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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 저학년 때로 기억한다. 무슨 영화인가를 보러 아침 일찍 종로에 갔다(확실하진 않지만 코아아트홀이었던 것 같다). 그때는 혼자 조조 영화를 보러 다니는 걸 좋아했다. 원래 평일 조조에 사람이 별로 없긴 하지만 그날은 비까지 와서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상영관 앞에서 기다리려고 터벅터벅 계단을 올라가는데 관객들을 위해 임순례 감독의 <우중산책> 비디오를 나눠주고 있었다. 비오는 그날과 딱 어울리는 영화 제목을 마음에 들어하며 비디오 테잎을 백팩에 넣었다. 그리고 상영관 앞에 도착했는데 유독 눈에 띈 것 하나. 요즘도 그러는지 모르겠는데, 그 당시엔 영화 홍보를 목적으로 영화 포스터로 만든 엽서를 극장마다 비치해뒀었다. 그때도 역시 상영관 앞에 수북히 엽서들이 쌓여 있었는데 그중 내 눈길을 끈 건 바로 <바이 준>이었다. 지금은 각자의 영역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유지태와 김하늘이 신인 때 찍은 첫 영화다. 누군가 내게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은 어떤 작품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조금 고민하다가 <바이 준>같은 작품이라고 느리게 말할 것 같다. 뭐랄까. 쓴 사람과 읽는 사람, 만든 사람과 보는 사람의 온도 차이가 생길 수밖에 없는 작품이라고 할까? 그 차이의 간극만큼 독자의 감상이나 느낌이 달라질 것이다. 그 폭을 좁힐 수 있느냐의 여부에 따라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릴 작품이다. 공감한다면 깊이 몰입하겠고, 그렇지 않다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허세 쩌는’, 심하게 ‘청춘을 앓는’ 한 남자가 조금은 불편할 수 있다. 모든 것이 궁금했지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해할 수 없던 그 무렵, 수취인 불명으로 반송돼온 내 편지 한구석에는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인간은 여름에 제 인생을 즐기고, 가을에 가장 인간다워지며, 겨울엔 인간다움으로 인해 고뇌하다가, 봄에 그 인간됨을 앓는다.’ 지금 읽어도, 훗날 세상이 나를 기념하지 않을까봐 불안해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구차한 변명이 아니라, 그때는 저런 건방진 소리라도 끄적이지 않으면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p.175)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일부 자의식과 관념의 과잉이 눈에 띈다. 그런데 굳이 이걸 비판하고 싶지는 않은 게, 생각해보면 그게 ‘청춘’ 혹은 ‘90년대’ 초반의 특징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는 담배를 피워물로 CD 플레이어를 튼다. 20세기 초의 가장 탁월한 피아니스트이자 낭만파의 마지막 작곡가 세르게이 라흐마니노프다. 훌륭한 음악가는, 그중에서도 특히 마성적인 음악가들에게는, 이처럼 그에 합당하는 이름이 있어야 한다고 나는 늘 생각해왔다. 예를 들어 바그너라든가, 에릭 사티 같은 사람들. 그런 고유명사에서는 어쩐지 아름다운 우수와 선병질적인 고독의 냄새가 풍긴다. (p.187)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일부 ‘라흐마니노프’, ‘바그너’, ‘에릭 사티’, ‘우수’, ‘선병질적인 것’, ‘고독의 냄새’ 같은 표현들도 공감할 수 없다면 유치하게 보일 수밖에 없겠지만 그게 90년대였다. 80년대 선배들처럼 몸바쳐 전념하고 몰입할 정치적 과제도 없었고, 그러면서도 그 끝물을 맛본 세대로서의 어정쩡한 책임감이나 의무에 대한 강박이 몸을 칭칭 감싸고 있었다. 80년대 동구권의 몰락으로 무너진 건 ‘386’만이 아니었다. 90년대는 말 그대로 혼돈의 세계였다. ‘준거’도 ‘규범’도 없이 던져진 ‘애매모호한 자유’를 어떻게 즐길 줄 몰라 곤혹스러웠던 때, ‘90년대 학번’은 그 혼돈의 한복판에 던져졌다. 