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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모든 내용이 좋았는데 그중에서도 '제 10장. 인생의 반환점을 지나서 - 마흔 이후의 독서'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 장에서 탕누어는 <콜레라 시대의 사랑>에 등장하는 의사 우르비노의 말을 빌려 '자기 내장의 위치와 형태를 알게 되는' 나이가 되면 우리는 '새로운' 몸으로 독서를 진행하게 되는데 그저 자신의 신체 기관에 신경을 쓰게 될 뿐만 아니라 젊었을 때는 거의 주목하지 않고 지나쳤던 책 속의 내용 또한 늘어나서 마치 처음 읽는 듯한 느낌이 드는 책이 많아진다고 말한다. 시력에 점점 더 신경 쓰이는 것만큼 백배 공감 가는 부분이다. 저자의 결론처럼 점점 더 유한해지는 생명의 시간을 장악하여 '가장 원하는 영역'에 집중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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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만 작가의 책을 사게 될 줄은 몰랐다. 솔직한 소회다. 대만을 무시하는 게 아니라 나의 독서력으로는 국내가 고작이거나 범위를 애써 넓힌다 해도 세계문학전집까지가 한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책을 여행에 비유한다면 세계문학전집에 나오는 책들은 내가 아는 지역이다. 여권도 있고 비자도 있고 무엇보다 한국어 안내문이 곳곳에 붙어 있어서 원문의 언어를 전혀 모른다고 해도 여행에 불편함이 없다. 그러나 대만의 책은 내게는 생소한 지역이었다. 단순하게 말해서 좋은지 나쁜지 전혀 알 수가 없었고 알 수 없는 것은 흥미를 자극하기보다 이질적이었다. 탕누어라는 이름은 경향 신문에 실린 글항아리 대표의 오피니언을 읽다가 알았다. 오피니언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탕누어라는 작가를 소개하면서 직업 독자라고 한 말이 인상적이었다. 독자가 직업이라니.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에 의하면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책을 읽을 사람이 평균적으로 일본 인구의 5%는 될 거라고 말했다. 단순 추정해서 세계 인구의 5%면 약 3억 5천만 명이다. 어디 가서 책 좀 읽었다고 말하기는 면구스러운 독서력이지만 얼굴이 달아오르는 홧홧함을 감수하고 말하면 나도 이 3억 5천만 명의 끄트머리에는 들어갈 것이다. 독자가 직업이라는 말은 책 읽고 돈을 받는다는 말인데 정말 그럴 수만 있다면 아마 이 3억 5천만 명 중에 적어도 10%는 하던 일을 그만두고 전업하지 않을까. 물론 수익이 얼마나 될 지는 전혀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책을 읽는 게 직업이라는 말은 참 듣기가 좋았다. 사실 정색하고 들여다보면 별로 좋은 얘기가 아닐지도 모른다. 책을 읽는 사람이 점점 줄어드는 와중에 독서는 등산이나 수영처럼 일종의 마니아적인 파트가 됐다. 직업 독자라는 말은 어쩌면 그러한 추세를 반영한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게는 이 말이 좀 다르게 들렸다. 책 읽는 게 너무 좋아서 그걸 직업으로 삼을 정도라고. 탕누어 작가는 다른 사람들이 오전에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하듯이 아침마다 카페로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한다고 한다. 물론 근무 시간에 하는 일는 오직 하나. 책 읽기다. 예전에 내게 성악을 가르치던 선생님은 내가 매일 연습한다는 말을 하자 네가 이렇게 성악을 좋아해주니 성악을 직업으로 삼고 또 가르치는 입장에서 참 고맙다고 하신 적이 있다. 내가 책을 직업으로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그래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수많은 사람 중 하나로서 책의 가치가 점점 사장되어가는 판국에 책 읽기는 나의 직업이라고 선언할 만큼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존재는 참 반갑다. 이런 사람은 그냥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치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틀린 게 아니라고 말해주는 것 같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뭘 한다고 하면 가장 궁금해하는 것 중 하나가 그 일의 교환 가치다. 적나라하게 말하면 그게 돈이 되느냐 라는 것이다. 글을 써서 돈을 버는 사람이 많고 개중에는 직업과 병행하면서 흔히 말하는 N잡러로서 다양한 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세상에는 자기가 쓴 글에 백 원도 받지 못해도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그 분들도 아마 글을 써서 수익을 올릴 수 있다고 하면 꼭 환대하지는 않더라도 싫어하지는 않을 것이다. 경제적인 면을 떠나서 자기가 쓴 글에 누군가 대가를 지급한다는 건 인정의 한 종류니까. 그렇지만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해서 쓰는 건 아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는 작가가 되기 전에 재즈 바를 운영했었는데 아무래도 술을 파는 곳이다보니 영업이 끝나면 새벽이었다. 