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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는 이슬람을 믿는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에서 정말 나이스한 사람중에 하나다. 그 친구에게 이슬람에 대해 물었던 기억이 난다. 워낙 사람이 좋아서 무엇이 그 친구를 그렇게 만들었는지가 궁금했기에 자연스레 묻게 되었다. 종교적인 행사, 그 가르침을 소중히 하기에 분명 이슬람도 그 친구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고 짐작했었다. 나의 물음에 그 친구는 이슬람이 평화를 사랑하는 종교라고 말했던 기억이 난다. 뿌리는 기독교와 같지만, 그의 종교는 무함마드를 떠받든다고 했고, 예수를 성인 정도로 생각한다고 했다. 이슬람이 그의 생활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준 것은 담배와 술.. 쓸데없이 낭비되고 소모되는 것을 그의 종교가 금지하기에 그 친구는 담배도 술도 하지 않는다고 했었다. 그 친구로부터의 몇가지 정보를 통해서 나는 이슬람이 금욕적이고 평화로운 종교라는 생각과 더불어 9.11과 여타의 테러를 일으키는 저변에 이슬람이란 종교가 자리잡고 있는 것이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그리고 매번 여행에서 언제나 단골로 몸 수색을 당하는 이슬람권의 사람들에 대한 서구의 불평등한 태도가 다소 불편하게 느껴졌었다. 스스로 보수라고 말하는 저자는 이슬람이 전쟁을 좋아하고 공격적이고 잔인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쿠란의 구구절절을 예시로 들며 무함마드가 선동하는 호전적인 기질을 설명한다. 해석적인 오류를 감안한다고 해도 분명 쿠란에는 다분히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구절이 있음에는 부인하기 어려울듯하다. 다만, 평화적인 어느 구절 하나 인용하지 않고 있음과 이 책에 실린 쿠란 구절은 극히 일부일 것이기에 작가의 이슬람 대한 반감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지금으로 부터 1400년이나 지난 과거의 역사를 마치 바로 앞에서 목격한 것처럼 비판하는 그의 시선.. 구절구절 폭력적인 색채가 다분한 무함마드의 어록을 보면서 이것이 진정 이슬람권의 사람들이 떠받들고 있는 그 사람이 맞는지 믿을 수가 없다. 이슬람의 전파를 위해 폭력적인 지하드(성전)을 촉구하는 무함마드..과연 그는 진정 무슬림의 신앙 그 중심에 있는 것인가 게다가 비무슬림을 대한 무함마드의 언급은 놀랍다. 쿠란에는 딤미스(dhimmis)라는 단어가 있다.성서의 백성이란 뜻으로 유대인과 기독교인들을 일컫는다고 한다. 유대인과 기독교인은 예전자 무함마드를 예언자로서 거부했으나, 이슬람법에 의해 보호받는 불신자..딤미의 신분으로 그 나라에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댓가로 비무슬림 인두세인 지즈야를 내야 만하고 온갖 굴욕을 감당해야만 해야했다. 무함마드는 그의 무슬림에게 불신자에게는 오로지 이슬람으로의 개종, 차별과 박해, 죽음의 선택사항이 있다고 했다했으니, 그의 말에 힘입어 무슬림들이 불신자를 대했던 그 잔인했던 태도는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도 없었으리라.. 무슬림이 행했다고 저자가 언급한, 이 정도의 박해라면 대대로 전해져 내려와 우리가 마치 일본에 치를 떨듯 해야할텐데, 그런 사례를 들어본 기억이 없다. 나의 무지 때문인가 생각했다가..어쩌면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게 이슬람국가로 알려진 이란 역시 초기엔 조로아스터교를 믿던 페르시아였다고 한다. 페르시아는 오래전 이슬람군들에 의해 정복되고 비무슬림에 대한 박해로 2% 미만만이 예전의 국교를 따르는 명실공히 이슬람국가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하지만, 이란이 이슬람에 대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본적이 없다. 이것은 페르시아가 결국 이슬람에 뿌리까지 젖어들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슬람이 비무슬림에게 준 선택사항 개종, 박해-복종, 죽음 중에서 개종만이 인간답게 살 수 있었던 길이 었기에 그들은 개종을 했을것이고..그것을 자손에게 자손에게 물려주었으니..종국에는 뿌리까지 무슬림으로 사는 후손에 의해 지금의 이란이 만들어졌을테고 이슬람에 대한 반감..예전 조상이 당한 굴욕은 서서히 잊혀진게 아닐까 짐작해본다. 그리고 중반즈음에 저자는 십자군 운동에 대해 이야기한다. 똑같이 폭력적이고 잔인한 학살을 했지만, 저자는 서구가 십자군 운동을 일으켰다는 것에 스스로 가지는 양심의 가책 혹은 트라우마를 이슬람의 잔인성으로 합리화 시키며 치유하려한다. 그가 점점 더 흥분하며 이야기하는 이슬람의 잔인성과 십자군 존재에 대한 합당함은 문득 영화 반지의 제왕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책을 읽고 있으면 무력의 행사를 지시하는 사우론과 무시무시한 오크족들의 모습이 마치 무슬림 전체가 어디선가 숨어서 테러를 준비하며 무장을 하고 있는 모습으로 오버랩된다. 그리고 그에 대항하는 반지의 원정대, 연합군은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유럽인의 모습.. 그 당연하고 고귀한 모습을 떠올리게까지 할 정도였다. 너무나 소설처럼 온갖 사례들을 이야기 하니.. 순간 이 영화가 떠올랐던 것이다. 이 책이 약간의 논리적 허점이 보임에도 왜 미국에서 베스트셀러로 자리매김했는지 실감한 순간이었다. 