그러면서도 대개는 산업화의 혜택을 받고 자라 문화적 혜안과 감각을 가지고 있던 세대. ‘고민 좀 한다던’ 20대들이 영화판에 기웃거리거나 대중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그때 한참 90년대 초반 학번들에 의해 대중문화를 분석한 책-예를 들면 서태지 현상-들이 쏟아져 나왔다) 특이할 게 없는게, 그게 바로 80년대 학번과 90년대 학번을 가르는 분기점이 아닐까 싶다. 어지중간하게 끼어서 맘껏 자유를 누리지도 못하고 부담감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었던, 그게 90년대에 20대를 보낸 90년대 초반 학번이다. 나는 그래서 이 모든 작품들을 옹호할 생각은 없지만, 마찬가지로 이 작품들이나 이응준을 비판하고 싶은 생각도 없다. 오히려 지금까지 읽었던 이응준의 장편소설과 소설집을 통틀어 가장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게 바로 이 소설집이었다. 새벽에 쓴 편지는 아침에 읽어 보면 절대 부칠 수 없다. 그러나 오후 세시의 내가 ‘나’인 것처럼 새벽 세시의 ‘나’도 ‘나’이다. 유치한 건 유치한 대로 과잉된 건 과잉된 대로 결핍된 건 결핍된 대로, 못나고 치열했던 20대. 그건 따지고 보면 이응준이란 한 개인의 ‘특수한’ 체험이 아니라, 90년대에 20대를 보냈던 개인들의 ‘보편적’ 경험일지도 모르겠다. 그런 측면에서 이 소설집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존재 이유를 가진다. 가치 있다. 한데 그 당시의 나란 과연 나 아닌 것들엔 전혀 관심 없었으니, 폭음의 어지럽고 메스꺼운 끝자락으로 이어지던 매일매일의 지지리도 못한 자학과, 나병에 걸린 듯 뭉개질 대로 뭉개지고만 일상에 대해 지금도 끔찍해 차마 설명하기가 괴롭다. 그래도 제 젊은 날에 대한 일말의 자존심과 애정 같은 것들은 남이 있었던지, 숨 끊어지기 직전의 환자가 마지막으로 용을 쓰고 잠시 정신이 맑아지는 현상처럼, 어느 날 갑자기, 이러다 영영 인간쓰레기로 전락하고 말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판단 능력조차도 곧 상실하게 되는 건 아닌가, 하는 공포가 일순 엄습해왔다. (p. 239)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중
세계는 허위와 착종으로 바래져버렸다. 아마도 그는 그런 것들에 의해 자연사했을 터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 (p. 296)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중 인용된 부분 중 강조하고 싶었던 두 문장을 볼드 처리했다. 지금은 쓰지도 않는 ‘착종’이란 단어가 심지어 생소해보이기까지 할텐데, 나는 바로 저 문장이 이 소설집에 있는 모든 소설들을 압축한 단 하나의 문장이란 생각이 들었다. 뭐랄까? 떠나 보낸 90대를 애도하며, 어떤 식으로든 90년대를 정리해야 한다면 결국 가능한 방식은 저런 식이 아닐까 하는 생각.
90년대라는 우리의 세계는 허위와 착종으로 바래져버렸다. 아마도 우리는그런 것들에 의해 자연사했을 것이다. 나는 그렇게 믿기로 했다.
이게 바로 90년대다. 그 시기에 20대를 보내야 했던 90년대 초반 학번들이 느낀 90년대는 저랬다. 그때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저런 서술들이 공감을 얻지 못할 수도 있지만, 90년대에 치열하게 20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깊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들이다. 결국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온도 차이는 여기에서 기인할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20대를 살았고, 90년대를 보냈다.” ‘첫사랑’처럼 그때를 아련하게 회상하고 싶은 같은 또래의 독자들에게는 추천하고 싶다. 그러나 <바이 준>이 기대했던 것과 달라 당혹했던 것만큼의 당혹은 감수할 준비를 해야 한다. 그러나 그 서툼, 낯섦, 어쩔 줄 몰라함, 미숙함까지도 ‘20대’였기 때문이 아닐까? 이응준이 보여주는 것은 ‘바로 그’ 우리가 혹독하게 앓았던 90년대이다.
