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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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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제목은 조금 서툰말의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에 읽은 신데렐라는 그 이름 자체가 재투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신데렐라를 우리말로 풀어놓고 그 문장을 제목으로 적어놓았으니 왠지 조금 단호한 느낌도 받게 되고.어쩌면 나는 '공주'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적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릴때부터 신데렐라를 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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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제목은 조금 서툰말의 느낌이 들었다. 어릴적에 읽은 신데렐라는 그 이름 자체가 재투성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 책의 제목은 말 그대로 신데렐라를 우리말로 풀어놓고 그 문장을 제목으로 적어놓았으니 왠지 조금 단호한 느낌도 받게 되고.
어쩌면 나는 '공주'라는 것에 대한 인식이 적어서 그랬는지도 모르겠지만 어릴때부터 신데렐라를 공주의 대열에 놓지도 않았었고 신데렐라는 재투성이가 맞기는 하지만 새삼 그걸 강조하는 문장을 앞에 놓고 보니 단순함을 뜻하는 것인가 싶은 생각도 들게 된다.

어릴적에 아이들이 놀 때 부르는 노래가 있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여의고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라는 노랫말에 맞춰 짝궁과 손유희를 하며 놀 때 불러대던 그 노래말이다. 사실 뭐 나는 그런걸 하며 놀아본 기억이 별로 없어서 신데렐라가 부모님이 안계신건지, 엄마만 안계셨던건지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우리가, 아니 내가 아는 신데렐라 동화 이야기는 콩쥐팥쥐 이야기처럼 어릴 때 계모와 의붓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지만 꿋꿋이 견디어내고 요정의 도움으로 왕자와 결혼하여 잘먹고 잘 살았습니다,라는 것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다. 그것이 아마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의 끝부분에 첨부되어 있는 샤를 페로의 신데렐라와 작은 유리 신발 이야기인 듯 하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이 얘기나 저 얘기나 내가 어렸을 적 읽었던 이야기나 뭐가 달라? 라는 생각이 들 뿐이다.

신데렐라에 대한 이야기는 다들 한번쯤 들어봤을테니 어떤 내용인지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그런데 내 기억속의 신데렐라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일뿐이었다. 한 아이가 있었고 계모와 의붓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으며 온갖 집안일을 다 하느라 재투성이가 되었지만 마음씨가 착해서 못된 언니들을 혼내지도 못하고, 그래서 결국은 잘먹고 잘 살았다는 이야기일뿐 그리 크게 마음에 남는 동화이야기는 아니었다. 친구들은 모두 그림동화책으로 책을 읽으며 책에 실려있는 이쁜 신데렐라의 모습을 보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원작의 단순한 이야기에 담긴 참 뜻보다 화려한 신데렐라의 공주같은 모습에 더 열광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한글을 겨우 깨우칠때부터 그림동화가 아닌 깨알같은 글씨들만 담겨있는 이야기책을 읽어서 신데렐라 역시 그냥 하나의 옛날 이야기중에 하나였을 뿐인지도 모르겠다.

동화는 아름답고 순수하고 이쁘기만 한 이야기를 뜻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한때 유행하다시피 했던 잔혹동화라는 말 역시 잘못되었다는 이양호선생의 글을 읽으며 새삼스럽게 '푸른수염'이라는 이야기를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림형제의 동화이야기에 실려있던 그 이야기는 몇년 전에 개봉됐던 - 내가 무섭고 끔찍해서 보지 못했던 영화 스위니 토드의 이야기와 크게 다를 것도 없지 않은가. 하지만 정말 이양호선생의 말대로 고갯길을 넘을때마다 떡하나를 던져주다가 끝내 아이들을 위해 자신의 사지육신도 던져주기를 서슴지 않았던 엄마의 사랑이 더 크게 다가오는 우리의 옛 이야기처럼 푸른수염을 읽으면서 무섭다는 느낌보다는 나쁜놈은 결국 벌을 받게 된다는 느낌이 더 컸던 것 같다. 가장 무서웠던 것은 현명하지 못한 단순한 호기심은 죽음의 위험에 이를수도 있겠구나, 정도였을까?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의 내용은 신데렐라에 대한 담백한 원작의 꾸밈없는 담백한 번역과 영문번역과 독일어 원문이 담겨있고 뒷부분은 그에 대한 역자의 해설이다. 솔직히 역자의 해설이 그리 쉽지는 않았다. 기독교적 세계관으로 원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설명은 왠지 종교적으로 치우친 해설이 아닌가 싶은 거부감이 들기도 했지만, '재'에 대한 설명을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설명이며 기독교적 세계관을 떠나서는 그들의 문화에서 파생되어 나온 옛이야기를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겠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해설 부분이 재밌어지기 시작했다.
재에 대한 이야기뿐만 아니라 신발에 대한 이야기, 새하얀 새, 옷이 상징하는 의미, 혼인의 의미 등등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상징과 의미가 마구 쏟아져나온다. - 이 이야기들이 무엇인지 궁금하시다면 책을 읽으시라.

짧은 동화 한편 읽으면서 이리 세세하게 분석하고 파헤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이렇게 짧은 이야기 한편에도 우리의 삶이 담겨있고 그 삶의 모습에서 나오는 진실함이 결국은 모두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임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삶의 진솔함을 담고 있으며 이야기를 통해 그것을 깨닫는 것이 또한 전래동화를 읽는 이유임을 알고 우리 아이들에게 동화를 읽어줘야 할 것이다. 그럴 때 신데렐라는 공주이야기가 아니라 재투성이 이야기라는 것을 제대로 전해줄 수 있다.




r***2 2009.11.19. 신고 공감 3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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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투성이는 재투성이인데....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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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 권은 제목도 신선 아니 충격적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책으로 작년에 무척 파격적(?)으로 읽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무렵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였을까... 한창 명작의 원전 읽기가 화두처럼 불거졌었던 것같다. 그래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하던 이들에게 <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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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도르프 선생님이 들려주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두 번째 권이다.

첫 번째 권은 제목도 신선 아니 충격적인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라는 책으로 작년에 무척 파격적(?)으로 읽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 무렵 아니 이미 오래 전부터였을까... 한창 명작의 원전 읽기가 화두처럼 불거졌었던 것같다. 그래서인지 나뿐만 아니라 원전에 대한 욕구에 목말라하던 이들에게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는 한줄기 신선한 바람과도 같았을 것이다.

더구나 저자 자신이 현재 우리가 또는 우리의 아이들이 알고 있는 대부분의 명작동화가 탄생한 독일에서, 세계적인 대안교육 기관으로 손꼽히는 발도르프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돌아와 쓴 글이라니 신빙성이 더해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발도르프 선생님인 저자가 들려주는 애초의 독일동화인 백설공주에는 그 어디에도 '공주'라는 말은 없었다. 다만 '새하얀 눈 아이'만 있었을 뿐. 다만 '새하얀 눈 아이'가 이런저런 연유로 '공주'가 되었다는 것! 즉, 원작을 무시한 엉터리 번역을 거치며 왜곡되었을 뿐만 아니라 콤플렉스까지 생겨나게 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물론, 저자 나름의 논거는 다름아닌 원작자인 그림 형제의 이야기로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어린이를 위한 동화가 아니라 가족들을 위한 가족동화인 백설공주였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라는 이 책 역시 그림 형제의 작품을 바탕으로 저자는 독일어와 영어를 병행하여 실어놓고, 단어 하나의 의미를 분석하고 있다. 아마도 저자가 발도르프 대학에서 4년동안 들었던 '언어조형'수업을 통해 발견하고 깨달았을 '왜곡'을 바로 잡으려는 것이 일련의 개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는 이미 첫 번째 권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온가족이나 사회 전체가 읽는 가족동화가 아니라 그저(?) 아이들이 '재미'로 읽는 많은 명작동화 중 하나이다. 물론 단순한 '재미'만이 아니라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교훈적인 메시지를 뻔하게 담고 있지만 말이다.

