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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저자가 ‘경제적 인간(homo economicus)’을 주인공으로 내세워 남성 위주로 통용되던 경제이론을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해석해 본 유쾌한 경제학 거꾸로 보기이다. 지은이는 스웨덴의 유력 일간지 『아프톤블라데트(Aftonbladet)』의 편집주간을 지내며 국제 금융․ 정치와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를 주로 썼으며, 경제학과 가부장제의 관계를 논한 저서 『유일한 성』으로 2012년 스웨덴 내 유력 문학상인 아우구스트프리세트(Augustpriset)의 논픽션 부문 후보에 오르기도 했다.
경제학에서 가장 유명한 말 ‘보이지 않는 손’은 애덤 스미스가 만들었지만, 이것을 유행시킨 것은 후대의 경제학자들 이라고 한다. 말 그대로 보거나 느낄 수 없고 ‘안에서부터 작용해서 시스템을 돌아가게 하는 원동력’이다.(p23) 그의 저서『국부론The Wealth of Nations』에 쓰인 그 개념은 이제 경제학과 더불어 세상을 읽어내는 기초가 되었다.
“나는 천체의 움직임을 계산해 낼 수 있지만 인간의 광기는 이해할 수 없다”는 뉴턴의 말이다. 뉴턴은 전체를 쪼개서 작은 조각으로 분해하면 무엇인가를 이해하는데 쉽다고 했다. 작게 나누고 그것을 반복하면 원자가 되는데 물질의 가장 작은 단위이다. 경제학자들은 이것을 응용해서 전체를 분해해서 남은 ‘개인’이라는 단위를 발견했다. ‘사회는 이 개인들의 총합에 불과’(p27)하다는 말로 설명한다.
상거래에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살 수 있고 식사를 할 수 있는 것이 그들의 수고스러운 손길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자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화폐와 교환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말을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애덤 스미스는 평생을 어머니와 살았던 독신남 이었다. 어머니가 집안일을 돌보고, 사촌이 돈 관리를 했단다. 그러니 간과한 것이 있으리라. 어머니의 아들을 위한 보살핌의 손길,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양조장 주인이 일에 고스란히 시간을 바칠 사이에 그들의 부인, 어머니, 누이들이 안에서 표가 나지 않는 집안일 등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데 바친 시간의 이야기가 빠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손길, 보이지 않는 수고, 티가 나지 않는 고생을 생략한 것이다. 남성 위주의 사관이라고 해야 할까. ‘의미 있는 일을 하지 않으면 아무 의미도 없다.’(p32) 는 말이 공허하다.
『로빈슨 크루소Robinson Crusoe』이야기는 경제학자들이 즐겨 쓰는 이야기라고 하는데, 여기서 개인의 창의력과 독창성에 대한 것을 말할 때 자주 인용된다. 바로 경제적인 인간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경제적이라는 말을 명쾌하게 설명해 주는 말이 있다. 바로 ‘싸게 사고, 비싸게 팔기.’다. 또한 경제적인 인간은 자신의 삶은 자신이 책임을 질 줄 안다. 하고자 하는 ‘욕망’과 더불어 앞으로 나아가 성장할 줄 아는 인간이다. 저렴한 시급으로 하루를 바치는 것도 우리가 ‘경제적 인간’이기 때문이고 인간의 본성이며 본질이기 때문이라고 말 한다.
2차 대전 후 정부의 시장 개방을 비판하는 학파로 유명세를 얻은 시카고대학의 경제학자들이 여성에게 관심을 기울이게 된 일은 흥미롭다. 그 중 게리 베커는 젊은 경제학자로서 모든 사람이 경제적 인간과 같다고 하며 경제학이 세상 전체에 관하여 연구하는 이론으로 확장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후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하게 된다.
