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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지나가는걸 목격하다. 마치 꿈처럼...
"하루가 지나가는걸 목격하다. 마치 꿈처럼..." 내용보기
오늘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간에... '소설책이나 한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출발. 높은 언덕길을 기어 올라 산등성이 둔덕에 위치한 도서관 계단을 올라 현관을 지나고 도서관 3층 열람실 창가 옆 책상 앞에 짐을 풀고.. 한숨 한번 쉬고 책장을 편 다음.. 3시간정도.. 공부했을까.. 그리고 나서..잠시 멍해진다 불쑥 찾아오
"하루가 지나가는걸 목격하다. 마치 꿈처럼..." 내용보기
오늘은 도서관에서 공부하던 중간에... '소설책이나 한권 읽어볼까' 하는 생각이 아무렇지도 않게 들었다. 아침 일찍 도서관으로 출발. 높은 언덕길을 기어 올라 산등성이 둔덕에 위치한 도서관 계단을 올라 현관을 지나고 도서관 3층 열람실 창가 옆 책상 앞에 짐을 풀고.. 한숨 한번 쉬고 책장을 편 다음.. 3시간정도.. 공부했을까.. 그리고 나서..잠시 멍해진다 불쑥 찾아오는 몽상들... 머리는 텅 비어 버리고 멍하니 창밖만 바라 보았나... 날이 완전히 저물 때까지 나는 의자에 망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앉아 있다. 창밖을 통해 보이는 산..그리고 나무들... 구름들.. 햇빛을 받아 연초록을 머금으로 숨쉬던 나무들은 점점 숨이 잦아드는 듯 하더니 하나의 평면 안에 조용히 갈무리 되었다. 가지와 잎은 흔들림도 이제 거의 보이지 않았다. 숲은 죽음을 기다리는 지혜로운 노인처럼 짙어지는 어둠에 편안히 몸을 맡기고 있었다. 어둠은 서서히 두터워졌다. 그렇게 소리없이 날이 저물고... 그렇게 창밖으로 어스름이 사물의 경계를 지워 나가는 걸.... 나는 의자에 몸을 고정 시킨 채 묵묵히 한참을 지켜보았다. 세상의 체우고 있던 여백이 지워져 나가는 광경은 참혹하리 만큼 적막했지만.. 어느 순간 내가 어둠의 일부가 되어 세상의 여백과 함께 그렇게 침잠하고 있다는 자각은 의외로 마음을 편안하게 만들었다. 그렇게 날이 저물자 .... 더 이상 바깥 세상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한 몸이 된 암흑과 정적, 모든 것이 사라졌고 시간이 지나는것도 알 수 없었다. 소실점이라고나 할까. 장소와 시간이 모두 사라져버린 어떤 절대 속에 나 혼자 남아 있었다. 오늘 하루가 그렇게 지나가는 걸 두 눈으로 바라보면서.. 아무 의미라곤 발견할 수 없는 그저 그런..지긋 지긋한 하루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돌아와 뜨거운 물로 몸을 지지고 나니까 한결 기분은 나아졌다. 오늘 하루를 되새겨 보고 있으려니 가슴속에서 검은 숯덩어리들이 버석거리는 것 같다. 메마른 버석거림과 탁한 먼지냄새... 그것들에 불씨가 옮겨 붙어 틱틱탁탁 소리를 내며 벌겋게 달아오르는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태우고도 남을 불이 일어나고...... 그 불이 꺼진 자리엔 숯덩어리와 검은 재와 먼지만... 그 흔적은 또다시 불씨가 되어 다른 마음을 불살라 먹고... 탁한 먼지와 뜨거운 불... 그리고 타고 남은 재.... 오늘 같은 하루가 계속 된다면... 난감 할 것 같다. 누가 보면 모든 것 을 끝장내려고 사는것 처럼 보일것 같다. 가벼운 슬럼프려니 생각하련다. 자고 나면 또 다시 일상일 테니까.. 잠을 청하련다. 피로회복제 한 알... 스스로에게 주는 작은 위로 오늘 하루는..... 꿈이였을까?
