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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출가하기 전에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내가 깨달았을 때 산은 산이 아니었고 물은 물이 아니었다 내가 진정으로 깨달았을 때 산은 산이었고 물은 물이었다 성철스님의 법어로 유명해진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의 출처가 되는 일본 선사의 말이다. 이말은 중관철학의 공 개념에 관한 깨달음을 말한다. 반야심경에서도 반복되는 중관철학의 공관은서양철학식으로 말하자면 먼저 현상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를 (칸트적 의미에서) '비판'한다. 비판적으로 검토되었을 때 (우리가 인식하는) 산과 물은 더 이상 (우리가 아는) 산과 물이 아니게 된다. 20세기 초 불교가 서구학자들에게 소개되었을 때 이러한 공 개념의 첫단계는 인식론적 회의주의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책의 저자가 제시하는 푸코는 불교식으로 말하자면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닌 (인간사고에 관한) 회의주의자이다. 푸코는 그의 역사서들을 통해 우리가 보편적 가치라 생각했던 진리, 자유, 인권, 사랑, 가족, 범죄, 정신이상 등이 역사적으로 구성된 우연의 산물이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어떤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라 가르쳤다. 푸코에 따르면 우리는 (해석학적 용어를 쓰자면) 우리 시대의 지평선(horizon, 푸코식으로는 담론)안에서만 세계를 본다. 그리고 그 지평선은 언제나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랐었다. 그의 초기저작인 광기의 역사에서 그는 중세와 절대주의 시대에 광기에 대한 이해와 지금의 광기에 대한 이해가 달랐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마지막 저작인 성의 역사에서 그레코로만 시대와 중세, 그리고 지금의 성에 대한 이해가 달랐었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우리의 이해는 우리의 지평선이 속한 시간과 공간에 우연적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차이에 대해서 푸코가 처음 발견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기독교나 (독일관념론의 전통에 선) 맑스주의 전통에서 그 차이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대적 '진리'에 근접해가는 역사적 과정으로 파악했었다. 그러나 푸코는 지평선 사이에 어떤 가치판단을 내릴 우월한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고 기각한다. 푸코의 세계에서 보편성도 절대성도 자리가 없다. 이러한 푸코의 회의주의는 낯선 것이 아니다. 기독교를 노예의 도덕이라고 분석한 니체('도덕의 계보')와 다를 것이 없다. 실제 푸코는 니체의 제자라고 스스로 공언했으며 그런 성격을 숨기지도 않았다. 사회과학에서 푸코가 중요하게 된 이유인 그의 권력론도 사실 니체의 '권력에의 의지'를 (독일전통의) 해석학적 틀에 대입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푸코적 세계에 사는 인간도 니체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구현하는 인간이다. 저자가 책의 후반에서 보여주는 푸코는 스스로의 사상에 충실하게 바로 그렇게 니체적으로 살았던 사람이다. 푸코는 정치적인 인간이었다. 그는 자신의 연구과정에서 알게된 감옥의 문제를 개혁하기 위해 정치적으로 목소리를 냈고 사형제에 반대했으며 호메이니의 이슬람 혁명을 지지했다. 그는 구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을 '구조의 얼간이'라 보지 않았다. 푸코식으로 말하자면 인간은 담론이라는 (투명한) 어항에서 살며 그 어항을 통해 세계를 볼 수 밖에 없지만 어항 자체를 보지는 못한다. 담론은 인간 조건이며 인간이 진리를 알 수 없는 이유이다. 인간은 유한할 수 밖에 없고 우연적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유한하기 때문에 절대진리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저항할 수 없다거나 자유를 원할 수 없다거나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단지 지금 나의 주장이 절대적이라고 보편적이라고 주장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는 오류의 가능성을 인정하며 생각하고 행동해야 한다. 푸코는 그의 주장대로 자신의 정치적 주장을 강요하지도 않았고 어떤 거창한 대의명분 때문에 정치적 행동을 한다고 으스대지 않았다. 푸코가 이해하는 인간이란 니체식으로 말하자면 권력에의 의지 즉 (산다는 것은 행위를 의미하며 행위는 곧 권력 즉 힘을 발휘해 무언가 결과를 만든다는 것) 살아가는 존재이며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원하는 존재자일 수 밖에 없다. 인간이란 원래 그런 존재자이고 그 존재자에게 중요한 것은 살아가는 것 그리고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 한다는 것이 자체이지 그 행위의 이유는 사후 합리화에 불과하다.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인간으로서의 푸코를 읽으면서 이런 생각을 해본다. 