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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오바마가 극찬을 한 소설이라고 해서 읽었다. 마치 김훈의 [칼의 노래]를 노 전대통령이 탄핵 기간에 읽고 있다고 해서 읽었듯이. 책의 앞 부분을 읽으면서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와 흡사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의 소설과 흡사하다거나 어디선가 읽은 듯한 느낌이 든다는 것은 그닥 좋은 느낌이라고는 할 수 없다. 조금씩 페이지를 넘기면서 뉴욕이라는 곳, 뉴요커들의 생활이 흥미를 끌기 시작했다. 크리켓이라는 낯선 운동 경기에 관한 부분도 자잘한 재미를 주었다. 하지만 이런 부분은 자잘한 재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서면서부터 약간 내 예상이 빗나가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고, 책장을 쥐고 있는 손이 살짝 긴장하기 시작했다. 첫인상과는 많이 다른 이야기구나, 만만치 않은 테마를 다루고 있는 소설이구나, 어쩌면 오바마를 매료시켰던 것은 이런 것이겠구나 하는 생각들이 들기 시작했다.
주인공 한스는 네덜란드 태생이다. 그는 어머니와 연관된, 네덜란드의 산천과 연관된 행복한 추억을 많이 갖고 있다. 동시에 그는 현재 뉴욕의 한복판에서 살고 있는 사람이다. 애널리스트로 금융계에 일하는 그는 자본주의의 첨단 업종에 종사하고 있는 고액 연봉자이기도 하다. 또한 그의 아내는 어떤가? 그의 아내는 잘 나가는 변호사이다.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는 지식인이고, 부시 정부의 정책에 비판적인 지식인이다. 그러한 아내를 주인공 한스는 마음 깊이 사랑한다. 하지만 그의 사랑도 아내의 생각에 대한 전적인 동의와 완벽하게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한스는 아내처럼 뚜렷하고 명백하게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거나 부시의 정책을 성토하지는 않는다. 그에게는 그게 그렇게 단순히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한스의 눈에 보이는 세계는 갈갈이 찢어져 있다. 뉴욕 주류의 세계와 이민자들의 비주류 세계가 찢어져 있다. 유년의 추억을 담은 네덜란드의 서정적 공간과 치열한 경쟁의 한복판에 있는 뉴욕의 맨해튼이 찢어져 있다. 찢어져 있는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함께 침대를 쓰는 아내의 생각과 한스의 생각은 찢어져 있다. 심지어 그들의 사랑마저도 9.11 테러가 남긴 후폭풍으로 인해 찢어지고 만다. 결정적으로 한스의 내면 또한 찢어져 있다. 그는 그가 무엇을 바라는지, 그가 어디에 살고 싶은지, 그가 지향하는 게 무엇인지 명확히 알지 못한 채, 그때그때의 상황 속에서 찢어진 내면을 부둥켜 안은 채 살아가고 있다.
문제는 한스의 삶이 유별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한스와 같은 삶이 오늘을 사는 우리 대부분의 삶이라는 것이다. 유년의 네덜란드는 행복한 추억으로 가득하지만 다시 되돌아갈 수는 없다. 네덜란드라고해서 세계화의 풍랑에 비켜 선 것은 아니기 때문. 뉴욕의 치열한 경쟁이 삶의 가치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운 것은 두말한 나위도 없다. 그러나 무턱대고, 무턱대고 현실을 비판하고 성토하는 것도 동의하기는 힘들다. 그 누구도 비판할 줄 몰라서 비판을 안 하는 건 아니다. 문제를 인식하지 못해서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목청을 높이는 사람들보다 침묵하는 사람들의 문제의식이 덜 절실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피상적인 생각일 수 있다.
