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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우리가 초자연적인 현상, 또는 미신으로 치부해 버리는 일들이 사실은 우리 자신에 의해서 일어나는 현상들이라면? 칼융은 그것을 '무의식'이라 칭한다. 그리고 의식만으로 세상을 살고 있는, 또 살아가려고 하는 우리에게 일침을 놓는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이 과연 행복했었느냐고 말이다.
칼융 하면 자연히 프로이트를 떠올리게 된다. 거의 절대적이었던 프로이트의 꿈이론에 반기를 들었던 사람. 그리고 그는 이 책에서 간간히 프로이트의 꿈이론에 조목조목 반박하며 자신의 이론을 알기 쉽게 설명한다. 봐라, 내 이론이 더 합리적이고 인간적이지 않은가...
그는 어느 한 점에 서서 바라보지 않는다. 인류의 기원으로부터 현재. 또한 어느 한 편에 서서 바라보지도 않는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이것이 그가 바라보고 말하는 상징, 그리고 무의식의 범위이다.
다시 말해 인간이 상식적으로 생각하고 느낄 수 있는 의식이라는 이면에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이 일어날 수 있는 무의식이 존재하며 따라서 그것을 어느 편협된 관점이나 범위에서 바라본다면 제대로 된 무의식의 세계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든 예로, 여덟살 짜리 소녀가 아무런 종교적, 교육적 배경없이 초기 기독교의 심오한 이미지를 그려냈다면,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 것인가.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신내림이나 귀신이 아닌, 바로 소녀의 무의식이며 그 매개가 되는 것이 바로 상징인 것이다.
이 책은 '무의식이란...이다' 라는 식의, 단순히 지식을 채워주기 위한 책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목적이었다면 칼 융은 아마 이 책을 쓰지 않았으리라. 칼융은 이 책을 통해 그러한 무의식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만 하는 우리 인간에게 경종을 울린다.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무의식이며, 인간은 자신의 악덕을 숨기고자 너무나 많은 거짓과 죄를 저질러왔다고. 인간이 서로 대립하는 것은 결국 자신의 무의식과의 대립이라고 말이다.
근래에 정말 많은 삶의 지침서들이 쏟아져 나온다. 생각을 바꾸어라. 생활을 바꾸어라...모두가 우리 의식 속에서 행해져야 하는 일들이다. 이제는 한 번쯤 우리의 무의식에도 관심을 기울여 보는 것이 어떨까 싶다. [인상깊은구절] <오늘날에는 아무도="" 고개를="" 숙이고="" 하느님을="" 경배하지="" 않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대답은 문제의 핵심을 제대로 짚고 있는 듯하다. 우리는 너무나 주관적인 의식의 세계에 사로잡혀 있다. 그래서 하느님이 꿈이나 환상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는 지극히 오래된 진실을 잊어버리고 있다. 보라. 불교도는 무의식적인 환상세계를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허깨비라고 불러 배척하고 있지 않은가? 기독교도들은 자신과 무의식 사이에다 교회와 성서를 끼워 넣고 있지 않은가? 뿐인가. 합리적인 사람, 지적인 사람도 자기의 의식이 정신의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직까지도 알지 못하고 있다.오늘날에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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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과 상징"을 읽고
한때 절친한 사제관계였던 프로이드와 융은 프로이드가 인간의 무의식을 성性에 관련지어 설명하는 것에 반발했고 결국 프로이드와 결별했다. 융은 리비도를 인간의 성욕에만 한정시켜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인간의 무의식은 성적인 것과 그것을 억압하려는 초자아만이 존재하며 그 초자아가 인간의 도덕적인 성향을 규정짓는다고 주장한 프로이드에게 융은 성적이지 않은 인간의 무엇인가가 성적인 충동을 제압하며 행동의 동기를 부여한다고 문제를 제기했다. 그러나 프로이드는 거기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내려주지는 못했다.
