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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사람과 더불어 태어난다.사람이 사라지면 길도 사라진다. 길이 있는 곳에 사람이 있었고, 사람이 있는 곳에 길도 있다. 그러므로 길은 사람이고,사람은 길이다. 제목이 참 멋스러운 책이다. 느낌으론 시집같기도 하지만 연극평론가인 작가의 에세이다.책은 크게 세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살며,여행하며,공부하고' 라는 부분으로 나뉘어 그가 일상이나 여행이나 공부를 위하여 해외에 나갔을때의 글들에서 공감가는 부분들도 많아 잔잔하게 읽어보기 괜찮은 책이었다. 걷기를 좋아하는 나와 자전거에 푹 빠진 남편이 있어 그의 이야기들이 더 와 닿았을까? 그가 교토와 파리에서 자전거를 타다가 서울에서 자전거를 본격적으로 타게 됨으로 느끼는 불편함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을 하는 남편덕에 더 공감을 하며 읽었던 부분인듯 하다. <등산,신성함을 깨닫는 경험>에서는 가끔 뒷산을 오르며 산책의 즐거움을 느꼈던 적이 많았기에 더 공감이 갔던 부분들이 많았다. '산들을 오른다는 것은 과거를 정면에서 오르는 것과 같다. 황량한 능선들을 향한 바위산들은 우리들이 아끼고 존중하는 모든 것의 탄생과 성장을 지켜봐왔기 때문이다.' 라고 한 문장이나 '산에서 어떤 다른 시간보다도 더 아름다운 시간을 꼽는다면 그것은 해가 지는 시간이다. 이 시간은 정신적인 아름다운과 평화와 이해의 시간이다.' 해가 지는 시간에 잠시 능선에 올라서서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던 시간이 있다. 찰나의 시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해가 지고 그 빛만 남은 산의 언저리를 한참을 바라보던 시간, 그 시간들을 다시금 되새기는 시간이 되게 만들어주었다. 걷기여행으로 잘 알려진 스페인 북부 피레네 산맥아래 산티아고 가는 길인 '중세 순례자의 길'은 다른 책에서도 만났을때 정말 한번 가보고 싶던 길이었는데 이 책에서 다시 만나니 반갑기만 했다. 걷기란 무엇일까? 새삼스러우면서 다시금 떠 오르는 걷기의 발견은 '길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가면 길이 된다'는 길과 생의 아포리즘을 깨닫게 된다. 그렇다. 삶도 그러하다.' 라는 말처럼 그가 강조하고 있는 '길' 이란 우리가 걷고 있는 길이면서 인생의 길이기에 그가 여러부분에서 나뉘어 강조한 것들 또한 한마디로 정의 한다면 '길' 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가 마지막 부분에 '맺으며' 에서 정리해 놓은 것처럼 그가 그동안 걸어왔던 길들은 최고의 장비로 완정무장된듯 했지만 아직 그 길의 의미를 제대로 즐기지 못했지만 평범하고 일상적인 장비를 가지고 길을 떠나는 아버지와의 너무도 비교가 되는 그의 깨달음이 가슴에 와 닿았다.'아버지의 낡은 장비와 내가 지닌 고급 장비들 사이에 그 범속함과 고급함 사이에 읽어야 할 의미가 있다.그러나 아직 잘 잡히지 않는다. 눈이 너무 많은 것은 아닐까? 나는 어디에 있는가?' 자신의 삶이며 여행이며 공부였던 연극이 아버지의 낡은 장비를 통해 다시 바라보게 되었으니 그의 연극은 희망적이며 우리의 연극은 희망이 될 것이다. 