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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 내내 마음이 무겁고 가라앉은 채로 지냈다. 방학을 허무하게 보냈다는 자책도 아마 한몫했을 거다. 얼마나 뭘 더 잘하려고 했는지 실소가 터지지만 건강을 제대로 챙기지 않은 건 잘못이다. 나쁜 줄 알면서도 끊지 못하는 습관과 성향과 기질도 한 개인의 운명으로 작용하기에 철학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느 부분에선 이해가 간다(나는 위대하지 않으니 비극적 결함은 될 수 없고 그냥 벗어날 수 없는 굴레라고).
이런 원리를 알고 있음에도 개학 앞에 마음이 넘실댄다. 괜스레 울적해하거나 스트레스 받는 자녀분이 있다면 새학기 증후군이니 잘 다독여주시길 바란다.ㅋㅋ 뒤돌아보는 시간조차 현재를 담보로 하는 미련맞은 짓이니 남은 시간이라도 잘 마무리하자고. 아니면 방학은 원래 후회하라고 있는 거라고.. 문제를 일축해선 안 되겠지만 객관적으로 바라보도록 도울 수 있을 듯하다.
원래 <코코>를 큰조카와 같이 읽으려했다. 그녀가 펑크를 냈지만 덕분에 나는 잘 읽었다. 조카와 어떤 얘기를 나눌지 생각하면서, 영화를 놓친 내가 상상한 그 세계가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영화를 소설로 옮긴 버전은 빠른 영상 전개와 편집으로 인해 맥락이 불분명할 때 그 틈을 메우도록 돕는다. <겨울왕국>과 <인사이드아웃>을 비롯해 여러 편을 소설 버전으로 만났는데 그중 <코코>가 최고로 전개가 매끄러웠다. 미국 학생들 대부분이 스페인어를 구사한다지만 <코코>에 엄청난 양의 외래어가 설명 없이 제시돼 깜짝 놀랐다.
<코코>가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이라지만 아무래도 미국 이민사회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지형적으로도 가깝고 멕시코계 이민자, 즉 치카노(남성)/치카나(여성)의 인구 비중이 상당히 높다. 이들은 미국 내에서도 가족 중심의 공동체를 탄탄히 유지하고 있다. 가부장적 문화를 그대로 가져온 반면 여성들의 생활력이 강하다. <코코>에서도 저승이든 이승이든 할머니의 신발을 맞지 않으려면 조심해야 한다. 치카노/치카나 문화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산드라 시즈네로스의 <The House on Mango Street> 일독을 권한다.
미국 내 소수인종에 대한 인정과 이국적인 문화 차용인가 싶다가도 식상한 할리우드식 가족애를 탈피하려는 몸부림이 아닐까 싶다. <라라랜드>의 원래 대본에서 세바스천의 가족애를 적극적으로 어필하다가 실제 제작 대본에서는 그 부분을 삭제한 걸로 알고 있다. 참 반가운 변화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기묘한 가족애로의 회귀를 부추기는 건 아닌지 노파심이 든다.
<겨울왕국>에서 엘사가 얼음 숲으로 떠났다 자신이 지닌 매직과 힘 조절 방식을 터득해 공주의 자리로 돌아온다. <인사이드아웃>에서는 라일리의 머릿속 감정들, 특히 기쁨이와 슬픔이가 험난한 여정을 감행 후 정상적으로 복귀한다. <코코>도 예외가 아니며 죽은 자의 세계(하데스)를 거쳐 산자의 세계로 돌아오는 성장 궤도를 밟는다. 일종의 탐색 신화로 주인공이 자신의 기원을 파악한 후 현실적인 난관을 풀 열쇠, 즉 기타를 획득해 귀환한다.
Though the living couldn't see the dead, the family was whole, brought together by the harmony -- and the meaning -- of a song. (137)
<겨울왕국>의 올라프의 매력에 쏙 빠졌던 독자라면 해골의 이미지가 기존의 으스스함을 너머 재미와 발랄한 상상을 더할 것이다(책에선 올라프에 대한 별도의 언급이 없다). <인사이드아웃>의 봉봉의 기억과 희생에 눈물을 흘린 독자라면 고조부의 정체에 눈물바람이 될 것이다. 이뿐 아니라 <코코>는 다채로운 마술적 기제로 앞선 영화들을 넘어선다. 주인공이 후드로 살을 가릴 때 <햄릿2000>에서 진퇴양난에 빠진 햄릿의 고뇌를 후드티로 설정했을 때의 전율이 떠올랐다.
그리고 <프리다>의 실제 화가인 프리다 칼로처럼 눈썹과 의상 변장을 하고 꽃을 꽂고 원숭이를 대동할 때 폭소가 터졌다. 진지한 독자인 나는 웃으면서도 화가를 인상비평적으로 쓰고 버리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아마도 <코코>에서는 멕시코를 대표하는 화가로 영화 속 음악가(에르네스토)의 입지와 유명세를 강조하고자 가져다 쓴 것일 게다. 죽은 자의 세계의 안내자인 날아다니는 재규어하며 날개가 돋는 개 단테도 환상성을 더했다.