집에 도착하면 2시나 3시 정도 되었다고 하는데 아내도 키우던 고양이도 잠든 그 시각에 홀로 부엌 테이블에 앉아 글을 썼다고 한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아마 그렇게는 못했을 것이다. 김연수 작가의 데뷔작인 <가면을 가리키며 걷기>도 작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쓰지 않았다. 그의 에세이 <소설가의 일>에 보면 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너무나 심심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88년 5월에 명동성당에서 투신한 조성만 씨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서다. 심심하다는 것과 누군가의 죽음을 이해한다는 것은 비교하기 어려워 보이지만 사실 대개의 경우 현실적인 무게를 갖는 것은 전자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마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지만 우리는 그 죽음보다 당장 현재의 지루함, 사는 것의 막막함에 골몰하고 있다. 그러니 김연수 작가가 데뷔작을 쓰게 된 계기를 굳이 어느 한 쪽일 거라고 정하고 싶진 않고 단지 이렇게 말하고 싶다. 심심하다는 것은 내가 지금 열중해서 할 일이 없다는 것이고 누군가의 죽음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은 그 죽음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은 할 일이 없으면 본인이 가치없게 느껴지고 이해할 수 없는 게 많으면 자기가 바보처럼 느껴진다. 요컨대 심심한 것과 누군가의 죽음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경로는 달라도 결국 자기 자신을 괴롭히고 상처입힌다. 그런 와중에 소설을 썼다는 것은 아마도 소설을 쓰는 것은 그 상처를 치유하는 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무카라미 하루키 작가도 했다. 소설을 쓰는 이유는 쓰고 싶은 마음이 저절로 솟아나기 때문이라고. 그래서 소설을 쓰는 일은 기본적으로 재미있는 일이라고. 그리고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사람들이 돈을 벌려는 목적 없이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이유이다.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탕누어 작가(본업은 편집자라고 한다)가 이제껏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느꼈던, 독서를 이루는 다양한 파트에 대한 소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책은 <백년 동안의 고독>으로 유명한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책 <미로 속의 장군>에 기대어 이야기를 시작한다. 아무래도 읽은 책도 엄청나게 많고 생각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지 책에 사용된 언어는 다소 현학적이고 때로는 난해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적지 않다. 말하자면 좀 더 쉽게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뭔가 의미를 최대한 끌어모으기 위해 어려운 말을 쓴 것 같은 기분도 든다. 물론 이건 내 개인적인 감상이므로 나보다 높은 독서력을 가진 분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다만 나와 비슷한 사람들에게는 좀 어렵게 읽힐 수도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쉽게 읽지 못한 탓에 최대한 집중하려 했음에도 많은 내용을 기억하진 못했다. 반대로 이런 책의 장점은 중간에 다소 이해하기 쉬운 부분이 나오면 벼락같이 머리에 들어온다는 점이다. 가시덤불과 나무줄기로 뒤엉킨 숲을 걷다가 갑자기 사람이 설치한 나무 데크를 만난 기분이랄까. 덕분에 좀 편하게 걸었던 나무 데크 중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사유는 불꽃이고 책은 재료라는 말이다. 불꽃이 꺼지지 않고 활활 타오르기 위해서는 장작이 필요한 것처럼 생각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비상하기 위해서는 책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나는 이 말이 참 좋았는데 왜냐하면 내가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려주는 동시에 무엇을 해야할 지도 말해주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말은 아마 나 같이 책을 읽고 글을 쓰지만 성과는 별로 없고 오히려 쓰기는 점점 어려워지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한다. 글을 쓸 때 왜 자꾸 멈추게 되고 지우게 되는가. 생각이 끊어지기 때문이다. 생각이 끊어지는 이유는 장작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만약 당신이 글을 쓰려고 하는데 머릿속에 혹은 마음속에 차오른 생각이나 감정이 언어로 치환되지 않는다면 그건 그 생각이나 감정이 어딘가 결점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당신의 언어가 부족한 탓이다. 부족한 언어를 채우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 책을 읽는 것. 이것이 내가 내린 결론이다. 