낯선 작가의 책은 조금 머뭇거려질 수 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를 알아 가는 과정처럼 작은 산을 하나 함께 오르고 난 뒤의 작은 희열처럼 그의 연극에 대한 생각을 읽어서일까 젊은시절 재밌게 보았던 소극장의 연극들을 떠올리게 해 주었다. 별생각없이 받아 들이고 보았던 소극장의 연극,하지만 지금은 큰 무대에서나 볼 수 있고 소극장의 연극은 내가 사는 곳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연극은 다른 장르와는 다르게 배우와 관객이 같은 공간에서 호흡을 하며 공감을 할 수 있어 참 좋은것 같은데 작은 규모의 연극이 사라져서 아쉽다. 지난날에 보았던 연극들을 뒤로 하며 그 연극과 관계하는 한사람의 마음 깊숙한 곳을 들여다 본 듯 하여 더 가깝게 연극에 다가서게 해준 책이 아니었나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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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프랑스를 좋아하게 되었을까. 고등학교 때 배웠던 불어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나 르 끌레지오? 하지만 그 때 내가 열심히 읽었던 소설가는 헤르만 헤세였는데. … 아니면 먼 훗날의 필립 솔레르스, 로베르 데스노스, … 기억은 꼬리를 물고 빙빙 돌아, 몇 해 전 갔던 파리 하늘 아래로 모여든다. 지하철을 오가며 안치운의 산문집을 읽었다. 웬만한 문학 비평가들보다, 웬만한 소설가보다 뛰어난 산문을 가진 그는 연극평론가이다. 중앙대에서 연극을 공부하고(그는 예술대 선배다), 파리에서 유학 생활을 하였다(뜬금없이 고백하건대, 마음 깊이 모교 교수를 하였으면 했던 이가 두 명 있었는데, 한 명이 안치운이었고, 나머지 한 명이 남진우였다). 생각은 계속 진전되어, 프랑스 쪽에서 공부를 한 이들이 대체로 감수성이 예민하고 문장이 서정적이라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불문학 전공자들 중 뛰어난 문학 평론가들이 많고 작가도 많고 .... (다른 문학 전공자들보다. 아니면 내가 너무 친-프랑스적이여서 그런 걸까) 책은 쉽고 편안하게 읽혔다. 하지만 예전만한 감동이나 몰입을 일어나지 않았다. 안치운의 글은 부드러웠고 적당히 쓸쓸했으며, 어디에서 읽어도 그 공간의 소란스러움을 잠재우는 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내 독서는 예전만 못했다. 어느새 내 독서 행위의 표면 위로 굳은 살이 덮인 것일 게다. 그렇게 세상의 먼지가 내 영혼의 세포 사이 사이로 밀려들어 자리를 잡아가고 있음은 이런 책을 읽을 때 알 수 있다.
침묵, 그것은 낯선 길이라는 타인과 친해지는 내밀한 상태이며, 귀 기울이는 일이며, 자신의 몸을 낮추는 일이며, 그 길에 발을 들여놓는 일이다. 그리하여 배우는 일이다. - 118쪽
하지만 이 산문집은 누구에게나 추천해도 좋다. 적당히 쓸쓸한 현대적 삶, 혹은 얇게 쌓인 눈이 한밤의 추위로 얼어 붙은 인도 위의 행인에게 이 책은 적절한 여유를 줄 것이고, 가령 키에로프스키를 좋아한다든지, 아니면 슈베르트, 파스칼 키냐르, 혹은 파트릭 모디아노를 기억하고 있다면 이 책은 근사한 선물이 될 것이다.