푸코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하이데거가 해석해낸 니체처럼) 사는 것 자체가 중요하지 그 삶에 무언가 거창한 이유를 붙이고(신이라든가 선이라든가 도덕이라든가 하는 등의 지금 여기일 수 밖에 없는 삶의 구체성을 초월한 앙상한 추상적 이름들) 그 이유들로 합리화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닐까라고 짐작해본다. 그러나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푸코는 뭔가 애매하다. 물론 푸코의 친구로서 푸코라는 인간을 알았던 저자가 푸코를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 아니다. 아마 이책의 저자가 그리는 푸코가 인간 푸코의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그 푸코의 니체적인 삶의 긍정은 니체의 한계를 그대로 따랐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기에 니체처럼 삶의 긍정이 애매한 결과가 나왔던 것이 아닐까? 이책에서 느낀 푸코에선 이 서평의 맨처음에 인용했던 마지막 단계의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다'란 삶의 있는 그대로의 재구성이 느껴지지 않는다. 중관철학의 결론은 삶은 삶이라는 것이다. 단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이해했을 때 즉 공을 깨달았을 때 우리는 자유 즉 깨달음을 얻게 되며 삶을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푸코에게서 느껴지는 것은 그런 삶의 자유가 아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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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전에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 http://blog.yes24.com/document/2316351>를 읽었습니다. 잘 아시는 것처럼 서구사회에서 정신병 환자에 대한 인식과 그 환자들에 대한 국가적 대책이 어떻게 변해왔는지 역사적 흐름을 뒤쫓고 있는 방대한 저서입니다. <광기의 역사>는 세월이 지나 현직장에서 하고 있는 일에 대한 논리적 배경을 설명하는데 크게 도움을 주었으니 책읽기는 언젠가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를 덤으로 해야 하겠습니다.
정신질환과 관련된 업무를 하면서 푸코를 인용하자 남다른 시각을 보이는 분이 계셨습니다. 아마도 푸코가 좌파성향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여기 콜레주 드 프랑스의 로마사학자인 폴 벤느교수의 <푸코, 사유와 인간>을 읽기 전까지 저도 그렇게 알고 있었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푸코의 30년 지기인 폴 벤슨이 쓴 <푸코, 사유와 인간>은 철학적인 주해와 전기적인 일화가 유려한 문체 속에 어우러져 있는 책으로 저자는 자신이 이해한 푸코(의 글)과 자신이 잘 알고 있었던 푸코(의 삶과 말)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냈다고 하겠습니다.
저자는 첫마디 ‘아니다’로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아니다. 푸코는 구조주의 사상가가 아니었다. 아니다. 그는 이른바 ‘68사상’에 속해 있지 않았다. 그는 상대주의자도, 역사주의자도 아니었다. 그가 이데올로기는 어디에나 널려 있다고 간파해냈던 것도 아니다. 이 세기에 매우 드문 일인데, 그는, 스스로 로백한대로, ‘회의주의’ 사상가였다.” (68사상은 프랑스의 우파 철학자 뤽 페리와 알랭 르노가 1985년에 발간한 68사상에서 유래한 용어로 두 사람은 1968년 5월 혁명과 연대기적으로 가깝고 그와 영향을 주고받았다고 여겨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적 사조들-푸코, 부르디외, 데리다, 라캉을 ‘68사상’의 꼬리표 아래 한데 묶었다고 해서 부르게 된 용어라고 합니다.) 따라서 “푸코는 너무 일반적인 모든 진리, 시간을 초월한 우리의 모든 거대한 진리를 의심한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65쪽)”라고 잘라 말하고 있습니다.
회의주의자들은 자연과학의 진리가 영원히 잠정적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우리가 참과 거짓의 대립으로부터 도출한 진리를 새로운 참이라고 믿고자 할 수 있지만, 이는 새로이 등장할 진리에 의하여 폐기될 운명을 배태하고 있을 뿐입니다.
저자는 푸코에 대하여 전투적 행동주의자로서 푸코는 마르크스도 프로이트도 믿지 않았고, 혁명도 마오도 믿지 않았으며, 사적으로는 선량한 진보주의적 정서에 냉소를 보냈다.(187쪽)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란혁명을 완성한 아야툴라 호메이니의 강력한 개성에 매료되어 있었는데, 푸코에게는 새로운 것, 미지의 것에 대한 열린 정신이 있었고, 개인적으로는 모든 저항에 호의적인 편견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저자는 생전의 푸코와의 교류를 통하여 자신이 알고 있는 푸코의 신념과 사상을 다시 정리해서 푸코는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부류가 아니라고 단정짓고 있습니다. 푸코는 혁명도 기성질서도 맹목적으로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파는 그를 싫어했고, 그 반동으로 좌파는 그를 좌파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칼 포퍼와는 다른 대접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열린사회를 추구한 포퍼의 자유주의는 우파도 기피하는 경향을 보일 뿐 아니라 마르크스 비판의 영향으로 좌파진영에서도 기피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는 점에서 말입니다.
