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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세계시민] 한 눈에 보이는 세계의 흐름과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지구촌과 세계시민] 한 눈에 보이는 세계의 흐름과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내용보기
이른 새벽에 잠이 깬 어느 날, 인간사랑출판사에 쪽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즈음 신간으로 나온 <지구촌과 세계시민>이 있었는데, 그 책표지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보냈다.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담긴 책표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시선을 확 잡는 부제가 없어서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이른 새벽 잠이 깬 기념으로 그 내용을 쪽지로 보낸 것이다.   평소 인간사랑출판사에서 내는
"[지구촌과 세계시민] 한 눈에 보이는 세계의 흐름과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내용보기

이른 새벽에 잠이 깬 어느 날, 인간사랑출판사에 쪽지를 보낸 적이 있다. 그 즈음 신간으로 나온 <지구촌과 세계시민>이 있었는데, 그 책표지에 관한 개인적인 의견을 보냈다. 재미있는 사진이 몇 장 담긴 책표지의 이미지와는 달리, 시선을 확 잡는 부제가 없어서 안타까움이 있었는데, 이른 새벽 잠이 깬 기념으로 그 내용을 쪽지로 보낸 것이다.

 

평소 인간사랑출판사에서 내는 책에 관심이 많았던지라, 책에 관한 개인적인 생각을 쪽지로 세 개 보냈다. 쪽지를 확인한 인간사랑출판사에서 좋은 의견 고맙다며 답을 보냈고, 그 후의 쪽지에서는 책을 보내주고 싶다고 했다. 새벽에 보낸 세 개의 쪽지로 인해 인간사랑출판사에서 좋은 책 세 권을 받았고, <지구촌과 세계시민>은 그 중의 한 권이다.

 

독자와 소통하는 출판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쪽지를 보낸 다음 날, 인간사랑출판사에서 ‘책 제목 달기’ 이벤트를 실시하는 것을 보고 다시 한 번 놀랐다. 독자와 소통하는 멋진 출판사이다. 인간사랑출판사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한다.

 

 

<지구촌과 세계시민>은 2011년부터 2014년까지 진행된 한국연구재단 토대기초 연구지원 사업인 <한국 대학교육에서 ‘시민교육’ 연구 및 자료 총서>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출판하게 된 것이라 한다. ‘1장 환경위기와 생태, 2장 지원갈등과 지속가능성, 3장 빈곤과 질병, 4장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5장 주권과 국가이성, 6장 전쟁과 평화, 7장 다문화시대의 공존, 8장 종교와 포용의 문명, 9장 글로벌 사이버 세계의 위험’으로 글이 전개된다.

 

알고 싶으나 시간을 내어 찾아 읽어보기는 힘든 내용들이 가득 담겨 있다. 책 한 권에 이 많은 내용들을 담고 있는 것이 참으로 대단하고 놀랍다는 생각이 든다. 휴가철이나 긴 연휴 때에 사색의 시간을 가지면서 마음 편하게 읽어보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3장에서 5장을 재미있게 읽었다. 내용이 워낙 방대하기에 간략히 정리한 <서문>과 함께, 재미있게 읽은 3장에서 5장을 중심으로 정리해 본다. 5장에서는 용어 설명이 많아 다소 지루할 수 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서문>

지구화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은 국경의 경계를 넘어 경제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이미 서로 얽혀 있으며, 정보화 시대의 도래로 인해 우리는 세계 곳곳의 일들을 실시간으로 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모두 세계시민이다.

 

내가 사는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가 하나의 공동운명체이며 그것을 단위로 생각할 수 있는 정신의 확장성이 필요하다. 빈곤과 질병, 환경과 자원, 전쟁과 평화 등과 같은 문제는 인류 공통의 관심사이며, 연대와 협력을 요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이런 정신의 확장과 공감, 연대와 협력을 통해 우리는 세계시민이 된다.

 

<3장> 빈곤과 질병

세계화가 진행되는 과정 속에서 경제적 격차에 따른 부의 양극화 문제는 심각하다. 유엔개발계획의 1992년 판 『인간개발 보고서』에 따르면, 상층부의 소득 20%에 속한 사람들의 소득 합계는 하층부 20%에 속한 소득 합계의 60배에 이른다. 이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지속적으로 심화되고 있다. 지구적 양극화와 빈곤의 심화는 지구적 차원에서뿐만 아니라 개별 국민국가 내부에서도 동일한 구조로 나타나고 있다.