이 책 속에서 연극을 이야기할 때의 안치운은 행복하나, 어딘가 쓸쓸해 보이고, 종종 힘겨워 보이는 것은 실제 세상-계량적 가치와 돈으로만 움직이는-과 너무 멀리 떨어진 탓이리라. 그리고 그런 쓸쓸함은 파리 풍경 속으로 사라지고 … 몇 해 전 파리, 생 제르맹 거리가 눈 앞에 선하니, 나는 다시 언제 파리로 갈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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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섦'이라는 단어는 긍정적인 의미보다 부정적인 의미가 더 많은 것 같다. 낯선 사람, 낯선 장소, 낯선 환경 등을 떠올려 볼 때, 먼저 드는 감정이 두려움여서인지(적어도 내게는) 이왕이면 익숙한 것에 안주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낯섦'이라는 것이 새로운 도전거리를 주고, 용기를 얻을 수 있는 가능성을 동시에 닮고 있으면서도 현재의 나는 '낯섦'에 대해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다. 독서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내게 낯선 작가나 낯선 장르, 심지어 낯선 출판사까지 나의 관심을 끌지 못할 때가 많다. 그러나 과감히 낯섦을 뚫고 새로운 세계로 발돋움을 해보면 의외로 괜찮은 책을 만날 때가 많다. 내가 관심 있는 분야의 독서도 충분히 매력을 발산하고 있지만, 종종 곁길로 들어가 새로움을 맛볼 때의 그 짜릿함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그런 의미에서 '안치운'이란 저자는 낯설 수밖에 없었다. 가을에는 수필이 제격이라 용기를 내어 집어든 책이었으나, 글을 읽기 전에 잘 알지 못하는 저자의 글이라는 것 때문에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수필이라 큰 부담이 없었다 해도 연극계에 몸을 담고 있는 분의 글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그러나 그런 걱정은 곁길로 들어가는 새로움과 가을이여서 수필이 제격이 아닌, 인간의 내면이 드러나 있는 글은 어느 때 읽어도 진솔하다는 느낌에 순식간에 가려졌다. 그래서인지 낯선 작가와 장르에 도전해 볼 용기를 얻었고, 꼭 새로움을 맛보지 못하더라도 도전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잘 몰랐던 타인에 의해 도리어 내가 마음을 열게 된 글들을 만나는 것만큼 행복한 독서가 있을까?
가을 들어 더욱 쓸쓸해진 마음 때문인지 저자가 머리말에 쓴 글귀부터 마음에 와 닿았다. '기억의 불안과 부재 속에서 산다는 것은 언제나 쓸쓸하고 외롭다.' 라는 말이 꼭 나에게 하는 것 같아 잠시 멈칫 하면서도, 그 뒤를 이어 '현실이 남루할 때 생은 과거에 지배된다는 것을 절로 깨닫는다.' 까지 내 마음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현재의 나는 기억의 불안함에 외로워하고, 과거의 나를 떨치지 못해 앞으로 나가고 있지 못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인정하기가 늘 껄끄러웠는데, 저자는 아무 거리낌 없이 머리말에서부터 독백 같은 내면을 흘려, 독자에게 마음의 세워진 벽을 허물어 주었다.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 세 단락으로 이루어진 저자의 글은 한 사람의 내면이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살아가고 있는 삶을(각자의 방향은 다르겠지만) 일상과 예술, 문화와 얽어 한쪽으로 기울어진 단편의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다. 저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연극계인지라 연극에 대한 소견과 자신의 경험담을 다루었지만, 어느 곳 하나 젠체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때면 객관성이 부족해 독자를 불편하게 했던 글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저자는 담담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어서인지 자랑할 만한 것인 것 같은데도 눈치 채지 못하고 넘어갈 때가 종종 있었다. 거기다 오랫동안 연극 공부를 해오고 현재도 연극인으로 불리면서도, 현실의 연극을 개탄하고 자신이 몸담아온 '연극'에 후회 깃든 혼란스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있어, 여전히 자신의 위치를 찾아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자 하는 의지를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수필을 읽고 느낌을 남길 때 가장 난감한 것은 어떤 글이 담겨 있냐를 내비치는 것이다. 단락이 나누어 있어 간략한 설명을 할 수 있을지 몰라도, 글에 담긴 무게를 드러내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그의 글을 읽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있지 않다는(신간이기에) 색다른 기분과 안타까움이 교차할 정도로 깊이 있고 평정을 유지한 글이었음을 고백하게 된다. 거기다 책 속에 글이 갇힌 것이 아니라 저자와 글, 그 글을 읽는 독자, 글을 통해서 다른 것과 이어지는 연결고리의 폭 넓은 관계를 보았다. 저자의 글을 읽는 동안 책 속에 언급된 다양한 책들을 만나고 싶어 검색을 해 본 것이 내게는 또 다른 즐거움으로 다가왔다. 파리에 유학 가서 만난 책들, 공부를 위해 읽은 책들, 자신이 만난 책들 중에서 좋았던 책들을 많이 언급하며 자신의 생각을 함께 드러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 책을 읽고 싶다는 욕망이 솟구쳤고, 저자가 그 책을 통해 얻은 것들이 내게도 스며드는 착각이 일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저자가 언급한 책들은 대부분 절판된 책들이어서(다행히도 그 가운데 움베르토 에코의 책이 개정판으로 나와서 반가웠다.). 그 책들을 만날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움이 컸다.