영화 속 영화는 <햄릿>의 극중극 쥐덫을 연상시켰다. 설마 동료가 자신을 배신했을까 싶어 식중독으로 비명횡사했다고 믿어온 헥터 앞에 주인공은 진실의 횃불을 밝힌다. 숙부의 ‘불, 불, 불’ 외침이 들리는 듯하다.
또한 서양인들이 이국적인 문화로 생각하는 제사 문화를 전면에 내세운다. 멕시코는 망자의 날을 기리는 행사로 종이 반죽으로 만든 skeleton art가 성행한다. 제삿날(죽은 자의 날)이 되면 저승과 이승에 꽃 다리가 놓이고 초대받은 조상들이 제당에 모여 한바탕 가족모임을 치른다. 아무나 다리를 건널 수 있는 게 아니다. 이승에서 제당을 마련해 사진을 올린 사람만이, 여권 사진을 보이며 공항 검색대를 통과하듯 특별히 건너올 수 있다. 주인공처럼 이승에서 저주를 받아 산채로 저승으로 넘어온 사람은 꽃잎의 축복을 받아야 마법이 풀린다. 조건 없이 그 사람 편에 서서 축복하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한다.
But I don't wanna make a choice. I don't wanna pick sides. I want you to pick My side... That's what family's supposed to do. Support you. But you never will. (86)
<코코>를 읽으며 가장 좋았던 설정은 말의 중의성을 곱씹게 하는 점이었다. 가족이 먼저다(Family comes first) 라는 말은 모순적이다. 가족은 누군가에겐 닻이지만 또 다른 이에게는 덫일 수 있다. 혈연 중심의 가족 관계는 이제 구태의연하지만 가족이라는 울타리 말고 달리 무엇에 기대 사나 싶다. 그리고 앞서 누군가 상처를 주고 배신했기에, 더 정확히 말해 음악에 미쳐 가족을 버리고 무책임했기에 집에 음악 자체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건 어폐가 심하다. 조상의 과거가 벗어날 수 없는 구속이 되어 미래를 장악한다면 그것은 현재를 온전히 살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름도 미심쩍은 음악가 에르네스토의 말은 칼의 양날처럼 ‘말의 함정’을 살피게 한다. 지금 자신에게 주어진 순간을 꽉 잡으라는 말의 뒷면도 보게 한다. 자아(self)라는 말에는 이기적인(selfish) 어감이 숨겨져 있듯이 순간을 기회로 오독해 자신의 야망만 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다른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한 흡혈귀는 우리 주위에 늘 함께 한다는 명언이 생각난다.
<코코>는 이제 겨우 제사문화에서 자유로운 우리에게 어쩌면 반갑지 않은 메시지를 던진다. 명절에 제사상을 차려 문을 열어두지 않은 집의 조상은 굶주린 채 하루를 보낸다. 제당을 마련해 사진을 올린 후 기억하지 않으면 그는 저승에조차 머물 수 없다. 그렇다면 조상의 얼굴을 기억하며 그와 관련된 추억을 모여 나누는 것이 대단히 중요해져 저승과 이승에서 동시에 가족모임이 펼쳐진다. 건너 뛸 수 없는 예 차리기이자 의식인 것이다.
<코코>는 나를 여러모로 찔러댔는데 그중 음악인을 대하는 태도가 특히 그러했다. 용서하지 않아도 가족으로 잊을 필요까지는 없지 않냐고(You don't have to forgive him, but we shouldn't forget him 113). 멀리서 음악가를 응원하는 일은 간단하지만 그 음악가를 가족 속에 두는 건 복잡한 문제가 된다. 특출 나야 하고 경쟁도 심해 그 널뛰는 시간을 옆에서 지켜봐야 한다. 가족이냐 음악이냐 그것이 문제인 양자택일의 순간이 덮친다. 대부분의 삶은, 가족의 시간은 희생과 양보와 헌신으로 지탱된다. 책임과 의무를 등진 채 마냥 꿈꾸는 권리를 누릴 수만은 없다. 헥터는 그것을 뮤지컬 판타지라고 지칭한다. 이런 딜레마까지 <코코>는 피해가지 않는다. 무조건적인 반대도 안 되겠지만 예술가의 에고이즘을 현실에 녹여낼 타협 방안을 숙제로 내준다.
