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보면 섬광처럼 빛을 뿜는 순간이 있다. 하지만 대저 섬광이라는 것의 속성이 그러하듯 그 순간은 곧 자취를 감추고, 그 여운만이 길고 진하게 낙인찍힌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그러한 것은 아니지만 간혹 어떤 이는 그 섬광의 근원을 찾아 멀고 험한 길을 떠나기도 한다. 그 중 또한 몇몇은 그 근원을 찾기도 하지만 대부분은 그 근원을 찾지 못한다. 게다가 그 근원을 찾은 대부분은 다시금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오는 일에 소원해지고 만다.
소설의 발단은 바로 이러한 섬광과도 같은 순간에서 비롯된다. 스킨 스쿠버인 쏠베감펭과 핑크 아네몬은 결혼식 전날 마지막 추억을 담은 잠수를 감행한다. 그리고 모든 수면 아래의 활동을 마치고 수면 위로 떠오르려는 순간 바로 그곳에서 CF 촬영에 한창이던 지니가 하강하는 중이었다.
“...바다색과 거의 구별이 되지 않을 정도의 얇은 청색 천으로 된 슈트를 입고 여자는 아기가 어머니의 자궁 속에서 그렇듯이 몸을 구부리고 우리를 향해 내려오고 있었다. 바다를 침대삼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의 지순한 표정을 짓고, 여자는 눈을 감고 하강하고 있었다. 그녀의 몸을 감고 있는 얇은 천은 바다 물결에 따라 흔들려, 여자는 투명한 수초에 휩싸인 신비한 여신 같았다. 바로 나 자신을 향해 내려오는 것만 같은 어린 여신.”
그리고 두 사람은 다음날 결혼을 한다. 하지만 피로연이 끝나고 찾은 바닷가에서 핑크 아네몬은 운명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쏠베감펭은 결혼식 전날의 그 섬광같았던 순간을 찾아, 어린 여신 같았던 지니를 찾아 길을 떠난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 우뭇가사리(지니의 엄마), 상어(지니의 오빠), 불가사리(지니의 언니), 소라(지니의 매니저)와 함께 살던 지니는 아무런 말도 없이 집을 나선다. 그 하강의 경험은 지니에게도 특별한 것이었음이 바로 그 이유이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는 것은 단 한 번의 하강. 기온과 색채와 물의 촉감이 그녀의 몸 속에 만들어내던 무한한 안도감...”
소설의 대부분은 이러한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골고루 빛을 보내는 것으로 채워져 있다. 물론 그 중심에는 지니가 있다. 어린 시절 상어(의 것을 비롯한 많은 손들)에 의해 목졸린 이후 목소리를 잃은 지니, 하강의 순간 솔베감펭의 인생을 뒤흔들어버린 지니, 우뭇가사리의 막내딸이면서 집안을 일으켜세운 지니, 지니가 떠난 후 불가사리로 하여금 지니와 닮은 스스로를 찾도록 만든 지니, 솔베감펭과 함께 소라가 전국을 여행하며 사람찾기에 몰두하게 만든 지니가 있다. 모든 일의 시작이고 끝이며 모든 사람들의 행동을 창궐케하며 모든 행동을 마무리짓는 절대 여신의 자리에 바로 지니가 있다.
하지만 그 끈끈해 보이는 최윤의 문체에도 불구하고 설정 자체가 튼튼하게 마감되고 있지는 않다. 마네킹이라는 제목이 결국 어린 시절부터 CF 모델(그럼으로 실재하지 않는 이미지로만 살아왔던)의 삶을 살았던 지니를 상징한다는 설정도 어설퍼 보이고, ‘핑크 아네몬의 죽음은 죽음 이후에도 오래 계속됐다’는 쏠베감펭이 아내의 주검을 뒤로 한 채 지니를 찾아나서는 것도 납득 불가능이다(모든 납득 가능한 것만이 소설의 재료라는 말은 물론 아니다). 또한 지니의 목소리를 빼앗는 가족들의 손이라는 설정도 너무 표면적이고 쉽다. 대체적으로 각각의 문장이 보여주는 그윽한 은유의 빛에 비해 내러티브는 너무 조악한 것 아닐까.
다시 한번 말하건대 사람이 살다보면 섬광과도 같이 다가오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때문에 어쩌면 문학이란 바로 이처럼 개개인이 느끼는 섬광의 순간을 절묘하게 포착하고 길이길이 남기는 작업과 다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런지도 모른다. 작가라면 모두들 이러한 순간을 침이 마르도록 고대할 것이고, 자기가 지금 느낀 것이 그토록 고대하던 그 섬광이라고 믿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에 따르는 책임감 있는 설명과 설정, 묘사와 은유가 제대로 결합되지 않을 때 그 섬광은 너무나 개인적인 것에 머무르게 될 지도 모를 일이다.
ps1. 『마네킹』은 계간지인 <문학/판>에 연재되었던 것이다. 고백하건대 난 우리나라 문학지 연재소설들을 불신하는 편이다. 작가와 평론가 사이의 그 끈끈함이 준비 안된 우리의 소설가들을 서두르게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 때문이다.
ps2. 글을 읽는 동안 나도 모르게 마루야마 겐지의 『천년동안에(문학동네,전2권)』라는 소설이 자꾸 떠오른 것은 왜일까. 그가 그 소설에서 보여준 환상적 리얼리즘의 세계가 갖는 실재감과 최윤이 보여준 환상적 리얼리즘 세계의 부재감이 비교되어서는 아닐까. 아쉽다.
ps3. 그럼에도 불구하고 근간에 출간된 다른 작품들에 비해 어지간히 잘 쓴 소설이라는 점을 힘겹게 덧붙여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