그의 논리는 종국에는 이슬람권으로 원조를 하는 미국의 태도를 비난하고, 미국내에서 일어나는 테러로 의심되는 사건들의 은폐를 비난한다. 유럽에서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는 무슬림의 수를 들어 자국민에게 경고하고 있다. 그 예로 유럽 덴마크 어느 나라에선 온 학생이 무슬림이고 쿠란이 정규 과목이라고 한다. 문제는 저자가 말하는 폭력적이고 호전적인 집단..우리가 지하드라고 알고 있는 일단의 테러집단이 과연 무슬림 전체를 대변하는가 하는 사실이다. 저자는 지도자의 입을 통해서 50%가 지하드를 지지한다고 했지만, 이 역시 지도자의 말일 뿐이다. 그리고 쿠란이 100% 이런 호전적인 구절을 담았을리 만무하고, 100% 무슬림이 쿠란을 구절구절 의미를 새겨 외우고 숨겨진 발톱을 갈고 있는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무엇보다 이슬람의 잔인한 행적으로 지금의 이라크전을 살짝 옹호하는 듯한 태도는 걱정스러웠다. 거기에 전체 무슬림을 마녀사냥하듯 새로운 십자군의 궐기를 촉구하는 듯한 마지막 구절도 염려스러웠다. 인간사랑이 내놓은 또 한 권의, 생각과 학습을 자극하는 책을 만났다. 열흘을 고민하고 생각하고질문했다. 저자의 사고와 일치된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지하드가 교육되는 쿠란이 내가 알던 것처럼 다분히 평화적이지 않다는 사실, 그들의 이슬람의 전세계화라는 황당한 발상, 무엇보다 무함마드의 실상에 대해 다시 머리의 한쪽을 열어준 책이다. 늘 강조하지만 생각의 유연성..내가 알던것이 전부라는 생각을 버리고 이번엔 십자군을 비판하는 책을 읽어보려한다. 이슬람과 십자군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분은 이 책을 꼭 읽어보시길 권한다. 당신의 임무는 이 책이 가진 오류를 찾아내서 제대로 다른 분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도 십자군도 아무것도 모르는 분께도 권한다. 당신에게 더 많은 책을 읽기를 더 많이 알기를 자극할 책이다. 혹은, 이슬람을 옹호하는 분들께.. 읽어보시고 반기를 들어주시거나 부연설명을 해 주시기를 부탁한다.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인 시각, 즉 기독교도도 아니고 이슬람도 아닌 제 삼자의 시각으로 본 이슬람과 십자군의 이야기를 우리 중 누군가가 펼쳐내주길 기대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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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은 전쟁의 종교인가? 저자는 “이슬람에서 폭력적인 지하드의 중요성에 대한 오해의 여지는 없다. 사실 이슬람의 예언자는 반복해서 지하드 전쟁에 참가하는 것보다 그의 추종자들이 할 수 있는 더 좋은 일은 없다고 강조했으니까 말이다. 어떤 무슬림이 무함마드에게 무슬림이 되는 행동 외에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가 뭐냐고 물었을 때 예언자는 “알라의 대의를 위해 지하드(성전)에 참가하는 것”이라고 대답했다. ”1)라고 이해한다. 여기서 저자는 이슬람에서 말하는 지하드는 오로지 성전(聖戰)을 의미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이고 있음이 드러난다. 그런데 이처럼 지하드(jihad)를 성전(聖戰)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이해일까? 저자 스스로 “‘노력하다’는 아랍어로 지히디(jihidi)인데, 명사 지하다(jihad)의 동사형이다. 이런 노력은 전쟁터에서 있어야 할 것이다”2)라고 말했듯이 원래 지하드는 (무함마드의 가르침을 위해)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이슬람 세계에서 보다 존중 받는 (내부의 존재와의) 대지하드는 불교에서 얘기하는 정진(精進)에 해당하는 것이고, (외부의 존재와의) 소지하드가 바로 포교 또는 성전(聖戰)에 해당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것이 올바른 해석인 셈이다. 따라서 저자와 같이 지하드를 기계적으로 성전(聖戰)으로만 이해한다면 충분히 이슬람을 전쟁의 종교라고 오해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이슬람에 대해 잘못 이해한 또 다른 예로서 마크 스타인의 다음과 같은 이슬람에 대한 평가를 떠올릴 수 있다. 따라서 단순히 이슬람 안에 잠재된 세계적 지하드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종교 자체가 정치적인 프로젝트이며, 사실상 제국주의적 프로젝트이다. 이것은 현대 기독교, 유대교, 힌두교, 그리고 불교가 추구하는 방식과 다르다. 더욱이 이 특정 종교는 역사적으로 볼 때 폭력이 거의 언제나 정당화되는 어느 정도 피에 굶주린 신앙이었다.3) 2. 이슬람은 무력에 의한 전도를 하였다? 이슬람은 무력에 의한 전파였고 기독교는 아니라는 점에서 두 종교 간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3) 중세에 한정해서 본다면 저자의 주장은 사실과 정반대이다. 마치 13세기 중엽 십자군에 의한 예루살렘 정복이 실패로 돌아갔음이 확정되었을 때,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 ‘한 손에 칼, 한 손에 꾸란’이라는 구호가 날조되어 이슬람의 호전성과 강압적 선교를 강조하여 유럽 기독교인의 이교도에 대한 적개심과 이슬람 세력의 확산에 대한 위기감을 표현하고, 내부의 역량을 집결하려 했던 것처럼.