21세기의 뉴욕 맨해튼에서, 자본주의 최첨단의 삶을 살면서, 9.11이라는 세계사의 한복판을 경험하면서, 어린 시절의 추억을 마음에 담고 외롭고 쓸쓸하게 이민자의 삶을 살아야 하는 한스는, "상실을 치유하고 회복을 꿈꾸는" 인물을 나타내기 위한 매우 극단적 설정일 수 있다. 하지만 반드시 그렇다고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떨까? 21세기의 서울, OECD 가입국이자 글로벌 경쟁의 선봉에선 나라이면서 동시에 분단 국가인 현실, 초고층 주상복합이 마구 올라가는 동시에 철거 현장에서는 용산 참사와 같은 일이 벌어지는 오늘, 이혼율은 증가하고 출산율은 떨어지고 고령화가 진행되고 88만원 세대가 양산되며 40중반이면 명퇴를 당해야 하는 일상, 우리는 과연 한스와 다른가?
한스는 아무런 전망도 보여주지 않고 어떤 확신에도 이르지 못한다. 간신히 아내와 재회하고 가정을 회복하는 정도에서 이 작품은 결말을 맺는다. 어느날 부부는 오붓하게 유람선을 타고 단란한 시간을 보낸다. 한스는 망연히 어딘가를 쳐다본다. 그의 눈가를 스치는 수많은 잔상들은 그냥 잔상일 뿐이다. 작가는 여기까지만 말한다. 아마도 그게 솔직한 것일게다. 아니면 작가도 아직 모색 중일게다. 작가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그가 어떻게 문제의식을 이어갈지, 어떤 결론에 도달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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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희도 열정도, 낙심도 절망도, 삶의 어느 순간순간마다 다가오는 느낌들에 감정의 과장된 기복을 표현하지 않게 되었는지는 명확히 그 기점이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세상에 그다지 기대할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기쁘다고 외치지도 슬프다고 쳐지지도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 작품의 화자인 ‘한스 판 덴 부르크’안에 잠복해 있는 운명론적 견유주의는 내겐 공감을 넘어선 일체감을 형성할 정도였다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선‘프루스트’를 떠올리게 하는 기억의 여정이고, 관조적인 내면의 일기 같아서 이야기 구조에 익숙한 사람들에게는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소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든다. 또한 ‘크리켓’이라는 과거 영연방국가들에서 볼 수 있는 스포츠가 주요 제재이고, 화려한 소비문화와 현란한 욕망의 무대를 기대케 하는‘뉴욕’을 배반하고,‘한스’의 일상에 있는 갈색과 흑색의 피부를 가진 이주민들의 단조로운 모습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독서를 어렵게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수다스런 치장과 감각적인 형용사들이 배제된 담백하고 일관된 아웃사이더들의 삶에서 오히려 치열한 삶의 의욕과 화해와 화합의 희망을“독선적 망상”에 빠져있는 거대제국에 뿌리려 하는 작은 행동들을 발견하는 것은 소박한 희열을 안겨주기도 한다. 변호사인 영국인 아내의 미국시장 진출을 위한 이주로 뉴욕생활을 하게 된 네덜란드인‘한스’의 이야기다. 금융투자분석가로 낯선 이국의 환경에서 그런대로 금융가에서 인정받는 애널리스트로 직장생활을 꾸려가는 서른여덟 살의 남자, 그에겐 친구도 없고 이렇다 할 여가활동도 없다. 아내와 아들이 있는 가정에 길들여 있는 그런 소박하고 평범한 남자. 그의 시선에 들어온 랜돌프 워커공원에 흰색 유니폼을 입고 크리켓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고향 네덜란드 헤이그에서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 이어진다. 