 

아이들이 읽는 신데렐라는 이미 아이들도 '재투성이'란 뜻임을 알고 있다. 신데렐라가 바로 재투성이라는 뜻임을 대부분의 책들이 알려주고 있기에......

 

물론, 발도르프 선생님의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에는 액면 그대로의 '재투성이'의 의미만을 일깨워주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재'가 의미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재투성이'란 그저 먼지처럼 '재'가 묻어 있는 정도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재'를 입고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재투성이는 재를 입고 있는 아이로, 결국엔 '재'를 벗고 황금옷을 입는 아이가 되는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인격을 상징하는 '옷'의 의미를 되새겨준다.

 

그림 형제의 원작에는 '재투성이'의 모습뿐만 아니라 번역과 왜곡을 거치는 동안 바뀌고 변질되어 우리가 볼 수 없었던 이야기를 복구해내고 있어 마치 또 다른 이야기를 듣는 듯하다. 어머니의 무덤이며 아버지의 모자와 '어린 나뭇가지'와 새하얀 새 등등이 정말 생소하다.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보다 더 폭넓게 원작이 내포하고 있는 (어쩌면 당시에는 표출하고 있는?) 의미를 파헤치는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는 원작에 대한 갈구를 더욱 타당하게 만들어주는 듯하다.

 

문득, 오늘날 우리 아이들이 읽는 명작들이 단순히 원작의 번역상 왜곡이 아닐 수도 있다는 오기가 피어오른다.

오늘날 주로 어린아이들에게 읽혀지고 있는 명작들이란 점을 생각하면 말이다. 애초의 명작이 아이들을 위한 이야기가 아니라 가족을 위한 가족동화였다는 점과 더불어 사회가 어린아이들을 주체로 인정하기 시작한 것이 역사적으로 그리 오래되지 않았던 점을 생각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즉, 애초의 이야기는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성인)을 위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그에 비해 어른들이 아닌 아이들을 위해 원작을 번역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적당한(?) 손질을 거쳐야 하지 않았을까......

 

그 과정에서 공주가 탄생하고, 재투성이는 옷이 아닌 먼지와 같이 다소 가벼워진(?) 것이 되지 않았을까.....물론, 예기치 못한 부작용(?)의 하나로 '공주 콤플렉스'가 나오긴 했지만 말이다.

 

요즘의 명작은 아이들만 읽는다고 생각하는 어른들에게, 발도르프 선생님의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는 어쩌면 아이들에게 읽혀지던 이야기가 애초에는 어른들을 위한 이야기였다는 것을 깨우쳐 주는, 분명 신선한 이야기이다.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이 책을 읽는다면 과연 이것이 아이들만 읽는 동화란 말이야? 라는 소리가 절로 나지 않겠는가......

j************4 2009.12.03.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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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데렐라를 제대로 아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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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번에도 역시 무척 흥미진진하다. 사실 첫번째 백설공주 이야기를 분석해서 들려줄때도 내가 알고 있던 이쁘기만한 동화에 대한 어릴적 꿈을 확 깨버리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 뭔가 속은듯한 혼란스러운 느낌도 받았으며 작가가 너무 따지고 드는것이 좀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번째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저절로 관심이 가는걸 보니 그당시 책읽기가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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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이번에도 역시 무척 흥미진진하다.

사실 첫번째 백설공주 이야기를 분석해서 들려줄때도

내가 알고 있던 이쁘기만한 동화에 대한 어릴적 꿈을 확 깨버리고

참 많은 생각을 하게 해주어 뭔가 속은듯한 혼란스러운 느낌도 받았으며

작가가 너무 따지고 드는것이 좀 못마땅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두번째 신데렐라 이야기에도 저절로 관심이 가는걸 보니

그당시 책읽기가 무척 흥미로웠다는 사실을 부인할수 없겠다.

 

그림형제가 들려주는 재투성이 신데렐라 또한 왕자와 결혼을 한다.

하지만 그과정에서 개암나무를 엄마의 무덤위에 심어 매일 세번을 울고

그 개암나무로부터 세벌의 멋지고 화려하고 이쁜 옷을 얻어입고

금빛 신발 한짝을 흘리고 하는 내가 알고 있는것과 다른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요정이 나오거나 호박마차가 나오거나 12시를 알리는 종은 치지 않는다.

왤까?

내가 알고 있던 유리구두를 신고 왕자님과 춤을 추는 신데렐라는

도대체 무슨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것일까?

 

이 작가는 신데렐라가 왕자와 춤을 출 수 있었던건 얼굴이 이뻤기 때문이 아닌

화려한 옷때문이라고 말한다. 그 화려한 옷이란 겉모습을 말하는것이 아닌

속사람이 때묻지 않아 너무 맑고 밝게 빛난다는 의미의 옷이란다 .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한눈에 보여주는것이 옷이라니 의아하지만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그것이 진짜 옷이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게 된다.

하지만 재투성이 옷은 고난과 역경의 길을 가야하는 신데렐라의 운명이란다.

신발 또한 마찬가지다.

한사람의 생애를 말해주는것은 바로 이 신발이다.

그 사람의 신발을 보면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를 알 수 있다는 말이다.

그의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책이나 이야기 혹은 전해들은 이야기들은

훨씬 많은 이해의 폭을 넓히게 만들어주기도 하는데

이 책의 저자는 참으로 많은 책을 읽고 또 아는것이 많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책은 그림형제가 쓴 독일어 동화와 영어 동화 그리고 우리말동화
이렇게 세가지 순서로 동화를 들려준다.
혹 원작이 궁금해 원문을 읽고 싶어하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고자 그랬단다!
그리고 중간 중간 삽화도 넣어 책읽기에 흥미를 더하기도 하고
맨 뒷편엔 우리가 알고 있는 동화와 근접한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이라는 동화를 실어 놓아 훨씬 비교 분석이 쉽다.

이 또한 우리가 알고 있는 공주콤플렉스를 확 깨주는 그런 책이다.

그저 착하게만 지내다가 어느 순간 왕자를 만나 행복해지는 그런 신데렐라가 아닌

자신의 노력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온마음을 다해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신데렐라를 보여주는 책이다.

이 작가는 이 책 전에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 란 책을 펴내어 적잖은 충격을 주었는데
그 작가의 새로운 해석의 신데렐라 이야기 또한 그렇다.