경제적이라는 말은 어떤 일을 함에 있어 최소한의 비용, 시간, 노력을 이르는 말이다. 언젠가부터 ‘경제적’이라는 말에는 합리적이고 영리함을 함축시키는 말과 동등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1930년대에 이미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감정과 충동, 광적인 오해가 경제를 추진시키기도, 또한 무너뜨리기도 한다고 언급한 바 있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 그의 사상이 재조명받았다.’(p148) 주식시장이나 부동산 시장에서도 합리적인 이성보다는 인간의 광기어린 심리가 작용하여 폭락과 폭등의 현상이 나타나는 것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이 유행이었던 적이 있었다. 결혼한 직장여성은 더더욱 자기만의 시간이 부족하다. 지금 생각해 보니 남성 위주의 사회에서 남성들이 진급과 성공의 가도를 달릴 수 있도록 안에서 모든 것을 지원해 주었던 여성들의 손길은 감추어졌던 것이다. 세상은 과학과 산업의 발달로 온갖 전자제품이 생산되어 옛날보다는 훨씬 편리한 삶이 되었다. 하지만, 세탁기로 빨래를 편하게 할 수 있지만 빨래가 저절로 널어지지는 않는다. 그처럼 편리한 생활 속 곳곳에도 사람의 수고가 따른다. 여성의 권위가 신장되었다고는 하나, 아직은 교과서 속의 이상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현실의 삶에서는 괴리가 있다. 예를 들어 맞벌이 부부의 가사분담에 대한 것을 생각해 보더라도 어느 한 쪽에 치우친다. 분담의 규칙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니다.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세상은 빠르게 변화되어 가지만, 아직도 불평등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다. 세상과 인간을 연구하는 경제학의 관점이 페미니즘의 영역을 확대하여 연구하고, 사회, 경제, 정치 등의 변화를 보여줄 때 좀 더 나은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을 부여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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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에게 묻는 저 질문이 솔깃 솔깃! 부제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로 짐작하듯 이 책은 여성과 경제학의 관계를 살펴봅니다. ![]()
경제학이란 퍼즐에서 빠진 조각은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입니다. 애덤 스미스가 근본적인 무언가를 생략해버린 실수는 현재 너무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여성에게 부과한 특정활동, 여성으로 태어났기에 그 일을 해야 한다는 믿음. 그러다가 이런 활동은 경제적 의미가 없다는 경제 이론을 만들어내며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공식적인 세계관으로 자리 잡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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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말고도 밑에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고 부제까지 붙어 있어서 페미니스트의 시선으로 보는 경제학의 새로운 시선을 느낄 수 있을줄 알았으나 생각만큼은 아니었다. 일반적인 경제학 이론에 약간의 양념정도로만 들어가 있어 아쉬운 느낌. 인트로에서의 '리만 브라더스'가 아니라 '리만 시스터스'였다면 같은 신선한 비유나 관점이 더욱 많았으면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여성이 이러이러한 차별을 받고 있으니 권리를 찾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책은 아니다. 집안일을 돕는 메이드에게 주는 월급은 GDP에 영향을 끼치지만 그녀와 결혼하는 순간 GDP는 그 월급만큼 줄어든다는 점이나 나이드신 부모님을 집에서 모시면 경제학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양로원에 모시면 GDP 증가에 일조를 하게 되는 현재의 경제학 원리가 정당한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내용이고 이게 제대로 된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책이다. 이쯤되면 제목이 무슨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유추가 가능할 것이다. 애덤스미스는 평생 결혼을 하지 않았고 아주 젊은 나이에 결혼하 애덤스미스를 출산하고 3년만인가 얼마 안있어 남편을 잃은 그의 어머니가 평생 그의 뒷바라지를 하며 그의 학문연구를 도왔다는 것. 심지어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촌동생인가도 함께 도왔다고 한다. 