항상 운동장에 아들의 시합이 끝날 때까지 자리를 지키시고 계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왠지 애틋한 사랑을 기억케 하고, 눈시울이 붉어지게 한다. ‘한스’의 일상 속에서 스쳐가는 사물과 사건에 이어지는 기억들, 시간과 공간을 마구 거슬러 떠오르는 회상들, 거기에는 어머니의 배려와 사랑이 담긴 표정이 있고, 아들 제이크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진지한 의지와 소망이 있다. 그리고 아내에 대한 부끄러움과 미안함, 실망과 부당함의 통증도 있고, 이민자의 스포츠로 치부되는 크리켓을 미국사회에 스며들게 하려는 트리니다드 사람‘척 램키순’의 열망에 대한 회의도 자리 잡고 있다. “아무리 발버둥 쳐도 거대한 결과는 우리의 노력과 관계없이 결정되며, 우리가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랑은 떠나가기 마련이고, 해야 할 말은 끝끝내 할 수가 없고, 온 세상이 지리멸렬함 투성이고, 붕괴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는‘한스 ’의 운명론은 마치 작품전체를 아우르는 예언 같다. 항상 분명한 목소리를 내는‘한스’의 아내 ‘레이철’이 쏟아내는 독설처럼 “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비현실적인 나라”에서 자신들의 자아에 상처를 입지 않고 꿈을 꾸려하는 이민자들의 비릿한 삶의 모습들이 흔들거린다. 이처럼‘한스’의 기억의 여정에는 미국의 배타적 독선이 빚어낸 망상과 이민자들의 기대어린 꿈이 어울려 있고, 어머니와 아내, 아들, 그리고 친구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 흐른다. 그리곤 이민자들의 마음 저 밑바닥에 흐르는 어린 시절 고향의 아버지와 어머니, 형제들에 대한 깊은 향수가 서려있다. 그런가하면 뉴욕에서의 운전면허 신청을 위한 외국인에 대한 하찮은 인간들이 행사하는 부당하고 냉담한 권력의 메스꺼움에 대한 일화에서부터, 떠나버린 아내로 인한 극도의 무감각으로 인생자체가 해체되었음을 느끼는‘한스’에서와 같이 그의 촘촘히 엮인 내면의 기억들, 세밀한 심리의 묘사들을 좇는 진지한 즐거움이 있다.‘한스’가 털어놓는 작은 기억의 기록들에서 잃어버렸던 우리들의 기억을 찾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소설의 형식이 가져다주는 빼어남일지도 모르겠다. 이주민들의 땅(nether-lands)이란 은유적 의미도 지닌‘네덜란드’는 뉴욕의 또 다른 얼굴을 우리에게 드러내준다. 절정도 리듬감도 어떤 굴곡도 느낄 수 없는 문장으로 참을 수 없는 지루함이 엄습하지만 그 어떤 소설보다 우리들 마음을 커다랗게 진동케 한다. 지적이고 아름다운 작품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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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사람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향수병을 앓고 있다. 그것은 지리적인 공간이나 역사적인 공간 어디에도 정착할 수 없는 불안과 관련된 향수병이다. - 169에서
* 자신이 태어난 모국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 이방인으로 살아보는 건 어떨까 우리는 종종 그런 꿈을 꾸곤 한다. 낯선 도시 낯선 사람들 속에서 살아간다는 건 왠지 나 혼자만의 비밀을 몰래 간직하고 있는 듯 스릴이 있고 어딘지 낭만적인 일처럼 생각하곤 한다. 새로운 나라에서 새로운 꿈을 꾸며 다시금 시작한다면 지금과는 다른 인생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느낌에 휩싸여 우리들은 낯선 나라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 속으로 떠난다. 하지만 낯선 도시, 낯선 거리, 낯선 사람들에 둘러싸이게 되면 우리들은 금세 짙은 향수 속으로 빠져든다. 익숙한 도시, 익숙한 언어, 익숙한 사람들 사이로 돌아가고 싶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은 모두 저마다 깊고 얕은 향수병을 앓고 있다. 고향에 있는 이들은 낯선 곳에 대한 향수를, 낯선 곳에 있는 이들은 익숙한 곳에 대한 향수를, 그리고 마음을 품어주는 곳에 관한 향수를.