[덧붙임] 내가 읽은 건 2009년에 나온 개정3판인데, 개정3판의 표지는 저렇다. 이브를 연상시키는 여자가 선악과 위에 알몸으로 누워 있고, 나무 가지엔 이미 유혹한 이후인지 이전인지 몰라도 뱀이 몸을 늘어뜨리고 있다. 익숙한 소재지만 독창적인 표지이다. 왜 요즘은 이런 책 표지들이 없을까? 소설을 읽는 독자가 20대의 여성이라는 분석 때문에 마케팅 타겟을 그 연령층으로 잡는 건 익히 알겠는데, 책 내용과는 상관없이 표지들이 점점 팬시해지는 건 유감이다. 책 표지는 단 하나의 이미지로 책을 압축해서 보여주는 '시詩'라고 생각한다. 이제 다시 이런 표지는 볼 수 없는 걸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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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가 선선해져 제법 가을 분위기가 난다고 느끼며 이 책을 읽어나갔다. 여느 때처럼 책과 함께 길을 걸으며 가을에 어울리는 로맨스에 빠져볼까 기대했다. 서정적인 문체로 숱한 사람들의 마음을 휘감았던 이응준 작가의 책이기에, 제목도 표지도 낭만적이기에, 그런 기대를 하는 것은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그러나 책장을 넘기면서 역시 가을은 로맨스보다는 고독, 채울 수 없는 공허함과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상과는 달리 단편집이다. 친구와의 통화에서 이응준의 단편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며 혹시나 했는데 역시.. 하지만 곧 그의 이야기 하나하나에 빠져든다. 극단적인 지점까지 가고야 마는 주인공들.. 그들만큼 가지는 않았지만, 그들과 맞닿아 있는 남은 사람들의 회상.. 하나같이 지적이고 허무감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인간들.. 광기어린 그들의 모습들.. 어딘가 최근에 읽은 책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알았다고 말하지 않고 굳이 느꼈다고 하는 건 유려한 그의 문체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보다... 그 이유를 확실히알게 된 것은 해설에서 '전혜린'이라는 세 글자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얼마 전 전혜린의 글에 흠뻑 젖어들고 반작용으로 형이상학적이고 모더니즘을 추구하는 글이 읽고 싶었다. 하지만, 의도와 달리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다른 책으로 넘어가기 전 복습 한 번 제대로 한 셈이다. 그녀가 살던 때로부터 시간은 흘렀고, 허무감의 형태도 현대적으로 변했지만, 본질은 맞닿아 있었다.
이응준이 '달 뒤편으로 떠나는 자전거 여행'이라는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써 놓았다고 한다. "내 글을 읽기 위해 필요한 사전 지식이나 교양 따위는 애초부터 없다. 그냥 당신이 스스로를 외롭다고 느끼면 그것으로 족하다. 사는 게 무지무지 행복하다고 여기는 당신이 있다면, 제발 덮어두고 돌아가 그 삶을 더 즐기길 바랄 뿐이다. 그리고 사는 게 정녕 슬프고 지루하다 여기는 당신이 어떤 구원 내지는 해답을 바라고 이 소설들을 읽고자 한다면, 난 그에게도 어쨌거나 비슷한 말을 해줄 수밖에 없다. 나는 당신들에게 한 줄 잠언조차 들려줄 수 없을 뿐더러, 그런 꿈의 책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유에서이다. 다만 내가 바라는 것은, 다 읽고 난 내 독자들이 누군가에게 다가가, 지금 외로워 몹시 피곤하지 않느냐고 물어봐줄 수 있었음 하는 것이다."
'Lemon Tree', '이교도의 풍경',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그녀에게 경배하시오',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 일곱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90년대 후반 포스트모더니즘의 물결 속에 인생에 대한 허무감으로 가득찬 사람들의 이야기들을 그리고 있다.
혹자는 소설을 읽는 데 두 가지 이유가 있다고 했던 것 같다. 하나는 진리에 근접해 가려는 노력이고, 다른 하나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한 이해이다. 저자가 말하는 걸 보면 이 책은 후자에 해당하는 듯.. 모르고 읽은 게 죄라면 죄다. 작가의 후기를 책 전면에 붙여놓았다면, 나는 이 책을 읽지 않았을까?
그가 엉뚱한 이야기라며 던진 한 구절, 내 맘에 쏙 드는 내용을 발견해서 적어본다. 술집에서 원고의 절반 이상을 작성하며, 그도 더 이상은.. 이런 글로부터 탈피하고 싶어졌는지 궁금하다.