천재들이 능력을 발휘하려면 그만한 환경이 갖춰져 있어야 하는데 이는 애덤스미스는 물론 현재의 경제학에서도 다루는 영역이 아니라는 이야기다. 얼마전에 보았던 도올 선생님의 강의에서 성경에서조차 여성은 정당한 사회구성원으로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해설을 들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에서도 중요한 이야기의 주인공은 왜 늘 남성이냐는 챕터가 있는데 조심스럽지만 당연하게 여겨왔던 사실을 젠더감수성을 바탕으로 의심해보는 연습을 할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머니에 대한 효도마인드는 덤이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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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내게 페미니즘에 대해 묻는다면, 나는 ‘앎을 대가로 편리를 지불하는 일’이라 답하겠다. ‘여성 혐오를 멈춰주세요!’라는 문장만으로 세상의 반 이상을 뒤덮은 혐오에 저항하기엔, 우리는 너무 멀리 왔다. 경제학, 철학, 정치학, 생물학, 문학 등 오래전부터 남성들만의 전유물로 이어져 온 수십 가지 학문은 이미 여성 혐오가 뿌리 깊게 자리잡혀 있다. 무지는 곧 권력이요, 혐오는 곧 죄로다. 내가 애용하는 말이지만 나 또한 아직 아는 것에 비해 모르는 것이 수억 배는 더 많다. 그게 인권만 따지고 든다 해도 말이다. 그래서 우리는 모르고 짓밟았던 풀들에 “어머, 몰랐어. 나는 그냥 흙뭉치인줄….”하고 사과하려들 때면 이미 때늦은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그 풀들은 짓밟히는 순간 다 죽어버렸거든. 죽어버린 시체를 뒤돌아보며 “암 쏘리.”하고 사과할 바에야 대놓고 약을 올리는 편이 덜 재수 없다 하겠다. 그러므로 우리는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거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를 읽음으로써, 또 다른 앎에 경지에 오르게 된다. 하지만 이미 머릿속에 덥석 입력시켜버린 걸 되돌릴 수도 없는 노릇이니, 이 혐오의 굴레 바퀴 속에서 빠져나가거나, 이 바퀴 자체를 파괴할 방법을 궁리하는 수밖에는 없다. 물론 이 책을 집었다는 거부터가 반성과 배움의 준비를 마쳤다는 뜻이니, 대부분은 후자를 택하겠지만. 어쨌든. 이러한 현상은 이 책의 근간이 되는 경제학뿐만이 아니다. 위에 말한 것과 더불어 모든 학문에 페미니즘을 접목했을 때 달라지는 시각의 차이는 너무도 충격적이고, 또 확연하다. 책 표지에는 ‘유쾌한 페미니스트의 경제학 뒤집어보기’라 되어 있지만, 두툼한 이 책은 그리 유쾌한 책은 아니다. 또 ‘애덤 스미스의 저녁을 차린 건 보이지 않는 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그의 어머니였다.’처럼 모성. 어쩌고 하며 감성에 치우쳐 있지도 않다. 오히려 ‘마거릿 더글러스가 애덤 스미스의 저녁을 차려준 건 맞지만 그녀가 정말 아들을 사랑해서 그랬는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지.’하며 사회가 여성에게 떠맡겨온 임무가 지나치게 이상적으로 표현되는 걸 차단한다. 혹은, 바로 이런 점이 지독한 혐오 속에서 쥐어 짜낼 수 있는 최선의 유쾌함일지도. 보이지 않는 손. 경제학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말이다. 경제학과 거리가 먼 사람도 이 말만은 몇 번 들어본 적이 있을 거다. 그리고 이 책은 말한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경제도 있다고. 마치 ‘제2의 성’처럼 말이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페미니스트가 바라보는 경제학을 담은 책이다. 경제학이라 하면 어쩐지 우리와 가깝고도 멀어 보인다. 아니 분명 내가 먹고 보고 자는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을 법한데, 정작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래서 더 어렵고 거부감이 든다. 게다가 이 어려운 학문에 페미니즘이라니. 경제학의 역사부터 다시 떼고 와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책은 생각만큼 어렵지도, 무게만큼 부담스럽게 다가오지도 않았다. 경제학에 대한 기본 배경 지식 없이도 쭉쭉 읽어나가는 데 큰 무리가 없을 거다. 물론 페미니즘을 처음 접하는 사람이 입문용으로 읽는 건 추천하지 않는다. 경제학의 역사부터 차근차근 설명하는 것도, 친절하게 구구절절 한 가지를 해석하는 것도 아니지만, 이 책의 제목이 무엇인가. 를 곱씹어보면 그 정도는 크게 신경 쓸 부분이 아니다. 남성과 여성이 생물학적으로 다르다는 점은 곧 정치적 위계를 정당화했으며, 이를 부정하는 것은 곧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차이를 부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여성이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의 의미는 임신과 출산을 한다는 것일 뿐이다. 