책을 읽다보면 정말 무언가 굉장한 분석을 하고 있는 느낌과 함께
마치 내가 탐정이 되어 하나 하나 실마리를 풀어내는 느낌을 받기도 하지만
어쩐지 한가지 주제를 너무 깊이 파고들어 너무 밥을 꼭꼭 씹어 먹여주는 느낌이 든달까?
어느정도 독자가 생각하고 판단할 여지는 남겨주어야하는데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하늘과 하나됨을 의미한다는 혼인잔치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결론적으로 종교적인 비판에 이르기까지 하는데 뭐 그렇게까지...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k*******7 2009.11.20. 신고 공감 1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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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투성이에게 길을 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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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하고 고생하여 이룬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이 알량한 정치 현실 앞에서, 옛이야기를 그것도 독일 옛이야기를 들춰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32)  이 독일 이야기를 나도 위와 같이 생각하며 만난다. 그래, 도대체 '신데렐라'가 '재투성이' 혹은 '부엌데기'라고 하여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에 덤벼든 책이었다. 결과는 지은이의 전작 [백설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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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생하고 고생하여 이룬 것들이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내리는 이 알량한 정치 현실 앞에서, 옛이야기를 그것도 독일 옛이야기를 들춰보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132)
 이 독일 이야기를 나도 위와 같이 생각하며 만난다. 그래, 도대체 '신데렐라''재투성이' 혹은 '부엌데기'라고 하여 뭐가 다를까? 라는 생각에 덤벼든 책이었다. 결과는 지은이의 전작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 만나보았던 장점이 고스란히 옮겨온 책에 현실적인 이야기가 덧대어져 더욱 만족스러운 책이 되었다.
 <우리말 풀이 + 독일 원전 + 영역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전개도 같고 이야기를 들려주고 나서 다시 한 번 곱씹는 과정도 똑같다. 여전히 하나의 이야기에서 실마리를 풀어 시와 소설, 철학으로까지 경계를 넘나들며 폭과 깊이를 더해가는 지은이의 해박함과 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알아듣기 쉽도록 자세히 풀어 말해주는 솜씨도 여전하다. 아래에 넉넉한 여백을 두어, 순간순간 떠오르는 생각을 충분히 적을 수 있게 해 둔 편집도 맘에 든다. 그래서 이어지는 <진짜 독일 동화 이야기> 책들에, 그리고 지은이에 대하여, 더욱 믿음이 간다.
 그런데 조금 이상하다. 한참을 읽다 예전에 읽었던 책들을 꺼내어 다시 비교해보았다. 그리고 그 까닭을 알았다. 예전의 지은이가 쓴 두 책 [백설공주는 공주는 아니다?!][공부를 잘해서 도덕적 인간에 이르는 길]은 말투가 존댓말이었는데 이번엔 아니다. 그러니까 존댓말이 주는 어떤 부드러움과 떠먹여 주는 듯한 느낌이 사라지고 대신, 읽는이가 스스로 판 때리기하고 찾아가며 받아들여야 할 책임(?)이 늘어난 듯하다. 아마 지은이는 이런 부분까지 생각하며 말투를 바꾸었으리라.
 신데렐라라고 하면 우리는 이른바 '한방 블루스!'로 표현되는 한탕주의와 연관지어 생각하는데 이는 동화를 제대로 읽지 못한 데서 오는 착각임을 이번 이야기에서도 깨닫는다. '재투성이'라는 존재감, 그리고 그 가 전해주는 빛깔과 정체성이 오롯이 살아나 '부활'과 '다시 피어남'의 바탕이 되는 , 그리고 스스로 일어서는 의 역할을 만난다. 그리하여 재투성이 아가씨는 마침내 다시 일어서는 것이다. 그 속에 삶의 진실이 있다.
 분노와 굴욕 사이를, 열광과 냉소 사이를 그 아가씨는 살았던 것이다. (133)
 산다는 것, 살아낸다는 사실은 요즘의 화두(話頭)이기도 하다. 얼마 전 한 지방 강연에서 신영복 선생님께서도 앞에 있는 어떤 특정한 길을 보고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더불어, 함께 같은 방향을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 뒤에 길이 만들어진다'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한 TV 프로그램에서 유시민 작가(?)께서도 이와 비슷한 관점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모두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내느냐가 중요하다는 말씀이리라. 재투성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그렇게 열심히 살았고 그래서 엄마 무덤 위에 나무가 자라고, 나무가 불러들인 새들의 도움을 받고, 그 모든 기적 같은 일들이 가능해진 것이다.
  지은이는 우리가 신데렐라를 통하여 만나야 하는 진실은 누군가의 도움으로 말미암은 '인생 한방'이라는 허상이 아니라 스스로 개척하고 만들어 나가는 길에 답이 있다고 일러주고 있다. 삶은 살아가고, 살아 내고, 버팅기는 것, 그리하여 살아남는 것이 제대로 사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진정으로, 치열하게 살아 꿈틀대리라. 
 삶이 따르지 않는 말은 쓰잘 데 없는 말일 것이다.  (137)
2009. 11. 21. 가을, 가족 나들이로 들뜬 새벽을 깨웁니다. -.-;
들풀처럼
*2009-241-11-10
책에서 옮겨 둡니다.
 영어 씬데르스Cinders - 프랑스어 쌍드리옹Cendrillon (그을음) / 독일어 원어 Aschnputtel = '재투성이' = (의역) '부엌데기' - 영어 씬데뤨라Cinderella - 우리말 '신데렐라'   (11)
 따라서 '신데렐라 = 재투성이' (11) 라는 뜻
 한 사람의 삶이란, 그를 둘러싸고 있는 모든 것들의 버무려짐이기 때문이다. (120)
 활자가 탁, 일어나서 걸어나오는 것 같은 감동 - 김제동
 재는 덧없음, 슬픔, 그리고 속죄의 상징이다. (122)
 그냥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타고 남은 재 속에서 다시 솟구쳐 오르는 생명이기에, 불사조라고 한다. 이 새는 크리스천에겐 부활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124)
  '재'는 슬픔, 죽음, 회개의 자리다. 그렇지만 '피닉스'에 비추면, 재는 부활의 바탕이다. (124)
 사람이건 낱말이건 간에, 그 사람 그 낱말과 어긋나 있는 것을 그것에 맞세울 때에야, 그것들은 또렷이 드러난다. 아무리 존엄성을 내세우고 절대성을 내세우더라도 어쩔 수 없다. 모든 것은 인연 속에 있고 관계 속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것과의 인연이 부정적이건 긍정적이건 간에, 읽히지 않고는 한순간도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131)
 남보다 천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고 남보다 귀하게 태어난 사람도 없다. 이거야말로 모든 종교가 알려주는 복음이다. 이 복음 때문에, 태어남은 이제 문제가 아니게 되었다. 문제는 삶이다. 거룩하고 영웅적인 삶을 사는가 못사는가가 있을 뿐이다. (153)
 그렇긴 하지만, 날씨가 아무리 험상궂더라도 길을 내면서 제 갈 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진흙탕 속에 있는 맑은 물줄기를 기어이 찾아내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연꽃 같은 사람들이다.  맹자가 말한 대장부이고, 우리 옛 분들의 이상이었던 군자이고, 오늘날의 선비다. 이분들 마음에는 '우주 나무'가 자라고 있음에 틀림없다. (154)
 저 땅을 딛고 선 재투성이는, "적은 年輪으로 이스라엘의 二千年을 헤아려" (정지용, <나무>에서) 아름드리 개암나무가 되었는데, 이 땅을 딛고 선 재투성이는, 반 만 년을 헤아리지 못한, 아직도 안쓰러운 나뭇가지일 뿐이다.  (158)
 이 세상에는 사람 수만큼이나 침대가 많은데, 그것을 모르고 제가 알고 있는 단 하나의 침대만 알았던 보수꼴통과 극좌파가 프로크루스테스가 아닌가? 프로크루스테스는 큰일을 꿈꾸는 젊은이라면 반드시 물리쳐야 할 적이다. 이념에 매몰되기 쉬운 게 젊은이이기 때문이다. (166)
 하이데거 지음, 박정자의 책, <빈센트의 구두>에 대한 설명 (171)
 다른 나라 왕에게 제 나라의 젊은이를 넘겨주는 사람도 왕이라 할 수 있는가? 아테네 왕 아이게우스가 그랬다. 예나 지금이나, 왕이 못난이이면 백성은 죽어나갈 수밖에 없다. (172)
 왜, 한 짝은 벗고 한 짝은 신어야 할까?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 할 것, 버려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 잊어야 할 것과 찾아야 할 것, 그 사이에 서 있는 인간의 운명 때문일까? 
 우리의 왼쪽 신발은 무엇일까? 여럿일 것이다. 재투성이와 테세우스가 벗었던 신발은, 어릴 적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설 때 신었던 것이다. 이 신발을 벗는 일은 쉽지 않다. 그럼에도 벗어야 한다. 벗지 않으면, 신발이 삼켜버리기 때문이다. (177)
 온 세상에 스며들어 '비어 있음'을 보여준 관음보살도, 신발 하나는 따로 남겨두었던 것이다. 땅을 딛고 산 삶이기에, 땅 위에 새겨진 흔적은 보살도 어찌할 수 없다는 속삭임이었으리라. (184)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플라톤)는 말했다. (192)
 이제 예수의 각시들이 말을 받을 차례다. '예수의 신부들이 사는 모습'은 어떤가를, 말이 아니라 몸으로 보여줌으로써, 예수가 죽어 있는가 살아 있는가를 세상에 알려줄 차례인 것이다. (208)
w******e 2009.11.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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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이야기의 참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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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확함과 충실함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에 우리 마음대로 덧붙인 것도 없고 일부러 아름답게 꾸미지도 않고 이야기를 들은 대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중략)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옛이야기의 개작에 반대합니다. 우연히 수집한 이야기를 좀 더 완결성 높은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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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야기를 수집하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 것은 정확함과 충실함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옛이야기에 우리 마음대로 덧붙인 것도 없고 일부러 아름답게 꾸미지도 않고 이야기를 들은 대로 복원해 놓았습니다.  (중략)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는 옛이야기의 개작에 반대합니다. 우연히 수집한 이야기를 좀 더 완결성 높은 이야기로 만들기 위해서라는 핑계를 댄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옛이야기, 그림형제 동화집>의 그림형제 서문 중에서

