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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 이전의 아서왕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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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아서왕의 죽음>이라는 제목과 책의 두께를 보고, 그 간극에 당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목만 보면 아서 왕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 같은데, 그 내용으로만 두 권을 합쳐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채웠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책의 목차를 보고서야 아서 왕이 왕이 되기 전부터 수십 년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대기라는 것을 알고 그 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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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처음 보았을 때 <아서왕의 죽음>이라는 제목과 책의 두께를 보고, 그 간극에 당혹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제목만 보면 아서 왕 최후의 전투에 대해서만 다루는 것 같은데, 그 내용으로만 두 권을 합쳐 천 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채웠다는 것이 상상이 되지 않아서였다. 책의 목차를 보고서야 아서 왕이 왕이 되기 전부터 수십 년간의 이야기를 다루는 연대기라는 것을 알고 그 당혹감은 가셨지만, 저자의 생몰연도를 보고 다시 호기심이 일었다. 15세기라면 아직 영국에서는 르네상스가 완전히 도래하지 않았을 때, 르네상스 이전의 아서왕 이야기인 것이다. 서사시는 시대를 변천하면서 시대상을 반영하여 변화하기 마련이라, 르네상스와 근대를 거치면서 중세 시대의 이야기가 많이 바뀌었다고 한다. 그래서 중세 말기의 아서왕 이야기는 대체 어쨌을지 궁금해서 이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세 말기에 쓰인 책이다 보니, 많은 인물이 후대에 정립된 캐릭터와 배치되는 언행을 보여 준다. 일반적인 이미지와 정반대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캐릭터도 여럿 있어서, 심할 떄에는 책에 몰입하기 힘들 정도였다. 이를 테면 아서 왕과 함께 자란 의형제 케이가 의젓하고 반듯하게 나올 떄마다 어색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20세기의 아서왕 전설 총집편인 <아발론 연대기>는 그렇다쳐도 중세 독일 서사시인 <파르치팔>에서도 경솔한 사고뭉치여서 많은 분란을 일으켰는데, <아서 왕의 죽음>의 케이는 의젓한 기사일뿐만 아니라 아서 왕과 기사에게 바람직한 충고까지 한다. 케이는 그래도 어색한 정도로 넘어 갔는데, 트리스트람(트리스탄)의 숙부 마크 왕의 묘사에서는 위화감 때문에 머리를 쥐어뜯었더랬다. 이주드(이졸데)와 결혼하기 전부터 트리스트람을 의심하고 경계하지 않나, 트리스트람을 제거하겠답시고 비겁한 계략을 마구 꾸며대지 않나. 오페라 <트리스탄과 이졸데> 등에서 온화하고 사려 깊으며 조카를 끔찍이 사랑하는 마크 왕의 이미지에 익숙한 나로서는 적응하기 정말 힘들었고, 결국 트리스트람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마크 왕의 캐릭터에는 적응하지 못했다. 이처럼 <아서 왕의 죽음>에는 통상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다른 묘사가 많이 나와서, 아서 왕 신화에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이 보면 어리둥절할 대목이 많다.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단 적응하고 나면 통념과는 다른 캐릭터 묘사를 서로 비교하며 보는 재미가 쏠쏠하고, 왜 캐릭터가 바뀌었을지를 추측해보는 것도 재미있기는 하다.

 

이 책에서는 중세 시대의 문화를 직접적으로 보여 주는 대목도 나오는데, 역자가 상세하고 친절하게 주석을 붙여서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를테면 트리스트람이 사냥한 짐승을 솜씨 좋게 해체하는 모습을 본 사람이, 저런 기술을 가진 것을 보니 교육을 잘 받은 고귀한 신분일 것이라고 생각하는 대목이 그렇다. 후대가 시대적 배경이었다면, 저런 기술을 익힌 걸 보니 심부름과 뒤치다꺼리를 하는 인물일 것이라는 생각이 훨씬 더 잘 어울릴 부분이다. 이 외에도 중세 갑옷의 구조나 결투의 방식 등에 대해서도 자주 언급되는데, 중세 시대 문화를 연구할 때 자료로 참고할 수 있을 정도로 상세한 묘사도 많이 나온다.

 

아서 왕 이야기의 배경은 영국이지만, 막상 독일과 프랑스에서 서사시가 흥성했다가 나중에야 영국으로 반입되었다. 일종의 역수입이라고나 할까. 그래서 <아서왕 이야기>에는 자기 나라를 배경으로 하지만 외국에서 들어온 이야기에서 벌어질 수 있는 사소한 충돌이나 어긋나는 묘사도 종종 드러난다. 르네상스 이후 매끄럽게 다듬어지기 전의 이야기이다 보니 그런 것이겠지. 이런 점은 이야기로서의 완결성에는 감점 요소일 테지만, 오히려 그 자체로도 흥미진진한 이야깃거리나 연구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외국에서 막연하게 서술한 지리적 묘사를 영국 지리에 들어맞게 끼워맞추려는 노력이 드러나는 부분을 보다 보면 저절로 미소를 짓게 된다.

 

<아서 왕 이야기>는 텍스트 자체로서의 매력은 좀 떨어지는 편이다. 서사 이야기인 만큼 장황한 서술이 많이 나오고, 중세 문화를 모르면 이해하기 힘든 대목도 여럿 있다. 이야기 자체로는 꽤 재미있지만, 묘사와 대사가 너무 길다는 점은 재미를 떨어뜨리는 것이다. 하지만 일단 적응하면 흥미진진한 줄거리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게 되고, 중세 말기 텍스트를 원문의 느낌 그대로 읽을 수 있다는 색다른 즐거움도 만만찮다. 전반적인 아서왕 전설에 대해 알고 싶다면 <아서 왕의 죽음>은 소화하기 힘든 축에 들겠지만, 색다른 아서왕 전설을 접하고 있다면 <아서 왕의 죽음>은 르네상스 이후의 버전에서는 맛볼 수 없는 재미를 보여 줄 것이다.

p*******1 2011.01.23.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