 

경영자와 노동자, 정규직과 비정규직 사이의 임금격차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현격하게 벌어지고 있다. 동시에 고용되지 않은 혹은 고용을 단념한 니트(NEET)단기 파트타임 노동에 종사하는 저임금의 프리터(Freeter)족 역시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다. 니트족이나 프리터족의 출현은 크게 보면 세계경제의 저성장 국면에 따른 고용시장의 악화와 비정규직 고용구조가 고착화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으로, 특히 청년층에게서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와 유사한 측면에서 우리가 검토해야 하는 것은 고령화 사회의 진전이 초래하는 문제이다. 생산가능 인구는 축소되고 연금생활자인 고령자가 증가한다는 것은 이들의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을 가능케 하려면 결국 정부가 투입해야 될 재정이 증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후의 삶을 가족경제 안에서 지탱할 수 있는 조건이 악화되면 악화될수록, 노인들에 대한 지원은 의료 및 사회복지 제도를 매개로 한 공공서비스로 전환될 수밖에 없다. 문제는 가처분 소득이 존재하지 않는 이 노년세대들을 지원할 수 있는 재정확보를 과연 현재의 정부가 충분하게 감당할 수 있는 재정상황에 있느냐 하는 점이다.

 

정부에 의한 의료 및 사회복지 예산이 확대되지 않는다면, 자산소득과 금융소득이 부재하는 은퇴 후 노인들의 질병과 고통, 빈곤의 심화는 피할 수 없는 일이 된다. 실제로 한국과 일본에서 노인 빈곤이나 고독사의 문제는 갈수록 악화되고 있는 추세여서, 이미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다.

 

경제적 불평등의 심화나 빈곤의 증대는 시민적 연대와 협력의 근거인 정의 개념을 위기에 빠뜨림으로 사회적 갈등을 야기하고 심화시키는데, 이러한 상황이 완화되거나 극복되지 않는다면 공동체의 안정을 위협하는 요소로 작동할 가능성이 높다.

 

양극화가 초래하는 경제적 빈곤과 질병 등의 사회적 고통을 해결하는 힘은 결국 사회적 연대로부터 가능해지며, 이것은 일국적 차원을 넘은 지구적 협력체계를 필요로 한다. 우리가 세계시민이 된다는 것은 이러한 분배상의 정의를 도덕적 혹은 윤리적 보편주의의 관점에서, 타자를 어떻게 대우할 것인가의 문제로 연결된다. 타자를 나와 같은 존재로 대우하기 위해서는 그것을 가능케 하는 윤리도 윤리겠지만, 정치, 경제, 문화, 법과 같은 사회시스템을 세계시민사회라는 관점에서 변형시키려는 새로운 사유와 실천이 필요하다.

 

<4장>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글로벌 경제란 무역, 투자, 금융, 노동, 기술, 정보 등의 경제활동이 국민국가의 경계를 벗어나 지리적으로 확대되는 ‘경제활동의 초국경화’를 이루는 가운데, 세계경제의 상호의존성과 통합 수준이 심화되어 가는 현상을 의미한다. 그런 중에 생산, 유통, 소비 등의 모든 영역에서 세계 경제가 지구적 차원에서 통합된 질서가 바로 글로벌 경제이다. 이전과 달리 국가의 논리가 아니라 이윤 실현을 확대하려는 자본의 논리로부터 추동되어 왔으며, 지식정보화가 그 인프라를 제공하고 있는 가운데 개인, 기업, 지역, 국가의 행위 모두가 국경을 넘어 이루어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글로벌 경제로의 전환은 산업적 성격보다 금융적 성격을 더 강하게 띠는 초국적 자본주의가 주도하고 있다. 이 때문에 작금의 글로벌 경제는 산업생산에 대한 투자보다 자본 시장에 대한 투기를 통해 움직이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초국적 자본은 과학기술과 정보 통신의 혁신에 따른 전 세계적 연결망을 토대로 24시간 실시간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전 세계 금융거래는 무역거래의 50배에 이르고 있다.

 

글로벌 경제로의 전환 이후 국가 간에는 물론 국가 내부에 불평등이 심화되고, 전 세계 차원에서 경제위기가 주기적으로 반복되면서 만성화되었다. 세계은행은 국가 간 불평등이 확대되고 있다면서 가장 부유한 20개 국가의 평균 소득은 가난한 국가의 평균 소득의 37배가 되고, 이러한 비율은 40년 전과 비교하여 2배에 달하는 것으로, 이의 주요한 원인으로는 가장 가난한 국가들에서의 성장의 결핍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글로벌 경제가 직면한 주요 문제는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 경제위기의 주기적 반복, 만성화이다. 빈곤과 불평등이 심각해진 상황에서는 복지국가의 기능을 더욱 강조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으면 글로벌 경제는 언제든지 보호주의 정책으로 회귀할 가능성 있기 때문이다. 글로벌 경제 하에서 국가의 빈곤과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기 위해서도 복지 기능을 복원 혹은 강화해야 하지만,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서도 그리해야 한다. 시기와 국가와 사회지출 규모 등에 따라 차이를 보이기는 하지만, 복지국가일수록 경제성장이 더 빠르다는 것을 감안할 때 그러하다. 뉴질랜드처럼 교육 분야에서는 복지를 확대한 것과 같은 방식으로 상황을 극복해가야 한다. 특히 소득수준에 비해 빈약한 복지제도를 갖고 있는 한국과 같은 국가의 경우가 그러하다.