"엉뚱한 얘긴지 모르겠지만, 기실 우리네 삶은 수채화가 아닌 유화가 아닐까. 성숙한 인간이라면, 우선은 세상의 바탕을 마땅히 고통스럽고, 슬프고, 쓸쓸하고, 외로운, 곧 어둠의 색으로 인정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대신 살아가는 동안 내내 점차로 희망이나 보람 같은 것들을 대변할 만한 밝은 색깔들을 스스로 찾아내어, 그 비관적인 인식 위에 덧칠하며 제 평생의 아름다운 그림 한 장을 완성시킬 것! 그리하여 마르는 시간이 오래 걸리기에, 설혹 덜 되었다 하더라도 늘 다 그린 그림처럼 세워두어야만 하는 유화의 작법은, 인생이 지닌 속성과 너무나도 흡사해 자못 섬찟하기까지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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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왜 여기와서 죽었니?
'백사장에 고래가 죽어있었다.'로 시작하는 시를 본적이 있었다. 아마 교보문고 어느 구석에서 신춘 문예 시집을 뒤적이고 있을 때였던 것 같다. '스트랜딩 증후군'이라고 한다고 그 시는 친절하게도 작은 별을 붙여주었지만, 그것의 이름보다는 상상되는 그 풍경에 나는 압도당했다. 백사장 위에 배를 드러내고 죽어있는 커다랗고 매끈한 몸뚱이의 고래들, 고래들이 나란히 누워 있는 그 기이한 풍경. 내가 만약 그것을 직접 발견했다면 나는 그 커다랗고 무시무시한 죽음의 풍경에 압도 되었을 것이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스트랜딩 증후군의 원인은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은 더 '무시무시'한 광경이 되었다. 원인을 파악할 수 없는 낯선 풍경. 어쩌면 그 고래들의 곁에 다가가 그 매끄러운 꼬리에 귀를 대고 물어보고 싶어질지도 모르겠다. 얘, 고래야. 왜 여기까지 거슬러와서 죽었니?
<이교도의 풍경>은 주인공이 육개월전 자살한 친구인 문화비평가 구문모의 유언에 따라 자신의 유품을 '주선욱'이라는 남자에게 전해 주기 위해 옥해로 가게 되는 이야기이다. 구문모는 자신의 둘도 없는 친구인 '나'에게, 너만큼은 나를 온전하게 이해해주면 좋겠다며 자신의 어떤 공백에 대해 채우기 위해 옥해로 가달라고 말한다. 그 한조각에 대해 구문모는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너는 내 어떤 부분-그냥 한 조각이 아니라, 그 한 조각의 부재로 인해 나머지 모두가 소용없게 될지도 모르는-에 대해 명백히 모르고 있어. 나는 나의 공백을, 나의 가장 따듯한 벗인 너에게만은 채워주고 싶어. 하여 완성된 그림으로, 온전히 '그것'까지를 포함해서 날 이해하고 회상해주기를 바라는 거야.(34p)
그러나 이런 이교도의 조각 때문에,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낯선 세계를 접하게 된다. 종교개혁자이자 개신교 출발점이 된 루터가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으리라. 루터는 자신속에서 일어나는 의심을 잠재우기 위해 수 많은 고행을 했으나 답을 얻지 못했고, 결국 95개조 반박문을 써 붙임으로 인해 가톨릭의 잘못된 부분을 수정하길 요청했다. 그로 인해 카톨릭에서는 불합리한 전승들이 수정되었고, 개신교라는 새로운 방향이 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퀴어에 대한 논의에 있어서 퀴어인 당사자가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아주 적다. 당사자가 퀴어임을 밝히기 어렵기 때문이기도하고, 당사자의 퀴어성이 마케팅이 되어 단순히 한순간의 '아, 그랬구나'로 끝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사랑의 한 당사자로서 위치되기 보다는 '퀴어' 자체가 어떤 코드로 소비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끊임없이 이야기 하려는 시도들이 있다. 한국 문단의 거의 유일한 커밍아웃 당사자 작가인 김비 씨는 "아무도 관심을 가져주지 않은 우리 같은 것들의 이 작은 이야기들은 세상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무슨짓이든 해야겠지. (..) 가짜가 아닌 진짜를 보게 할 수있다면(2)" 하고 말한다. 퀴어퍼레이드는 매해 열리고, 규모가 커져간다. 그래, 이를테면 육지의 단단한 측면으로 자꾸만 몸을 가져다 부딪치는 고래들이 있는 것이다. 자, 그렇다면 이제 우리, 집중 좀 하자. 그런 고래들이 '있다'는 사실에 말이다. 너는 왜 존재하니? 라는 물음보다 먼저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들도 말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굳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해? 라는 물음뒤에, 굳이 그런 이야기를 왜 해? (나 불편하게) 같은 괄호가 붙어있다는 사실을 스스로 반성해보는 건 어떨지? 그들에게 자꾸 낭설을 가져다 붙이는 대신에 그들의 존재를 그냥 인정하고 그 조각이 어떻게 새로운 세상을 비출 수 있는지를 한번 보는 건 또 어떨지. 어쩌면 그 속에서 사막에 길을 내고 모래를 헤험치는 고래의 고독을 이해할 수 있지는 않을지?
