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

리뷰 (2)

한줄평
평점 분포
  • 리뷰 총점10 0%
  • 리뷰 총점8 100%
  • 리뷰 총점6 0%
  • 리뷰 총점4 0%
  • 리뷰 총점2 0%
연령대별 평균 점수
  • 10대 0.0
  • 20대 0.0
  • 30대 0.0
  • 40대 0.0
  • 50대 8.0
리뷰 총점 종이책
[정지용] 해바라기 씨
"[정지용] 해바라기 씨" 내용보기
<미래엔 컬쳐 그룹(윤여탁 외)>에서 발행한 중학교 국어1학년 1학기 교과서에 실린 시입니다.   ------------------------------   해바라기 씨    정지용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 나면 이슬이 나려
"[정지용] 해바라기 씨" 내용보기

<미래엔 컬쳐 그룹(윤여탁 외)>에서 발행한 중학교 국어1학년 1학기 교과서에 실린 시입니다.

 

------------------------------

 

해바라기 씨   

정지용 

 

해바라기 씨를 심자.

담 모롱이 참새 눈 숨기고

해바라기 씨를 심자.

 

누나가 손으로 다지고 나면

바둑이가 앞발로 다지고

괭이가 꼬리로 다진다.

 

우리가 눈 감고 한 밤 자고 나면

이슬이 나려와 같이 자고 가고,

 

우리가 이웃에 간 동안에

햇빛이 입 맞추고 가고,

 

해바라기는 첫 시약시인데

사흘이 지나도 부끄러워

고개를 아니 든다.

 

가만히 엿보러 왔다가

소리를 깩 지르고 간 놈이-

오오, 사철나무 잎에 숨은

청개고리 고놈이다.

 

------------------------------

 

 * 목연 생각 : 나의 학창 시절 시론을 담당하는 교수님이  

최고로 꼽은 시인은 정지용, 소설가는 이태준이었지요.

그러나 북으로 갔던 그들은 금기의 대상이었고요.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을 노래한

<향수>의 시인으로 친숙한 그가

이런 동시도 남겼네요. 

 

화자는 누나와 함께 해바라기 씨를 심은

대여섯 살 쯤 된 소년.

소년은 꽃이 피기를 기다리는 동안

해바라기를 연인이라도 되는 듯 좋아했지요.

그런 마음을 청개구리한테 들키고는 부끄러워하고 있고요.

 

<향수>와 <해바라기 씨>의 고운 심성을 지녔던 그가

북으로 가서 얼마나 고초를 겪었을까요?

하긴 남쪽에서도

김지하 씨 같이 옥에 갇혀야 했던 시인이 있었으니

여기에 남았다고 해서 행복했으리라고 보장할 수는 없겠지만….

 

 

* 괭이 : 고양이.

  시약시 : 새색시, 새악시 

  청개고리 : 청개구리 

 

  

* 정지용(1902~1950 )  : 시인. 충북 옥천에서 태어남. 

일본 도시사(同志社) 대학 영문과를 졸업.

1926년 <학조(學潮)>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함.

초기에는 섬세하고 감각적인 시어와 선명한 이미지를 구사하다가

뒤에는 동양적인 관조와 고독의 세계를 주로 다룸.

시짐으로 <정지용 시집>, <백록담> 등이 있음.

 

* 자료 출처 : 2010학년도 중학교 1학년 학생들이 배우는

  <미래엔 컬쳐 그룹>의 국어교과서에 실려 있으며,

감상은 저의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y******3 2010.08.09. 신고 공감 1 댓글 4
리뷰 총점 종이책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용보기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부친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 교지[휘문] 창간호의 부장이 되어, 기획, 편집일을 맡아 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일본 도지샤대학 재학시절에 시작되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1930년에는 <시문학>
"내 무엇이라 이름하리 그를?" 내용보기

정지용은 1902년 음력 5월 15일 충북 옥천 청석교 바로 옆 촌가에서 한약상을 경영하던 부친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옥천공립보통학교 졸업후, 휘문고등보통학교 재학시 교지[휘문] 창간호의 부장이 되어, 기획, 편집일을 맡아 했다. 본격적인 작품활동은 일본 도지샤대학 재학시절에 시작되었다. 1929년 대학을 졸업하고 귀국한 뒤 휘문고보 영어교사로 부임하고,  1930년에는 <시문학>지 동인으로 참가했으며, 1933년 6월부터는 그가 편집에 간여하는 [카토릭 청년]을 출간했다.  1939년 2월에 창간되어 1941년 4월 폐간될 때까지 [문장]지의 추천위원으로서, 조지훈, 박두진, 박목월, 박남수 등의 시인을 추천하여 시단에 데뷔시켰다. 해방후 16년 동안 재직하던 휘문고보를 사임하고, 이화여자대학교 문과과장으로 1948년 2월 사임할 때까지 봉직하였다.  이 기간 중 [경향신문]주간으로 일하였으며, 1948년 이대를 사임하고는 녹번리에 머물다 1950. 6. 25. 당시 납북되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2001년 이산가족 상봉시 북한의 셋째아들도 그를 상봉대상자로 올려 그가 북한에도 없었다는 사실이 알려졌다. 북한측의 [조선대백과사전]에는 그가 1950년 9월 25일 사망한 것으로 씌여있다.

그의 이런 인생은 그의 시에도 드러나서, 청년때의 일본문학의 영향, 신사조에 대한 시도와 이후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도전들로 나타나 있다. 정지용의 시를 연대순으로 묶은 이 시집은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스물 다섯살의 카페 프란스, 그리워. 26세의 바다, 향수, 발열, 말, 태극선. 29세의 유리창. 31세의 바람, 봄, 고향[고향에 고향에 돌아와도 그리던 고향은 아니러뇨]의 서정적 시세계로부터, 32세의 갈릴레아 바다[주를 다만 깨움으로 그들의 신덕은 복되도다]의 신앙고백을 거쳐, 35세이후 유선애상(流線哀像), 파라솔, 폭포[산골에서 자란 물도 돌벼람박 낭떨어지에서 겁이 난다.]의 은유와 의인화, 이후 옥류동, 구성동의 자연묘사. 40세의 도굴, 예장, 호랑나븨에 나타나는 사건취재적 시에 이르는 그의 변화를 알려준다.

그의 시는 가장 아름다운 한국 현대문학의 꽃봉우리로 여겨진다. 너무 오랜 시간 분단된 나라의 틈바구니에 끼어 그의 아름다운 싯구들은 숨겨지고 가르쳐지지 못하여 왔다. 이제 좋은 현대어 서술과 시어 해석을 통해 그의 시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더욱 친숙해질 날을 기다린다. 이번 여름은 그래서 아이들과 하루를 그의 고향 옥천에서 머물며 그의 재능과 또 불행을 생각해 보았다.

s***y 2011.08.20.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