여성이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가 대학에 갈 때까지 돌봐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의 육체에 여성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의 의미는 말 그대로 여성 호르몬이 더 많이 분비된다는 것이다. 수학을 가르쳐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여성만이 쾌감만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의 의미는 여성만이 쾌감을 느끼기 위해 존재하는 신체 부위를 가졌다는 것일 뿐이다. 이사회의 임원으로 일할 수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선 그동안 ‘생물학적’ 그리고 ‘보편적’이란 단어 뒤에 기생하던 성 고정관념, 그리고 정당한 ‘노동’으로 취급받지 못했던 가사노동에 관해 이야기한다. 그동안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은 가사노동을 떠맡아 왔다. 여성이 집안일을 더 잘 한다는 결론의 근거를 물으면, 학자들은 생물학적 이유를 갖다 대며 뒤에 숨어버렸다. 그리고 효율성을 따지며 생물학을 부정하는 거냐고 이에 반하는 사람들의 입을 막아왔다. 하지만, 그래 백 번 양보해ㅡ사실 별로 양보하고 싶지 않지만ㅡ여성이 집안일을 남성보다 월등하게 잘 한다는 가정을 해보자. 하지만 이게 여성이 받을 교육의 권리를 박탈하고, 집 안에 묶어둘 근거로 정당한 걸까? 아직도 진행되고 있을 이 뼈아픈 현실이 부끄러울 뿐이다. 그리고 가사노동. 가사노동의 또 다른 말은 바로 무보수 노동이다. 그리고 전 세계 여성은 전체 일하는 시간의 3분의 2를 무보수 노동에 바치며, 이 가사노동의 가치는 GDP의 30.6~41.4%를 차지한다. 엄청난 수치가 아닐 수 없다. 남성이 주류가 되는 사회에서 남성이 하지 않는 일은 자연스레 하등 시 여겨졌다. 그런데 가사 노동이 이 정도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니. 상상이나 해보았을까. 아직도 ‘노동’을 ‘노동’으로 읽어내지 못한 사람들이 수두룩하다. 이 노동의 대가를 반드시 돈이나 물질로 보상해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저 여성이 하는 일이라며 그들이 등한시했던 이 노동의 피와 땀이 무겁게 느껴질 뿐이다. 경제적 인간의 모든 특성이 우리가 남성성이라고 규정한 모든 특징과 일치하는 데서 문제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 특성들이 우리가 여성성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우월하고 그 위에 군림할 가치가 있다고 받아들이게 된 것이 더 큰 문제다. ㅡ책에서는 서구 사회라 되어있지만 내가 보기엔 어딜 가든 그렇다ㅡ이분법으로 나누기 참 좋아하는 사회에서 우리는 또 그 안의 우열을 가리고, 항상 우등한 것은 남성, 열등한 것은 여성으로 구분 지었다. 책에 계속 등장하는 ‘경제적 인간’처럼 ‘사람’이라는 틀 안에는 남성만이 존재하게 했다. 그리고 여성은 그 이외의 것으로 취급하며 미지의 존재. 즉 성녀 혹은 창녀화 시켰다. 자연. 주관. 감정. 수동적. 땅. 의존. 이것들이 나쁘다는 게 아니다. 그러나 저 모든 게 사람(경제적 인간. 남자.)의 정반대 개념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가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 짓는 동안 수많은 여성의 이름과 목소리를 잃었다. 그 이름들은 경제학을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혹은 그럴 수밖에 없었던) 페미니스트들이 아니었다면 영원히 묻혔을 것이다. 그가 이성이 되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감정이 되어야 한다. 그가 육체의 속박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육체가 되어야 한다. 그가 독립적이려면 누군가는 의존적이어야 한다. 그가 세상을 정복하기 위해서는 누군가는 복종해야 한다. 그가 이기적이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희생해야 한다. 애덤 스미스가 저녁 식사에 들어간 노동을 가치 없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그를 위해 스테이크를 요리해야만 한다. 우리는 단순히 솥에 여성을 추가해 섞었다. 한 세대 전체가 “너는 무엇이든 될 수 있어”라는 말을 “너는 무엇이든 되어야만 해”로 해석했다. ‘모든 것을 갖는 것’은 ‘모든 것을 하는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지 않으면 쓸모없는 사람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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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깐 애덤 스미스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이 책의 제목부터 나의 어떤 것을 건드렸다. 