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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잘 꾸는 것도 유전인 듯 하다. 친정엄마가 주무실 때 보면 얼굴표정도 변하고 어떤 때는 신음소리까지 내며 몹시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럴 때면 나는 얼른 엄마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면 잠깐 눈을 떴다가 잠속으로 빠져든 엄마는 또 꿈을 꾸었다.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엄마는 꿈속에서조차 고단한 삶을 살고 있으셨을까?
이런 엄마를 닮아 나도 꿈을 많이 꾼다. 다행스럽게도 지금은 아니지만 이 빠지는 꿈을 꾸고 났을 때는 얼마나 기분이 언짢은지 모른다. 윗니 아랫니 할 것 없이 후두둑후두둑 다 빠져버리고 나면 얼마나 놀랍고 충격적인지 꾸어 본 사람만이 안다. 그러다가 깨고나서 멀쩡한 이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길게 내시곤 했다. 꿈속에서 울고 있을 땐 실제로도 흐느끼다가 깨어서 눈가는 눈물범벅이 된 경우도 적지 않았다. 뱀꿈을 꾸었을 때는 몸서리 쳐질 정도로 싫지만 고등학교 때 가장 많이 꾸었던 꿈이다. 나는 잠시만 졸아도 꿈을 꾸는 꿈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숙면을 취하기가 힘들다. 꿈 때문에 잠의 질이 현저히 떨어진다.
어떤 특별한 꿈들, 그러니까 돼지꿈이나 똥꿈이나 불꿈을 꾸면 사람들이 복권을 사 듯 나도 꿈에 대한 의미를 많이 찾으려고 했다.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읽기 전에는 말이다. 그러나 꿈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자신의 심리를 알 수 있는 하나의 도구가 될 수는 있다. 프로이트가 이야기한 것 가운데 무의식의 표출인 경우가 그러하다. 성인이 되어서 꾸는 꿈 가운데는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을 대신 이루어주어서 나의 욕구를 풀어주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꿈은 욕구해결의 열쇠가 되어주기도 하고 대리만족을 주는 좋은 점도 있다. 물론 이것은 상대방과는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내 쪽에 해당되는 일이다.
꿈을 많이 꾸는 사람으로서 할 이야기가 참 많다. 하나만 예를 든다면 초등학교 때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해주셨고 나도 좋아했던 선생님이 계셨는데 몹시 보고 싶어졌던 것이다. 그 때는 작은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여서 어디로 이동한다는 것이 쉽지 않을 때였다. 여러모로 수소문해서 선생님의 연락처를 알아냈다. 그래서 선생님과 소식이 닿아 직접 통화를 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편지도 썼다. 아이를 낳으면 뵈러 가겠다는 말을 썼다. 그러나 막상 아이를 낳고나니 연년생을 둔 상태여서 찾아뵙는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밤이면 꿈을 꿨다. 선생님을 만나서 왜 뵈러 못 가는지, 얼마나 선생님을 보고 싶었는지 등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실제로 현실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들을 그대로 하고 있었다. 그런 꿈을 한 동안 반복해서 꾸었다. 그러고나니 나는 선생님을 직접 뵌 것 같았고 찾아뵈고 싶었던 욕구가 많이 사그라져 있었다.
처음으로 읽은 은희경의 작품 <그것은 꿈이었을까>도 꿈을 소재로 하고 있다. 이 소설은 은희경의 유일한 연애소설이라 한다. 1998년 <꿈속의 나오미>라는 제목으로 PC통신에 연재했던 소설로 비틀스의 앨범 <러버 소울>에 담긴 열네 곡을 그대로 소재목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노래 가사와 소설 속의 이야기는 별로 연관이 없다. 그 노래에 맞춰서 쓴 것이 아니라 그 노래를 들으며 쓴 소설이기 때문이다.
은희경 자신도 꿈을 많이 꾸는 사람일까? '작가의 말'에서 "비슷한 꿈을 반복해서 꾸는 일, 그 역시 나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다. 나에게는 꿈속에 가는 장소들이 몇 군데 있다."라고 쓴 것을 보니 작가도 어지간히 꿈을 많이 꾸는 모양이다. 또 은희경은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나는 현실에서도 살고 있고 꿈에서도 살아간다. 꿈 속의 나에게는 꿈이 즉 현실이므로 꿈속의 꿈이 또 존재하고 말이다. 삶은 그렇게 겹으로 되어 있는 게 아닐까(7쪽)."라고 말한다.
꿈으로는 아주 유명한 장자의 '호접몽'에서도 꽃사이를 훨훨 날아다니는 꿈을 꾸고 나서 '내가 나비 꿈을 꾼 것인지 나비가 내 꿈을 꾼 것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하는 것이 나온다. 보통은 개꿈이라고 하지만 프로이트식으로 말하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무의식이 표출되거나 자신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것을 대신 이루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에 꿈도 또 다른 자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신경정신과에서는 꿈을 토대로 치료를 하기도 한다. 그래서 꿈도 현실 못지 않게 중요하다고 본다.