YES마니아 : 로얄 s****7 2005.03.17. 신고 공감 2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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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헷갈림
"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헷갈림" 내용보기
이 책은 1999년에 나온 책이다. 절판되었다가 다시 개정판으로 나온 책이다. 개정판이라고해서 책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니, 1999년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그가 꿈과 현실사이에서의 헷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읽는 독자에게 까지 헷갈림을 선사하고 있다. 은희경씨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꿈과 현실 사이에서의 헷갈림" 내용보기
이 책은 1999년에 나온 책이다. 절판되었다가 다시 개정판으로 나온 책이다. 개정판이라고해서 책의 내용이 바뀐 것은 아니다. 그러니, 1999년 소설로 봐도 무방하다. 이 소설의 주인공을 보고 있으면 그가 꿈과 현실사이에서의 헷갈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그것이 지나쳐 읽는 독자에게 까지 헷갈림을 선사하고 있다. 은희경씨의 작품을 많이 읽은 편이다. 재미있게 읽었다. 또한 작가는 작품을 통해 무엇인가 던지는 메세지가 분명히 있는 작가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책은 다른 작품에 비해서 은희경씨 특유의 맛이 덜한 작품이다.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서 어느 작가를 좋아해서 그 작가의 작품들을 골라서 읽는다면 당연히 그 작가의 특유의 맛이 나야되는 것이다. 그 작가만의 독특한 맛을 얻기위해 골라서 읽는 것이다. 그러나, 그 맛이 나지 않는다면 재미가 있고 없고를 떠나 독자는 그 작품의 선택에 대한 후회를 할 수 밖에 없다. 이 책에서는 은희경씨 특유의 맛이 덜하다. 심하게 말하면 거의 없다고 봐야한다. 다른 소설들에 비해서 그녀만의 독특함이 없다. 그래서인지 무미건조하였다. '은희경'이라는 브랜드네임(?)에 도취하여 읽는것만으로도 좀 따분하다.
b*******r 2004.02.18. 신고 공감 1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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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과 현실, 그 경계의 외줄타기
"꿈과 현실, 그 경계의 외줄타기" 내용보기