그렇다, 보이지 않는 손을 제창한 그분의, 빵집 주인과 정육점 주인의 이기심 덕에 저녁을 먹을 수 있었다고 주장한 그분의 저녁은 누가 차려줬는가. 우리가 간과하고 있는 경제학의 큰 부분이 이 질문 하나로 수면 위로 떠올랐다. 현재 우리 사회는 거의 모든 것에 경제학 논리를 적용하고 있다. 실제로 나부터도 그러한 내용의 책들을 즐겨 읽으면서 경제학 논리야말로 명쾌하고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논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무상으로 제공되고 있는 돌봄의 영역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저자의 말대로, 그 돌봄의 영역은 여성의 영역으로 간주되고 있었다. 무엇이 먼저라고 해야할까? 닭이 먼저인지, 달걀이 먼저인지 알 수 없다. 돌봄의 영역이, 여성의 영역이 경제학에서 무시되면서 여성의 입지가 좁아진 것인지, 원래 여성의 입지가 좁아서 경제학에서 무시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어쨋든 경제학은 여성의 존재를 무시하였고, (정확히 여성의 돌봄을 무가치한 것으로 평가하였고) 경제적 인간은 남성적 특징만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그로 인하여 현재 우리 사회에서는 피터지는 남녀간의 싸움이 벌어지고 말았다. 나도 일하는 여성이다. 예전이라면 돌봄의 영역이고 여성의 영역이라고 생각되었던 간호사, 교사 등의 직업이 아닌, 남성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던 의사로 일하고 있다. 의사로 일을 시작하면서 여전히 이 일이 남성의 일이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과 사회적 편견들에 부딪혔었다. 일례로, 여자환자의 소변줄은 간호사가 꽂고 남자환자의 소변줄은 의사가 꽂는다. 간호사는 여성, 의사는 남성이라는 굳건한 사회적 편견위에 만들어진 일분배방식이다. (그래서 몇몇 환자들은 굉장히 당혹스러워했지만 나는 그냥 태연한 척 일을 수행해야 했다.) 여성들이 남성들의 영역이라고 간주되었던 곳에 진출하면서 원래 여성의 영역이었던 돌봄의 영역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남성이든, 여성이든 이 책은 한 번 읽어볼 필요가 있다. 여성이라면 자기에게 강요되는 사회적 성공과 동시에 가정을 돌봐야한다는 사회적 압박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을 것이고, 남성이라면 현대 사회에서 (남성이 보기에 어느때보다 여권이 강해져 오히려 역차별이 되는 것 같은 이 사회에서) 왜 아직도 여성들이 남녀평등을 주장하는지 약간의 짐작이라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나 역시 너무나 자명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경제학의 논리가 수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고, 특히 여성의 영역을 무시함으로써 오늘날의 이런 사회를 초래했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모든이들이 꼭 한번은 읽어봐야 할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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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경제학의 아버지, 애덤 스미스가 <국부론>에서 언급했다는 말이죠. 애덤 스미스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말로 '시장'의 작용을 설명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애덤 스미스의 경제학에는 보이지 않는 손이 하나 더 있습니다. 바로,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매끼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 말입니다. 20년쯤 전 일로 기억합니다. 당시 한 여성이 이혼을 하면서 재산 분할에 대한 권리를 청구했는데, 재판에서 '가사노동'의 가치를 고려한 위자료도 함께 청구했던 거죠. 그런데 그 액수가 어마어마했습니다. 재산을 분할할게 아니라 전부 줘야 할 정도였죠. 재판 결과가 어땠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때의 경험은 '가사노동'이 결코 공짜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죠. 언제부터였는지 알지 못하지만 사회를 지배하는, 주도하는 개념을 차지하고 있는 경제학만을 보고 배워왔습니다. 경제는 활성화시켜야 하고, 경쟁은 자유로워야 하며, 그를 위해 끊임없이 능력을 계발해야 하고, 뒤처지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과 함께 말이죠. 이유는 분명하지 않지만 한국 사회는 여성의 사회 참여를 부정적으로 생각한다고 여겨왔습니다. 가부장적인 인식도 있었고, 여성이 사회생활을 하는데 불편함이 너무 많아 보였으니까요. 같은 교육을 받고, 오히려 더 나은 성적을 내도 직장에서는 더 낮은 급여를 받고, 승진의 기회도 적다는 이야기도 그런 생각을 부추겼습니다. 