거기에 대한 융의 해답은 집단 무의식이었다. 인간의 행동의 원인은 단순히 성적 충동과 그 억제만으로 이루어 진 것이 아닌 인류가 갖고 있는 원형의 동질성은 꿈속에 녹아있는 여러 상징들과 이야기들로써 그것은 단순히 한 개인의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공통된 것이며 그러한 상징과 이야기들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여러 상징이나 이야기들로부터 아득한 고대의 신화들까지, 그리고 남아메리카 오지로부터 가장 현대화된 대도시의 번화가에까지 그런 상징과 이야기들은 곳곳에 숨어있다.
"인간과 상징"은 그러한 융의 연구결과들을 일반인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설명하기 위한 목적 아래 쓰여진 책으로써 가능한 한 많은 도판을 사용하여 그러한 이론들을 시각적으로도 흥미롭게 설명한다. 이 책에서는 인간의 무의식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상징이 세계 곳곳에 모든 다양한 매체에 어떻게 적용되는 지를 한 눈에 파악할 수가 있다. 북미 인디언의 모래그림 속에서 중세 교회의 스테인 글래스에서 구석기 시대의 동굴 벽화에서 헐리우드의 극영화에서 텔레비젼 광고에서 우리는 공통되는 어떤 일련의 상징들을 발견하게 되고 그러한 상징들이 우리의 무의식과 어떻게 연결되는 지를 이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융의 학설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문화인류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꿈과 무의식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만큼의 깊은 세계가 존재한다고 믿는 사람이라면 이 책은 매우 흥미로운 책일 것이다. 특히 다채로운 도판들은 비록 이국적이지만 글을 읽는 동안 그러한 사진들과 그림들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며 무엇이 설명하는지 금새 알게 될 것이다. 이 책에 있어서 도판의 위력이란 글에서 진술하는 사실들을 단순히 보완하는 역할이 아니라 도판 만으로도 각 문화권의 이질적으로 보이던 상징들의 공통점을 들어내어 보여주는 역할을 한다.
번역은 "장미의 이름으로"나 "푸코의 추" "종교의 기원" "변신 이야기" 그밖에 많은 훌륭한 인문과학서적을 번역한 이윤기씨가 맡았다. 예술, 종교, 그 밖의 집단행동 같은 인간의 모든 것이 어디로부터 비롯되는 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일독을 권한다. [인상깊은구절] 디오니소스의 술잔을 드는 것으로 표현되든, 그리스도의 성배를 마시는 것으로 표현되든 이 성체배령의 의식은, 적어도 이 두 종교에 관해서 말하는 한 똑같다고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의식의 참가자들이 지니는 자각의 수준은 다르다. 디오니소스적인 참가자에게 이 의식의 의미는 사물의 근원, 즉 어머니 대지의 자궁에서 억지로 찍겨져 나오는 <폭풍과도 같은="" 탄생의=""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폼페이에 있는「신비의 집Villa de Misteri」이라는 프레스코 벽화에는 이 의식이 베풀어지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보면 사제가 입문자에게 술잔을 내미는데, 그 술잔에 무시무시한 가면이 반사되고 있다. 이 골포분위기의 조성은 곧 디오니소스 신을 부르는 말하자면 초혼의례에 해당한다. 뒤로는 지상의 귀중한 과일이 가득 담긴 바구니도 보이고, 번식과 성장의 원리를 나타내는 신성한 창조력의 상징인 남근도 보인다. 오르페우스 교는 탄생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영원한 순환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과거지향적인 종교인데 반해, 기독교는 입문자에게 전지전능한 하느님과의 궁극적인 결합의 약속을 강조하는 미래지향적인 종교이다.폭풍과도> |