세계 온갖 국가에서 온갖 인종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살아가는 미국. 아메리칸 드림의 나라. 그 미국 제 1의 도시 뉴욕. 그러나 주인공 한스가 마주한 미국은 그런 꿈을 꾸기엔 너무나 힘겨운 삶이 이루어지는 나라였고, 욕망의 도시 뉴욕은 911테러가 휩쓸고 간 허탈함과 허무함이 팽배한 도시였다. 조지프 오닐의 2009 펜포크너상 수상작 <네덜란드>. 처음엔 쉬이 읽히지 않았다. 미국의 낯선 거리, 낯선 이름들, 낯선 경기 크리켓, 낯선 감정들 속에 나를 집어 넣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어디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한 채 부초처럼 떠도는 한스의 그 절박하면서도 황량한 마음이 남의 것 같지 않았다. 뉴욕의 이방인들이 펼치는 낯선 경기 크리켓을 통해 새로운 뉴욕 새로운 미국 새로운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었던 척의 지나친 열정이, 결국은 그 열정과 열망으로 인해 살해되고 만 그의 꿈과 생명이 씁쓸하게 가슴을 적셔 왔다. 그러면서 미국에서 꿈을 꾸었던 척은 살해되고 이방인으로 떠돌던 한스는 다시 런던으로 돌아간 이야기의 결론이 의미하는 건 뭘까 싶기도 했다. 이 책이 보여주는 뉴욕은 화려하고 거창한 열정과 유행과 욕망의 뉴욕이 아니다. 그런 화려한 꿈들이 만들어낸 어두운 그림자 같은 쓸쓸한 뉴욕이다. 그래서 내겐 화려한 조명과 최첨단 유행으로 치장하지 않은 뉴욕의 맨얼굴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스팩타클한 모험도 사건도 재치넘치는 유머도 없는 그러나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인생 그 씁쓸함의 기록 <네덜 란드>였다. - 다락방서 허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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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든 이데올로기가 난무하는 나라, 대중이나 지도자가 미국과 세계뿐만 아니라 광신적인 기독교 복음주의 운동 덕분에 우주에 대한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다른 나라들에는 문명과 법과 합리적인 규칙을 무자비하게 강요하면서도 미국만은 면제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독선적인 망상에 빠져 있는 나라, 한마디로 ‘악성 정신병에 걸린 비현실적인’ 나라….
2001년 9월 11일. 학교 근처 자취방에 있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자면 내 방 옆 건물에 사는 친구의 방에 있었다. 지금쯤 십중팔구 헐렸을 게 분명한 내 자취방은 온갖 고양이, 덩치 큰 개들, 닭들과 함께 살아가는 동물농장이었던 데 반해,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내 친구의 펜션은 온수 샤워가 언제든지 가능한 ‘럭셔리’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TV가 있었다.
왜 그 시각에 거기에 있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도 덤으로 껴서 온수 샤워를 하려 하지 않았을까. 아무튼 그렇게 방에서 뒹굴 거리고 있을 때 텔레비전 화면에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뉴욕 쌍둥이 빌딩이 무너지고 있었던 것이다. “무슨 영화야?”곁에 있던 친구가 물었다. 정말 영화 같은 장면. 미국의 번영, 자본주의의 상징이었던 쌍둥이 빌딩이 그렇게 영화처럼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온갖 아름다운 수식어와 경탄, 그리고 부러움과 화려함의 대상이었던 뉴욕. 멋진 할리우드 배우들의 로맨스가 펼쳐지고, 인종의 용광로라 불리며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이었던 뉴욕. 그렇게 뉴욕은 어이없게 무너져 내렸고, 아메리칸 드림은 덧없이 사라졌다.
《네덜란드》는 바로 그 뉴욕에서 살았던, 그리고 죽어간 이들의 이야기다. 주류가 아닌 비주류로 살아가는 뉴욕. 그 곳의 욕망과 절망, 아름다움 속에 가려진 철저한 생존의 법칙. 누구도 돌볼 수 없지만, 또한 누구라도 돌봄 없이는 온전히 숨 쉴 수 없는 곳. 뉴욕은 환상과 낭만보다는 씁쓸한 혼잣말과 퀭한 눈망울이 더 어울리는 도시로 비쳐진다.
“지금까지의 소설 가운데 가장 주목할 만한 탈식민주의 작품”이라는 거창한 평가를 제쳐두고라도 《네덜란드》가 주는 난처한 묵직함은 범상치 않다. 결코 화려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뉴욕, 그 안에 살아가는 너무도 다양한 이들의 모습. 주류가 아니기에 때론 더욱 치열하고 때론 더욱 열광적일 수 있었던 사람들. 그 치열함과 열정 밑으로 흐르는 불안과 고독.