장자가 그랬지.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가? 영속하지 않는 것을 두고보면 삶이나 꿈이나 똑같은데 꿈은 언젠가부터 하찮게 여겨져 왔다. 왜 그랬을까? 어른답지 못하며 현실과의 감별이 번거롭고 귀찮아서가 아닐까? 그러나 꿈을 꿀 수 있으므로 난 행복에 접근할 수 있다. 건조한 삶에 꿈은 아름다운 겉칠을 한다. 그 포근한 꿈에 둘러싸여 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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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가 그랬지. 내가 나비의 꿈을 꾸는가? 나비가 나의 꿈을 꾸는가? 영속하지 않는 것을 두고보면 삶이나 꿈이나 똑같은데 꿈은 언젠가부터 하찮게 여겨져 왔다. 왜 그랬을까? 어른답지 못하며 현실과의 감별이 번거롭고 귀찮아서가 아닐까? 그러나 꿈을 꿀 수 있으므로 난 행복에 접근할 수 있다. 건조한 삶에 꿈은 아름다운 겉칠을 한다. 그 포근한 꿈에 둘러싸여 있을 때 누구나 요람 속 갓난 아이가 된다. 젊은 날 잃어버린 꿈을 되찾을 수 있다면, 작가도 삼십 대가 저물어 갈 무렵 지나간 꿈이 그리웠나 보다. 우리 세대의 꿈 속엔 스모키의 투박한 록큰 롤이 있었고 비틀즈의 회색 빛 관조의 낭만주의가 깔려졌으며 ''삶이 트레이지디''라는 비지스의 비명이 떠돈다. 개중 은희경은 비틀즈가 무척이나 좋았었나 보다. 이번엔 비틀즈의 노랫말에 맞추어 몽환적인 소설을 써냈다. 주인공은 국가고시를 앞둔 본 4 남학생 둘, 그리고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오락가락 그 모습을 감추는 여인 하나, 그들은 안개 낀 시골 고시원에서, 서울의 병원에서, 프라하의 옛성 가에서 꿈처럼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세월은 비틀즈의 음악에 실려 흘러간다. 비록 그들처럼 꿈의 흐름에 침몰하지 않아 사십대 중반까지 살아남은 독자로서는 안쓰러운 쓸쓸한 미소로 그들의 꿈을 떠나 보낼 수밖에 없다. 어떠한 논리적 연결이나 주장하는 바가 결핍된 이 소설은 그저 읽는 것만으로 진한 에스프리를 느끼게 한다. 마치 마리화나를 한 대 태운 후 풀어진 눈으로 세상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중독에 천천히 빠져들면서. 읽는 것보단 보고 듣고 감상하며 음미하는 소설, 전체가 시 한 소절로 응축될 수 있을 것 같은 소설, 아니면 비틀즈 노래 한 곡, 은희경, 쉽게 덤벼들지 않고 하나하나 문학적 실험을 지속하는 작가, 분명 아마추어는 아니다. 그녀가 지향하는 소설은 무엇일까? 한번에 터뜨리기 보다는 차곡차곡 쌓아가는 작가, 그녀는 솔직하다. 마구 자기 기분에 흥분하다가 그 다음 날 "내가 뭔말했지?"하며 회오의 깨름직한 표정을 짓는 것을 무척 싫어하는 듯하다. 캔맥주를 따서 든 다음 비틀즈의 노래를 틀어놓은 채 읽으면 이 소설보다 더 좋은 안주, 아니 삶의 위안은 없을 것 같다. 굳이 술을 못 드신다면 에스프레소 커피에 잘 구은 쿠키를 드시며 읽으셔도 좋다. 작가 서문에도 겨울 날 나무 밑에 고인 얼음 웅덩이를 발로 K와 같이 깨다가 "처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둘이 동시에 하는 것을 보며 웃었다는 걸 보니 내숭스러운 독자에 대한 초댓 말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초대에 응하실 분이 읽어보시면 후회 안하실 듯,

