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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무한대를 과연 볼 수 있는지, 혹은 (앞으로야 몰라도) 여태 존재했던 인류 최고의 천재들이 무한대를 보았는지 볼 수 있었는지는 결코 확정지어 말할 수 없다.
인도인 혈통인 배우 데브 파델이 라마누잔 역, 제레미 아이언스가 하디 교수 역을 각각 맡았다. 데브 파텔은 구자라티 주 출신 양친을 두었는데, 이 지역의 독특한 문화와 생활 양식, 또는 디아스포라에 대해서는 이 블로그에서 여태 여러 번 말한 적 있다. 실제 라마누잔은 북부가 아니라 저 아래 타밀 인근에서 태어났는데, 이 영화 속에서도 출신의 남부/북부의 정체성을 분명히 가르는 대사가 나온다. 같은 인도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다만 그 대사가 아리아/드라비다의 이분법과 완전히 일치하는지는 불확실하다.
천재적인 수학 자질, 혹은 적어도 수를 다루는 감각에 있어 초인적인 재능을 지녔던 라마누잔에 대해 일반인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여러 흥미로운 에피소드를 엮어, 영국에 초빙되어 온 후 죽음에 이르기까지 그의 생애 중요한 국면을 전기처럼 엮은 영화다. 역시 우리가 잘 아는 대로, 그저 인종적 편견 때문에 명백한 천재성과 업적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최고 지성의 전당에서의 한심한 작태를 신랄히 고발하기도 하는데, 하디 교수의 중요한 협력자 중 하나였던 버트런드 러셀이야 당연히 오픈된 마인드였지만, 리틀우드 같은 이는 완강하게도 편견의 벽을 고수한다. 리틀우드 역의 토비 존스는 우리가 여러 작품에서 그의 개성 있는 연기(와 외모...)를 봐 왔으므로 눈에 아주 익을 것이다.
라마누잔은 이 영화에서 세 가지 정도의 장벽과 시련에 부딪힌다. 하나는 물론 영국인들의 개탄스러운 인습과 차별 대우이며(이건 새삼스러울 게 없다), 영화에서는 그 다음, 즉 고향에 머물러 있는 그의 어머니와 아내 사이의 충돌(그들 입장에서는 고부 갈등)이, 아들의 본분과 남편 역할 사이에서 딜레마에 빠진 그의 처지를 조명하며, 이에서 유래한 고통 역시 그의 영혼을 만만찮게 갉아먹었으리라는 추측을 내놓는다. 물론 며느리는 일방적인 피해자에 가깝지만, 영국인들의 그것 못지 않게 훨씬 존재의 자유를 구속했던, 소속 종족 고유의 후진적인 관습 역시 이 젊은이의 마음을 지옥으로 치닫게 한 것이다.
내 생각에는 이것들 말고도, 그가 전적으로 긍지를 가진 수학적 재능 역시, 그가 확신을 지녔던 만큼이나 객관적으로는 그리 단단한 토대를 보유한 게 못 될 수 있다는 회의감과 불안감이, 사실은 그가 진짜 대적해야 했던 최후의 시련, 시험이 아니었을까 싶다. 라마누잔은 수십, 어쩌면 수백 자리의 수, 수, 수들을 그저 머리 속에서 자유로이 조작(연산)하고 그들이 펼치는 향연을 자유자재로 시뮬레이션할 수 있던 천재였다. 이런 그가, 예컨대 극중에서(그리고 실제 생애에서) 표현되는 것처럼, '이보게, 혹시 페르마의 정리는 참일 것 같나, 어떻나?' 같은 질문을 받았을 때, 머리 속으로 잠시(혹은 좀 길게라도) 굴려 보고는 '예, 그런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을 때,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자신은 그런 '직감'에 대해 얼마나 확신할 수 있을까? 이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다.
설령 그가 수천 자리의 연산과 분해를 자유로이 행한다 해도, 이것이 이후에 전개될 모든 경우에 대해서도 여전히 참이리라고는 절대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디 교수도, '이 사람아, 자네가 정직하게 그리 느낀다는 건 알아. 하지만 수학은 계산 그 이상의 영역일세. 증명이 필요하다는 거야!' 라고 절규했던 것이다(사실임). 그러나 아무리 천재라고 해도, 혹은 천재이기 때문에, 남들보다 멀리 볼 수 있는 그 능력과 체험, 확신 하나로 자신의 직감을 '증명 없이' 참으로 믿어 버리고 말며, '대체 그게 뭐가 잘못인지' 다급해하고 불안에 떨게 된다.
아마도 라마누잔은 살아생전에 결국은 '증명의 중요성'을 깨달았을 것이다. 이런 천재일수록 자신이 빠져든 오류에 대해서는 맹목이 되기가 오히려 쉬운데, 자기 반성은 IQ가 아니라 인성의 문제이긴 해도, 그는 또한 선량하고 겸손한 인품이었겠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혹 '아 그렇구나, 증명은 역시 별개의 영역이었어.'를 각성했다면, 그때부터는 '역시 나의 한계란 여기서부터 엄연히 펼쳐지는 것이었군.' 같은 자기 회의가 또한 존재를 엄습하지 않았을까? 그가 조금만 낙천적인 기질이었다면 '아, 그래? 뭐 지금부터 잘하면 되지.' 정도로 쿨하게 넘겼을 텐데, 설령 머리가 좋고 겸손하기까지 한 유형이라 해도 이처럼 현명하게 털털해지기가 또 쉽지 않기에, 누구에게든 참된 안식, 행복이란 그처럼 어려운 과제가 되는지도 모른다.
제목은 그저 역설로 해석해야 하며, 인류가 무한대를 보기는커녕 아직 그 개념조차 올바로 정의할 수 없음 역시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혹시 라마누잔이 진정 무한대를 목도했으나 단지 그를 증명할 수 없었을 뿐이라면, 역시 범속한 자신들의 한계에 갇혀 심심상인의 교감을 얻지 못한 우리 불쌍한 둔재들의 과오(와 운명)에 대해 한없는 회오의 눈물을 흘릴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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