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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 날 읽은 시집 중에서 가장 빛나는 시집 중 하나를 뽑으라면 송기원 시인의 『그대 언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실천문학사, 1983년)도 막강한 후보에 오를 것이다. 시집에는 개인의 깊은 상처가 빛나는 시로 승화한 작품들이 오롯이 박혀 있었는데 두고두고 읽어도 새로웠다. 당시 시인은 민중문학을 하는 이들의 계열에 속했는데 민중문학을 하는 시인들에서 흔히 나타나는 구호성 짙은 작품은 거의 없다시피 하고 순수문학을 하는 시인들에게서 발견되는 탐미주의나 퇴폐주의가 깊게 스며들어 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시인의 그러한 경향은 소설집 『월행(月行)』(창작과비평사, 1979년)과 『다시 월문리에서』(창작과비평사, 1984년)에서도 어느 정도 드러나고 있는데 소설이라는 특성 때문인지 좀 더 현실에 닿아 있었다.
그리하여 송기원을 빼어난 시인이자 단편소설을 잘 쓰는 작가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장편소설은 가난한 시골의 장돌뱅이 사생아 출신이라는 자의식이 작품의 완결성을 현저히 떨어뜨렸다. 그런데도 작가는 1990년대 중반부터 주로 장편소설을 썼고 그로 하여 작가와 멀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어쩌면 영영 멀어질 수도 있었으나 이 소설집으로 하여 작가는 다시 내게 중요한 작가가 되었다. 작가로 하여금 지리산이며 계룡산 골짜기의 암자를 떠돌게 하고, 때로는 히말라야 골짜기의 힌두 수도원이며 미얀마의 명상사원을 기웃거리게 한 그 자의식이 비로소 걷히고 작품의 완결성은 물론 감동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아울러 가난한 시골의 장돌뱅이 사생아라는 상처가 역설적으로 아름다운 사람의 향기로 다시 태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소설집에는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어렸을 때 화자를 둘러싼 가족과 친지, 그리고 이웃들에게서 뒤늦게 발견한 사람의 향기를 다루고 있다. 가족의 범주를 다룬 작품에는 화자의 친누나를 그린「양순이 누님」과 의붓아버지를 다룬 「사촌아부지」가 속한다. 친지를 다룬 작품에는 유복자로 태어난 외사촌형 「울보 유생이」와 백부의 외아들 「폰개 성」이 속한다. 그리고 이웃을 다룬 작품에는 동네사람에게 겁탈당해 아이를 낳는 당달봉사 「끝순이 누님」, 새재에 중국집을 열고 뿌듯해하던 폐병쟁이 「물총새 성관이」, 선한 마음으로 굳세게 살아가던 억척어멈 「헤조갈래」, 해창댁의 행려병자 아들에 관한 「바보 막둥이」, 문둥이의 딸이라는 사실을 평생 숨기고 살아온 동무와의 재회를 다룬 「정애 이야기」가 이에 속한다.
헤조갈래는 얼른 몸을 돌려 동네 아낙네에게 다시 한번 큰절을 했다. “야우, 아짐 말이 백번 옳구만이라우. 나가 눈깔이 삔 죄로 천금 같은 내 딸 신세까장 망체부렀구만이라우. 나야 살아생전에 두 번 다시 이 양반을 볼 일이 없겠제만, 글고 나야 이 양반이 당장에 덕석몰이를 당해 목심이 끊어진들 터럭만큼도 한 될 거이 없제만, 아무리 그래도 우리 애들한테는 애비가 아닌 게라우? 그러댁기 이 양반이 내 딸한티 아무리 몹쓸 짓을 했다고는 해도, 정작 내 딸 뱃속에서 자라는 씨앗은 이 양반이 뿌린 거이기도 안허요? 지발 우리 딸을 생각해서라도 우리 새끼들 앞에서 이 양반 숭한 꼴을 보이지 말고 무사히 보내주시요오.” (105쪽)
헤조갈래의 두 번째 사내는 거적을 둘러쓰고 시체처럼 누워 있던 동냥아치였다. 다 죽은 사람을 살려내 남편으로 받아들인 셈인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고 의붓딸에게 몹쓸 짓을 하여 애를 배게 했다. 아무리 장돌뱅이 동네라지만 동네 사람들은 그런 꼴까지 용인할 수가 없어 치도곤을 하려고 나섰는데 정작 헤조갈래가 온몸으로 막아서서 울며 큰절을 하며 그냥 보내달라고 하소연하는 장면이다. 이렇듯 기막히게 감동적인 사연은 아홉 편 단편에 올올이 살아 있다. 하여 ‘대저 문학을 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살아낸 삶의 고통과 쓰라림과 막막함을 바탕으로 하여 다른 사람의 고통과 쓰라림과 막막함으로까지 그 외연을 넓혀가는 일이 아니가. 그리하여 결국은 나와 다른 사람이 다 함께 동류의식을 갖’(49쪽)게 한다고 하겠다. |