당신은 어디까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관여하는지 묻고 싶다. 배신과 사기가 난무한 세계로 기꺼이 가족을 들여보낼 생각이 있는지도. 그래도 꿈이라는 환상이라도 있어야 살맛나지 않을까. 꿈은 반드시 이루어야만 의미가 있는 건가. 성취라는 단어의 다른 면에는 소모가 써져 있지 않을까. 유명 음악가가 사는 저승의 탑은 타지마할과 다른 점이 없다. 누군가에겐 사랑인 것이 다른 이에게는 죽음이기도 하다. 대박을 꿈꾸며 일상의 소소한 재미를 외면할지, 모든 운을 당겨 쓰는 파우스트가 될지 등등 멀리서 부메랑이 자꾸 날아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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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을 너무 재미있게 봤습니다. 영어책으로 나온게 있으면 읽어보고 싶어 찾아보다 발견. 구매했습니다. 우선 외국책의 경우에는 재생지를 사용해서 무척 가벼운게 장점인거 같아요. 솔직히 영어 실력이 좋지 않아 읽는 내내 힘들긴 하지만, 그래도 조금씩 나아가는 모습이 기특하네요. ㅎㅎ 제 자신에게 칭찬입니다. ^^ 애니메이션의 내용을 생각하며 읽다보니 그나마 좀 편하게 읽을 수 있는 것 같아요. 코코는.. 사랑입니다. ㅎㅎ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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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같은 제목의 다른 책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었다. 앞 책은 어린이용이었고 이 책은 주니어용이다. 영화를 소설화한 이 책은 주니어용이다 보니 중편에 해당한다. 총 144페이지에 렉사일 580L에 해당하여 초등 3학년에서 5학년 정도에게 권해지는 책이다. 물론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권할 수 있는 책이다.
뮤지션이 되고 싶은 미구엘에게 가족내에서 할머니인 애뷰엘리타가 집안내에 모든 음악을 허용하지않고 있다. 미구엘은 자신이 꼭 저주를 받고 있는 듯하다 표현하고 있다. 음악가인 증조할아버지가 많은 사람들에게 음악을 들려주고 싶다고 기타하나 메고 집을 나가버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집에 남은 증조할머니는 집안의 모든 음악과 관련된 것들을 치워버리고, 구두만드는 일로 가족들을 부양하게되고, 그녀의 자식에게도 그리고 손자와 그의 아내 등등 모두에게 구두만드는 일에 매달리게하고, 집을 나간 남편에 대한 복수(?) 같은 것이 집안 내에 내력으로 내려오게된다. 덕분에 음악을 하고 싶고 뮤지션이되고 싶은 미구엘에게는 큰 벽이 아닐 수 없다. 현재의 할머니는 자신의 할머니가 만든 가족내 전통을 중시하여 미구엘에게 음악을 허락하고 있지않다.
자신이 재능이 있음에도 가족들의 반대로 자신의 뜻을 펴지못한다는 것은 슬픈 일일 것이다. 미구엘에게 닥친 일은 자신의 미래와 꿈을 접어야 하는 일일 것이다. 그러나 미구엘은 결국 자신의 꿈을 쫓기로한다. 비록 할머니와 부모님이 반대를 하고 있어도 말이다.
내용은 영화와 앞선 이야기책등에서 익히 알고들 있을 것이기에, 내용은 이만 줄이기로 하고, 어린 미구엘과 판타지스런 증조할아버지와의 재회는 정말 애니메이션답다. 집안에 저주(?)를 걸어놓게한 당사자인 증조할아버지는 이미 죽은자의 땅에 거하고 있다.(이미 죽었다!) 그런데 이미 이 세상의 사람이 아닌 존재때문에 자신의 꿈이 펴보지도 못한다면 보통은 화가 나거나 좌절하게될 것이다. 그러나 꿈과 희망을 주는 디즈니가 어린이에게 판타지로 죽은자들 땅에 가서 증조할아버지를 만나게 해서라도 희망을 주고 싶어한다.
인간에게 살아가는 데 희망이라는 불씨가 없다면 삶은 암흑 속 절망의 나락에 빠져 허우적대거나 무감각과 무덤덤한 만성적 포기라는 틀안에서 살게 될 것이다. 수많은 신화나 전설에서도 인간에게 희망을 심어주려는 노략을 많이한다. 판도라의 상자에서 맨 마지막으로 삐져나온 그 '희망'은 인간에게 있어 없다면 인간으로 하여금 어디로 가야할지를 알수없게만드는 존재이다. 시지프스에게 허락된 바위굴리기와 불씨를 건네주고 영원히 까마귀에 간을 쪼이는 프러메테우스나 그후 모든 인간들은 꿈과 희망을 노래한다.
자신의 꿈을 쫓는 것은 인간으로서 당연한 권리라고 생각되어지지만 허락되지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 현실과의 갭인 듯하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신을 꿈을 위해 노력한다. 영화<코코 COCO>나 이 책 <코코>를 소소설화 해논 이책도 역시 꿈을 노래하고 있다. 꿈을 쫓는다는 것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발현하기위한 몸부림일 것이다. 동화같은 이야기를 통해 뜬금포를 날리고 있지만 그래도 꿈은 소중하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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