이탈리아의 도지 스파(Dogi spa) 社의 청소년 대상 교양서인 브라보 시리즈에는 기독교인들은 빼앗겼던 땅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불신자의 종교를 ‘이긴’ 것이다. ~ 스페인 무슬림과 기독교인들 사이에 맺은 우호관계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금이 가기 시작했다. ~ 1276년 기독교인들이 무슬림 거주지역을 공격한 것이다. ~ (이를 계기로 강제개종의 주장이 높아졌고) ~ 1391년을 기점으로 강제개종이 시작되었다. ~ 무슬림들은 기독교로 개종할 것인가, 아니면 이주할 것인가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하지 않으면 안되었다.4) 라고 기독교인들에 의해 재탈환된 스페인에서의 기독교로의 강제 개종 상황을 묘사하고 있고, 저명한 역사학자이자 3세대 아날학파를 대표하는 쟈크 르 고프도 그의 저서에서 13세기 기독교 세계는 자신의 변경을 벗어나고 싶었던 듯하다. 기독교 세계는 이미 십자군원정의 이념대신에 선교의 이념을 채택하기 시작했고, 세계에 대하여 스스로를 열어 놓았던 듯하다. 그러나 기독교 세계는 새로운 신자를 무력으로 받아들였지만(“강제로 개종시켜라”), 비신도들을 배척했고 사실상의 종교적 인종주의에 입각해서 스스로를 규정하는 폐쇄된 사회였다. 기독교에의 소속 여부가 그들의 가치와 행동을 판별하는 기준이었다. 기독교도들 사이에서는 악으로 통하는 전쟁이 비 기독교도들에 대해서는 하나의 의무였다.6) 라고 하여 기독교 세계가 이교도들을 무력을 통해 강제로 개종시켰음을 명시하고 있다. 반면 이슬람교는 당시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오랜 수탈과 착취에 시달리던 시대적 상황으로 인해 이슬람의 진출은 오히려 환영 받았다. 때문에 이슬람 정복 과정에서 강제 개종은 실제로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무슬림들은 피정복민들의 문화나 관습 및 종교 등을 보호해주는 대가로 그들에게 일정한 세금만을 요구하였다. 피정복민들의 입장에서도 이슬람 세력의 진출을 막을 아무런 이유가 없었다. 오히려 많은 자유와 평등이 주어지는 이슬람으로의 대량 개종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때문에 이슬람 정부는 세금 감면을 노리는 대량 개종을 막기 위해 개종금지백서를 발효하였고, 국가 수입의 증대를 위해 피정복민들이 개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세금을 내도록 요구했다. 그런데 이 공납 액수도 비잔틴이나 페르시아의 강제 징수에 비하면 가벼운 것이었으므로 이슬람 제국 하에서 기독교인과 유대교인들은 상당한 종교적 자유와 경제적 기득권을 향유할 수 있었다.7) 3. 십자군은 유럽 식민주의의 원형이 아니다? 저자는 “십자군들은 중동의 유럽 식민주의의 원형이 아니며, 십자군이 유대인과 무슬림을 대학살한 것은 끔찍하고 잔인한 행동이었지만 당시 전쟁법규에 의하면 이례적인 일이 아니었다.” 8)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쟈크 르 고프의 저서를 보면 십자군 원정은 서양, 특히 기사 계급을 빈곤하게 하는 데 기여했다. 그것은 기독교 세계의 도덕적 통일성을 창조하기는커녕 갓 시작된 민족적 적대감을 더욱 격화시켰다. ~ 성전에 대한 열정은 ~ 중도에서 유태인 학대로부터 대량 학살 및 약탈에 이르기까지 극도로 십자군들을 포악하게 행동토록 고무했다. 1099년의 예루살렘 사건과 1204년 콘스탄티노플 사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우리들은 이런 사실을 이슬람이나 비잔틴 연대기 작가들은 물론 기독교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서도 읽을 수 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십자군들이 팔레스타인에 일시적으로 정착했던 것은 유럽 식민 운동의 최초 예이며, 그것은 하나의 전례로서 역사가에게 교훈으로 가득하다. ~ 푸셰르 드 샤르트르는 그의 연대기에서 ~ 오늘날 하느님께서 서양을 동방으로 바꾸어놓은 방식에 대해서 스스로 고찰하고 반성해보십시오. 서구인들이었던 우리들은 동방인이 되었습니다. 로마인이거나 프랑스인이었던 사람들이 갈리리인이 되거나 팔레스타인인이 되었습니다. ~ 날마다 우리의 부모들과 친척들이 서양에서 그들이 소유했었던 재산을 포기하고 우리들과 합류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습니다.9) 라고 되어 있어 역사적 사실은 그가 주장하는 내용과 반대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4. 오늘날의 이슬람 – 히잡에 대한 상대적 이해 이슬람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1979년 호메이니에 의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한 후 변화하였다. 이전에는 내부의 적으로 히스패닉을 상정했다면 이슬람 혁명 이후에는 이슬람이 그 지위를 대체한 셈이다. 그러면서 이슬람에 관계된 것을 모두 이슬람 원리주의로 몰아가는 경향마저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슬람 세계에서 기독교에 대해 반대하는 분위기가 강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식민지배를 받아왔던 피 식민국가의 입장에서 식민국가의 문화와 종교를 거리낌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을 감안하면 당연한 것이 아닌가?