저자의 글이 평정을 유지했다고 하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저자의 개탄을 살펴보면 이 책에 실린 글들이 그렇게 밝은 사유(思惟)가 아니었음을 깨닫게 된다. 저자에게 익숙한 연극을 통해서 삶을 비유하고, 자신이 사랑했던 작품을 통해 현실을 드러내 보이는 것에 발랄함을 갖추기란 힘들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글을 통해 우울하거나, 삶의 희망을 느끼지 못했다는 푸념은 번지지 않았다. 오히려 진솔한 글로 인하여 내가 당면해 있는 현실을 또 다른 시각을 바라볼 수 있어 위로가 되었다. 나만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위로, 내게 펼쳐진 길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답답하면서도 설렌다는 희망, 인생의 끄트머리에 가서도 후회라는 것을 과감히 할 수 있다는 거칠지 않은 절망의 가능성 모두가 내게는 하루를 살아갈 수 있는 힘을 되어 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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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책을 읽는 이유는, 책을 통해 뭔가를 배웠으면 좋겠다는 바람 때문이기도 하지만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재미'라고 할 수 있겠다. 퇴근하고 와서 편하게 뒹굴며 쉴 수도 있는 시간에 '재미'가 없다면 굳이 책을 펴들 이유가 없으니까. 하지만 뭔가를 배우게 해주는 책이라고 해서 영 재미가 없는 것은 또 아니다. 사람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는 책 외에도 역사책, 미술책, 예술에 대한 책 등 내가 이해할 수 없고 한 번에 머릿속에 집어넣기에는 힘든 책들도 어떤 내용이 실려있고 어떤 문체를 쓰고 있느냐에 따라 받아들이는 정도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에세이 또한 마찬가지다. 대개 에세이는 쉽게 읽히는 분야에 속하지만 또 그렇다고 해서 배울 점이 없다거나 한 번 읽고 잊어버리게 되는 책이라고도 단정지을 수는 없다. 하지만 에세이는 어디까지나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 읽기 쉽고 받아들이기 쉽게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영.
소재는 좋다.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 내가 지금까지 읽었던 에세이들의 주제는 모두 이 범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고 본다. 살고 여행하고 공부하는 것. 우리의 근원을 생각하게 하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를 고민하는 인간으로서는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소재다. 그것을 어떤 사람은 여행을 통해, 어떤 사람은 자신의 관점으로 본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나름의 방법대로 풀어냈었던 것이다. 그런데, 솔직히. 이 책의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정확히 와 닿지를 않는다. 내 눈이 글자를 읽고 있기는 한데 그 내용이 머릿속으로 슉 들어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책과 나 사이에 보이지 않는 투명한 막이 설치되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유가 뭘까.
이 작가는 갇혀 있다. 글을 써서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도 자신만의 세계에 홀로 남겨져 있다.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은 철저히 부정하며 자신의 생각만 옳다고 주장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아파트를 예로 들어보자.
나는 이 문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진지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판단 기준이 과연 어디에 있다는 것일까. 겨우 그 사람이 살고 있는 집 하나로 그가 진지한 삶이라느니, 경망한 삶이라느니 논할 자격이 그에게 있을까. 물론 중심을 잡고 살아가기 위해서 자신만의 기준은 필요하다. 하지만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의 삶까지 한 마디로 정의하려는 그가 나는 못마땅했다.