솔직히 그런 인식과 차별의 문제들, 불평등과 부당한 대우들을 단순히 우리 사회의 문제라고 생각해왔습니다. 그래서 선진국들은 역시 다르다며, 당당한 커리어 우먼들을 내세운 외국 사회를 마냥 아름답다고 믿었죠. 하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차별들과 불평등하고 부당한 대우는 단지 우리 사회의 문제가 아니라 여성이 있는 모든 곳에서 일어나는 문제였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는 이런 문제들을 페미니즘 경제학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경제학에 대한 지식이 없어도, 여성 문제에 관심을 둔 적이 없어 선후 관계를 잘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주제를 통해서 말이죠. 이 '주제'는 앞에서 이야기한 애덤 스미스의 '보이지 않는 손', 애덤 스미스의 식탁에 식사를 차려 올리는 '어머니의 손'을 말한 겁니다.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어느 집에서나 '여성', 엄마, 할머니, 아내, 심지어는 딸이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을 겁니다. 말이 집안일이지, 사실은 이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고, 많은 수고와 시간이 필요한 작업입니다. 요리, 청소에서부터 온갖 잡다한 일까지 더하면 하루가 모자라다고도 하죠. 이러한 '보이지 않는 일'을 경제학에서는 '생산활동'이 아니라는 이유로 제외해 왔습니다. 동시에 집안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여성조차 보이지 않게 만들었습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여성을 단순히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가치 없는 존재' 혹은 '무능한 존재'로 치부해버렸다는 데 있습니다. 가정은 물론 사회, 국가의 유지를 위해서는 누군가는 집안일을 해야만 합니다. 아주 먼 옛날에는 사냥과 채집이라는 활동이 주된 경제활동이었기에 여성은 가사와 육아를 담당하는 식의 책임 분담이 자연스러웠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현대 사회는 그때와 전혀 다릅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만큼 명백히 다르죠. 하지만 경제학에서는 여전히, 그렇게 믿는 듯 보인다는 겁니다. 경제학은 여성의 기여와 가치를 배제했을 뿐 아니라 '경제의 원리'라는 것도 왜곡시켜왔습니다. 경제의 시작은 '경쟁'이라는 식으로 말이죠. '무한 경쟁'이라는 말이 귀에 익숙할 겁니다. 경제학은 모든 걸 '이윤 추구'로 수렴시켜버립니다. 경제를 예측하는 사람들, 계획하는 사람들이 만드는 모델은 이상적인 '경제적 인간'을 대상으로 하는데, 이들 경제적 인간은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언제나 최대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며, 사랑이나 인정, 외로움과 같은 건 느끼지 못하는 존재입니다. 경제 정책이 현실과 동떨어졌다고 느낀 적이 있으실 겁니다. 아주 당연한 일입니다. 정책을 입안하는 사람들이 생각한 '경제적 인간'과 실제적 인간은 너무 다르니까요. 실제적 인간은 잠을 자야 하고, 외로움과 동정 같은 감정을 지니고 있고, 때로는 합리적이지 않은(사실은 거의 언제나 합리적이지 않은) 선택을 하는 존재입니다. 전혀 다른 존재를 대상으로 같은 정책이 실행되다 보니 이상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거죠. '경제적 인간' 존재의 비인간성만이 문제 되는 게 아닙니다. 이 존재의 성별은 '당연히 남성'이며, 남성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이며, 객관적이고, 과학적이라는 인식도 함께 있다는 겁니다. 영어에서의 자연(MOTHER NATURE)이라는 표현도, 여성이 상징하는 게 '자연'이라는 인식에서였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자연은 정복되어야 하고, 수동적이며, 무력하고, 의사를 표현하지도 못한다는 부정적인 면에서 말이죠. 그는 그가 제거해 버리고자 하는 현실에 반응해 출현한 존재다. 육체, 감정, 의존성, 불안감, 취약성 말이다. 그것은 수천 년간 사회에서 여성들의 자리라고 말해왔던 특징이기도 하다. 경제적 인간은 그런 것들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남성들이 만든 이론에, 남성이 중심이 된 경제학과 남성 위주로 돌아가는 경제 구조. 잘못된 구조가 먼저인지, 잘못된 인식이 먼저인지는 알지 못하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잘못이 잘못이 아닌 것처럼, 오히려 정상적인 것처럼 믿게 만들어버렸습니다. 차별이라는 생각을 못하거나, 차별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지금까지 그래 왔으니 문제없다며 무시하게 만들어버렸다는 겁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에서 다루는 문제점들은 처음 제기되는 것이 아닙니다. 지속적으로 제기되어 왔지만 해결되지 않고 미뤄져 온 문제입니다. 