"세상의 모든 사랑엔, 틀림없는 당사자들이 있다. 그것이 고래와 낙타의 사랑일지라도 그러하다." (58p)
작성: 악어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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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와 너. 나. 너. 우리. 그. 그들... 이런 것은 어떠 의미가 있을까. 우리가 쉽게 사용하는 우리라는 단어는 어떤 의미를 가진 단어일까. 사전적으로 나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생생한 삶 속에서 우리라는 말이 가진 진짜 의미는 무엇일까. 우리라는 우리(카테고리)로 함께 가두어 두는 것이 정말 내 따뜻한 두팔로 보다듬을 수 있는 그 진정한 우리일까. 아니면 우리라고 부르는 그 말들은 술자리에서 웃는 허허로운 웃음처럼 가식에 가득찬, 아니 우리가 그것을 가식이라고 부르지 않고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기 위해 편리하게 사용하는 단어일 뿐일까. 이 작가의 책을 읽으면서 자꾸만 가슴에 솟아오르는 질문이다.
사람의 삶을 보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다. 얼마나 경제적인 성취를 했는가. 얼나마 힘들지 않은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반대로 얼마나 모진 풍상을 겪으며 하루 하루를 힘들게 연명해 나가는가. 혹은 힘든 삶을 살아가는 중에도 그 사람의 가슴속에 얼마나 따뜻한 희망이 부풀어가고 있는가. 혹은 그 따뜻한 희망이 그를 얼마나 만족시키는지, 혹은 그 희망이 그의 가슴에 얼마나 잔인한 배신의 단검을 꼽아 넣는 것인지.... 사실 사람의 삶의 진정한 내면의 풍경은 이런 것이 아닐까. 그리고 이응준이라는 작가의 작품은 바로 이런 면을 내밀하게 들여다보는 글들이다.
오늘날이라서, 현대라서, 우리의 삶이 형해화 했기에, 그래서 이 책에 나오는 것처럼 우리들의 삶이 아픈 것은 아닐것이다. 우리를 바라보는 관점이 그만큼 내밀해졌고, 세상이라는 바람부는 벌판을 걸어가는 맨몸의 사람들이 겪는 풍상이 우리들에게, 나에게, 너에게, 우리가 아닌 나 그리고 너에게, 그리과 나와 너의 관계에 미치는 그 아픔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 치열하게 성찰하고, 그 결과를 치열하게 글로써 표현한 쉽지 않은 작업의 결과들을 담은 책이다.
이 책에 실린 일곱편의 작품들. 처음부터.... 참 아프고 시리다. 시리다..... 시리다.... 그의 작품에 내 마음이 공감한다는 것은 나라는 존재가 살아가는 방식에도 이 작품에 어울리는 시림이 존재하고 , 그것이 작가의 시림에 공감하고 공명하며 같이 떨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작가가 즐겨 사용하는 어두운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같이 아름답고, 또 그 별들처럼 멀리 떨어져 외롭고 고독하고, 그러면서 그 별들이 어두운 장막으로 덮어 주는 포근함같은 아픔과 시림과 따뜻함의 공존. 그 아픔과 따뜻함의 미학을 잘 느낄수 있는 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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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할까? 이응준의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을 다 읽고 이런 궁금증이 생겼다. 작가에게 있어 모든 일상은 소설로 연결되어 있는 걸까? 남과 북의 가상 통일 후 한국을 그린 <국가의 사생활>을 통해 처음 만난 이응준은 회색와 검정계통의 색이었다면, <내 여자친구의 장례식>은 블루, 코발트 블루였다.