 

글로벌 경제의 폐해, 즉 국가 간 불평등의 심화와 자본의 유동성과 불안정성에 따른 경제 위기의 반복이라는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글로벌 거버넌스 체제를 (재)구축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거버넌스는 ‘협치’를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글로벌 거버넌스란 국가 간 불평등과 자본의 유동성과 불안정성을 제어하기 위한 ‘협치 체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의 (재)구축이 필요한 이유는 자본의 유동성과 불안정성 같은 문제는 개별국가가 독자적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누가 이러한 글로벌 거버넌스를 구축하느냐는 물음에 대한 답을 구하기 위해 주목할 것이 바로 세계시민이다. 세계시민은 세계를 하나의 공동체로 인정하는 주체이다. 그린피스와 같은 국제 환경 단체에 가입해 국가를 초월해 세계환경을 위해 애쓰는 사람, 이주 노동자를 위해 출신국의 시민단체와 연대하여 권리를 주장하는 사람을 예로 들 수 있다. 즉 국적을 초월해 정치적 실천을 하고 동료시민으로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면 세계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글로벌 경제와 관련해서는 빈곤과 불평등의 심화와 같은 병리적 현상을 인식하고 초국가적 협력을 통해 앞서 제기한 글로벌 거버넌스의 과제를 수행하는 이가 바로 세계시민이라 할 수 있다.

 

지역화된 세계시민주의를 보다 체계화한 것이 세계시민적 공화주의로 이어지고 있기도 하다. 다중적 정체성을 지닌 존재로서의 인간에 대한 이해에 기반을 두어 개인-가족-지역-세계인이라는 처지를 고르게 감안해, 지배-피지배의 관계가 아닌 공존의 주체로서 균형과 조화를 이루며 공동체를 꾸려가는 ‘비지배의 원리’에 입각해 세계시민의 정체성을 구성해야 한다.

 

<5장> 주권과 국가이성

‘근대 국제질서는 유럽의 마지막 종교전쟁으로 평가되는 30년 전쟁(1618`1648)을 약 5년 동안의 지난한 협상 끝에 종결시킨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기점으로 출현했다.’ ― 1948년 레오 그로스가 처음 제시한 이 시각은 이후 국제정치학 교과서에서 근대 국제질서의 출발을 소개할 때 거의 예외 없이 채택하는 표준적인 설명이 되었다. 헨리 키신저는 주권, 국가이성, 국가이익, 세력 균형 등의 개념을 제도적으로 구현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을 근대 국제정치의 지평을 개창한 ‘천재적’ 발상으로 평가하기까지 했다.

 

클라우제비츠에 따르면, 모든 전쟁은 극한 상태로 확전되는 속성을 지닌다. 클라우제비츠는 이런 확전 과정을 거쳐 도달한 전쟁의 극한 상태를 ‘절대전쟁(absolute war)’으로 개념화했다. 하지만 절대전쟁은 추상의 지평에서 논리적 추론을 통해 설정한 것일 뿐, 실제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발생하는 ‘실제전쟁(real war)’은 현실의 다양한 변수 때문에 절대전쟁과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클라우제비츠는 모든 실제전쟁의 가변적 외양 이면에서 존재하는 세 가지 핵심 요소를 간파했는데, 전쟁시 동물적 적대감에 휩싸이는 국민, 불확실한 전쟁터에서 활동하는 군인, 정치적 이성을 발휘해서 전쟁을 지휘해야 하는 정치지도자가 각각 그것이다. 클라우제비츠는 이 중에서 정치 지도자의 역할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했다. 전쟁 그 자체는 목표가 될 수 없고 항시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는 수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정치적 목적이 목표이고, 전쟁은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이다. 이처럼 전쟁이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 수단으로 제한되어야 한다는 원칙을 ‘정치 우위의 원칙’이라고 부른다.

 

정치 우위의 원칙을 통해서 아롱이 기대한 정치적 효과(확전을 통제할 수 있고, 적대적 감정이 폭발하여 무자비한 만행으로 끝없이 변질되는 것을 피할 수 있다. … 국가 간의 정치적 교섭의 목적을 공동체 구성원 모두의 생존, 공동의 번영, 그리고 인간의 목숨을 구제하는 쪽으로 설정할 경우에 한해서만 ‘신중하게’ 선택된 정치적 행위는 ‘합리적’ 행위가 될 수 있다.)를 거둘 수 있으려면 몇 가지 조건을 선결시켜야만 한다.

 

첫째, 정치지도자는 반드시 ‘책임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베버는 책임윤리와 신념윤리라는 두 개의 이념형을 구성해서 정치윤리를 설명했다. 베버에 따르면 정치는 여타 세계와 달리 ‘물리적 강제력(무력)’이란 수단을 법적으로 동원할 수 있는 독특한 성격을 지녔다. 정치의 폭력적 본성 때문에 정치의 독특한 윤리가 요청되는데, 책임윤리가 바로 그것이다. 책임윤리 정치 지도자가 정치적 결정을 내릴 때 자신이 떠맡은 정치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할 것을 요구하는 윤리다. 반면, 신념윤리 정치 지도자가 자신이 ‘절대적으로’ 신봉하는 도덕적, 윤리적, 종교적, 추상적 가치에 대한 신념을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하면서 정치적 결정을 내리는 윤리다. 그래서 신념윤리는 사실상 ‘종교윤리’와 동일하다.