여성 차별, 여성 혐오는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문제입니다. 저를 포함해서, '나는 아니다'라고 말하는 이들도 모든 순간에 여성과 남성을 동등하게, 조금의 차별도 없이 대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겁니다. 표현하는 언어가 그렇게 되어있고, 사회 구조가 그러하며, 집안에서도 명백하니까요. 얼마 전 정부에서 '가임기 여성 지도'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밝혀져 경악하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더 최근에는 여성들의 사회 진출을 방해, 차단하기 위해서 '불이익'을 줘야 한다는 문건을 작성한 정책 연구원도 있다고 합니다. 나아져야 할 것이, 당연히 그렇게 되어야 할 것조차 나아지게 하기가 이렇게 어려울 수 있는지.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은 경제학의 이론과 적용, 사회 현상들을 두루 돌아보며 곳곳에 숨어있는 '차별'을 드러내 보여줍니다. 너무나 당연하게 여겨왔던 것이 사실은 전혀 당연한 것이 아니며, 보이지 않았던 것들, 보지 않으려고 했던 것들이 전혀 가치 없는 게 아니라 가치를 측정할 수 없을 정도라는 사실도 제기합니다. 학교에서 배우기를 '가정'은 휴식과 재생산의 공간이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가정에 돌아와도 휴식할 수 없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생산은커녕, 재 소모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이름은 '여성'입니다. 누가, 어떤 권리로 여성을 보이지 않는 존재로 만들 수 있을까요. 어떻게 '의미 없는 일'과 여성을 등식에 넣을 수 있는 걸까요. 경제학이 나아가야 하는 방향은 명확합니다. 지금까지 발견한 문제들 가운데 애써 무시하고 못 본 척 해왔던 여성 문제를 포함시키는 겁니다. 가정에서의 활동(남성이 하든 여성이 하든)도 경제에 포함시키는 겁니다. 왜 집안일을 가사도우미에게 맡겼을 때만 경제활동이 되는지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지금까지 당연하다고 여겨져 왔던 부당하고 불합리한 일들을 바로 잡아야만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식과 함께 구조도 변해야만 합니다. 어머니가 없이 태어난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여자가 낳은 이는 나를 해칠 수 없다"라며 자만했던 맥베스를 죽인 어머니의 배를 가르고 태어난 자에게도 어머니는 있었습니다. <잠깐, 애덤 스미스 씨 저녁은 누가 차려줬어요?> 저자 카트리네 마르살도 이야기하는 바지만 인간은 연약하게 태어납니다. 보호와 양육이 꼭 필요한 존재로 말이죠. 그 기간이 없다면 인간도, 인간의 사회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경제학은 그러한 아주 기본적인 사실을 외면해왔습니다. 그렇기에 '틀렸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겁니다. '우리는 모두 페미니스트가 되어야 합니다.' 작가 치마만다 은고지 아다치에의 말이자, 책 제목이기도 합니다. 우리의 태생을 생각한다면, 삶의 시작을 기억한다면 우리는 당연히 페미니스트여야 합니다. 아니었다면 되기 위해 애써야만 합니다. 우리는 자유롭고, 우리는 평등합니다. 그에 대한 대우 역시 동일해야 합니다. 경제는 무한경쟁으로만 돌아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는 경쟁으로만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동정과 이타심, 희생정신까지도 지니고 있습니다. 어쩌면 경제는 경쟁이 아니라, 사랑을 중심으로 돌아가야 하는 건지도 모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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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에 관한 이야기를 유쾌하게 즐길 수 있는 책이 나왔다. 지은이 카트리네 마르살은 스웨덴 웁살라대학을 나와 언론사에서 편집주간을 지내며 국제 금융, 정치와 페미니즘에 대한 기사를 주로 썼다. 그녀는 자신만의 특기를 살려 독자에게 경제학의 저녁 식탁을 선보인다.
"그가 저녁 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상인들이 자신들의 이익을 추구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어머니가 매일 저녁 식사가 식탁에 오를 수 있도록 보살폈기 때문이다." (32쪽)
애덤 스미스가 평생 독신으로 지내며 자신의 업적을 이룰 수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돌봐줬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역설적이게도 애덤 스미스는 자신의 경제학에서 여성들이 시간과 노동력을 들여 해 주는 모든 일은 무시해 버렸다. 그가 인간의 욕망과 이익 추구로 돌아가는 사회를 생각하는 동안 자신을 돌봐준 어머니를 까맣게 잊었던 것이다.