[인상깊은구절]
오블라다, 오블라다.
u****s 2006.08.29.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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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복해서 같은 꿈을 꿀까?
"왜 반복해서 같은 꿈을 꿀까?" 내용보기
왜 반복해서 같은 꿈을 꿀까?   꿈을 잘 꾸는 것도 유전인 듯 하다. 친정엄마가 주무실 때 보면 얼굴표정도 변하고 어떤 때는 신음소리까지 내며 몹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잠깐 눈을 떴다가 잠속으로 빠져든 엄마는 또 꿈을 꾸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꿈속에서조차 고단한 삶을 살고 있으셨을까?   이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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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반복해서 같은 꿈을 꿀까?

 

꿈을 잘 꾸는 것도 유전인 듯 하다. 친정엄마가 주무실 때 보면 얼굴표정도 변하고 어떤 때는 신음소리까지 내며 몹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잠깐 눈을 떴다가 잠속으로 빠져든 엄마는 또 꿈을 꾸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꿈속에서조차 고단한 삶을 살고 있으셨을까?

 

이런 엄마를 닮아 나도 꿈을 많이 꾼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아니지만 이 빠지는 꿈을 꾸고 났을 때는 얼마나 기분이 언짢은지 모른다. 윗니 아랫니 할 것 없이 후두둑후두둑 다 빠져버리고 나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지 꾸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러다가 깨고나서 멀쩡한 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시곤 했다. 꿈속에서 울고 있을 땐 실제로도 흐느끼다가 깨어서 눈가는 눈물범벅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뱀꿈을 꾸었을 때는 몸서리 쳐질 정도로 싫지만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꾸었던 꿈이다. 나는 잠시만 졸아도 꿈을 꾸는 꿈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다. 꿈 때문에 잠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어떤 특별한 꿈들, 그러니까 돼지꿈이나 똥꿈이나 불꿈을 꾸면 사람들이 복권을 사 듯 나도 꿈에 대한 의미를 많이 찾으려고 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심리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는 있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것 가운데 무의식의 표출인 경우가 그러하다. 성인이 되어서 꾸는 꿈 가운데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대신 이루어주어서 나의 욕구를 풀어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꿈은 욕구해결의 열쇠가 되어주기도 하고 대리만족을 주는 좋은 점도 있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 쪽에 해당되는 일이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으로서 할 이야기가 참 많다. 하나만 예를 든다면 초등학교 때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셨고 나도 좋아했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몹시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때는 작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여서 어디로 이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때였다. 여러모로 수소문해서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래서 선생님과 소식이 닿아 직접 통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편지도 썼다. 아이를 낳으면 뵈러 가겠다는 말을 썼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나니 연년생을 둔 상태여서 찾아뵙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면 꿈을 꿨다. 선생님을 만나서 왜 뵈러 못 가는지, 얼마나 선생님을 보고 싶었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실제로 현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런 꿈을 한 동안 반복해서 꾸었다. 그러고나니 나는 선생님을 직접 뵌 것 같았고 찾아뵈고 싶었던 욕구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읽은 은희경의 작품 <그것은 꿈이었을까>도 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은희경의 유일한 연애소설이라 한다. 1998년 <꿈속의 나오미>라는 제목으로 PC통신에 연재했던 소설로 비틀스의 앨범 <러버 소울>에 담긴 열네 곡을 그대로 소재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 가사와 소설 속의 이야기는 별로 연관이 없다. 그 노래에 맞춰서 쓴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들으며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은희경 자신도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일까? '작가의 말'에서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는 일, 그 역시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꿈속에 가는 장소들이 몇 군데 있다."라고 쓴 것을 보니 작가도 어지간히 꿈을 많이 꾸는 모양이다. 또 은희경은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살고 있고 꿈에서도 살아간다. 꿈 속의 나에게는 꿈이 즉 현실이므로 꿈속의 꿈이 또 존재하고 말이다. 삶은 그렇게 겹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7쪽)."라고 말한다.

 

꿈으로는 아주 유명한 장자의 '호접몽'에서도 꽃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나온다. 보통은 개꿈이라고 하지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 표출되거나 자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꿈도 또 다른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정신과에서는 꿈을 토대로 치료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꿈도 현실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의대생 준과 그의 친구 진은 하품하는 쌍둥이라고 불리울 만큼 아주 친하다. 그들은 시험 준비를 위해 고시원 레인캐슬로 떠난다. 언젠가부터 준은 같은 여자에 대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실제로도 그녀를 만난다. 고시원, 콘도미니엄, 병원, 다시 꿈 속.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준과 그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준이 그녀에게서 도망친 후에도 여전히 그녀와 그녀의 분신들은 어디서나 나타난다. 그래서 소설속의 이야기는 이상야릇하게 느껴진다. 그 때의 그녀가 그녀인가, 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이름도 비슷하다.


 주인공 준은 상상을 아주 많이 한다. "쓸데없는 상상이 왜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머릿속 어느 공간에 종말을 찍어두었던 필름이 저장돼 있기라도 한 걸까(19쪽)."라고 할 정도이다. 모험과 용기도 없고 게을러서 무언가를 바꾸기보다는 적응하는 편이 훨씬 성격에 맞는다는 준은 레인캐슬로 여행을 떠날 때 '실레 화집'과 카프카의 '성'을 가지고 간다. 

 

화집의 해설에 따르면 실레는 한 개의 물건에 집착했다. 그 물건이란 그가 죽던 스물여덟 살까지 평생을 지니고 있던 거울이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는 많이 그렸다. 뺨을 잡아당기는 자화상, 길쭉한 배를 드러낸 자화상, 가슴이 깡마르고 붉은 손을 얹고 있는 자화상,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붉은 셔츠의 자화상, 수음하는 자화상, 윗니 한 개를 드러내고 있는 자화상, 죄수 자화상, 성 새비스탄이 되어 온 몸에 화살을 맞는 자화상.(26쪽)

 

그 중에서 주인공 준은 '이중 자화상 두 점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하나는 '예언자'와 '나의 영혼'이다.