 

책임윤리를 실천하는 정치지도자는 정치 공동체의 생존과 번영에 대한 책임을 가장 중요시한다. 그러나 신념윤리를 실천하는 정치 지도자는 자신이 신봉하는 신념의 순수성에 헌신할 뿐, 자신의 행위가 정치 공동체에 초래할 결과에 대해서는 전혀 책임을 지지 않는다.

 

둘째, 정치 공동체는 그것의 관할 영역 내부의 무력을 모두 독점해야만 한다. 그래서 정치 지도자가 전시에 군 통수권자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 공동체에서 무력을 독점하지 못할 때, 그래서 공동체 내부의 유력자들이 무력을 소유하고서 할거할 때, 그 공동체는 만성적 내전을 겪지 않을 수 없다. 또한 내전 과정에서 그런 유력자들이 정치 공동체 외부의 세력과 결탁할 경우, 국제전으로 확전되는 것이 불가피하다.

 

셋째, 정치 지도자는 전쟁을 수행할 때 국민 다수의 지지를 확보해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지지는 정치 지도자가 국민으로부터 전쟁의 정당성을 획득할 때 비로소 확보할 수 있다. 그런데 정당성의 근거는 정치지도자의 ‘권력’이 아니라 국민의 ‘마음’에서 존재한다.

 

레이몽 아롱은 국제정치이론을 집대성한 『평화와 전쟁』에서 국제 정치적 평화의 조건을 다음과 같이 간결하게 제시했다. “국제정치적 법칙은 그 본성상 다음과 같은 원칙을 따라야 하다. 평화 시 모든 국가는 최선을 다해 우호적으로 지내야만 한다. 하지만 전쟁이 불가피하게 발생했을 경우, 적대국의 사활이 걸린 이익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전쟁의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아롱이 제시한 국제정치적 평화의 조건을 충족하는 전쟁을 수행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앞에서 검토한 정치 우위의 원칙을 준수해야만 한다.

 

유럽에서 100년 이상 치열하게 전개되던 종교전쟁을 가까스로 종식시키면서 국제정치적 평화를 창출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그것은 이른바 근대 유럽 특유의 지적 성취인 ‘주권’, ‘국가이성’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주권과 국가이성 등이 종교전쟁을 지배하는 신념윤리를 책임윤리로 전환시킨 일종의 ‘변환기’ 같은 역할을 수행했기 때문이다. 유럽의 종교전쟁은 주권, 국가이성 등이 개입하면서 점차 종교적 색채를 탈각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책임윤리가 안내하는 국제정치적 평화의 길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과정을 극적으로 제도화시킨 성과가 베스트팔렌 평화조약이었다.

 

보댕은 인간의 어떤 힘으로도 주권을 제약할 수 없으며, 따라서 주권은 “절대적” 능력이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주권을 왕, 삼부회, 고등법원 사이에서 나눠가질 수 없다고 주장했다. 주권은 반드시 한 사람이나 하나의 정치제도가 정당하게 독점해야 한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보댕이 제시한 프랑스 정치적 병폐의 처방책은 유럽 여러 국가의 선망의 대상이자 모범이었던 프랑스 절대군주제에서 실현되었다.

 

한편, 국가이성은 보댕이 제시한 주권과 함께 근대 초기 국가이론의 양대 지주를 이루는 개념이었다. 국가이성은 보통 마키아벨리의 사상을 통해서 선구적으로 제시된 것으로 간주된다. 마이네케는 마키아벨리의 국가이성 사상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로마사 논고』, 제3권, 제41장에서 찾았다.

 

절대적으로 자기 조국의 안전이 걸린 문제일 때, 정당한가 정당하지 않은가, 자비로운가, 잔혹한가, 칭찬을 받을 가치가 있는가 치욕스러운가는 전적으로 고려할 필요가 없다. 그 대신 모든 양심의 가책을 제쳐놓고 인간은 모름지기 어떤 계획이든, 조국의 생존과 자유를 유지하는 계획을 최대한 따라야 한다.