말미에 사진 한 장이 놓여 있다. 콘래드 메츠가 그린 애덤 스미스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러스의 초상화(사진)다. 1778년 그녀의 나이 84세 때 모습이다. 마르살은 단호하게 말한다. 어머니를 잊은 자들에게 미래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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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학의 바이블 '국부론'을 집필한 애덤은 여성의 집안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경제활동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가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던 것은 푸줏간 주인, 빵집 주인 등 (음식을 올리기 위한 과정에 수반되는 모든 인물들)이 '자기 이익을 추구하려는 욕구'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죠. 그의 이러한 주장은 어떻게 본다면 굉장히 설득력 있는 주장일지 모릅니다. 실제 그는 이 분야에서는 실로 대부라고 불리울 정도이니 그의 주장과 이론이 널리 설득력을 얻었음은 자명하죠. 하지만 이 책의 제목처럼 "그 저녁 누가 차려주었어요?" 라고 묻는다면 과연 뭐라고 대답할까요? 우리는 '보이지 않는 손'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시험 답안지에 쓰면서도 어머니가 매일 저녁을 차려준 장본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깜빡 잊거나 묵과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도 푸줏간 주인이나 빵집 주인처럼 자신의 이기심과 이익추구를 향한 욕구때문에 아들에게 저녁밥상을 매일마다 차려주었을까요? 경제학의 대부라고 불리울 만한 엄청난 학자와 바이블인 국부론이 탄생하는 역사적 순간에 노모는 아무런 이기심없이 묵묵히 저녁밥을 차리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평생 결혼하지 않았던 아들을 위해 더더욱 노모는 자신의 체력과 노동을 무대가로 자식과 가정에게 바쳤더랬죠. 시카고 학파를 비롯한 주류경제학에서 주창하던 경제적인간은 로빈슨크루소와 매우 닮아있습니다. 무인도에서도 재빨리 체제를 창출해내어 화폐없이도 필요한 물건을 구매하고, 합리적인 사람이므로 가장 효율적이게 가장 비용이 적게드는 경로를 선택하며,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 누구에게도 의존하지 않으며, 완전한 독립체이죠. 모든 인간을 경제적인간의 모습으로써 묘사했지만, 철저히 그것은 남성의 모습일 뿐이었죠. 남성만이 항상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일하는 존재이며 이 과정에서 여성은 배제되었습니다. 대신 자기이익 극대화와는 전혀 정반대, 즉 '타인 돌보기'라는 임무가 주어졌죠. 왜냐하니, 애초에 출산과 생리라는 신체적인 제약을 갖고 태어났기에 합리적일 수가 없다는 주장이었습니다. 그러한 제약을 갖고 태어난지라 여성은 천상 양육, 청소, 빨래와 같은 가정일에 매진하게 되는데 이는 교환가능한 유형의 재화를 생산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 다시 공적영역에서 밀리게 되었고, 경제라는 영역은 여자에게는 그야말로 함부로 발들일 수 없는 성역이 되고 말지요. 어떠한 합당한 근거도, 설득력 강한 모델도 없이 그저 생체적인 문제로 女性은 비생산적 존재로 취급되고 끊임없이 사적 영역, 즉 가사일에 시달리게 되죠. 실제 짐바브웨의 한 어린 여성은 새벽4시부터 밤9시까지 쉴새없이 가사일에 매달리고 가족 구성원을 돌보기 위해서 희생하지만 당연하게도 무보수이며, 경제학적 모델로부터 철저히 배제된 존재죠. 그녀의 노동력은 천연자원과 같아서 측정의 필요성을 못느껴 'GDP에 넣을 필요가 없다'라는 것이 논거 아닌 논거구요. 남녀를 각각 이기적인 모습과 자기희생적인 모습으로 양분한 채, 우리는 성 불평등을 굉장히 자연스럽게 여기며 기나긴 세월을 지냈으며, 현재도 결코 변한 것 없는 세상 속에 살고 있습니다. 여전히 자유로운 경제활동에 대한 갈망 속에서 좀 더 이기적이고 합리적인 개체가 되기를 지향하고 또 희망하죠,. 하지만 우리는 경제 모델 속에는 늘 포함되지 않았던 여자들의 무보수 노동이 세계빈곤 및 성차별, 성불평등으로 어떻게 이어지고 있는지, 어떤 관계가 있는지에 대해 더이상 외면해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을 새삼 하게 되었습니다.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것을 추구하려는 욕망 뒤에 움직이는 비하인드 이코노미. 거기에는 수많은 무보수 가사노동이 숨어져 있음을 자각할 수 있었어요. 미혼이었던 애덤스미스가 한 평생 의존했다던 그의 어머니 마거릿 더글라스. 비록 애덤은 어머니의 공짜 저녁을 너무도 자연스럽게 매일마다 먹으면서도 '공짜 점심이란 없다'는 사실을 온 세상에 전파했지만, 우리는 이제라도 알아야겠습니다. "공짜 돌보기도 없다"는 사실을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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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전 결혼해 두 명의 자녀를 둔 직장인 이씨. 이씨는 해 뜨기 전 이른 아침 회사로 가는 통근버스를 타기 위해 집을 나섭니다. 지난 밤 아이들을 재워놓고 조금 늦게까지 예능프로를 보느라 부족했던 잠을 통근버스에서 보충합니다. 회사에 도착해 메일을 확인하고, 보고서도 쓰고, 협력사와 회의도 합니다. 바쁜 하루 일정이기는 하지만 업무 중간 중간 동료들과 차도 마시며 잡담할 시간은 충분히 가질 수 있습니다. 야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이씨는 법정 노동 시간 안에서만 일하면 됩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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