혹시 이해가 되지 않는다면 일본의 식민지배를 받았던 한국에서 어떤 여자가 기모노를 입고 다니면서 공개적으로 일본 문화를 받아들이자고 주장하고, 신사참배를 한다면 그 사람이 어떤 꼴이 될 지 쉽게 상상이 될 것이다. 미국의 경우 이슬람에 대한 오해에서 이슬람 혐오증이 더 부풀려진 부분도 있다. 미국 등 기독교 세계에서는 이슬람 여성들이 히잡을 착용하는 것을 여성의 권리와 자유의 제약으로 본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도 이슬람 페미니스트들이 히잡의 착용을 주장했다고 한다. 그것은 그들에게 있어서 히잡은 여성을 속박하는 것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의 가치와 전통의 상징으로 여성이 사회/경제적 혜택을 확보하기 위한 여성운동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오해가 히잡 하나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감안해본다면 이 책의 비판적 독해를 통해 이슬람에 대해 문화적 상대주의의 입장에서 이해를 하고, 그에 따른 건설적인 비판을 제기할 수 있는 새로운 이슬람에 대한 소개서가 등장할 토대가 되기를 희망한다. 1) 로버트 스펜서 지음, 유달승 옮김,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 (인간사랑, 2009), pp. 62~63 2) 로버트 스펜서 지음, 같은 책, p. 44 3) 마크 스타인 지음, 3) 로버트 스펜서 지음, 같은 책, p. 151 4) 로베르토 만치니 / 파브리치오 리차르델리 지음, 5) 쟈크 르 고프 지음, 6) 쟈크 르 고프 지음, 같은 책, p. 179 7) 8) 로버트 스페서 지음, 같은 책, p. 181 9) 쟈크 르 고프 지음, 같은 책, pp. 92~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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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에 대한 대중의 관심이 높아지면서 이슬람 관련 책들을 많이 접할 수 있는 요즘이다. 인간사랑의 책 중에서도 이 책을 첫손에 든 이유는 다양한 이슬람 관련 책들 속에서 도무지 진실이란 게 어떤 것인지 정확하게 판단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이슬람= 테러리즘, 이슬람=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끌었던 수준높은 문명... 이렇듯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 그 평가 또한 상반된다.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는 노골적인 이슬람 폄하와 공격이 난무한다. 팩트에 대한 해석의 문제라 생각하는데... 이는 코란을 해석하는 방식, 성경을 해석하는 방식의 차이라 생각한다. 같은 말이라도 다르게 해석할 수 있는... 그런 점에서 이 책이 담고 있는 내용들이 사실 불편했다. 아래 올해 내가 접한 이슬람 관련 2권의 책을 반추해본다.
![]() [도서]잃어버린 역사, 이슬람
이슬람을 새롭게 바라본 사실은 바로 타 종교에 대한 관용이다. 아랍 이슬람의 지배자들은 당시 식민지 주민들을 개종시키려는 어떠한 종교적 전략도 없었다. 전도나 포교활동은 금했지만, 기존 지역의 여타 종교들을 나름 존중하는 방식을 취했다. 두 번째는 그들의 놀랄만한 지적, 과학적 소양이었다. 서구 문명의 토대라고 단언할 수 있을만큼 절대적 영향을 끼쳤던 이슬람. 이슬람을 통해 전 세계 문명의 진화는 더욱 빠르게 전개될 수 있었다. 세 번째는 17세기 유럽 제국주의의 엄청난 만행이다. 유럽 제국주의로 인한 중동, 이란, 아프리카, 인도, 동남아 일대의 이슬람권에 가해진 그들의 침탈 행위는 이후 미제국주의와 맞물려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 [도서]벼랑 위에 선 미국
>> 알기 쉽게 위 3권의 책을 정치 성향으로 나눈다면(미국 입장에서) '잃어버린 역사, 이슬람'이 좌편향적이라면, '벼랑 위에 선 미국'은 중도성향이고,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는 극우에 가깝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이슬람의 실체와 야심을 정확히 알고 십자군원정이라 불러도 좋을만큼 그들의 침략에 방어태세를 갖추자.라고 할까? 많은 사람들이 이슬람이 박해받고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서구사회 vs 이슬람의 대결 구도는 십자군원정 이래로 1,000여 년간 지속되어 온 전쟁이다.
사실 이렇게 단언하며, 상대방을 조목조목 따져나가는 책들은 서평 자체가 쉽지 않다. 저자의 논리가 처음부터 극단적이고, 점핑이 심하다 생각하면, 그 이후의 모든 이야기들을 쉽게 수긍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크게 3장으로 구성된 이 책. 1장 이슬람, 2장 십자군 전쟁, 3장 현대의 지하드로 구성되어 있다. 예언자 무함마드와 코란을 이해하는 방식부터 논리적 비약이 심하다. 이후 십자군 전쟁에서는 이슬람의 지하드를 비판했던 방식 그대로 서구 기독교를 옹호한다. 그리고 마지막 장에서는 그들을 쉬쉬 하지 말고, 정확히 직시하여 그들이 걸어오는 전쟁에 대응하자...라고 결론짓는다.
왜 옮긴이가 번역 제안을 받고 망설였는지 이제야 수긍이 간다. 아무리 다양성이 존중받는 시대라 하더라도, 이슬람에 대한 객관적 자료나 논의가 부족한 상태에서 이 책은 상당히 많이 나갔다고 생각한다. 코란에 따르면 절대 이 지구상에 무슬림과 비무슬림의 공존이 불가능하다고 하지만, 끝없는 대결과 응전의 연속이라면... 뭔가 화해의 제스처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물론 이 책의 저자 또한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그에 대한 제언도 하고 있다. 하지만 딱히 자기 위안 혹은 변명으로밖에 들리지 않는다.