 

세력균형을 통해서 국제정치적 평화를 성취할 수 있으려면 주권, 국가이성, 책임윤리, 정치우위의 원칙 등을 반드시 충족시켜야만 한다. 주권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내전과 국제전의 착종을 피할 수 없고, 국가이성, 책임윤리 등이 부재할 경우 적대국과 유연한 협상이 불가능해서 세력균형 체제를 경직시키거나 전복시키는 문제를 야기하며, 정치 우위의 원칙을 확보하지 못할 경우 제한전쟁, 전쟁종결 등의 과제를 해결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전시나 평시에 타국을 ‘상대’로 간주할 수 있으려면 반드시 책임윤리를 실천해야 한다. 만일 신념윤리를 실천할 경우, 타국을 ‘원수’로 전락해 버리고 말기 때문이다. 전자에서는 세력균형 체제의 유연한 작동이 가능한 반면, 후자에서는 세력균형 체제의 경직 내지 전복이 불가피하다. 근대 유럽의 대외정책 정신은 대체로 전자에 가까우며, 특히 20세기 미국의 대외정책 정신은 대체로 후자에 가까운 모습을 보인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이른바 ‘윌슨주의’로 지칭되는 미국 특유의 국제정치관이 유럽 국제정치에 개입하게 되는데, 그 사건은 궁극적으로 베스트팔렌 평화체제를 전복시키고, 16세기 유럽 종교전쟁을 부활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그리고 그렇게 틀 지워진 국제정치가 21세기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다.

 

윌슨이 구상한 세계는 권력이 아니라 원칙에, 국가이익이 아니라 법률에 뿌리를 두었다. 유럽 강대국의 역사적 경험과 국제정치적 행동 양식을 완전히 전복시킨 것이다. 9?11이후 테러와의 전쟁을 선도했던 부시 독트린도 윌슨주의를 거의 그대로 계승한 것이었다. 부시 독트린의 신념윤리가 지배하는 테러와의 전쟁 또한 십자군 전쟁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테러와의 전쟁은 궁극적으로 16세기 유럽에서 전개된 종교전쟁과 동일한 성격을 지닌 것이었다. 최근 미국이 주도하는 테러와의 전쟁, 중동의 만성적 종교전쟁 등의 해법으로 베스트팔렌 평화조약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는데, 이는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종교전쟁을 지배하는 신념윤리를 책임윤리로 전환시켜야만 종교전쟁의 갈등을 완화시키면서 정치적 해법을 모색할 가능성이 열리기 때문이다.

 

현대 한국의 사회윤리는 대내윤리와 대외윤리를 준별하는 가산제의 유산과 정통과 이단을 준별하는 신유학의 신념윤리가 착종되면서 자리를 잡은 것이다. 한국의 사회 윤리는 한국사회를 지극히 독선적 사회로 만들어버렸다. 세대 간, 지역 간, 여야 간, 남북 간 등에서 극단적 적대감이 만성적으로 표출되고 있고, 그런 갈등은 끊임없이 클라우제비츠가 개념화한 ‘절대전쟁’으로 질주하는 양상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런 사회에서 합리적 소통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했다.

 

남북 간의 커뮤니케이션 폐쇄를 해체하고, 남한과 북한의 평화적 공존 내지 통일의 길을 개척하려면 리슐리외가 걸어온 길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리슐리외는 ‘선악의 저편’에 존재하는 국가이성에 입각해서 책임윤리를 실천하는 가운데 프랑스의 패권과 유럽의 국제정치적 평화를 동시에 성취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리슐리외는 그런 성취가 지속적인 외교적인 협상을 통해서 가능했다는 사실을 강조했다. “국가는 간단없는 대외협상을 통해서 많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 단 그 협상은 반드시 정치적 분별력에 입각해서 수행되어야만 한다.” 바로 여기에서 현대 한국 지성의 시대적, 실존적, 역사적 과제를 찾아볼 수 있다, 한국인의 영혼을 지배하는 신유학적 신념윤리를 해체하고, 한반도의 정치적 평화를 기약할 수 있는 책임윤리의 에토스를 새롭게 정착시키는 과제가 바로 그것이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 시점이어서 그런가 5장의 내용이 특히 가슴에 와 닿았다. 국가이성에 기초한 동맹으로 자리잡아야 할 ‘한미동맹’, 전쟁으로 치닫기 전에 풀어야 할 남북 간의 대화에 대해서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게 되었다.

 

오타가 적지 않게 보여서 아쉬움이 있다. 출간하기 전에 편집하는 시간을 충분히 가지고 맞춤법과 문단 구분에 조금 더 신경을 쓰면 좋을 듯하다.

 

 