전체적으로 문장이 붕 떠 있다. 쉽게 이해되지 않을 뿐더러, 다른 사람과 공감하기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자신에 취해 쓴 글이라는 느낌이다. 연극학과 교수에 연극평론가, 파리 국립3대학에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니 대단한 사람일 수는 있겠다. 하지만 그와 나의 관계는 작가와 독자다. 우리의 관계에서는 그다지 환영받을만한 책은 아닌 듯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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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세이를 읽는다는 것은 사실 좀 읽는 독자도 작가도 조금씩 볼이 발그레해지는 일이 아닌가 싶다. 더구나 작가 자신의 삶의 이야기와 사유하는 바를 이야기를 할 때면 말이다. 더구나 어떤 특정 주제를 다룬 에세이가 아니라 자신의 삶과 직업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다룰 때면 그 주제에 공감할 수 있는 분들은 잔잔한 감명을 받을 테지만 전문적인 직업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잘 모르는 나와 같은 독자들은 좀 난감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모르니, 공감하기도 힘들고 작가의 생각과 글 속의 이야기가 진짜 연극계의 현실인 것인지, 작가가 생각하는 변화되어 가는 우리들의 모습에서 안타까움을 표현한 부분에서는 그렇게까지 우리가 길을 잘 못 들어서고 있나 하는 의문도 들었었다. 물론 에세이는 자유로운 글쓰기이고 읽는 독자가 모든 것을 공감하고 공유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조금 일반 독자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지 않았나 싶다. 그래서 기억하고 싶은 글귀도 생각도 많았는데, 그 부분이 묻히는 것 같아 아쉬웠다.
'시냇물에 책이 있다' 는 크게 '살며, 여행하며, 공부하고'라는 주제로 분류되어 작가의 생각하는 바를 유학시절 공부하던 시절과 한국에 돌아와 연극계에서 느낀 현실, 연극의 길을 가겠다는 작가를 묵묵히 바라만 보고 계셨던 아버지와의 이야기, 요즘 관심 있게 생각하고 있는 주제에 대한 이야기는 다소 딱딱하게 느껴지던 글에서 작가의 정을 느낄 수 있었다. 건축, 사진, 연극 등 예술 전반에 걸친 작가의 생각과 글은 읽을 당시에는 어렵기도 하고 잘 모르기 때문에 공감하기도 어려웠지만 지나고 나서 가끔 그가 한 이야기들이 기억에 남는다. 그래서 주위 분들에게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을 전하기도 하는 것을 보면 완전 공감은 아니지만 부분 공감은 가능케 한 에세이였다. 조금만 더 독자에게 가깝게 다가올 수 있었으면 하는 아쉬웠던 그러나, 기억에 남는 이야기들도 많았던 에세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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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서대 연극학과 교수이자, 연극평론가인 분이 쓴 에세이입니다. 아시는 분은 아시겠네요. 저는 모릅니다. 사실 에세이집의 리뷰를 쓴다는 건 그리 탐탁한 일이 아닙니다. 소설과는 다르게 에세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의 모음집이 아니겠습니까.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의 글이야 히햐, 감탄하면서 밑줄도 죽죽 긋고 군데군데 감동도 좀 먹어가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겠습니다마는 그렇지 않을 경우엔 참, 이거. 그러니까 말하자면 아하,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구나, 하는 차원에서의 다른 생각은 사고를 확장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서로의 생각이 확고한 부분에서의 다른 생각은 사실 좀 불편하죠. 그렇다고 그 부분이 나와 다르다해서 뭐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요. 그나마 나는 그에 대한 생각은 이렇게 달라, 라고 말할 필요를 느낄만한 부분이라도 된다면 다행일텐데 전혀 필요를 느끼지 못하는 영역에서의 다른 생각을 읽는 것은 확실히 즐거운 일은 아닙니다. 이 에세이집은 제게 그런 존재였는데요, 내용보다는 표현하는 방법이 제가 굉장히 싫어하는 방식이어서 좀 불편했습니다.