사실 어제 저녁 W라는 프로그램에서 예멘의 9살짜리 이혼녀를 소개하는 장면을 봤다. 파키스탄에서는 매년 수천명의 여성들이 구혼에 남성들로부터 황산이나 염산으로 얼굴을 공격받는다고 한다. 일찍이 일부다처제가 코란에 명시됐고, 여성이란 불완전한 존재이기에 남성에게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것...등 우리가 보고 있는 무슬림의 단면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게 이슬람의 모든 것인가? 진실인가?
여전히 판단불가이지만, 이슬람을 알면 알수록 복잡하게 얽혀있어 사고도 감정도 그리 유쾌하지 않다. 더욱이 이런 대결 구도의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는 책들 속에선 더더욱 진실을 발견하기가 어렵다. 11월의 마지막, 정치적으로 왜곡시킨 한 서구인의 이슬람 공격하기를 지켜보며, 또다른 이슬람 관련 책들을 찾아나서야 겠다는 작은 의무감을 느껴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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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어 나가면서 필자의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독특함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책을 이슬람들이 읽어나가면 반론을 많이 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의 입장에서는 거대 종교인 이슬람교와 이슬람을 주장하면서 파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대 테러의 진앙지인 원리주의 등 맛만 보았을 뿐이지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들이 왜 그리 열광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그리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그들의 이념에 충실하는가 하는 문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하다. 단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내용으로 필자와 공통의 생각을 해나가면서 그들의 면면을 살려볼 수밖에 없다. 즉 독후감 정도의 리류밖에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책은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코란과 성경을 대비해 나가면서 코란의 위험성을 말해나가고 있다. 코란의 내용 속에 이미 투쟁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이 있어, 오늘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세상을 놀라게 만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란 성경의 말씀과 ‘군대와 말로써 너희가 할 수 있는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와 너희들의 적들과 그들 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리라 너희는 그들을 알지 못하나 알라는 그들을 알고 계시니라.’란 코란의 말을 대비해 보면 분명하게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경전의 구분에서 이미 오늘날의 사회 현상에 생겨나는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은 복수와 핑계, 승리와 패배 등 전쟁을 권장하고 폭력을 권고하는 내용들로 성경이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다. 비무슬림과 그 종속자에 항전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 도둑질 및 살인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십계와 같은 윤리강령은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테러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교의 내세관을 말하면서 그것이 테러들의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됨을 말하고 있다. 내세에 대한 자신, 그것이 쟁취해서 빼앗는 것이라는 논리로 그들의 자살 테러를 합리화시키고, 그들의 공고한 힘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끔찍한 논리로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을 십자군 전쟁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서구 십자군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알라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의 우위를 무슬림에 심으면서 그들의 희생과 충성을 정당화시키는 전통을 만들어 갔고,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이슬람이란 요소를 온건파의 측면에서 미화하여 종교적인 문제점은 없고, 정치적으로 도 도덕과 선을 우선시하는 형태로 왜곡되게 제시되고 있다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일부 극렬 집단(지하드)의 사회 파괴를 하는 불온 세력으로 치부하는 점에서도 필자는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과 같은 단체가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오늘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보고, 문제에 접근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이슬람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타인의 행위를 구속하고, 자유와 생명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성전화시키면서 사회에 불안 요소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오늘날 이슬람 테러분자들에 대한 진실된 사고와 그 근본의 문제가 해결되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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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를 쓰기 전에 다른 사람들은 뭐라고들 하셨나 먼저 훑어 보았다. 그만큼 이 책에 대해 뭐라고 말하기에는 자신이 없었던 것이다. 보통은 내가 읽으면서 생각한 대로 리뷰를 올리는 데 거리낌이 없는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가 못했다. 내가 바로 읽고 있기는 한 건가? 제대로 이해를 하고 있나? 뭘 잘못 받아들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책 내용에서 의문점을 느끼는 게 아니라 읽고 있는 내게서 자꾸만 문제점을 찾으려고 했던 것이다.
이슬람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이슬람과 관련된 사건이나 정보를 접하게 될 때마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게 확실한지 늘 의아했다. 아무래도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고, 더 알아야 할 것 같았고, 몰라서 이해를 못하는 것 같았고, 제대로 알게 된다면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래서 이 책을 읽었던 것인데, 결론적으로 나는 더 혼동스럽고 더 큰 편견을 갖게 되었으며 이슬람에 대해서는 더 거리감을 느끼게 된 것만 같다.
기본적으로 내가 종교에 대해 우호적이지 못한 입장이다 보니(종교인에 대한 이해심도 극히 없는 편이고) 유대교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갈등 관계에 대해서도 냉소적일 수밖에 없다. 왜들 그렇게 싸워온 것인지, 그런 역사적 배경을 읽을 때마다 이해심을 키우기보다는 고개를 돌렸다. 속으로만 비웃으면서.
그래서 내 입장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슬람의 기본 정책을 제대로 이해해 준다면 왜 그런 것인지 이해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 이 책을 읽기는 했는데, 저자가 이토록 반이슬람 입장이었다니. 100% 동감을 하지도 못하겠고, 그렇다고 뭐라고 반박도 못하겠고, 맞는 말인 것도 같고, 과장인 것 같기도 하고.
작가의 말대로라면 나는 이슬람교를 믿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이슬람법의 적이 되고, 그 이유만으로 죽음을 당할 수도 있고,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남자에게 학대받을 수도 있고...그러한데.
