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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나의 친구들로부터 넌 대단해, 우리랑 달라, 하는 말을 듣는다. 나는 항상 부족하고 부끄러운 사람이라 생각하는데, 그 순간에는 ‘나는 뭐지?’ ‘나의 어디를 칭찬하는 거지?’ 하며 나를 돌아본다. 그리고 나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누구지? 나는 뭐지? 나는 내 세상 어디에 와 있지?’ 사람 마음이 참 알 수가 없다. 내가 좋을 때는 세상도 다 좋고 예쁘다. 그러다가 뭐 하나 삐뚤어지면 세상 모든 것이 다 못마땅하다. 내 마음 하나를 내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고, 나 하나를 자유자재로 쓸 수 없으면서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우쭐했다가 이내 흔들린다. 그럼에도 오늘만큼은 잘나지 못했지만 노력하는 나를 보여주기로 했다. ‘깨닫고 나서야 남을 제도할 수 있다는 것은 절대 아니다.’는 스님의 말에 힘을 얻어 완벽하진 않지만 노력하는 내 모습을 닮아갈 누군가를 위해.
아침에 눈을 뜨면 핸드폰 메모란에 오늘의 할 일을 적는다. 일어남과 동시에 나는 24시간 안에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지 적는다. 나는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도 나 자신에게 바쁘다. 잠에서 깨어 잠자리에 들 때 까지 쉼 없이 생각하고 움직이고 찾아내는 등 메모에 적힌 대로 나의 하루는 실행된다. 저녁이 되고 잠자리에 누워 메모란을 다시 열고 오늘의 하루를 체크한다. 스마일 이모티콘이 많이 채워진 날은 잠자리가 감사하고 다행이다. 물론 그렇지 못한 날은 하루 밥값도 못한 것처럼 무거운 마음으로 잠자리에 든다. 24시간 안에서 너무 전투적으로까지 살 필요가 없는데, 하루 그냥 보낸다고 내일이 어찌되는 것도 아닌데, 나 혼자 안달하며 아옹다옹 사는 것 같아 스스로가 안쓰럽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살고 있고 그리 살아야 편하다. 대체적으로 그렇게 산다 하지만 그렇다고 일 년을 하루같이 마냥 타이트하게 계획적으로 살아가지는 못한다. 가끔은 스스로 흥청망청 보내는 나날도 적지 않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삶이 꼭 닮은 것은 아니지만 불교적인 삶을 살아가려고 한다. 날마다 좋은날 되소서, 문구처럼 나는 나의 날이 좋은 날이 되길 바라며 살아가고 있다. 그것은 바로 끌려가는 삶이 아니라, 이끄는 삶이다. 내가 하루를 계획하고 실행하며 나의 하루를 만드는 것이다. 그래야 나는 당하고 하루를 부리는 사람이 된다. 내가 남들과 공평하게 가진 것이 시간이라면 이것만큼은 내가 당당하게 부릴 수 싶다.
인간이란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나는 누구이고, 나는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무엇이 행복이고, 나를 위해 어떻게 살 것인가? 이런 질문 속에서 하루가 고단하고 주저앉고 싶을 때도 나는 다시 으싸싸 파이팅, 혼자 내뱉으며 일어난다. 에너지는 얻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다. 나를 채찍질하고 스스로 파이팅 하면서. 이것은 마치 우리는 산에 오를 때 ‘산이 나를 불러서가 아니라, 내 안에서 산을 오르고 싶은 욕구가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나는 해야 하기 때문에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자 하는 의지 때문에 모든 일을 한다.
나는 욕심이 많다. 물건, 돈, 시간, 사람 모든 것을 가지고 또 가지려 한다. 그러나 내가 욕심을 내는 것은 적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많아서다. 그리고 그 때문에 나는 인간적으로 소외감을 갖고 불행을 느낀다. 두 손에 내 것을 가졌으면서도 하나만 더 하고 남의 것에 욕심내며 끝없이 방황하기도 한다. 때문에 나는 ‘파우스트의 비유를 들출 것도 없이, 회색의 이론에 묻혀 생명의 나무가 시들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도 나의 욕심을 잡아주는 것이 있으니 ‘버려라, 비워라, 놓아라.’ 이 한귀에서 시작된 법정 스님의 말로 나는 나를 정리한다. 사람을, 물건을, 마음을. 사람들은 스트레스가 쌓이고 마음이 복잡할 때 쇼핑을 하고, 무엇인가를 산다. 그러나 나는 내가 가진 것 중에서 하나라도 버린다. 버리고 나면 개운하다. 집 안을 청소한 뒤 그 느낌처럼, 그 욕심도 버리고 집착도 버리는 일부 버린다. 동시에 몸을 움직이며 육체적인 노동이 정신적인 조율이라는 사실도 깨닫는다. 기껏해야 내가 가진 몇 개를 버리고 정리하는 일, 그 곳에서 나는 마음을 비운다. 승가에서는 처음 출가한 행자들에게 궂은일을 많이 시킨다고 한다. 그들을 부려먹기 위해서가 아니라 일을 통해 온갖 번뇌를 견디며 정진하라는 뜻에서라고. 어쩌면 나는 버리는 행위-일-을 통해서 몸을 움직여 심란한 생각을 할 겨를이 없게 하는 거 같다. 일을 통해 새로운 이치를 터득할 수 있고, 그 안에서 나는 진정한 나로 다시 시작한다.