일단 이 에세이는 말그대로 에세이고요, 교토와 한국, 산을 타거나 길을 걸으며 느끼는 것들, 외국을 다니면서 생각한 것들, 학문에 대한 생각들을 적어놓은 것입니다. 당연히 그렇겠지만 어떤 이야기들은 저와 생각이 비슷하고, 어떤 이야기들은 그렇지 않았으며, 어떤 이야기들은 짜증이 좀 나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것은 저자가 말하는 방식, 그러니까 앞서 제가 말씀드렸던 부분에 대해 얘기를 좀 해볼까 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명료하지 못한 문장을 싫어하고, 부실한 내용을 감추고자 꾸민 문장도 매우 싫어합니다. 어렵게 읽고나니 실은 알맹이가 없는 그런 문장들 말이죠. 이를테면,
<인간의 표상들도 단순화되고, 도식화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제 삶은 자연에 대립되는 기술로 실재하는 삶을 증발시켜버리면서 자신을 확대 재생산한다.>
저는 이런 식으로 표현하는 문장을 굉장히 싫어합니다. 이해에 앞서 읽을 필요조차 느끼지 못한다고나 할까요? 이를 저는, 알맹이가 없는 내용을 뭔가 잔뜩 꾸며서 읽는 이를 미혹시키려는 잠재의식에서 발동된 욕심이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의식 과잉이라고 해야할지, 뭐 그렇습니다. 자신의 내공보다 더 위에 것을 성급하게 취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이 드러내는 행동이기도 하죠. 진정 의사소통을 하고자 함이 아니라 자신의 포장이 우선인 부류들이 대개 저런 식의 문장, 혹은 말을 구사하더라는 게 저의 개인적인 통계입니다. 명예욕이 좀 과한 이들이 가진 특징이기도 하고요. 이건 어쩌면 서로가 살아온 사회 환경으로부터 비롯되는 차이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의 경우는 오랫동안 비지니스 분야에 몸담아 왔기 때문에 조금 더 명확하고 분명한 전달력을 지닌 문장이 익숙한 것이겠지요. 그러면서도 쉽고 세련된 문장을 구사할 수 있다고 여기는 편이니까요. 사실 이쪽 분야에서만 보자면 대개 알맹이 없는 빈깡통 같은 내용의 기획서들이 휘황찬란하거든요. 그런 거 좋아하는 경영자는 제가 알기로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 그리고 그런 언어를 구사하는 사람의 내공 역시 단박에 알아보지요. 장사꾼들은 본래 그런 얄팍한 수, 혹은 허영에 넘어가지 않도록 끊임없이 훈련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뭔가를 꾸며서 실력을 속이려는 행위는 오래가지 못 할 수밖에 없죠. 자, 이걸 제가 지내온 사회적 환경의 성향이라고 하면, 그와는 다른 쪽, 말하자면 주로 학문이나 예술 쪽에 오래 몸담은 분들은 저런 식의 문장을 좋아하는 것 같기도 하더군요. 말들은 쉬운 문장, 쉬운 문장, 하면서도 그렇게 쉬운 문장으로 쓰는 것이 좋다라고 말하는 문장 자체부터 어려운 단어를 선택해서 쓰는 양반들이니, 가끔은 뚜껑을 좀 따보고 싶은 마음이 들 때가 있습니다. 어쨌든 저의 짧은 생각으로는 그렇게 글이나, 말을 통해서라도 무게감을 싣지 않으면 별달리 보여줄 수 있는 실력이란 게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닌 가 싶습니다. 같은 말을 해도 뒷짐을 지고 말해야 좀 더 무게감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런 느낌이랄까... 하나 더 가보죠.