책을 읽어도 원한 것만큼 얻지 못했다 싶으면 더 찾아서 읽고 싶어지는 게 보통의 심정일 텐데, 지금으로서는 이슬람에 대해 더 알고 싶은 마음이 안 생긴다. 이게 이 책을 읽은 효과가 되고 말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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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을 읽어 나가면서 필자의 이슬람을 바라보는 시각의 독특함을 많이 느낄 수 있었다. 아마 이 책을 이슬람들이 읽어나가면 반론을 많이 펴지 않을까 생각된다. 나의 입장에서는 거대 종교인 이슬람교와 이슬람을 주장하면서 파편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현대 테러의 진앙지인 원리주의 등 맛만 보았을 뿐이지 전체적인 모습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그들이 왜 그리 열광하는가, 그들이 어떻게 그리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그들의 이념에 충실하는가 하는 문제는 잘 모르기 때문에 왈가왈부 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닌 듯하다. 단지 이 책을 통해서 읽은 내용으로 필자와 공통의 생각을 해나가면서 그들의 면면을 살려볼 수밖에 없다. 즉 독후감 정도의 리류밖에 쓸 수가 없다는 말이다. 책은 재미있게 이끌어 나가고 있다. 코란과 성경을 대비해 나가면서 코란의 위험성을 말해나가고 있다. 코란의 내용 속에 이미 투쟁적이고 파괴적인 성향이 있어, 오늘날 파괴적으로 나타나고 세상을 놀라게 만든다고 생각을 하고 있다. 예를 들면 ‘너희 원수를 사랑하고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라.’란 성경의 말씀과 ‘군대와 말로써 너희가 할 수 있는 그들에 대항할 준비를 하라 하셨으니, 그것으로 알라와 너희들의 적들과 그들 외의 다른 위선자들을 두렵게 하리라 너희는 그들을 알지 못하나 알라는 그들을 알고 계시니라.’란 코란의 말을 대비해 보면 분명하게 그 속성이 잘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이 경전의 구분에서 이미 오늘날의 사회 현상에 생겨나는 많은 문제가 내포되어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슬람은 복수와 핑계, 승리와 패배 등 전쟁을 권장하고 폭력을 권고하는 내용들로 성경이 이루어져 있다는 얘기다. 비무슬림과 그 종속자에 항전할 뿐만 아니라 이슬람을 전파하기 위해서라면 거짓말, 도둑질 및 살인을 허용한다는 내용이다. 이슬람에는 기독교의 십계와 같은 윤리강령은 없고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음을 말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테러리스트들이 테러를 합리화시키는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하는 점을 말하고 있다. 또한 이슬람교의 내세관을 말하면서 그것이 테러들의 용기와 힘의 원천이 됨을 말하고 있다. 내세에 대한 자신, 그것이 쟁취해서 빼앗는 것이라는 논리로 그들의 자살 테러를 합리화시키고, 그들의 공고한 힘이 된다는 말을 하고 있다. 끔찍한 논리로 다가갈 수 있다. 이런 모든 일들을 십자군 전쟁과 관련시켜 말하고 있다.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서구 십자군이 부정적인 모습을 보였고, 알라딘으로 대표되는 이슬람의 우위를 무슬림에 심으면서 그들의 희생과 충성을 정당화시키는 전통을 만들어 갔고, 오늘의 결과를 만들어 내고 있다는 생각이다. 또한 이슬람이란 요소를 온건파의 측면에서 미화하여 종교적인 문제점은 없고, 정치적으로 도 도덕과 선을 우선시하는 형태로 왜곡되게 제시되고 있다라고 필자는 보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말하는 일부 극렬 집단(지하드)의 사회 파괴를 하는 불온 세력으로 치부하는 점에서도 필자는 문제점을 제시하고 있다. 근본적으로 오사마 빈 라덴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과 같은 단체가 생겨날 수 있는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라고 보는 것이다. 이런 각도에서 오늘의 이슬람 테러리스트들을 보고, 문제에 접근해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사실 내가 생각해도 이슬람은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든 타인의 행위를 구속하고, 자유와 생명을 무기로 사용하는 일이 바람직하다고 할 수가 없는 듯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성전화시키면서 사회에 불안 요소를 가중시키고 있다. 이 책을 통하여 오늘날 이슬람 테러분자들에 대한 진실된 사고와 그 근본의 문제가 해결되어 나가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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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원제는 Politically Incorrect Guide to Islam 이라고 한다. 여기서 Politically Incorrect라 함은 특정인종, 여성, 장애인등 근현대사에서 소수자에게 부적합한 태도나 말, 행동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이슬람의 주류입장을 반영하기 보다는 비주류 시각을 토대로 쓰여졌기 때문에, 역자가 제목을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엿보기]로 바꾸었다고 한다. 저자‘로버트 스펜서’는 서문에서 말하기를 9.11.테러후‘부시’는 테러와의 전쟁을 선포했으나, 이것은 또 다른 비극을 탄생시켰다고 얘기한다. 테러와의 전쟁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를 양산시키는 전쟁이었다는 것이다.‘부시’는 더 나아가 이를 이슬람 파시즘과의 전쟁으로 미화시켜 이슬람혐오증3)을 확산시켰으며, 저자 또한 이를 이슬람 문명과 기독교 문명의 대립과 갈등으로 인한 문명의 충돌이라고 강조하여 또 다른 이슬람혐오증을 확산 시키는 주역이 되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슬람 문화권에 살지도 않고, 기독교 문화권에 살지도 않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일정부분 자유로울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이슬람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들에 대해서 쓰여져 있기 때문 이었다. 