7편의 단편은 모두 외로운 자아를 그렸다. 혼자가 아님에도 덩그러니 혼자인 느낌, 끊임없이 누군가를 그리워하는 군상, 온전한 나를 알고자 하는 고독이라고 할까. 언젠가 나 역시 느꼈던 쓸쓸함과 외로움, 그것들과 오랜만에 재회를 하는 기분이었다. 이응준의 소설은 과거에서 온 긴 장문의 편지처럼 지난 날의 순간 순간을 떠올린다.
단편 <이교도의 풍경>은 무척 인상적이었다. 서로에 대해 다 안다고 믿었던 친구의 자살과 뒤이어 화자인 나에게 날아온 죽은 자의 편지. 친구가 남긴 물건을 전하러 가는 낯선 여행길. 그 길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될 꺼라는 친구의 글은 화자에게도 독자에게도 호기심을 불러오며, 그 여행길에 동참케 한다. 과연, 그곳엔 누가 있으며, 어떤 일을 만나게 될까. 그리하여, 마주하게 된 사실은 모두를 놀라게 한다.
아마도 고래는 낙타를 사랑하고 있었던 걸 거야. 사막에 사는 낙타말이야. 왜, 알다시피 고래도 포유류잖아. 유전자적으로 끝까지 올라가보면 낙타에 걸릴지도 모르는 일이지. 아무튼, 바다에 사는 온갖 고래 중에 몇 마리가 낙타를 그리워한 거라구. 그래서 백사장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거야. 물 한 방울 없는, 먼지투성이의 사막을 향해 더이상은 다가가지 못한 채. 사람들은 비웃고 조롱하겠지. 불가능한 사랑이라고 치부하면서. 기껏 인심을 쓰더라도, 안타까워하는 정도일 뿐이야. 고래가 낙타를 그토록 사랑하는지 모르고, 까끌한 모래알을 씹어 삼키며 기다리고 있는 낙타의 어두운 고독은 상상도 못하면서. p 52
고래의 절박함과 낙타의 어두운 고독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타인의 내면을 꿰뚫어보고 심연을 잴 수 있는, 이응준은 그것을 알았던 걸까?
<이미 어둠의 계보를 알고 있었다>의 나 역시 불안하다. 친구 준기와 그의 여자친구와 나는 언제나 함께였다. 셋은 둘보다 때로 안정적이다. 둘에서 셋은 자연스럽게 동화되지만, 셋에서 둘은 어딘가 불안하다. 갑작스런 준기의 죽음은 수영과 나는 더이상 안정적이지 못하다. 어느 날 갑자기 존재는 부재가 될 수 있다는 삶의 허무함. 그것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지만, 쉽게 인정할 수 없다. 수영은 미국으로 떠나고 나는 대학원에 들어간다. 그리고 다시 시작되는 새로운 관계. 대학원 동기 미오. 역동적인 미오와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준기의 죽음에서 조금씩 벗어나는 듯 하다. 어디서든 만날 수 있는 게 죽음이며, 그것이 삶이라는 걸 확인한다.
한 때 연인이었으나 타인으로 다시 만나 아련한 추억을 되돌아보는 <Lemon Tree>, 서로의 외로움을 알아보지만 선뜻 다가서지 못하는 사람들의 슬픈 내면을 그린 <지평선에서 헤어지다>, 타인에게 가슴 한 켠을 내어줄 여유가 없는 <내 가슴으로 혜성이 날아들던 날 밤의 이야기>. 치열하게 고독했을 시간들, 나를 찾아 방황하던 청춘들, 상념의 시간을 지나온 그들, 지금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엉뚱하게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10년 전과 지금의 나는 어떻게 달라졌나. 생각해보면 삶은 여전하게 불안하고, 여전하게 외롭다. 단지, 외로움을 드러내지 않을 뿐,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애쓰는 게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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