푸코는 인간의 본질에 있어서 참인 지식과, 권력에 더하여 인간의 주체에 대하여 고민하였습니다. 인간은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하여 확립해가는 인간의 주체를 신뢰하였습니다. “인간은 역사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구성했다. 즉 그는 계속해서 자신의 주체성을 옮겨놓고, 상이한 주체성들의 무한하고 다원적인 연속 안에서 자신을 구성한다. 이 연속은 결코 끝이 없으며, 우리는 절대로 인간이라는 것을 향해 위치하지 않는다.(70쪽)” 이 주체는 윤리적으로 행동해야만 하는 주체인 것입니다.
푸코의 유고가 출간되고, 푸코 이후의 철학자들에 의한 푸코 철학의 해석등이 이어지면서 푸코가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고 합니다. “신자유주의 경영기술이나 자기계발 담론의 분석, 이슬람에서의 정치적 영성 문제, 사회보장과 위험의 계보학, 유전공학과 생명공학에 대한 정치적 분석, 대안적인 존재윤리와 언론 자유의 문제, 주변화되고 박탈당한 다중들의 새로운 연대와 사회 운동 등이 푸코의 논의로부터 새롭게 정식화되고 탐구”되고 있다고 하니 관심을 두어볼 생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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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천천히 읽어보면 푸코의 절친들이 이해한 푸코의 본모습과 서구 학계에서 수용된 푸코의 대중적인 초상을 면밀하게 비교해 볼 수 있다. 푸코의 30년 지기였던 현대 역사학계의 대가 폴 벤느가 바라보는 푸코의 모습이 간결한 명제로 잘 정리되어 있다.
먼저 다음의 인용구를 보자.
그럼 폴 벤느가 보는 푸코주의는 대체 어떤 모습일까? 다음과 같이 다섯 가지로 정리할 수 있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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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 그의 죽음 이후로 수많은 글들, 연구서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를 학자로서 인정할 수 있지만 과연 철학자로서 역사에 기록될까? 아니면 고고학, 계보학적 탐구 방법을 이은 사회학자? 역사가? 혹은 정치철학 분야에 혁명을 일으킨 누군가? 수많은 평가들이 앞으로도 이어지겠지만 미셸 푸코와 한 세대를 산 폴 벤느는 그의 학문에 대한 글과 순간순간 맞닿게 된 푸코와의 기억을 이어서 책을 펴냈다. 아직 국내에 출판되지 않은 <Dits et ecrits>를 상당수 참고했다는 말에 번역본을 찾아보았지만 아직도 번역이 되지는 않았다. 어쨌든 구조주의자, 68혁명을 참여한 당시의 지식인, 공산당원 등의 표지를 지워버리고 부정하는 폴 벤느는 아마 푸코의 입장에 가장 가까운 생각을 하지 않았나 싶다. 구조주의자의 주장치고는 그는 인간 자유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그 어느 편도 강력하게 지지하지는 않았다. 푸코에 대한 편견들을 없애고 나면 투명하게 다가오는 것은 그의 학문적 여정이 꽤 충실했다는 것이다. 어떤 이들과의 사랑을 통해(기억에 남는 건 음악가와의 사랑) 형식주의를 알게 되었다는 것과 또한 이상적인 학자의 모습만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마치 꼬장꼬장하고 히스테릭한 학자가 푸코의 모습이 아니었나 싶다. 폴 벤느가 푸코랑 연을 쌓게 된 부분도 신기한데, 푸코가 막 그의 학문적 성과를 발표할 때가 아니라 니체에 대해서 그 중요성을 나중에 알게되고, 들뢰즈의 니체에 대해 말하면서 그의 책은 진리에 대한 문제를 말하지 않는다고 한 폴 벤느의 답변을 푸코가 좋아하면서부터다. 또한 폴 벤느의 책에 실린 푸코에 대한 역사학적 탐구 방법에 대한 논문에 대한 푸코의 평가를 듣고나면 푸코를 좋아하는 독자들이라면 이 책을 보게될 것이다. 푸코의 사상을 쉽고 간편하게 알려주는 입문서보다는 그의 생각을 폴 벤느의 언어로 재해석한 책인 듯 하다. 쉽게 읽히는 책은 아니었다. 빌려본 책이라서 꼼꼼하게 적어가면서 보지 않았으며, 아직 푸코의 용어와 개념이 낯설어서 푸코의 이론을 폴 벤느가 얼마나 통찰력 있게(penetration) 해설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다. 마음에 드는 건 푸코에 대한 무조건적 찬양보다는 그가 놓친 부분도 자신의 의견을 담아서 해설한다는 것이다. 믿을 만한 학자가 또 다른 학자에 대해 쓰는 글은 왠지 더 궁금해진다. 푸코의 세계를 좀 더 알고 난 후에 꼭 다시 읽어봐야겠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