내가 주변에서 듣는 말 중에 또 하나는 너는 똑똑해, 다. 그러나 지혜롭지는 라는, 않아,라는 말도 포함하는 것 같다. 책을 읽고 경험이 많고 배우고 익혀서 지식적으로는 그럭저럭 남에게 빠지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지식은 무용지물일 때가 많다. 어쩌면 몰라도 되는 것을 굳이 알아서 스스로를 피곤하게 할 때도 있다. 그리고 지혜롭게 대처하지 못하고 후회하는 일도 있다. ‘지혜는 인격과 직결된 것이므로 거기에는 행동과 책임이 따른다. 우리가 의지해야 할 것은 사변적인 지식이 아니라 끝없는 빛, 즉 지혜라고 불교 경전에서는 누누이 강조하고 있다. 교육이라는 말의 어원을 살펴보면, 처넣는 것이 아니라 끌어내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식은 적당히 알고 그 지식으로 지혜를 이끌어내야 한다. 분명 나에게는 지식보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지혜로운 사람들 속에서 물들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다면 홀로 있는 시간도 용기 있게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고요한 시간이 필요하다. 외부로부터 들리는 모든 소리-소음-로부터 벗어나 나 홀로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혼자 있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즐기는 사람을 보면 외롭겠다, 불쌍하다, 특이하다, 말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간을 즐기는 사람이야말로 진정한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타인으로부터 벗어나 오로지 혼자만의 시간 속에서 나를 알아가는 사람이야말로 멋지지 않나. 그러면서 나는 나만의 색을 찾고 나만의 길을 걷는 것이다. 꿋꿋하게 당당하게 말이다. 우리들의 정원에 똑같은 꽃만 핀다고 가상할 때, 우리들의 눈과 손길은 저절로 멀어지고 말 것이다. 모든 꽃들이 그 꽃답게 피어날 때 그 꽃밭은 비로소 장엄한 교향악의 조화를 이룰 것이다. 사계절을 두고 생명의 기쁨이 넘치게 될 것이다. 내가 나답고 너가 너답다면 우리도 이렇게 살았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나와 부처님의 연으로 마무리해야겠다. 출가란 버리고 떠남이다. 묵은 집, 집착의 집, 갈등의 집에서 떠났다고 해서 출가라고 이름한다. 부처는 아름다운 아내 야쇼다라와 왕권이 보장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조건들이 그의 치수에는 맞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나답게 살기 위해서, 내 식대로 살기 위해서 집을 떠났노라. 나는 가족도 있고 집도 있고 일도 있다. 취미도 있고 세상살이가 꽤 즐겁다. 나는 나의 삶의 상당수 만족한다. 그러나 이렇게 살면서 더욱더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한다. 삶이 항상 즐겁고 신나지만 않음을 알기에, 삶이 죽을 때까지 죽을 일만 일어나지 않음을 알기에, 지금 이 순간에 삶에 만족하고, 다음 벌어질 나의 삶에 순응하기 위해서 버리고 떠나는 연습을 하는 것이다. 마음을, 욕심을 놓아 버리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연습은 끝이 없다. 일상이 반복된 연습이다. 안이해지거나 무력해질 때, 이게 아닌데 싶으면 지녔던 것을 선뜻 버려야 한다. 물건을 정리하고 흩어진 마음을 정돈하는 것이다. 어릴 때 내가 버린 물건을 어머니는 그래도 한 번 더 쓸만하다며 다시 주어오곤 하셨다. 그럴까? 하면서 다시 주어오듯, 버린다고 다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덜어낼 것은 덜고 버린 것은 버린다. 그러기 위해서는 용기 있는 가지치기가 필요하다. 과감히 버리고 떠남으로써 얻는 자유를 느끼는 것이다. 내 인생은 내가 살기 위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