| 우리는 매일밤 꿈을 꾼다. 하지만 다음날 일어났을 때, 그꿈을 분석해보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 이 책은 이처럼 우리가 그냥 지나치는 꿈에 대해 얘기한다. 사실 꿈에 대한 분석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꿈이 가장 중요한 재료가 되고 있다. 꿈이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꿈이 무의식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항상 의식에 의해 억눌려진 무의식이 그 존재를 꿈을 통해 드러내는 것이다. 무의식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우리는 그 무의식을 외면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상당히 독특한 융학파의 견해에 대해 긍정과 부정이 교차했다. 무의식을 다루다보니 필연적으로 독단과 잘못이 저질러질 수 밖에 없다는 문제가 있으면서도 이들의 의견은 상당히 논리적이고 매혹적이었다.우리들 마음속의 원형의 모습과 의미있는 우연의 일치인 동시성같은 문제는 정말 많은 생각을 하게끔 했다. 우리들 내부에 감춰진 수많은 세계는 얼마나 많은 것일까? 그 이룰수없는 목표를 향하는 첫걸음이 바로 이 인간과 상징일 것이다. |
| 칼 구스타프 융의 <인간과 상징="">은 인간의 꿈과 세계 사이에 나타난 상징의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실제로 우리 삶에서 우리가 만나게 되는 무수한 상징들의 의미를 우리는 찾아 헤매왔었다. 융에 의하면, 그러한 외부적인, 혹은 내부적으로 보여지는 상징들은 자아의 어떤 개안(開眼)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즉, 우리가 찾아 떠나왔던 상징의 발자국들은 실은 우리 자신, 자기 자신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질문으로 돌아온다는 것이다.훌쩍 어디엔가로 떠나고 싶은, 그것이 어디인지 모르면서도 '그 어디'엔가를 지향하는 인간의 자세는 궁극적으로 자기자신의 존재가치와 의미를 찾아 떠나는 하나의 여행담을 의미한다. 오늘, 자기자신에게로 떠나는 가장 숭고한 여행을 떠나기 원한다면, 이 책의 책장을 넘겨보라.인간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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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쭉 프로이트보단 융의 책을 읽고 싶어해왔다. 프로이트의 책이라고 해봤자 3권 남짓밖에 읽지 않았지만, 그의 책을 읽다 보면 인간은 온통 성(性)으로만 이루어진 것 같고, 순 리비도 얘기 뿐이다. 내가 그를 이해하지 못해서 깊이 못보는지 모르겠지만 나같은 문외한의 입장에서는 그렇다.
융의 책을 읽어도 뭐 그렇게 다르진 않다. 정신분석이라는 분야는 아직도 미지의 영역이 많은 것인지 여전히 시야가 좁다는 생각이 든다. 확신할 수 있는 부분만 얘기를 해서 그럴지도 모르겠다.
융과 그의 동료들이 저술한 이 책은 아주 흥미롭다. 특히 우리 나라는 돼지꿈 꾸면 돈번대, 자기가 죽는 꿈은 좋은 꿈이래.. 등등 획일화된 어떤 기준에 의한 해몽이 난무하고 있기 때문에 꿈이란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이며 개인적인 상황과 심리상태등 여러가지를 고려해 해석해야 한다는 생각은 저편으로 넘어가있다.
꿈은 두려워할 것도 아니고, 꾸고 나서는 바로 잊어버릴 것도 아니다. 자신의 무의식이 의식체계로 건네는 조심스럽고도 중요한 메시지일수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잠자리 옆에 필기도구를 두고 깨자마자 꿈을 잊지 않도록 메모를 하는 습관을 들였다고 하는데 그런 것도 괜찮을 것 같다. 그렇게 해서 자신에게 오는 반복적인 메시지는 무엇인지, 그 메시지가 던져주는 과거, 혹은 미래의 상황은 어떤 것인지 파악한다면 우리는 좀 더 완성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인상깊은구절] 그림자라고 해서 반드시 꿈꾼 사람과 적대관계에 있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그림자라고 하는 것은 좋건 싫건 한 길을 함께 가야 하는 동행인과 같다. 함께 가야 하기 때문에 때로는 져주는 척하면서, 때로는 저항하면서, 때로는 다독거리면서 다스려야 하는 것이다. 그림자는 무시되거나 오해받을때만 적대적인 힘이 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