저자는 그림형제와 같은 시각으로 옛이야기를 바라봐야 한다고 말한다. 옛이야기에는 그 때의 생각과 정서, 문화, 지식등이 들어 있기 때문에, 번역을 하더라도 '넘어서는 안 될 금'이 있다고 말이다.

몇 년 전 완역에 가깝다하여 구입한 <그림 형제 동화집>에 실린 이야기 중에 <신데렐라>는 우리에게 익숙한 '신데렐라'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을 읽고나서 다시 꺼내 읽어 보았는데, 내용은 이 책에 쓰인 <재투성이>와 거의 흡사하나, 재투성이가 아닌 '신데렐라'로 쓰여져 있는 것과 '혼인잔치'가 아닌 '무도회'로 번역 되어 있는 점이 달랐다. 아마도 우리에게 너무도 익숙한 '신데렐라'라는 이름과 '무도회'를 떨칠 수 없었나 보다.

저자는 <신데렐라>의 원작에는 '신데렐라'가 없다고 말한다. 영어로 옮기면서 생겨난 이름이 '신데렐라'인데, 그림형제가 지은 '아셴푸틀 Aschenputtel'은 직역하면 '재투성이'이고, 의역한다 해도 '부엌데기'이기 때문에, 슬픔과 무거움이 느껴지는 '아셴푸틀'이, 아무런 뜻도 없는 '신데렐라'로 번역되는 것은 크게 잘못 옮긴 것이라고 말한다. 또한, '재'는 서양에서 슬픔, 회개, 부활의 의미로 쓰이는 단어이기에, 단순히 잿빛 옷을 입은 재투성이가 아닌 함축적인 뜻을 지닌 '재투성이'라고 말한다. 

본문에는, 독어 원전과 영역본, 그리고 우리말로 옮긴 '재투성이' 동화와, '재투성이'를 고찰하여 설명한 저자의 해설, 그리고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와 흡사한, 샤를 페로의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 신발' 동화가 포함되어 있다. 

그림형제의 동화와 샤를 페로의 동화가 각각 실려 있어 비교하며 읽어 보는 것도 흥미롭고, 저자가 고찰하여 써내려간 '재투성이' 안에 담긴 여러 의미들 (옷의 상징성, 금의 상징성, 새의 상징성, 개암나무, 신발, 결혼 등등)을 읽고난 다음, 다시 한번 동화를 읽어 본다면 또다른 깊이를 느껴 볼 수도 있으리라.

이 책을 읽고나니, 우리의 전래 동화들도 삽화나 내용에서 전해지는 이야기와는 달리 변질되어 읽히는 이야기들이 많다는 생각이 든다. 구전되는 옛이야기 속에 담긴 옛 사람들의 목소리만은 잃지 않아야 하지 않을까?

YES마니아 : 골드 l****e 2009.11.1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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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상징을 파헤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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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을 들을 때 참 지루했지만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간섭효과다. 아마 이름이 조금만 비슷해도 헷갈려하던 당시 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박혔을 것이다. 지금도 이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는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해줄 때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신데렐라 이야기와 잠자는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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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학을 들을 때 참 지루했지만 몇 가지 기억나는 것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간섭효과다. 아마 이름이 조금만 비슷해도 헷갈려하던 당시 내 상황을 명쾌하게 설명해주는 이론이었기 때문에 기억에 박혔을 것이다. 지금도 이것 때문에 곤란한 상황을 많이 겪는다. 아이들 책을 읽어주거나 이야기를 해줄 때 경험하는 것 중 하나가 이것이 아닐까 싶다. 신데렐라 이야기와 잠자는 숲속의 공주, 백설공주, 심지어는 콩쥐팥쥐까지 뒤섞여 나중에는 내 맘대로 결론을 짓곤 한다. 좀 억지스럽긴 하지만 '스승의 날' 노래 부르다가 '부모님 은혜'로 은근슬쩍 넘어가기도 하고 온갖 종류의 호랑이 이야기가 하나로 합쳐지기도 하지 않던가. 그런데 공주 이야기가 많긴 하다. 공주 이야기는 왜 하나같이 다 비슷한걸까. 이런 의문은 누구나 한 번쯤 품어보았을 것이다. 그러면서 때로는 (어른이)거부하기도 하지만 아이들 때문에 그냥 골고루 보여주고 만다.

 

그런데 그런 의문을 하나하나 풀어가는 사람이 있으니 바로 이양호 저자다. 이미 백설공주를 파헤치며 원전에는 '공주'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다. 그런데 아직 그 파급효과는 드러나지 않는 듯하다. 하긴 지금까지 몇 십 년을 길들여졌는데 하루 아침에 바뀌기야 하겠나. 이번에는 신데렐라에 딴지를 걸었다. 옛이야기라는 것이 워낙 다양한 판본이 있어서 어느 것을 원전으로 햇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저자는 그림 형제의 이야기를 충실히 따라간다. 게다가 그림 형제의 초판본과 두 번째 판본까지 비교해 가며 한 가지씩 풀어가는 것을 읽다 보면 단순히 옛이야기가 어떻게 변형되었는지 뿐만 아니라 그 안에 들어있는 상징성까지 알 수 있다.