| 촌스러운 표지에다 역시 촌스러운 제목이라 별 관심이 가지 않았던 것이 사실이었다. 개인적으로 제목은 압축적이고 소탈한 맛이 있어야한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이 제목에 있어 '향기'라는 단어가 자꾸만 걸리는 것이다. 다분히 '그럴듯하게'의 느낌을 준다. 책의 내용이 '사람냄새 물씬 풍기던 사람들에 관한 기억'일진대 향기는 이러한 느낌을 표현하기에는 의미의 폭이 너무 좁다. '그리운 사람들' '사람 냄새나는 그곳으로 가고싶다' 정도가 어떨까? 솔직히 그리 좋은 제목 같지는 않지만 하여간 '냄새'라는 단어가 쓰였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고 잠깐 생각해보았다. 본문으로 들어가서 끝순이 누님, 울보 유생이, 물총새 성관이, 헤조갈래, 바보 막둥이, 정애 이야기, 사촌 아부지, 폰개 성, 양순이 누님- 이 총 아홉 개의 연작들이 그리고 이 아홉명의 사람들이 작가에게 향수를 일으키는 향기로운 사람들이다. 그들은 가난하고 모자라다. 그래서 더 행복하고 아름답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나는 어느 새 작가의 눈 속으로 들어가 버린다. 아주 오랜만에 고향을 찾아 기차를 타고 창 밖을 바라본다. 한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이 아홉명의 정든 사람들을 차례로 스쳐간다. 그들은 웃으며 손을 흔든다. 그리고 아스라이 사라진다. 과거로의 회상은 그리고 그 기억들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는 것은 현재의 나의 삶이 그러하지 못하다는 것을 뜻한다. '물총새 성관이'에서 작자가 성관이를 떠올리게 되는 것은 술자리에서였다. 그것도 전업시인, 전업작가들이 모인 술자리.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살아갈 수 없는 고민들을 나누던 상황은 어느덧 작자를 물총새를 잡던 성관이의 기억으로 이끈다. 현재의 고통은 과거의 기억들을 더 아름답게 만든다.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린 시절을 그리워하게 마련인 것이다. 과거가 현재와 분리되지 않는 것, 그것이 이 소설집의 핵심이다. 그들은 과거 속에만 존재하는 박제된 인물이 아니다. 현재의 나와 만나고 있는 인물이다. 나는 그들을 만나고 과거를 떠올리며 그들의 변함 없음을 확인한다. 바로 거기서 감동이 오는 것이다. 차가운 현실과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환멸감 속에 여전히 향기로운 그들은 힘이 된다. 차가 멈추고 차창 밖에서 손을 흔드는 그들에게 작자 역시 손을 흔든다. 그렇게 마주보며 활짝 웃고 다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
| 어릴 때 자신이 좋아하던 사람을 나중에 커서 만난다면....좋은 추억만 가득찬 사이라면 만나면 정말 좋을 것이다. 아마 세상을 다가진 기분이 이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아픈 추억으로 가득 찬 사이라면...그녀가 불행에 빠졌을 때 그녀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했던 사이라면...과연 그 사이가 다시 만나면 행복하기만 할까...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만나지 않았더라면...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불행한 일이지만 오히려 다시 만나지 않는 사이가 더 행복할 수도 있다. 끝순이와 대운이의 만남이 그런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기도 한다. 만나지 않았으면...하는 생각을 한다. 왜냐하면 그녀의 삶이 많이 고통스러웠고 그것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대운이였으니까... |
| 무당집 딸 끝순이...그래서 사람들은 그녀의 뒤에는 항상 귀신이 버티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아마 나같아도 그런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를 돌봐줄 사람...그녀를 이해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자신이 얼마나 착하고 외로운 사람인지 알아주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 뒤에서 수근덕거리는 사람은 많아도...하지만 그녀를 뒤에서 묵묵히 아껴주는 사람...대운이가 있었다. 솔직히 이 소설 속에서 주인공들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는 확실하게 알지 못하겠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소설의 제목처럼 주인공들에게는 그들의 향기가 있었다. 그런 향기로 사람들은 예추억을 기억하기도 하며 앞으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