작품을 뚫고 지나가는 것은 다름 아닌 공허함이었다. 9·11테러라는 전대미문의 사건 이후 달라질 수밖에 없었던 뉴욕과 그 안에 살아가는 이들. 온갖 화려한, 그리고 잔인한 명분 속에 벌어지는 어처구니없는 미국의 난폭함 속에서 저마다 여전히 꿈을 안고 살아가는, 아메리칸 드림을 포기하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는 허무하면서도 슬프다.
오바마 대통령이 읽었다고 해 더욱 화제가 되었던 작품은, 때문에 운이 무척 좋은 작품으로도 해석된다. 저자 역시 시대를 잘 만났다는 고백을 하고 있다. 그동안 미국인들을 비롯해 전 세계인들의 동경의 대상, 화려함의 상징이었던 뉴욕이 철저히 타자화 되어 해석되고 보여 지고, 느껴진다. 그것이 어떤 모습이든지, 2001년 9월 이전의 뉴욕이 아님은 분명하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살아간다. 미래는 불분명하지만, 현재는 여전히 생생하기 때문이다.
10년이 다 되어가지만 쌍둥이 빌딩의 침몰은 여전히 미국인들의, 세계인들의 트라우마로 남아있다. 아마 그 상처는 오랫동안 지속될 듯하다.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뉴욕의 잿더미 속에서도 다시금 꿈을 꾸는 이들이 생긴다는 점이다. 영원히 잡을 수 없는 도시, 뉴욕에 여전히 사람들은 열광할 것이며, 좌절할 테고, 잊혀져갈 것이다.
내 기억 속의 뉴욕은 여전히 잿빛이다. 미국 땅 한 번 밟아보지 못한 촌놈이라, 더더욱 주관적인 동시에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내 기준으론 그렇다. 살아가면서 미국이란 국가에 대해 긍정보단 회의와 부정이 늘어나는 이유도 어찌할 수 없다. 이 역시 다분히 주관적이고 다분히 객관적이다. 혹시 모른다. 어느 때고 미국을 가게 된다면, 뉴욕을 바라보게 된다면 한스와 같은 삶을 살아갈지, 아님 척 램키순이 될지, 아마도 척이 더 유력할 듯.
퇴근 시간, 난처해하며, 시내를 방황하는 많은 이들을 목격한다. 그들은 빌딩에 들어갔다, 빌딩에서 나오고, 구석을 찾아 들어갔다, 다시금 나온다. 끊임없이 자신이 바쁘다는 것을 알리려 애쓰고, 외롭지 않음을 선포한다. 하지만 DMB, PMP, 노트북을 들여다보며 키득거리는 그들은 슬프다. 그리고 외롭다. 죽을 정도로.
뉴욕은 서울이다. 서울은 동경이고, 동경은 북경이다. 뉴욕이 주는 묵직함에 우리가 매일 놀라면서도 매일 지나치는 이유다. 서울 안에 얼마나 많은 척이, 한스가 살아가고 있을지 우리는 의식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한다.
화려함 뒤에 감춰진 쓰라린 고독과 불안감. 이는 한 잔의 술잔으로, 지나친 수다로도 덮을 수 없다. 가족의 따뜻한 위로와 이웃들의 말없는 동행이 다시금 희망을 줄 수 있을 뿐이다. 척이 그리던 고향 땅은 온갖 미개한 것으로 설명된다. 척은 다시 고향보다는 뉴욕에 묻히고 싶어 했다. 하지만 척은 진정으로 고향을 사랑했고, 고향을 그리워했다.
결국 그는 고향땅에 묻히게 될 것이다. 그의 바람대로 뉴욕에 묻히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즐거운 귀향은 아닐 것이다. 화려한 뉴욕에서의 한바탕 멋진 꿈을 꾸었던 척 램키순. 그리고 네덜란드와 영국, 미국 그 어디에서도 편안함과 안정을 얻기 힘들었던 한스.
책 읽는 재미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네덜란드》지만, 난처한 외로움과 불안을 멋들어지게 묘사한 범상치 않은 작품임은 확실한 듯하다. 오늘도 또 다시 화려한 꿈을 찾아 뛰어드는 수많은 척 램키순을 위해 한 잔의 건배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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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잔잔하게 풀어내려간 책이다.