의대생 준과 그의 친구 진은 하품하는 쌍둥이라고 불리울 만큼 아주 친하다. 그들은 시험 준비를 위해 고시원 레인캐슬로 떠난다. 언젠가부터 준은 같은 여자에 대한 꿈을 반복해서 꾸고 실제로도 그녀를 만난다. 고시원, 콘도미니엄, 병원, 다시 꿈 속. 꿈과 현실을 넘나들며 준과 그녀는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한다. 준이 그녀에게서 도망친 후에도 여전히 그녀와 그녀의 분신들은 어디서나 나타난다. 그래서 소설속의 이야기는 이상야릇하게 느껴진다. 그 때의 그녀가 그녀인가, 하고 헷갈리기도 한다. 이름도 비슷하다.
주인공 준은 상상을 아주 많이 한다. "쓸데없는 상상이 왜 떠오르는지는 알 수 없다. 내 머릿속 어느 공간에 종말을 찍어두었던 필름이 저장돼 있기라도 한 걸까(19쪽)."라고 할 정도이다. 모험과 용기도 없고 게을러서 무언가를 바꾸기보다는 적응하는 편이 훨씬 성격에 맞는다는 준은 레인캐슬로 여행을 떠날 때 '실레 화집'과 카프카의 '성'을 가지고 간다.
화집의 해설에 따르면 실레는 한 개의 물건에 집착했다. 그 물건이란 그가 죽던 스물여덟 살까지 평생을 지니고 있던 거울이다. 그는 엄청나게 많은 자화상을 그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보다는 많이 그렸다. 뺨을 잡아당기는 자화상, 길쭉한 배를 드러낸 자화상, 가슴이 깡마르고 붉은 손을 얹고 있는 자화상, 오른쪽 팔꿈치를 들어올린 붉은 셔츠의 자화상, 수음하는 자화상, 윗니 한 개를 드러내고 있는 자화상, 죄수 자화상, 성 새비스탄이 되어 온 몸에 화살을 맞는 자화상.(26쪽)
그 중에서 주인공 준은 '이중 자화상 두 점을 오래 바라보곤 했다. 하나는 '예언자'와 '나의 영혼'이다.
하나는 두 남자가 반쪽짜리 몸으로 나뉘어 담긴 그림이다. 알몸의 남자는 팔이 몽뚝하게 잘려 있고 음부도 검은 골처럼 도려져 있다. 또 하나의 남자는 길고 검은 외투로 감싸여 몸이 보이지 않는다. 그 남자는 두 눈에 눈동자가 없다. 알몸인 남자의 눈도 한 눈은 감기고 한 눈은 반만 뜨고 있다. 그들의 눈은 단지 거울 속의 자신만을 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신까지 포함에서 바라보는 겹의 눈이다. 제목은 '예언자'이다.
다른 하나는 '나의 영혼'이다. 기형적으로 커다랗고 뼈만 남은 손을 쳐들어보이고 있는 검은 옷의 남자. 그의 등 뒤에는 마치 남자의 유령처럼 희뿌연 모습이 하나 더 그려져 있다. 입과 두 눈 모두가 단지 공허한 구멍일 뿐인 두 개의 자화상. 나와 나의 영혼.(27쪽)
실레가 하나의 물건에 집착한 것처럼 같은 여자에 대한 꿈을 꾸는 준. 준의 상상이나 꿈은 실레의 그림만큼이나 독특하다. 또한 불확실성과 인간의 불안한 내면을 독창적으로 그려낸 '성'을 즐겨읽는 그의 모습에서 고독과 불안을 읽어낼 수 있다. 은희경도 "나는 이 소설을 고독에 관한 이야기로 쓰기 시작했다. 고독한 사람의 뒤를 쫒아가보니 그의 발길이 사랑으로 향했다. 그래서 고독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가 된 것 같다."라고 말한다.
현실과 꿈사이를 오가는 이 소설을 읽으며 나도 꿈속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꿈이란 것은 시간과 공간의 경계도 없고 일관성도 없다. 그래서인지 이 리뷰를 쓰는 내 마음도 갈팡질팡인 것 같다. 깔끔하지 못하다. 책을 읽고 났을 때 그러한 느낌이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 꿈이 불안하다는 것은 심리가 불안하다는 이야기이다. 불안한 주인공과 함께 한 몇 시간 동안 나도 불안스럽게 이 책을 읽었다. 불안한 준이 친구 진과 취해서 불렀던 노래가사가 그들에게 힘을 주었을까?
나날의 불안이 무엇이든지 괜찮아 괜찮아
자신의 잘못인지 아닌지 그런 건 상관없어.
시계를 보는 건 시간의 낭비
준의 프라하 여행 직후 진은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고, 준은 진의 약혼녀와 결혼하게 된다. 준은 꿈 속의 그녀를 잊고 일상으로 돌아가지만, 그녀가 다시 등장하면서 진이 그러했듯이 준도 자동차 사고를 당하는데….
그것은 꿈이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이 현실도 꿈일지도 몰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