* 이 리뷰는 인간사랑출판사에서 책을 제공받아 작성했습니다. *

s********0 2017.04.23. 신고 공감 11 댓글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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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촌과 세계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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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집안이나 출신 지역,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 단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나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웃과 타인에 대해 공정하고 열린 시각을 갖는 마음 자세는, 특히 요즘처럼 "관용과 화합, 다문화, 소수자 존중"의 가치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이런 올바른 세계관, 혹은 정치관은 이르면 이른 단계에서 함양될수록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앞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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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입니다. 집안이나 출신 지역, 지나치게 엄격한 종교 단체의 가르침에서 벗어나, 나를 바르게 파악하고 이웃과 타인에 대해 공정하고 열린 시각을 갖는 마음 자세는, 특히 요즘처럼 "관용과 화합, 다문화, 소수자 존중"의 가치가 강조되는 세상에서 특히 필요합니다. 이런 올바른 세계관, 혹은 정치관은 이르면 이른 단계에서 함양될수록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앞에서 말한 대로 배움에는 끝이 없는 법이며, 올바른 초심도 인생에서 다양한 고비를 맞아감에 따라 흔들리고 퇴색하기가 또한 일쑤입니다. 그래서, 권위 있는 석학들이 정연하고 진중한 언어로 가르쳐 주시는, "세계 시민으로서 흔들림 없는 도덕성과 참여, 비판 정신"에 대한 바른 시야를 수시로 익히고 이를 실천에 옮김이란 더욱 보람 있고 의미 깊다 하겠습니다. 

이 책은 시민단체에서 주최하는 대중 상대 교양 강연이나, 혹은 대학에 갓 입학한 새내기들을 위한 코스에 교재로 권하기 안성맞춤으로 보였습니다. 그런데 한 장 한 장 넘겨가며 숙독해 보니, 세계 시민으로서 부끄럼없이 판단하고 행동하기 위해 함양되어야 할 내용이라는 게, 어쩌면 또 이처럼이나 깊이 있고 보편타당한 지식과 관점을 담고 있나 싶어 절로 희열과 감탄이 나오더군요. 이 책 한 권에 법률, 정치, 경제, 세계사, 종교 등 인간사 문명의 천양만태를 압축적으로 요약, 진단, 규정하는 도도한 담론이 모두 담겨 있는 듯, 지식과 소양에 목마른 독자에게 적시적소의 일깨움을 던져 주는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세계 시민"이 되려면 이처럼이나 포괄적이고 섬세한 교양을 체득해야 하며, 또 올바른 관점에서 잘 정제된 지식이야말로 바른 판단과 행동을 위한 전제 조건이 된다는 점도 재삼 확인이 가능했습니다.

정치학자, 사회학자들의 주옥 같은 논문을 높은 안목으로 잘 편집하여 대중에게 전달해 주시는, 경희대 이동수 교수님께서 역시 이 책에도 책임 편집의 소임을 맡으셨더군요. 교수님 본인의 논문은 책머리에 놓인 <환경위기와 생태>입니다. 첫 글이 환경 관련 주제라(또 책의 컨셉이 시민 교육 쪽이라) 혹시 이어지는 다른 논문도 모두 비슷한 주제 아닐까 짐작하신다면 그건 틀렸습니다. 앞서 말했듯 환경, 생태 토픽을 넘어서, 정치 경제 문화 등 21세기 현대인의 모든 삶의 양상을 주제로 다 아우르고 있으니, 혹 어린 자녀(배움에의 의욕이 왕성한)에게 멋진 교양서 한 권을 딱 원 볼륨으로 선물하고 싶다면 주저없이 이 책을 고르셔도 됩니다.

환경과 생태 주제가 권두에 배치된 건, 인간이 육신과 건강을 초월하여 정신적 깨달음만으로 존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절박한 현실 인식에 기초하고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석가, 예수, 공자라 한들 오염되고 황폐화한 세상에서 호흡과 영양 섭취라는 기초 생존 활동이 위협받는다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19세기 산업 혁명이 본격화한 이래 인류는 지속적으로 환경 오염과 자원 고갈의 공포에 시달려 왔지만, 아직도 근본적인 해법을 발견하지 못했으며,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결합이라는 우려스러운 추세는 문제의 해결을 더욱 방해하는 실정입니다. 게다가 새로 미국 대통령에 당선된 트럼프는 기후 협약을 무효화하겠다며, 건전한 의식을 지닌 "세계 시민"들을 더욱 걱정스럽고 불안하게 만들기까지 하는 형편이죠.

그렇다고 "성장"의 과제, 목표를 전면 도외시할 수도 없습니다. 근본적으로는 인간의 탐욕을 줄이고 환경 친화적인 심성을 회복하는 게 옳습니다만, 한번 흥청망청한 소비 행태에 길이 든 인간의 습성이 금세 청빈과 절제로 회귀하기란 힘들죠. 교수님께서는 이런 맥락에서, 현재 한국 환경담론의 진보적 시각을 대변한다 할 "녹색성장론"의 의의와 연혁을 되짚습니다. 저는 길고 긴 발자취에의 회고를 기대했으나 의외로 최근(1999년) 시점에 그 유명한 폴 에킨스의 저술이 이 입장의 시발점을 이뤘다는 걸 책을 보고서야 알았습니다. 많은 이들이 공감과 합의를 이룬 "녹색성장론"의 내용과 방침, 비전에 대해 정확하고 알기 쉬운 소개가 이뤄져 있으므로, 실천적으로나 교양의 목적으로나 꼭 일독이 필요한 논문입니다.