 

독일어로는 아셴푸들, 프랑스어로는 쌍드리옹(모두 재투성이를 뜻한단다.)으로 불렸던 것이 영어로 넘어오면서 Cinderella가 되었고 그것이 우리말로 되면서 신데렐라가 되었단다. 아, 신데렐라가 이렇게 탄생하게 되었구나. 그런데 단어는 참 이상하다. 쌍드리옹보다 신데렐라라고 하면 더 부드럽고 뭔가 환상적인 느낌이 나니 말이다. 신데렐라의 모습이 각인되어 그렇게 느껴질 수도 있겠지만 된소리인가 아닌가에 따라 느낌이 달라진다는것은 이미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읽고 나서 만나는 신데렐라는 이제 예전의 그 신데렐라가 아니다. 확실히 재투성이라는 말로 치환시켜 놓고 읽으면 느낌이 다르다.

 

처음엔 이렇게 단어를 이야기하지만 차츰 그 안에 들어있는 상징성을 따지기 시작한다. 왜 재투성이였을까. 어째서 개암나무를 엄마 무덤에 심었을까. 혼인잔치가 열렸는데 결혼의 의미는 무엇인가. 또한 하얀 비둘기의 의미는 무엇인가 등등. 어디 그 뿐인가. 재투성이가 신었다는 무거운 나막신에도 상징이 들어있다. 그냥 당시 보편적인 신발일 뿐이라고 생각하고 의미를 두지 않았는데 저자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아주 커다란 의미가 있다는 걸 알게 된다. 독일에서는 '어른이 되었다'는 뜻의 '어린애 신발에서 벗어났다'는 숙어가 있다고 하니 단순한 신발이 아니다. 옛이야기에는 상징이 많이 들어있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처럼 작은 것 하나까지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이 숨어있는지는 몰랐다.

 

이 밖에도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소재 하나하나가 그냥 들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서양의 문화와 관습을 결부시켜 이야기해준다. 특히 서양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으면 안되는 성경에서 상당부분 차용했음을 다양한 문헌을 예로 들며 증명한다. 단순히 재투성이 이야기 하나만을 가지고 풀어내는 것이 아니라 동서양 고전을 넘나들고 있어 읽는 이는 가만히 앉아서 얻기만 하면 된다. 헌데 너무 톡톡 튀는 듯하고 시니컬하게 말하는 듯한 글투(뭐라 설명하기가 어렵다. 마치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방식의 글투 같기도 하다.)가 처음엔 좋았는데 그렇게 한 권을 읽으려니 나중에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책과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저자는 강연할 때의 모습과 글로 만나는 모습에 차이가 많이 난다. 강연장에서 본 모습은 잘못도 덮어줄 것 같은 푸근한 아저씨 같았는데 글에서는 어찌나 날카롭던지 잘못했다가는 당장 매서운 질책이 쏟아질 것 같다.

l*****8 2009.11.27.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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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투성이'이야기 들어 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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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네. 살짝 금장을 하고 있어서 은근히 나 같은 서민에겐 고압적인 이미지가 풍기는데.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한 비평서네. 호기심이 생기는군.   내가 알던 신데렐라 이야기는 근본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숲속의 잠자는 미녀 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지. 차분히 기억을 떠올려볼까.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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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 표지부터가 심상치 않네. 살짝 금장을 하고 있어서 은근히 나 같은 서민에겐 고압적인 이미지가 풍기는데. 내용을 보면 우리가 잘 아는 신데렐라 이야기에 대한 비평서네. 호기심이 생기는군.

 

내가 알던 신데렐라 이야기는 근본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아. 백설공주, 헨젤과 그레텔, 숲속의 잠자는 미녀 들의 이야기가 튀어나오지. 차분히 기억을 떠올려볼까.

‘신데렐라는 어려서 부모님을 잃고요.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더래요. 샤파샤파은샤파~얼마나 울었을까요‘

고무줄놀이에 쓰이던 노래가 생각난다. 그래. 부모님을 잃은 게 아니라 엄마를 잃고 아빠가 새장가 들어서 든 집에 계모와 언니둘이 있었지. 무도회에 가고 싶은데 말도 안 되는 일들을 시켜서 어렵게 만들고 두꺼비와 생쥐들이 도와줘서 무도회장에 갈 수 있었지. 요정이 나왔던가? 아니, 두꺼비는 콩쥐팥쥐이야기인가? 허허 헛갈리기 시작이구먼. 요정이 나오는 건 디즈니가 꾸민거라구? 그럼 뭐야. 도대체 원작은?

 

재투성이 아가씨란다.

 

‘신데렐라의 역사를 거슬러 오르면 프랑스작가 샤를 페로의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 그림형제의 <재투성이>가 나온다. 두 이야기 어디에도 ‘신데렐라’는 등장하지 않는단다. 신데렐라는 영어로 옮기는 과정에서 생겨난 신조어다.

Cinderella가 우리말로 바뀌면서 가벼운 ‘신데렐라’로 되었다고. 이런 배경에도 불구하고 ‘재투성이’가 아닌 신데렐라라고 해도 좋은 건가?‘

그림형제가 쓴 <재투성이>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아이는 엄마를 잃고 계모와 언니들을 맞게 된다. 부자 아빠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계모와 언니들은 잘 입고 잘 먹으면서 주인공은 화롯가 잿더미 옆에서 누워 자고 먹고 하기에 재투성이라는 별명이 붙는다. 원래 옷을 벗기고 잿빛의 옷을 입히고 나막신을 신겨 식모살이를 시킨다. 물 긷고 불을 지피고, 밥 짓고 빨래를 한다.

 

콩을 잿더미에 쏟으며 소녀는 그것을 재에서 골라내야 했다. 아버지가 장에 가면서 두 의붓딸에게 뭘 가져다줄까 했을 때 새 옷과 보석을 답한 언니 둘과 다르게 모자에 부딪히는 어린 나뭇가지를 꺽어다주라 한다. 개암나무 가지를 꺾어다 주자 그 나무를 엄마무덤가에 심었다. 그 위에 눈물이 떨어져 가지가 자라 아름다운 나무가 되었다. 그때 새하얀 새가 한 마리 날아와 소녀가 울면서 기도하면 바라는 것을 떨어뜨려주곤 했다.

 

왕이 궁에서 사흘이나 이어지는 잔치를 벌였는데 나라의 모든 아가씨를 초대했다. 신붓감을 고르기 위해서. 재투성이는 같이 가고 싶었지만 누이들은 먼지투성이에 옷도 더럽다며 거부했지. 그래도 가고 싶다고 애원하자 콩을 가득 잿더미에 쏟아서 한 시간 안에 골라내면 가게 해주겠다고 놀렸다. 재투성이는 비둘기들을 불러 콩을 골라냈지. 그러자 의붓엄마가 옷이 없고 춤을 출수 없어서 창피하다며 갈수 없다고 못 박고 가버렸지.

 

 재투성이는 개암나무 밑으로 가서 소리쳤어. 금과 은을 내려달라고. 새는 금과 은으로 된 옷과 비단으로 수놓은 신발을 내려줬다. 그 옷을 입고 혼인잔치에 갔지. 두 언니와 의붓엄마는 못 알아보고 왕자는 그녀에게만 마음을 열고 춤을 청했지. 밤이 깊어 왕자가 바래다주려하자 그녀는 뛰어나와 집으로 들었어.

 

왕자가 확인했을 땐 재투성이 부엌데기만 있었어. 사흘을 반복하게 되자 왕자가 대책을 마련하는데 계단에 송진을 발라둔것이지. 아가씨의 왼쪽신발이 남게 되었어. 신발이 맞는 여인을 찾는다는 말에 두 언니는 필사적이었지.