무엇이 정치적으로 왜곡되어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그러나 제1부 이슬람에 대한 사실들을 좀더 읽기 시작하면서 조금씩 심사가 뒤틀리기 시작했다. 이건 너무 이슬람의 어두운 면만을 부각시킨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무함마드’를 전쟁의 예언자라 부른다.‘무함마드’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승리를 하건 패배를 하건, 그 모두를 이슬람 원리의 강화에 연결시켰다고 한다.“이슬람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면 어떤것도 선한 것이 아니며, 이슬람을 막는 것이 아니라면 어떤것도 악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예로들며‘무함마드’는 결코 평화와 관용을 가르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그는 또한 쿠란을 전쟁서로 폄하한다. 예언자가 남긴 성서 쿠란은 폭력적이고 비타협적이며, 신자들에게 불신자들에 대한 전쟁을 권장하는 세계 유일의 성서로, 알라의 대의는 이슬람을 위해 무기를 드는 것으로 가르친다고 말한다. 예언자와 쿠란에 대해 이렇게 평가하는 저자가 이슬람을 전쟁의 종교, 비관용의 종교라고 했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어 보인다.‘무함마드’는 추종자들에게 지하드전쟁보다 더 높은 것은 없다고 가르쳤으며, 그들의 법은 때에 따라 거짓말과 도둑질과 살인을 허용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슬람은 천국의 유혹을 미끼로 무슬림들을 지하드로 내몰고 있으며, 무력에 의한 포교정책을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의 포교방식은 이슬람을 권유하고, 개종하지 않을 경우 지지야1)를 부과하며, 그것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엔 전쟁을 통해 복속시켜 왔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그들의 포교정책은 유효하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또한‘알라’는 과학을 말살 하였으며, 음악과 미술은 해로운 것으로 규정하여 예술을 황폐화 시켰다고 아하디스2)를 인용하여 저자는 주장하고 있다. 제2부는 십자군 전쟁에 대하여 기록되어 있다. 1099년 처음 시작된 이래 7차례에 걸친 십자군전쟁에 대해 쓰고 있다. 십자군 전쟁은 이슬람 세계에 대항하여 유럽인이 일으킨 침략행위가 아니라, 11세기에 들어와서 더욱 격렬해진 무슬림 침략에 대한 반응이었다는 주장은 그렇게 생각할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1차 십자군 전쟁시 예루살렘을 함락시킨 십자군이 저지른 유대인과 무슬림에 대한 대량학살을 전쟁중 어쩔수 없는일로 치부하고, 이슬람의 만행은 쿠란에 따른 일상적인 일로 평가 하는데에 이르러서는, 책을 읽다 말고 다시금 저자의 약력을 찾아보게 만들었다. 저자‘로버트 스펜서’ 데이비드 호로비츠 자유센터라는 곳에서 추진하는 프로젝트인 지하드 와치(Jihad Watch)라는 단체의 소장이라고 한다. 또한 자유의회재단의 객원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으며, 지하드와 이슬람 테러리즘에 대한 전문가로 안전을 위해 공개되지 않은 모처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지하드 와치를 후원하는 데이비드 호로비츠 자유센터는 9.11테러후 자유문제를 강조하는 보수주의 성향의 재단이고, 저자는 서구 보수주의의 입장에서 본 이슬람, 더 나아가 이슬람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보여주기 위해 이 책을 썻다고 한다. 그는 계속해서 말하길 십자군이 없었다면 현대문명은 존재할수 없고, 인간의 평등과 존엄은 진작에 종말을 고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서구문명의 자존심을 회복하는 길 만이 지하드를 제압할수 있으며, 십자군의 과오에 대하여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것은 역사적 넌센스이며, 정치적인 동기가 개입되어 있다고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전개되는 지하드에 대항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와 서구사회가 이슬람의 진실을 알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현대의 지하드라는 제목으로 쓰여진 제3부는 저자가 얼마나 편견으로 이슬람을 바라보는지가 더욱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그 동안 일어났던 각종 사건들이 해당국에서 테러와 관계없다고 밝혔음에도 사실은 이슬람 지하드에 의한 테러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이슬람에 대한 십자군전쟁을 사과한 교황도,‘클린턴’전대통령도 진실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이슬람에 대한 편견을 시정하자는 유엔도 악마와 거래를 했다고 주장한다. 또한 더 나아가 유럽은 금세기가 끝나기 전에 이슬람에 정복될 것 이라며 심한 우려를 나타내고, 이를 막기 위하여 미국은 기존의 동맹관계를 재조정하고 이슬람 지하드와 관계가 있으면 각종 원조도 중단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는 이를 현대 십자군전쟁이라 불러도 좋다고 한다. 책을 읽고 나니 답답하기만 하다. 이슬람과 기독교와 전혀 관계가 없는 나 이지만, 이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기독교 세계관의 입장에서, 또 서구의 관점에서 이슬람을 비판하고 이슬람을 공격 할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비판에도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이유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 처음부터 끝까지 이슬람 죽이기로 나온다면, 설사 그의 주장이 옳다 하더라도 역효과가 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다. 저자는 책에서 이슬람을 비판하면 건강하지 못한다고 하였는데, 아마 이런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모처에 숨어살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을 읽을수 있게 해준 출판사에 감사(?)