김연수 작가는 소설 쓰기를 그만두려고 한 시점에서 박완서 작가를 만나 평생 소설을 썼는데도 여전히 소설 쓰기가 어렵다는 말을 듣고 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연수 작가 본인의 말에 따르면 “누구도 개그콘서트를 보듯이 글을 쓰진 않는다”. 김연수 작가는 몇 편의 에세이만 보아도 얼마나 책을 좋아하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다. 한 번은 최대한 짐을 줄여서 중국에 갔는데 그곳 헌책방에서 책을 사다보니 도저히 가지고 갈 수가 없어서 국제운송을 부쳐야 했다고. 이런 걸 보면 아마 장작이 충분하다고 글을 쉽게 쓸 수 있는 건 아닌 모양이다. 불 피우는 데도 기술이 있듯 글을 쓰는 데도 재료를 다듬기 위한 기술이라는 게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을 아무리 읽어도 기술이 없으면 글을 잘 쓰기란 요원할 거라는 말은 아니다. 재료가 많으면 다양한 시도를 해볼 수 있다. 가령 요리로 비유하면 재료가 적을 경우 한 번 음식을 망치면 시간이 남아도 다시 해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재료가 충분하다면. 몇 번이고 망쳐서 음식물 쓰레기를 만들어도 끝없이 시도할 수 있는 여력이 남아 있는 셈이 된다. 어차피 기술이라는 게 돈을 주고 사거나 크리스마스에 산타 할아버지가 던져주고 가는 게 아니라면 결국 그건 우리가 어쩔 수 없는 부분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인정하고 어쩔 수 있는 부분에 집중해야 한다. 재료를 모으는 건 다행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다.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건 살면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기 마련인 상처를 회복하는 일이다. 음악이나 미술이나 체육이나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체능이라고 부르는 모든 영역이 그렇다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관리가 뛰어난 소수를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상처를 관리하지 못한다. 언제 다칠지 무슨 일이 생길지 그 일이 어떤 영향을 미칠지 전혀 통제할 수가 없다. 그러니 좀 일반화해서 말한다면 상처는 우리가 어쩔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상처 이후의 처치다. 상처가 인간 바깥의 일이라면 회복은 인간의 일인 것이다. 그래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이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사람이 그림을 그리듯 어떤 사람들은 책을 읽고 글을 쓴다. 탕누어 작가는 말한다. “독서는 자유”를 느끼는 일이라고. 국어 성적이 좋았던 중고등학교 시절을 기억하며 책 속에서 주제를 찾아내는 게 아니다. 책은 바다이고 중요한 건 그속에서 헤엄치는 것이다. 얼마나 멀리 갈 수 있을지 혹은 얼마나 깊이 갈 수 있을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그저 자기가 갈 수 있는 만큼 가면 된다. 그렇게 해서 몸으로 그린 해도가 아마도 우리가 쓸 수 있는 글이 될 것이다. 책을 어떻게 하면 잘 읽을 수 있는지 글을 어떻게 하면 잘 쓸 수 있는지 말해주는 책은 많다. 일독한 입장에서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거기서 완전히 다른 영역의 책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사실 독서나 글쓰기의 방법론을 쓴 책을 거의 읽어보지 않아서 단순 비교가 어렵지만 그래도 추측을 바탕으로 이야기하면 방법론을 이야기하는 책들이 ‘구체적인 객관론’을 지향하고 있다면 <마르케스의 서재에서>는 ‘추상적인 주관론’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 책은 독서론에 속하지만 어떻게 보면 독서론의 이단아인 것 같기도 하다. 그래서 책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지만 독서를 시작하고 싶은 분이나 압도적인 독서량과 단단한 독서력을 갖고 계시는 분께는 추천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있음에도 계속 책을 읽고 싶은 분들께 권한다. 2024년 12월 9일부터 2024년 12월 16일까지 읽고 생각하고 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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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세계는 바다와 같이 넓다. 한자의 역설 표준전쟁 하는 경기로 인해 사람들이 받는 흥분과 꽤감은 왜 빼시나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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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한 독자의 몸으로 무한한 독서의 바다를 상대하려면 결국 선택과 결정을 해야 한다. 그리고 고통스럽게 무언가를 포기해야 한다. 죽음이 모든 것을 방해할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다. 물론 이렇게 말하는 것이 위험할 수도 있다 조금만 잘못해도 게으른 자의 핑계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독자가 자신을 성실하게 대해야 하는지의 여부는 주위 사람들이 개입하여 뭐라고 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