논문에는 이 외에도 생태근대화론(주로 공적 섹터나 보수 진영의 지지를 받는), 그에 대한 네오맑시스트의 반응, 또 이른바 "지속 가능 발전론" 등 다양한 시각과 담론들이 설명되었으므로, 환경과 생태의 과제가 오늘날 어느 지점에서 논의되는지 총체척으로 파악할 수 있는 유익한 읽을거리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참여하는 시민, 깨인 의식의 유권자로서 이 환경 이슈에 대해 분명한 인식이 미비하다면 어디 가서 무슨 말을 꺼낼 초보적 자격조차 못 갖춤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경제" 주제는 김윤철 교수님의 <글로벌 경제와 불평등> 한 편뿐입니다만 이 논문이 현재 세계 경제가 맞닥뜨린 "상시화한 경제 위기", 이른바 신자유주의 물결에 내재한 근본 모순, 그 대안으로서 제시되는 국제 NGO 주도의 신 거버넌스 등 굵직하고 확장성 높은 논의가 펼쳐지기 때문에, 말 그대로 한 권(한 편)을 읽고 만 가지 아이디어와 각성을 부를 만한 명문입니다. 확실히, 한국에서도 박세일 교수(지난 2017 .1월에 타계)가 YS 정부에서 야심차게 내 건 "세계화" 바람이 온 나라를 휩쓸 때만 해도, 글로벌라이제이션이 세계인 모두의 욕망과 복리를 만족, 증진시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게 근 이십여 년이 지나, 실물 경제 규모의 몇 배를 웃도는 금융 경제의 투기 바람이 각국의 생산- 소비 기제 펀더멘털을 위협하고(논문의 기조는, 결국 세계화 때문에 경제 위기의 공포로부터 세계가 안전할 날이 없게 되었다는 쪽입니다), 일반 대중들도 막연하게나마 세계화의 허상을 깨닫고는 엉뚱하게도 제노포비아 같은 국수주의, 폐쇄주의로 퇴행했다는 진단을 내어 놓으십니다. 이 과정에서 김 교수님은, 1990년대에 큰 인기를 모았으나(한국에서도 대단한 주목을 받았죠. 특히 계간잡지 창비에는 거의 매호 그의 글이 번역되어 실렸습니다) 현재는 거의 잊혀진 편인 이매뉴얼 월러스틴 교수의 "세계체제론"이 다시 원용됩니다. 과거 사회과학 독서 열풍에 향수를 지닌 특정 세대분들이 특히 눈길이 끌릴 만한 대목입니다.

제가 가장 재미있게 읽은 글은 이현휘 교수님의 <주권과 국가이성>이었습니다. 교수님은 박승관 서울대 교수의 발언을 제사(題辭)로 삼아, 전쟁과 갈등과 증오와 알력이 그칠 날이 없는 국제 정치 현실에서, 오랜 이념적 기반이자 모든 외교활동의 기초가 될 주권론의 허실이 무엇인지 다시 분석, 회고, 통찰하고 계십니다. 공교롭게도 C V 웨지우드의 명저 <30년 전쟁>을 한국어로 완역한 남경태 씨가 3년 전 타계하기도 했는데요("공교롭다"는 말을 쓴 건, 대체 1648 베스트팔렌 체제의 본질과 실상, 한계가 무엇인지 새삼 주목하게 되는 요즘의 국제 정세를 감안해서입니다. 저런 묵직한 저서가 시장성을 고려할 때 번역, 출판이 잘 안 되는 게 한국의 실정이기도 한데 말이죠). 이 논문에서도 웨지우드의 그 책(외에, 30년 전쟁을 분석한 다른 고전들까지)이 수시로 인용되며, 대체 주권이 무엇인지, 주권 담론에 기반한 근대형 외교 시스템은 과연 어디까지 제 기능을 유지할지에 대해 살벌하고 심각하기까지 한 실증 분석의 틀을 적용합니다.

작년 하반기, 중국이 남중국해 일원의 "영해성"을 강변하며, "이는 우리의 '주권 사항이니 미국이나 '자칭 국제 단체(국제사법재판소를 가리킵니다)'는 개입하지 말라"는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로 인해 국제 정치, 특히 미-중간의 긴장이 고조되었으나, 희한하게도 친중 성향의 포퓰리스트 두테르테가 필리핀(영해 분쟁 당사국)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유야무야하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기존 질서를 유지하려는 쪽이건, 그에 대항하려는 쪽이건 이 "주권"이라는 (무형의)이념에 이처럼이나 의존한다는 사실부터가, 본의의 탐구이건 발전적 해체적 재정립이건 간에 이론적 천착이 시급함을 잘 알려 준다 하겠습니다.

