절을 보낸 1960년대 미국의 대학가는 ‘대항문화’가 거세게 끓어올랐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약자에 대한 배려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던 시기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개인의 철학이 몸담고 있는 사회의 분위기만으로 형성되는 것은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벡위드 집안의 내력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벡위드의 삼촌과 숙모는 좌파였다고 합니다. 눈초 역시 깜짝 놀랐습니다만, 그의 삼촌은 남한이 북한을 침공했다는 주장을 추종하는 젊은이들에게 전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화학과 유전학을 전공한 벡위드교수는 1969년 대장균 박테리아에서 유전자를 순수하고 완벽하게 분리하는데 처음으로 성공을 거두게 되었는데, 기자회견을 통하여 자신들의 연구결과와 과학적 의미를 설명하면서 자신들의 연구성과로 유전자를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하는 상황과 같은 위험성을 경고하였습니다. “과학자들은 그들의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중들에게 알려야 할 의무가 있다. 그래야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될 결정에 대한 통제를 요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벡위드의 과학자로서 충심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 배경에는 과학적 성과가 인간에 대한 차별정책을 수립하는 근거로 오용되어 온 당시 사회적 분위기가 잘 못되었다는 그의 인식에서 출발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대표적인 사례는 나치독일의 아리안족 우월주의와 유약한 체질을 제거시켜야 한다면서 인종청소를 강행한 사실 등이 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과학자들의 입장에서는 그의 행동이 지나치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제 유전자를 겨우 분리해낸 상황에서 유전자를 인간의 마음대로 조작하는 일이 금방 가능하겠느냐는 견해였는데, 결국은 5년 정도 지나서 유전자를 재조합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한 생물의 유전자조각을 끄집어 내어 다른 생물에 이식하는 일이 일상이 되었습니다. 벡위드교수는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이라는 급진주의 단체를 통하여 사회운동을 전개하게 되는데, 맨하탄 프로젝트의 산물인 원자폭탄을 예로 들고 있습니다. 핵물리학의 성과가 살상무기로 개발되어 무수한 인류의 목숨을 앗아가는 도구가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인간의 위대함을 간과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원자폭탄은 2차 세계대전을 종료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그 위력에 놀란 인류는 핵폭탄의 사용을 두려워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국지전은 지속되고 있지만, 핵을 사용하는 상황은 서로 피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지 않습니까? 과학자들이 사회운동에 참여하는 것이 과연 인류를 위하여 옳은가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됩니다. 참여한다면 벡위드교수처럼 열성적 참여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문제도 같이 생각합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제각기 해야 할 몫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타고난 몫을 다하기 위하여 열심히 노력해야 한다고 말입니다. 학자는 학문에 정치하는 사람은 정치에 각각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 아닐까 싶습니다. 벡위드교수 역시 사회운동에 간여하는 기간에는 연구에 소홀하여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다는 점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벡위드교수가 자신의 사회운동에 대하여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입니다. ‘민중을 위한 과학(Science for the People)’에 동참하는 사람들의 구성이 무정부주의자들, 맑스주의자들, 이념적 성향은 없지만 사회에 대한 관심을 가진 과학자 등등 다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 까닭인지 특정한 성향에 대하여 무비판적인 환호를 보내서는 안된다는 입장을 가졌던 것 같습니다.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에 대한 지원을 하고 있을 무렵의 상황에 대한 벡위드교수의 생각은 새겨둘만 합니다. “나는 비록 우리가 니카라과에서 벌어지는 것과 같은 사회운동을 지원한다고 해도 비판이 필요한 경우 우리 역시 비판에 개방적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진작 배웠어야 했다고 느꼈다. 이러한 자세를 취하지 않는 것은 미국 내에 있는, 우리의 주장에 귀를 기울여 주고 있는 사람들뿐만 아니라 우리가 지원했던 사회운동에게도 좋지 않은 일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사회들의 상황이 자신들이 믿었던 만큼 이상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속았다는 느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실망의 결과는 종종 운동 자체에 대한 이반으로 나타났다.” 덤으로 얻은 소득입니다. 벡위드교수는 상당한 페이지를 에드워드 윌슨이 주창한 ‘사회생물학’ 비판에 할애하고 있습니다. 연전에 읽고 상당한 느낌을 받았던 책 ‘통섭’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이 이론은 책을 번역하여 소개한 최재천교수에 의하여 도입되었는데, 최근에 이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사회운동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있는 과학자들이라면 자신의 위치를 되돌아보는데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일독을 권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