드리고, 앞으로는 번역서를 선정할 때 조금은 신경(?)을 써서, 객관적인 내용을 가진 책들이 출간되었으면 하는 것이 인간사랑에 무한한 애정을 느끼고 있는 독자의 한 사람으로써 바램이다. 어디까지나 내 생각 이지만… 1) 지지야 : 비이슬람에게 부과하는 세금 2) 아하디스 : 하디스의 복수형,‘무함마드’에 관한 이야기 모음집으로‘무함마드’는 쿠란에 나오지 않는‘알라’의 말을 인용하였다고 한다. 3) 이슬람혐오증 : 이슬람을 전세계의 문젯거리로 삼아 공격하거나, 이슬람과 그 역사 전부를 극단주의로 몰거나, 온건파 무슬림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무슬림과 관련된 분쟁의 원인을 무조건 무슬림 탓으로 돌리는 생각으로, 유엔에서 이슬람에 대해 제대로 알자는 취지에서 이슬람혐오증을 극복하자는 의미로 제기한 신조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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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 이슬람 - Islam : 신에게 복종한다, 또는 순종이라는 뜻을 가진 말이다. 또한 이슬람교를 마호메트교라 하기도 하며 회교(回敎)라 말한다. 회교라는 말의 뜻은 중국이 신장 위구르족이 믿는 종교이기 때문에 만들어졌다. 동투르키스탄이라고 하는 위구르족은 중국에서 회흘족(回訖族)이라 지칭하며 회교(回敎) 또는 회회교라 불린다. 또한 이슬람교를 믿는 신도들을 모슬렘(Moslem)이라 부른다. 무함마드(Muhammad Ibn Abdullah) - 혹은 마호메트. 이슬람교의 창시자이다. 무함마드는 아브라함의 아들인 이스마엘의 자손이라 불리는 꾸리쉬족의 하심가문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40세가 되던 해 메카 교외의 히라산 동굴에서 가브리엘 천사로 부터 신의 계시를 받는다. 그리고 신의 계시를 전하는 신의 사도가 된다. 신의 계시를 메카에서 전하고자 했으나 자신의 꾸리쉬족에게 천대를 받는다. 그리고 후에 자신의 세력을 키운 무함마드는 꾸리쉬족 정벌에 성공한다. 한국에서는 기독교와 카돌릭 그리고 불교를 쉽게 접할 수 있지만 이슬람교를 접하기는 쉽지 않다. 정서적, 문화적인 차이에서 비롯되는 문제도 있고, 지하드(성전)를 통한 교세 확장이라는 이슬람교 모토가 한국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국에서 근래에 이르러 이슬람교 교세가 꾸준한 증가추세를 보이고 있다. 외국인 노동자를 비롯하여 모슬렘의 적극적인 한국포교 활동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상을 지켜볼 때 이슬람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이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이해가 필요하다. 로버트 스펜서의 정치적으로 왜곡된 이슬람은 제목에서 혼동을 야기한다. 보통 왜곡이란 말은 무언가 잘 못 전달된 지식에 대하여 올바른 이해를 돕고자 할 때 쓰이는 말이다. 흔히 이슬람은 서방 세계로 부터 잘 못 인식되어져 온 여러 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 같지만, 오히려 극우에 가까운 저자의 의도가 드러난 책이다. 지하드를 통한 이슬람교의 근본 교리가 무엇인지 또한 그 교리가 만들어 내는 사회적 문제가 어떠한 것인지를 설명하는데, 거의 모든 내용이 이슬람교의 잘못된 점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 이 책의 특징이다. 책의 구성은 총 3파트로 나뉜다. 이슬람에 대한 이야기와 오해에 대한 설명이 앞부분에 이루어지고, 중세시대 십자군 전쟁이 가졌던 의미를 서방국가의 입장에서 재조명한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과거를 지나 근현대화된 지하드와 새로운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 한다. 유대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의 근본은 하나님이다. 유대교와 이슬람교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메시아인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한 시대를 지나간 선지자로 여긴다. 여기서 세 유일신 종교의 차이점이 드러난다. 이 책의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와 무함마드를 곧 잘 비교한다. 이 책의 저자는 이슬람교가 가지고 있는 근본적 폭력성에 중점을 두고 있다. 이슬람교 창시자 무함마드부터 전사 출신이며, 지하드(성전)를 통해서 순교하거나 적을 죽일 경우에만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교리의 문제점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저자는 근본적으로 이슬람교는 평화를 추구하는 종교가 될 수 없음을 강조한다. 무함마드를 전쟁의 예언자라 말하며, 이슬람교의 꾸란을 전쟁서라 이야기한다. 또한 이슬람교에는 관용이 있을 수 없으며, 엄청난 남녀 불평등의 문제점을 지적한다. 흔히 동혼이라 알려져 있는 아랍의 결혼 풍토가 가져오는 사회적 문제를 질책한다. 이슬람의 포교활동이 무력에 의해서이며, 과학과 문화의 퇴보를 가져오는 것이 이슬람문화라 이야기 한다. 흔히 중세시대 십자군전쟁에 대해서 카톨릭의 모슬렘에 대한 무차별한 학살을 이야기 하곤 한다. 하지만 저자는 중세시대 카톨릭이 십자군원정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던 타당성을 이야기 한다. 아프리카와 아랍에서 그리스도교가 소수종교로 축소되어진 이유를 설명한다. 십자군 원정이 없었더라면 동유럽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가 모슬렘화 되었을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한다. 현대에 이르러서도 지하드는 계속되어지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국제적 사회적 문제를 야기 시키고 있다. 계속되는 테리들과 이슬람 국가들의 신분 차별들에 대해서는 심각하게 생각을 해 보아야 한다. 그리고 국가적인 전복을 꽤하는 모슬렘의 지하드의 궁극적 목적에 노출된 한국도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슬람 출발 자체가 폭력성에 근거한다는 저자의 말이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분명한 것은 그들은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