특히 제일 마지막 부분(스포일러 땜에 밝히긴 뭐하지만...). 가족과 회전전망대에서 보는 일몰 속으로 오버랩되는 그의 어머니. 뉴욕의 맨해튼의 일몰여행 부분은 9.11 재난 이후의 미국인이 보면 빠져들지 않으면 안될 치명적 문장들로 이어지고 있다. 압권이다. 과거의 어머니 미소 위에 겹쳐지는 제이크(그의 사랑스런 아들)! 과거에서 미래로 이어지는 이 마지막의 빼어남은 이 책이 왜 찬사를 받아야 하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렇다. 이 부분에서 미국의 대통령은 분명 크게 감명 받았으리라. 최근들어 마지막 부분을 이렇게 품위있게 그려내는 책을 잘 못보았는데... 이 좋은 책을 읽게 되어 스스로에게도 좋은 기분이다.
책의 내용은 알고보면 간단하다. 9.11 테러 이후의 뉴욕을 배경으로 네덜란드 출신 애널리스트 한스와 중미에서 온 이민자 척의 이야기가 주류를 이룬다. 9.11 이후 삶에 대한 시각을 달리한 레이첼(한스의 부인이며 변호사로, 뉴욕으로 오게된 근원이다)의 방황과 그로인한 부부간의 갈등과 위기가 깊이 깔리면서 가슴을 안스럽게 하지만, 잘 극복하고 나아가는 과정이 현재의 미국이 제반 딜레마를 슬기롭게 헤쳐나아가야하는 상황과 참 잘 통한다. 마찬가지로 네덜란드가 주는 복합적 의미도 상당하다. 한스의 조국이기도 하지만, 척의 생활반경에서 느끼게 하는 마이너리티 같은 이민자의 영역인 nether-land의 내음을 내포하고 있다.
크리겟과 관련한 내용이 큰 줄거리를 이루는데, (난 크리겟을 거의 모른다) 그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해본다. 빛을 잃어가고 있는 이 경기를 통하여 현재의 공간에 부적응하고 있는 군상들에게 변화의 의미를 일깨우게 하는 상징물이 아닐까?
학교를 빼먹고 스케이트를 타던 한스에게 다가선 그의 어머니의 인자한 대응은 너무나 감동적이다. 언제나 옆에서 따뜻한 미소로 받침이 되어주신 그의 어머니는 우리네 어머니와 다를 바가 없다. 사랑이 절로 전해진다. 어머니의 따스함이 가족의 사랑으로 이어지고 희망적인 미래를 보여주는 감성적이고 인간적인 느낌을 이 책은 전해준다.
한스와 레이첼의 지적 수준에 걸맞는 독백같은 서술이 큰 진폭없이, 마치 큰 물결처럼 도도히 나열되면서도 사색의 여지를 증폭시키는 필력이 작가의 수준이 어느정도인가를 증명하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나이가 들어 읽을수록 삶의 깊이를 반추하며 깊은 곳에서 청량한 우물물을 끌어올리듯이 내면의 울림을 더 쉽게 포착할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지적 매력을 준다. 때론 번역자의 고어체가 거슬리긴 하지만 전체적으로 무난하고 부드럽게 읽히는 옮김이다.