하나는 두 남자가 반쪽짜리 몸으로 나뉘어 담긴 그림이다. 알몸의 남자는 팔이 몽뚝하게 잘려 있고 음부도 검은 골처럼 도려져 있다. 또 하나의 남자는 길고 검은 외투로 감싸여 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는 두 눈에 눈동자가 없다. 알몸인 남자의 눈도 한 눈은 감기고 한 눈은 반만 뜨고 있다. 그들의 눈은 단지 거울 속의 자신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까지 포함에서 바라보는 겹의 눈이다. 제목은 '예언자'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영혼'이다. 기형적으로 커다랗고 뼈만 남은 손을 쳐들어보이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 그의 등 뒤에는 마치 남자의 유령처럼 희뿌연 모습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입과 두 눈 모두가 단지 공허한 구멍일 뿐인 두 개의 자화상. 나와 나의 영혼.(27쪽)

 

실레가 하나의 물건에 집착한 것처럼 같은 여자에 대한 꿈을 꾸는 준. 준의 상상이나 꿈은 실레의 그림만큼이나 독특하다. 또한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성'을 즐겨읽는 그의 모습에서 고독과 불안을 읽어낼 수 있다. 은희경도 "나는 이 소설을 고독에 관한 이야기로 쓰기 시작했다. 고독한 사람의 뒤를 쫒아가보니 그의 발길이 사랑으로 향했다. 그래서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실과 꿈사이를 오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이란 것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그래서인지 이 리뷰를 쓰는 내 마음도 갈팡질팡인 것 같다. 깔끔하지 못하다. 책을 읽고 났을 때 그러한 느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꿈이 불안하다는 것은 심리가 불안하다는 이야기이다. 불안한 주인공과 함께 한 몇 시간 동안 나도 불안스럽게 이 책을 읽었다.  불안한 준이 친구 진과 취해서 불렀던 노래가사가 그들에게 힘을 주었을까?

 

나날의 불안이 무엇이든지 괜찮아 괜찮아

자신의 잘못인지 아닌지 그런 건 상관없어.

시계를 보는 건 시간의 낭비

 

준의 프라하 여행 직후 진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준은 진의 약혼녀와 결혼하게 된다. 준은 꿈 속의 그녀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녀가 다시 등장하면서 진이 그러했듯이 준도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데….

 

그것은 꿈이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도 꿈일지도 몰라!