 

첫째는 엄지발가락 때문에 맞지 않았는데 엄마는 왕비가 되면 걸을 일이 없다며 발가락을 잘라 넣었어.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신발에 흥건한 피를 보고 다시 되돌아가 구두 주인을 찾았지. 둘째언니는 뒤꿈치가 커서 안 들어갔는데 엄마가 칼을 들고 와서 잘라버렸어. 그래서 왕자는 다시 둘째를 데리고 왕궁으로 향하다가 비둘기들의 노랫소리를 듣고 구두 안을 보니 피가 흥건한 거야. 말머리를 돌려 돌아왔을 때 재투성이 밖에 남지 않았지. 어머니는 너무 더러워서 보여드릴 수 없다며 거절했지만 왕자가 청하여 구두 앞에 서서 신게 되자 꼭 맞았지. “이 아가씨가 진짜 신부다.” 외치고 궁으로 향했어.

왕의 혼인잔치가 열린 날 언니들은 재투성이에게 온갖 아양을 떨었지. 신부 측 사람들이 교회로 갈 때 큰언니는 오른쪽에 작은 언니는 왼쪽에 섰어. 그 때 비둘기들이 언니들의 눈 하나씩 쪼아서 빼버렸어. 돌아올 때 반대로 서서 걸었는데 또 남은 한쪽을 쪼아 빼버려서 평생 눈먼 자로 지내야 했단다.

 

와~우. 섬뜩한 결말인데. 확실한 인과응보로구나. 이런 이야기가 고전이라 할 만하지 너무 치장된 이야기는 사실 현실성도 떨어지거니와 우리에게 ‘콤플렉스’만 줄 뿐이지. 재투성이가 결국 공주로 되어가는 과정에서도 일하고 성정이 바르고 곧아서 언젠가는 복을 받을 만한 아가씨였기 때문에 결말이 인정이 되는 것이고 한껏 소비하는 언니와 다르게 나무를 심고 나무와 자연을 통해서 수확하는 과정은 뭔가 교훈을 주는 것 같은데.

 

두 언니의 엄마는 요즘 학부형들과 그리 달라 보이지 않아. 자식의 출세를 위해 신체훼손도 서슴지 않는다. 물론 비유적이 되겠지만 감방수준의 생활패턴을 10여년이나 참아야 하는 요즘 학생들이 떠오르고 또 이를 채찍질 하는 엄마의 모습이라. 혹은 군대에 가지 않기 위해 손가락을 자른다던가 어깨수술을 받는 이 땅의 젊은이들의 슬픈 모습도 떠오르는 걸.

 

재투성이 아가씨는 결국 행복해졌을까? 이야기에서는 알 수 없어. 그저 결혼을 위한 과정이 그려질 뿐이고 끝없는 시련과 고통을 통해서 ‘완성’이 된다는 옛사람들의 결혼에 대한 의식을 미루어 짐작해 볼 뿐이지. 하지만 원래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환상적인 ‘공주 이야기’가 아닌 은 분명하군.

 

아이에게 이야기를 읽을 때는 신중해야 할 것 같아. 무턱대고 읽어주거나 읽게 했다가는 어느덧 모순과 편견 속에 자라는 이가 되어버릴 것 같아서 말이지. 요즘 동화책들은 그림도 편견투성이더군. 백인우월과 오리엔탈리즘. 민족주의와 집단주의와 폭력성이 주입되는 건 아이들이 교과서를 잡기 전에 비디오나 책을 통해서라는 이야기도 있으니 말이야.

YES마니아 : 골드 s******e 2009.11.23.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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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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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어른이 읽는 잔혹동화라는 이름의 책들이 한때 인기리에 판매되었던 적이 있다.    밖이 깜깜해진 줄도 모르고 읽은 후 온갖 권선악의 대모격인  백설공주,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까지 모두 하나같이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의 실체를 알게 된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백설공주를 내다 버린 사람이나 헨젤과 그레텔에서도 모두 친어머니의 소행이었고 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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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점에서 어른이 읽는 잔혹동화라는 이름의 책들이 한때 인기리에 판매되었던 적이 있다.    밖이 깜깜해진 줄도 모르고 읽은 후 온갖 권선악의 대모격인  백설공주, 신데렐라, 헨젤과 그레텔까지 모두 하나같이 해피앤딩으로 끝나는 천편일률적인 이야기의 실체를 알게 된 나의 눈을 번쩍 뜨게 했다.

  백설공주를 내다 버린 사람이나 헨젤과 그레텔에서도 모두 친어머니의 소행이었고 신데렐라에서 신발이 맞지 않아 발을 잘라냈다는 등 도무지 어떻게 이해 해야할지 혼란하기만 했다.

  이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민담이 이야기로 정리되면서 어떻게 변화를 겪고 애초에 무슨 의미를 가졌는지 알게되면서 이야기를  이해하는 데 <신데렐라는 재투성이다>(2009.10 글숲산책)이 나를 혼란하게 만들었던 이유에 대답을 들을 수 있었다.

  원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재투성이가  번역이 되면서 어떻게 변화를 겪게 되었는지 알 수 있게 된다.

  익히 아이들과 읽게 되는 신데렐라는  샤를페로의 글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신데렐라는 샤를페로보다 100년이나 뒤에 나온 독일작가  그림형제의 글을 가지고 설명하고 있다.

  일단 원작의 정확성을 위해 독일어, 영어로 된 원본을 볼수 있다는 점, 청소년과 부모들을 위한 친정한 해설을 읽을 수 있고 눈여겨 볼 점은 어떻게 번역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신데렐라가 입은 옷, 재, 신발이 각각 가지는 의미를 그리스 신화에서 불교적, 종교적인부분까지  두루 인용하여 설명을 하고 있다.

  특히, 신발이 가진 의미가 의미심장하다. 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 즉 그 사람이 한 발 한발 디뎌온 삶을 적는다는  전기와 이력서, 그 중에 이력서에 신발 리 지나올 력 글서로 된 낱말에도 등장하는 신발의 의미는 만만치 않다.  그리스신화에도 자주 등장하는 신발,  재투성이가 다시 왕자와 만나게 하고, 남의 행운을 빼았으려 자신에게 맞지 않은 신발에 맞추느라 발을 자르게 했던 의붓언니들이 절대 바꿀 수 없었던 운명적인 역할을 말이다.


  p206

   결혼이 가지는 의미란 바로 두 사람이 '하나 됨'으로서 아름다운 옷과 신발을 빼앗기고 ,죽음 위에 나뭇가지를 심어 생명을 키워낸 삶, 그리고 그 생명 나무에 하늘로부터 새하얀 새가 날아들어 빛나는 옷과 빛나는 신발을 내려준 이야기를 거쳐 하늘과 하나되는 결혼까지 <재투성이>의 이야기는 끝났다.  

 원작이 말하고자 했던  원래의 의미를 알게 해준것을 아는 중에도 계속 콩쥐 팥쥐이야기가 오버랩되는 게 동서양을 막론하고 엄마잃은 아이의 서글픔은 어찌 이리도 똑같을까..
e***p 2009.11.21.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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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이야기에 담겨 있는 수많은 의미와 상징이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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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재투성이. 이 두 단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데렐라라고 우리가 부를 땐 갑자기 부자와 결혼한 여자나 성공한 사람을 뜻한다. 반면에 재투성이는 말 그대로 지저분하고 더럽고 가난한 느낌을 준다. 이 차이는 우리가 두 단어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재투성이는 신데렐라의 우리말 번역이다. 사실 많은 외국어 이름이나 표기들이 우리말로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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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재투성이. 이 두 단어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신데렐라라고 우리가 부를 땐 갑자기 부자와 결혼한 여자나 성공한 사람을 뜻한다. 반면에 재투성이는 말 그대로 지저분하고 더럽고 가난한 느낌을 준다. 이 차이는 우리가 두 단어를 받아들일 때 생기는 것이다. 이 책의 제목처럼 재투성이는 신데렐라의 우리말 번역이다.