이제 책을 덮어야한다. 이 책 <네덜란드>는 오랜만에 온기와 용기와 사유의 날개를 주는 책으로 마음 속에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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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책이 두꺼워서 읽기를 망설였지만 한 열 페이지 정도를 읽다보니 정말 안 읽을 수가 없겠더라. 너무나 감동적이고 또한 너무나 사실적인 그런 소설이었다. 하지만 가장 내 맘을 사로 잡았던 것은 저자의 문체였다. 모든 문장을 손으로 빚어서 만든 듯한 느낌을 받았다. 문장 하나하나 정말 공들여서 만들었구나 하는 것이 절로 느껴졌다. 또한 그 치밀하고도 매혹적인 심리묘사가 합쳐져서 정말 아름다운 글을 만들어낸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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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대게는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하나쯤은 있게 마련이다. 그 책을 읽고 난 나의 개인적인 감정이나 소감일 경우도 있고, 그 책의 여운이 끌어당기는 개인적인 기억들인 경우도 있지만 어쨋든 거의 매번 한 권의 책을 읽고 나면 그 순간 떠오르는 느낌은 분명 늘 있어왔다. 그리고 나는 그런 느낌들을 되새기며 책의 이야기와 그 순간의 감정을 기억하곤 했다. 하지만 오늘 그렇지 못한 한 권의 책을 만난것 같다. 무엇인가 끝없이 말하고 있지만 무엇인지 모를, 그러나 알것도 같은 아리송한 무엇인가를 한껏 뭉쳐있는 잘 풀리지 않는 실타래처럼 얽힌 그대로 던져버리고 간 그 책의 제목은 바로 <네덜란드>이다. ![]() 희망과 위기를 동시에 준 곳, 뉴욕. <네덜란드>에는 잘나가는 애널리스트 한스와 그의 아내, 그리고 아들이 이루고 있는 그의 가족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한다. 한스는 변호사인 아내가 미국으로 진출하기를 원하자 아내를 따라 뉴욕으로 이주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새로운 직장을 얻고 석유업 관련 애널리스트로 자리를 잡아 꽤 잘나가는 성공한 애널리스트로 나름의 삶을 유지한다. 그러나 9.11이후 그의 아내 레이철은 다시 그들이 왔던 영국으로 돌아가길 원하게 되고 그렇게 한스는 레이철과 그의 아들을 떠나보내고 홀로 뉴욕에 남는다. 물론 일정간격으로 가족들을 보기 위해 날아가지만 그에게 가족이 함께 하지 않는 뉴욕은 어딘지 안정감이 없고 소속감을 느낄 수 없는 불안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한다. ![]() 영원한 이방인. 그는 흔들리는 뉴욕에서의 시간동안 끝없이 과거를 맴돌게 된다. 뉴욕이라는 땅에서 자기 분야의 다섯손가락 안에 드는 저명한 애널리스트가 되었지만 여전히 뉴욕은 임시운전면허 하나 발급하는데에도 끝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게 하는 발을 딛기엔 어렵고 난해한 땅인 것이다. 언제나 뉴욕이 멀게만 느껴지는 한스는 자연스레 자신의 과거를 떠올리며 위안을 얻게 되고 그 위안의 매개중 하나로 크리켓이라는 운동을 선택한다. 어린시절 어머니가 늘 동행하던 크리켓, 자신이 조금씩 발전하는 모습을 사랑스럽게 바라보아주던 그 어머니의 모습을 떠올리기 위해 크리켓을 선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한스에게 크리켓은 승부가 중요한 운동이 아니다. 뉴욕스타일의 크리켓을 익혀 팀을 이기게 하는것 보다 중요한 것은 어린시절 그대로의 방식으로 그 기억으로 찾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 크리켓과 현실. 한스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뉴욕에서의 소외감을 외면하는 방식을 선택했다면 그와는 사뭇 다른 방식으로 미국이라는 땅에, 그리고 뉴욕이라는 도시에 적응하고 있는 혹은 그곳을 자신에게 적응시키려 하는 사람이 있다. 바로 네덜란드의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사람, 척 렘키순이다. 트리니다드 출신의 흑인 척 렘키순은 한스와 마찬가지로 검은 피부의 이방인이지만 그가 뉴욕을 대하는 방식은 사뭇다르다. 한스가 자신만의 기억을 더듬는 것으로 과거에서 현실의 위안을 찾는 소극적인 방법을 선택했다면 척은 자신이 좋아하는 이민자들의 운동 크리켓을 뉴욕의 중앙으로 끌어오려한다. 크리켓을 할 수 있는 대형 경기장을 건설하는 꿈을 꾸는 척은 그래서 과거의 기억으로 도망하기 보다는 현실로 자신의 과거를 이끌어오려한다. 스스로가 이민자라는 이름의 영원한 이방인임을 인정하고 그대로 현실에서 연명하려는 한스에 비해 척의 꿈은 그래서 때로는 황당하고 때로는 말도 안되어 보이기까지 한다. 