YES마니아 : 플래티넘 i****l 2012.05.10. 신고 공감 0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비틀즈, 존 레넌, 캔맥주, 데자뷰.
"비틀즈, 존 레넌, 캔맥주, 데자뷰." 내용보기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러버소울」을 틀어놓고 캔맥주를 마신 뒤 취해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근데 여기가 어디지, 하고 허망히 중얼거리게 만드는 느낌의 책은 없을까.” 삶의 예측불가능성, 상황의 양가성들이 인생을 헛갈리게 만들고, ‘자기논리’보다는 나름의 ‘개똥철학’만을 주절거리게 만든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 어쩌다보니 그렇게
"비틀즈, 존 레넌, 캔맥주, 데자뷰." 내용보기
작가의 말을 들어보자. “「러버소울」을 틀어놓고 캔맥주를 마신 뒤 취해 잠이 들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근데 여기가 어디지, 하고 허망히 중얼거리게 만드는 느낌의 책은 없을까.” 삶의 예측불가능성, 상황의 양가성들이 인생을 헛갈리게 만들고, ‘자기논리’보다는 나름의 ‘개똥철학’만을 주절거리게 만든다고 느껴본 적이 있을 것이다. 이해하지 못할 일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되어버린’ 일들, 그런 어설픈 세상살이들이 모여모여 삶의 중대한 흐름을 결정짓고 있다는 그런 느낌, 당신도 분명히 하지만 아련하게 느껴본 일이 있을 터, 데자뷰처럼 말이다. 그런 흔들림의 세계, 안개낀 세상살이를 살아내고 견뎌내는 방식은 어쩌면 ‘매진’이 아니라 ‘이탈’일지도. 꿈의 세계, 상상의 삶-. 하여 그런 것들은 ‘개꿈’이 아니라 또하나의 나, 두겹의 나로 인정해주어야 할듯하다. 어쩌면 나또한 비오는 날, 맥주한잔의 적당한 취기 중에 이 책을 읽어내려서인지 그런 작가의 목소리가 마음에 들어버렸다. 은희경의 소설을 읽는 맛은 무엇보다도 시원시원한 신랄함, 세상만사 다 이해하고 달관한 듯한 앙큼하고 도도한 씨니컬함에 있다. 개인적으로는 그녀의 작품 중, 단편집 「타인에게 말걸기」와 장편 「새의 선물」「마지막 춤은 나와 함께」가 은희경의 매력을 듬뿍 담아낸 수작이라고 생각하지만, 비틀즈와 존 레넌의 노래들을 모티브삼아 ‘스토리’보다는 ‘이미지’를 추구한 이 작품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다. 통렬하게 세상의 고정관념들을 비꼬아대는 신랄한 맛은 아무래도 덜하지만, 대신 단절된 고독함을 추적하면서 적당한 씨니컬함을 곁들이는, 사람살이의 불확실성에 대해 생각하고 안아내는 품이 보다 넓어졌달까. 꿈 얘기를 하면서 그런 자화상 돌아보기의 시도는, 그러나 아직 조금은 어설픔이 엿보이는 것이 사실이다. ‘나’와, 내가 쫓는 그녀와, ‘진’은 사실 하나다. “하품하는 쌍둥이”, “실레의 자화상”으로 암시되고 있는데, 이렇듯 자아는 분열되고, 서로를 쫓으며, 다시 뒤섞인다. ‘레인캐슬(성)’이라는 은유에서 드러나는 뿌연, 그리고 고요한, 몽환적 분위기, 그곳에서 나는 ‘또다른 나’인 그녀를 만나고 꿈을 꾸며, 결국엔 다시 되돌아온다. ‘내’가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 그것은 그녀가 실레의 자화상처럼 나의 다른 모습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하여, 나의 또다른 분신 ‘진’이 그녀를 잊으라고 충고하는, 이 야릇한 이중성(야누스)! 그 중에 흘러나오는, 비틀즈 노래의 개똥철학. “오블라디 오블라다, 인생은 그런 것”. 마지막으로 프라하 여행에서 만나는 미나/미아와, 그 도중 일어나는 ‘진’의 자살. 자 그러면, 책의 첫부분에서 언급되는 실레의 자화상과 카프카의 「성」이 무엇을 암시하는지 명확해진다. 괴롭지만, 떼어놓을 수 없는 애증의 본질인 이중자화상, 꿈 속의 도플갱어. 카프카적 ‘성’에서 만나는 기묘한, 그리고 자기애적인 불구・소외・고독・무관심. 그건 모두 ‘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책의 마지막 대목에서 ‘준’이라는 스스로의 이름을 ‘처음’ 듣게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나는 그녀를 사랑한다.”, 그토록 간절하게 깨닫고, 마주치길 원하므로. 하지만 결국에 “단지 꿈이었을 뿐일까.”하고 중얼거리는 꿈의 허망함, 혹은 삶의 고지식함. 바깥을 돌아서, 세상을 통과해서, ‘자신’의 삶을 고민하고 찾아가는 소설. 은유는 섬뜩하고, 그것을 깨달을 때 책읽기는 흥미로워진다. ‘꿈’으로 자기를 찾고, 또 다르게 세상은 살아가는 것이니까. 시원한 캔맥주를 홀짝거리고 싶은 마음이 문득.
b********g 2003.09.0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