사실 많은 외국어 이름이나 표기들이 우리말로 번역되기보다 발음 그대로 이용되고 있다. 보통의 경우라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가끔은 의미를 왜곡하고 진실을 들여다보는데 방해를 한다. 이런 방해는 개인에게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로 확장되면서 선입견과 편견을 가지게 한다. 이런 왜곡과 편견을 바로 잡기 위해 이양호 씨는 전작 <백설공주는 공주가 아니다?!>에서 새로운 번역과 해석을 선보였다. 이번 신데렐라 이야기도 바로 그런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신데렐라 이야기는 두 가지 버전이 있다. 그림 형제와 샤를 페로의 것이다. 작가가 텍스트로 삼고 새롭게 번역하고 해석한 것은 그림 형제의 이야기다. 번역을 떠나서 다시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낯설고 새로운 느낌을 받았다. 이야기 뒤에서 단어와 문장 속에 숨겨진 의미를 풀어냈지만 그보다 나의 기억과 다른 이야기에 놀랐다. 뒤에 샤를 페로의 이야기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던 신데렐라 이야기임을 확인하면서 기억에 안심했지만 백 년이란 시차 속에 이런 차이가 발생했는지와 왜 샤를 페로의 이야기를 그림 형제의 작품으로 기억하게 되었는지 의문이 자랐다. 이것은 사실 명확히 보여주지 않아 조금은 아쉬웠다.


재투성이 이야기는 짧다. 한 호흡에 읽을 수 있는 분량이다. 그런데 이 짧은 이야기를 작가는 길고 자세하게 해석한다. 먼저 옷의 상징성을 풀어내고, 셋이란 숫자의 의미를 되새기고, 그녀의 별명에 들어있는 재가 어떤 연관성을 가지고 있는지 알려준다. 무덤 위에 심었던 나무가 자란 곳에 내려온 새를 역사와 신화 속에서 헤아려보고, 그녀가 심은 개암나무가 지닌 의미를 찾는다. 그리곤 그녀에게서 벗겨진 신발의 의미와 상징을 역사와 신화와 전설 속에서 하나씩 되짚어본다. 이 과정을 단순히 독일이나 유럽 속에서만 찾는 것이 아니라 동양의 신화와 역사를 보여주고 비교하면서 그 깊이를 더한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귀찮은 것이나 힘든 일을 멀리한다. 현실의 무거움이나 힘겨움은 가벼운 웃음이나 다른 사람의 행복하고 걱정 없는 삶속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매체를 통해 대리만족을 얻고자 하면서 그 본래의 목적은 조금씩 사라지고 보고자하고 믿고자 하는 것만 눈에 들어오고 마음에 와 닿게 된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보면 참 모습은 사라지고 환상과 거짓이 희망이란 이름으로 변해 우리와 함께한다. 이 책을 읽으면서 과연 아이를 가진 부모들이 이 책이 보여주는 실제 모습을 자신들의 아이들에게 그대로 전해줄까 하는 의문이 생겼다. 산타크루스가 있니 없니 하는 것으로 소송이 생기고 교사가 짤리는 현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책을 읽으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작가의 폭 넓은 지식과 깊이 있는 이해와 해석에 놀랐다. 다음에 나올 이야기가 벌써 기대된다. 한 가지 옥의 티를 찾는다면 오른손을 바른손이라고 쓴 것이다. 흔히 사용하는 단어지만 그 속에 담긴 의미가 왼손잡이를 낮추는 표현에서 비롯한 것임을 생각하면 아쉽다. 그림 형제의 이야기에서 문장 하나 단어 하나에 큰 신경을 쏟은 것을 생각하면 아쉬움이 더 커진다.

이달의 사락 f***2 2009.11.20. 신고 공감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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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씌어져야 할 '재투성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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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표지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흘려 쓴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고 다시 안 읽었던 여자들의 로망 신데렐라를 이 기회에 다시 읽는 감회도 새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오류를 바로잡고 거기에 깊이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이 책을 쓰느라 노고가 많았을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데렐라가 왜 재투
"다시 씌어져야 할 '재투성이'" 내용보기

우선 표지 정장이 마음에 들었다. 흘려 쓴 글씨체도 마음에 들고. 아주 어렸을 때 읽어보고 다시 안 읽었던 여자들의 로망 신데렐라를 이 기회에 다시 읽는 감회도 새롭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의 오류를 바로잡고 거기에 깊이있는 해석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 책은 읽을만하다. 이 책을 쓰느라 노고가 많았을 저자에게도 박수를 보낸다.  

이 책의 서문에서 신데렐라가 왜 재투성이가 될 수 밖에 없는가, 즉 신데렐라의 어원을 설명해 주고, 그후 본문에서는 신데렐라의 독일어 버전과 영국 버전을 수록해서(그것도 원문과 번역을 함께) 우리가 읽고 있는 일명 '재투성이 아가씨'와 얼마나 다른가를 비교할 수 있도록 했다. 글쎄, 나는 이 책을 워낙에 오래 읽었던지라 지금은 어떻게 변해있을지 모르겠다. 그래도 요즘 나온 이야기는 뭔가 조금이라도 달라져 있지 않을까? 모르긴 해도 내가 읽었던 이 이야기는 미국판을 수입해서 의역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뭐 이 이야기의 원뜻을 이해 못할 정도는 아니니 그런 줄 알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런데 이 책을 읽어보니 내용이 확실히 조금 다르다. 무엇보다 의붓 엄마와 그의 딸들이 신데렐라의 구두에 발을 맞추기 위해 새끼 발가락을 자르고 뒷꿈치를 깍아내도록 부추기고 실제로 잘라냈다는 내용은 황당하기도 하고 엽기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 부분은 내가 어렸을 적 읽은 '재투성이 아가씨'에 빠져 있는 것 같았다.   

무엇보다 나는, 신데렐라가 재투성이의 원래 이름인 줄 알았다. 즉 사람에게 붙일 수 있는 이름씨 같은 것이 신데렐라고, 재투성이는 그녀에게만 허락된 고유대명사 같은 것인 줄 알았다. 솔직히 신데렐라 외에 다른 어떤 인물에게도 재투성이란 말을 쓰지 않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이 책을 읽었을 때야 비로소 이 둘이 같은 의미로 쓰인다는 것을 알았다. 저자 서문을 보면, '재투성이'로 옮긴 프랑스 원전 낱말은 '쌍드리옹Cendrillon'이고 독일어 원어는 '아셴푸틀Aschenputtel' 이라고 한다. 이것은 직역을 하면 '재투성이'이고 이른바 '부엌데기'를 뜻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것을 영어로 옮기면 씬데르스Ciders인데 그것은 프랑스어의 쌍드리옹과 그 뜻이 비슷한 '그을음'에서 나오고 그 소리와 뜻 모두 이야기의 주인공 이름에 거의 겹친다고 한다. 그래서 영어로 옮기면 '씬데뤨라Cinderella'가 되고 그것을 우리말로 되면서 아주 부드럽고 가벼운 발음 신데렐라가 된 것이라고 한다.(11p) 이렇게 어원을 알고 보면 책은 더 흥미로워진다. 그리고 읽다보면 정말 그런가 싶은 것도 새롭게 재인식을 하게 된다.