이민자의 나라 미국에서 또 다시 만들어진 이민자들. 그들이 각자 미국이라는 땅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는 방식을 <네덜란드>는 참으로 냉정하고 차갑게, 그러나 한켠의 희망을 품은채 보여준다. ![]() 오바마가 읽었다던 그 소설. <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이 책이 유명세를 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미국의 첫 흑인대통령인 버락 오바마가 읽고 있다는 한줄의 소식때문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무엇이 한나라의 대통령. 그것도 그 존재만으로 참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상징처럼 느껴지는 그 대통령의 눈을 끌었던 것일까? 아마도 그것은 미국이 아직도 온전히 끌어안고 있지 못하는 이민자라는 존재에 대해 사실적이고도 잔혹하게 그 현실을 그려내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민자의 나라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열린 곳처럼 보이는 미국의 거대한 땅, 그곳에서 부유하는 이민자라는 같은 이름의 새로운 이방인들은 미국이 놓인 현실이고 동시에 풀어야할 과제이기 때문이니 말이다. 물론 <네덜란드>라는 이름의 이 소설은 그저 그들의 현실과 그들의 좌절, 그리고 그들이 한 때 꿈꾸었던 꿈에 대한 것들을 그리고 있을 뿐이지만 그 이야기가 잔인하리만큼 사실적이고 현실 그대로이기 때문에 그곳의 지도자인 한 사람의 눈을 끌었던 것은 아닐까? 이민자들이 꿈을 안고 어딘가를 향할때 그들은 그저 물질적인 안정이나 사회적인 지위만을 그들의 최종목표로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들이 속했떤 땅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그들이 속할 곳을 찾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들이 더이상 이민자가 아닌 그곳의 사람이기를 바란다. <네덜란드>가 전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바로 그들을 받아들여줄 완전한 포용이 아니었을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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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346페이지, 23줄, 26자. 특이한 형식의 글입니다. 제가 하나 만들어 보겠습니다. 어제는 집 근처의 놀이터에 갔었다. 가다가 개를 산책시키는 부인을 보았는데 갑자기 엄마가 생각났다. 엄마는 개를 키우지는 않았으나 좋아했었다. 개는 사람과 친숙한 동물이다. 다른 것으로는 고양이가 있다. 하지만 고양이는 사람에게 의존하는 편이 아니다. 아무튼 엄마는 가끔 산책을 했었다. 놀이터에 도착하니 빨간 티를 입은 아이가 있었다. 아이의 손은 흙으로 얼룩져 있었고 맨발이었다. 3달 전에 맨발로 다니다가 유리에 다친 기억이 났다. 유리는 아내가 던져서 깨진 컵이었다. 뭐 이런 식입니다. 연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전개되지요. 일부는 되돌아와서 다시 원 이야기를 계속 진행시키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때로는 점점 과거로 뛰어 가기도 하지만 규칙이 있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전체적으로 보면 크리켓에 관한 잡다한 이야기, 척 램키순와 아내 레이첼에 대한 이야기들, 뉴욕의 이야기 등이 대부분입니다. 아주 어렸을 때의 이야기를 뺀다면 주 무대는 2002년에서 2003년까지로 보입니다. 네덜란드 출신이면서 영국에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뉴욕으로 진출한 주인공(요하누스 프란시스퀴스 헨드리퀴스 판 덴 브루크 = 한스 판 덴 브루크)의 인생이야기이죠. 9.11 테러로 인한 주거환경의 변화 때문인지 '9.11 이후 문학'으로 분류된다는군요. 무엇에 미친다는 주제로 대입하자면 크리켓에 미친 것처럼 보이지만 잊기 위한 방편으로 생각됩니다. 정신병원에 입원해야 하는 천사의 삽입도 비슷한 것이고요. 읽어 내려가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잠시만 한눈을 팔면 이야기가 어느 시대 것인지, 왜 이렇게 흘러왔는지를 전혀 알 수 없습니다. 이 책은 읽으려면 단번에 한자리에서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110421/1104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