<집에 대한 불경한 태도들이 삶을 온통 휘저어놓고 있다. 집의 건축적 성취가 삶의 성취와 관계없고, 집은 삶과 어긋나면서 같이 간다. 집이 집 같지 않고, 삶이 삶 같지 않다. 집과 삶이 서로 마주보지 않는다.>
저는 이 문장을 읽고 그만 실소를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어쩔수가 없어요. 도저히 저와는 맞지 않는 문장들입니다. 집과 삶이 마주보지 않는다니. 저는 이것이 어쩐지 낭만, 혹은 철학적 감상이라기보다 가식적이라는 느낌이 먼저 들어서 레드 얼럿 경고등부터 반짝이더군요. 이런 냥반들이 위급할 때 가장 먼저 배신을 때린다, 뭐 그런 엉뚱한. 하지만 이런 식의 문장을 좋아하는 분들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이걸 두고 왈가왈부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경우는 뭐랄까, 그냥 각자의 길을 가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거겠지요. 어쨌든 그러니까 이 에세이에 대해서 저는 더 할 말이 없습니다만, 대충 어떤 느낌인지는 충분히 전달되었으리라 생각하므로 저와 반대의 생각을 가진 독자 분들께는 잘 맞을듯 싶습니다. 그럼 안녕. http://blog.naver.com/vitoj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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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받아 읽게 된 책 <시냇물에 책이 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모른다. 사전 정보 없이 이번에 처음으로 읽게 된 책이었다. 대학교수 연극평론가라는 지은이 소개를 읽고 산문집을 읽기 시작했다. 그런데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어가는데 살짝 고개를 갸우뚱 하게 한다. 그는 뒷산을 걸어도 뒷산을 걷는 것이 아니라 삶의 본질로 걸어가는 일이고, 산을 타는 것은 그냥 산을 타는 것이 아니라 인생을 탐구하는 일이고, 자전거를 타는 일은 그냥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고 삶의 철학을 실천하는 일이고, 프랑스 파리에서 글을 쓰는 일은 그냥 파리에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무거움을 다시금 확인하기위한 일이다. 하아.... 그의 생활은 모두 관념과 추상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러니 어디를 가든 무엇을 보든 무엇을 하든 그는 오로지 그의 머릿속을 헤매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내게 수필이란 소설이나 시에서는 느낄 수 없는 작가의 생활냄새 사람냄새를 맡게 해주는 그런 책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런 생활이나 소소한 일상의 일들은 모두 지워지고 그의 추상적이고도 관념적인 생각들만이 추려져 있다. 그러니 이 책은 그가 얼마나 추상적이고 관념적인지 본질을 추구하는지를 보여준다. 구체적인 일상과 생활은 사라지고 맥락없이 그가 느끼는 추상적 관념들과 사색들이 가득해서 내게 이 책은 수필이나 산문이라기 보다는 두서없이 뒤섞인 그의 일기장을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지금 여기라는 현실에서 함께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한 세 걸음쯤 비껴난 곳에서 현실을 바라본다. 나는 그게 자꾸만 눈에 걸리고 마음에 걸리고 신경이 쓰이는 게 불편했다.
자신은 인생의 불확실성 앞에서 과감한 선택을 하는 이들이 부러워 멀리 청춘의 열정을 불태웠던 파리까지 떠나서 글을 쓰면서 아내에게 아이들 재우고 좋은 글 많이 쓰라고 말하는 그가, 아내가 긴 팔 옷을 넣어주지 않아 여름인데 추위에 떨고 있다는 그가, 프랑스 파리에 와서 제일 먼저 이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가난한 그대들, 좋은 하루'라고 인사를 건네고 싶었다는 그가, 가난한 이들이 여유롭게 식사를 하는 시테 식당에 앉아 '더이상 없다는 것은 있다는 것보다 훨씬 풍요롭다'라고 말하는 그가, 연극에 빠져 프랑스 파리까지 유학을 하고 연극평론가와 대학교수로 살았는데도 이제 연극판에 실망해 연극 공부에 빠져 죽치고 버텨낼 자신이 없다고 말하는 그가, 아버지는 왜 자신이 선택하도록 내버려 두셨을까? 라고 묻는 그가, 나는 어디에 있는가? 라고 묻는 그가 나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공감할 수 없었다. 안치운 산문집 <시냇물에 책이 있다> - 다락방 허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