그런데 이 책을 읽다보면 동화 한 편에 이렇게 심오한 것들이 담겨져 있는 것인가 새삼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저자는 해설에서 옷에 관한 이야기로부터 시작해서(그도 그럴 것이 이야기의 도입부분을 보면 신데렐라가 무도회에 입고 갈 옷이 없어서 전전긍긍하지 않은가?) 민담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융의 집단무의식을 얘기했다가, 기독교 사상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그러다 고희 같은 당대 유명 화가들의 그림 이야기도 하고, 불교나 동양 사상, 서양 사상 등을 종황무진으로 이야기 하고 있다. 난 그저 신데렐라 이야기도 단순히 인과응보나 권선징악의 다름이 아니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렇게까지 포괄적이어야 하는가? 한편 놀랍기도 하고 한편 고개가 갸웃거려지기도 한다. 놀라운 것은 저자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고, 갸웃해지는 것은 어차피 어린 아이를 위한 동환데 동화는 그 자체로 음미하고 즐기면 안 되는 것인가? 꼭 이렇게 까지 파헤쳐야하고, 분석해야 하는 것인가? 그런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하긴 이렇게 말하면 동화를 생각하는 나의 마음부터가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사실 편견인지는 모르겠지만 난 '해리포터'가 대단한 책인 것만은 사실이지만 그 책이 그다지 교훈적이거나 깊이가 있거나하진 않다고 본다. 그저 책을 읽지 않은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도록 만드는데 대단한 공을 세웠다는 정도로 인정만할 뿐이다. 책을 읽는 성인인 나로선 그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렇다면 내 마음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동화는 아름다우면서도 교훈적이어야 하는가? 아니면 교훈적이진 않아도 책에 관심을 갖게 만드는 구실만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쪽에 서야하는가? 그냥 재미있으면서 약간의 교훈적이어야 한다는 중도적 입장이면 안되는 것일까? 

요컨대 저자가 이렇게 파헤치고 분석하는 거야 나쁠거야 없지만 솔직히 그다지 공감은 가지 않는다. 그냥 신데렐라를 말하려 하다보니 여기 저기 흩어진 지식을 모아 짜깁기를 했다는 느낌이지 통찰했다고는 보기는 좀 어려운 듯하다. 즉 안타깝게도 짧은 분량에 너무 많은 지식을 소개하려다 보니 포괄적이고 개괄적인 논의는 될지 모르나 저자 자신의 생각은 그다지 드러나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말미에 나오는 저자 나름의 교회 비판론은 너무나 많은 사람이 이미 말했던 부분이라 식상하기까지 하다. 대안없는 비판이야 누가 못하겠는가? 그래도 어느 부분 공감하고 새로운 이해를 가능케 하는 부분도 있었다. 이를테면 우리나라 동화는 대부분 "옛날 옛적에..."로부터 시작해서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래요."로 마치지 않는가? 나는 항상 이것이 불만이고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렇게 사랑해서 결혼하고 오래오래 잘 살았다로 마치면 다란 말인가? 그 이후에 펼쳐질 남자와 여자가 부부로 살기 위해 얼마나 많이 부딪히고 인내해야하는가는 왜 빼고 말을하는 것인지 무책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것에 대해 저자는 플라톤의 <향연>에 대해 말하고 있다.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사람은 몸통 하나에 팔과 다리가 각각 넷, 머리도 둘이 달렸었다. 그런데, 신이 사람의 몸통을 위해서 아래로 쪼개 둘로 만들어버렸다. 그 때 쪼개졌던 흔적이 지금도 사람에게 남이 있는데, 배꼽이 그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사람을 이렇게 쪼개놓고 보니 세 부류의 쌍이 생겨났다. 여자와 남자, 남자와 남자, 여자와 여자가 그 쌍이다. 이들은 쪼개져 나간 제 짝에 너무도 애착한 나머지 아무 일도 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신은, 사람에게서 다시 합쳐지려는 마음 즉 사랑의 기운을 조금 덜어냈다. 그때서야 비로소 사람들은 다른 일도 할 수 있게 되었다.  

다시 하나가 되려는 마음이 사람에게서 조금 덜어내졌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되려는 기운 즉 에로스는 사람 마음의 대부분을 채우고 있다. 그러니, 에로스가 어떻게 쓰여져야 하는가를 문지 않을 수가 없었다. ...... 완전하고 이상적인 것 즉 불멸의 존재에 다가가 하나가 되려는 것을 '사랑'이라고 그는 말했다. 결혼은 그런 사랑의 제도화일 것이다.(192p)"

 

 이렇게 말을하고 있으니 왜 옛날 이야기가 그렇게 끝을 맺고 있는지 이해가 갈 것 같다.  

또한 신약성경 마태복음  22장 1절에서 13절의 천국에 대한 비유에서의 혼인잔치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잔치에 참여할 수 없는 것과 신데렐라의 의붓언니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도 과연 그럴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무엇보다 동화(문학)에 대한 저자의 생각에 동감한다. 

 

"언젠가부터 우리는 인과응보를 비껴나가는 게 문학의 미덕이나 되는 양 여기게 되었다. 그래야, 세련된 문학이고 현대 문학이라고 말한다. 심지오는 어린이 문학에서조차 인과응보는 덜 떨어진 작품으로 여겨진다. 세상살이가 인과응보로 이루어지지 않더라는 서글픔 경험 때문일 것이다.(200~201P)"

 
그렇다고 하면 옛날엔 인과응보의 시대에 살고 있어서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학이 가져야 하는 미덕은 계속이어져 와야한다고 말한다. '그림 형제 이야기'는 종교적이다'에서 가늠할 수 있듯이 '재투성이' 역시 그렇다고 하면서 말이다. 

저자는 친절하게도 말미에 샤를 페로가 1697년에 쓴 <재투성이와 작은 유리신발>을 부록처럼 소개해 놓고 있는데 아마도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 나온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런데 나는 여기서 정말 '재투성이' 이야기는 다시 써져야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이 이야기에서 남자는 빠져 있다는 것이다. 남자래봤자 재투성이의 아버지와 왕자 정도인데 그들은 여기서 거의 하는 일이 없다. 왕자는 그저 굳은 결의로 재투성이와 사랑을 이룬다는 정도고 아버지는 재투성이가 의붓 어머니와 언니들에게 그토록 핍박을 당하는데도 속수무책으로 아무 것도 하지 않는 아니 초두에만 잠깐 언급될뿐 마지막까지 나오지 않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리고 이야기는 여자들이 사랑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장을 벌이는 것처럼 나온다. 더구나 의붓 어머니는, 그 유리구두에 자신의 딸의 발을 맞추기위해 새끼발가락을 자르고 뒤꿈치를 자르는 엽기적인 모성애를 드러내면서 마치 여자를 이기적인 동물로 몰아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래동화인 '콩쥐 팥쥐'에서도 그대로 들어난다. 이 이야기들의 공통점은 인과응보나 사필귀정을 말하기 위함이라고는  하지만 어린아이들에게 남자와 여자에 대한 이해를 극히 왜곡시키는 것이라 보지 않을 수가 없다. 언젠가 누군가는 새로운 재투성이, 즉 남자와 여자를 새롭게 보게하는 이야기가 나와줘야 하지 않을까?          

책은 아쉬움이 좀 남지만 그래도 우리가 익히 아는 이야기를 새롭게 보게 하는데 일조하고 있으니 한 번쯤 봐도 좋을 것 같다.               

m****9 2009.11.25.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