이 논문은 특히 "국가이성"이라는 개념에 대해 그 연혁과 논의상을 집중적으로 파헤치는데, 그 실질적 기원은 30년 전쟁의 결정적 국면에서, 신앙의 동지가 아닌 자국 이익의 더 확실한 담보자가 누구인지를 계산하여, 신교 연합국의 손을 들어준 프랑스 왕국의 실력자 리슐리외 추기경(이자 재상)의 원대한 정치적 국량에 대해 특히 상술합니다. 이전까지만 해도 도대체 "종교"나 명분. 혹은 특정 사안(왕실 가문 영토의 상속, 병합 등)을 놓고 벌어지는 즉흥적 이합집산이 유럽 국제 정치의 한계였는데, 리슐리외의 이 기회주의적 처신(이자 정책)이야말로 "국가"를 독립된 이해관계의 주체로 정립하고, 아울러 냉혹한 국제관계에서 염치도 양심도 돌볼 것 없이 철저히 실리와 계산에 의해서만 작동하는 외교의 생리를 최초 규정했다는 의의를 아주 선명하게 밝힙니다. 이성의 반대라면 "감정"이겠는데, 이 감정적 동기에는 "같은 구교국이니 구교국 편을 들어주자"라든가, "특정 왕실의 전쟁 동기가 더 비인도적이므로 그를 징치하자" 같은 게 포함되겠습니다. "국가이성"은 이런 추상적이고 일시적인  인적 요소를, 의사 결정과정에서 철저히 배제하고 오로지 "국가의 실익"만을 기준으로 삼는 기제이죠.

"프랑스는 저 리슐리외(와 그 후계자들)의 현명한 처신으로, 향후 250년에 걸쳐 유럽의 패권을 유지했다."는 서술이 (헨리 키신저의 논문으로부터의 재인용을 통해) 나오지만, 독자로서 여기에는 반대하는 편입니다.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 국권이 유린될 뻔한 상황도 겪었고, 나폴레옹 전쟁의 처리 과정에서도 프랑스는 일시 존립의 위기를 맞기도 했기 때문이죠. 하지만 왕실의 몰락 후에도 공화정으로서 국체와 정통성을 이어갔으며, 이 과정에서 대체적으로는 보불 전쟁의 패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은 프랑스의 고갯짓 없이 어떤 중대한 정책도 전개할 수 없었음은 분명합니다. "왕실의 이익"이 아닌 "국가이성"에의 개안(開眼)이 있었기에 이런 연속적 번영과 위신의 행사가 가능했음은 도무지 부정할 수가 없습니다.

교수님은 특히 한국인의 정치 행태에서, 이단과 정통의 판별에 집착하여 나의 생각과 다른 모든 입장을 절멸시켜야 직성이 풀리는, 일종의 주술적 심성(이성, 대화, 타협이 배제된)을 특히 지목합니다. 읽으면서 백 번 타당하다고 여겼지만, 헌데 소위 확증편향이란 게 또 모든 이들의 마음에 나쁜 버릇으로 자리잡아, 이런 말도 좌파 쪽에선 우파를 비판하는 적실한 통박으로 받아들일 것이며, 우파 역시 반대진영의 체질을 어쩌면 그리 잘 짚어냈냐며 아전인수로 해석할 게 틀림없습니다. 어떻게 해야 이 악성 자기파괴의 수렁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까요? 해답은 협소한 에고가 아닌, 이웃과 약자와 환경 전체를 마음과 머리 속에 품고 새길 수 있는 "세계 시민 정신"입니다. "당신은 어디 시민입니까?" "나는 아테네도 에페수스도 다마스쿠스도 아닌, 세계의 시민입니다. 당신은 어떠십니까?" 어느 고대의 철학자가 지중해 세계를 주유하며 발언했다는 이 감동적인 언술은, 이천 년이 지난 지금도 평화와 항구적인 번영을 위해 우리가 최우선으로 염두에 두어야 할 바가 무엇인지 준엄히 깨우칩니다.

k*********6 2017.02.15. 신고 공감 1 댓글 0
리뷰 총점 종이책
지구촌과 세계시민 - 세계시민 되기 (시민교육 연구총서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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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기원전 330년경 헬레니즘 시대를 연 이래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치세에조차도 그 이상형이 실현된 적은 없으며, 이후 이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극한의 싸움을 벌여 왔고 마침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절멸전 수단까지 개발했습니다. 세계시민은 고사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그친 적이 없으며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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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알렉산드로스 3세가 기원전 330년경 헬레니즘 시대를 연 이래 세계시민이라는 개념이 그리 낯설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알렉산드로스 본인의 치세에조차도 그 이상형이 실현된 적은 없으며, 이후 이천 수백 년 동안 인류는 극한의 싸움을 벌여 왔고 마침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절멸전 수단까지 개발했습니다. 세계시민은 고사하고 나라와 나라 사이의 전쟁이 그친 적이 없으며 한 나라 안에서도 종족, 지역 간의 다툼이 빈발하는 게 21세기의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그러나 이럴수록 각국의 시민단체, NGO 들끼리 연대하고 시민들을 계몽하여 세계시민 사상, 개념, 가치를 널리 공유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미국이건 한국이건 같은 관심사를 공유하는 이들이 꼭 있기 마련이고, 심지어 국경을 초월하여 경제적 이해관계를 같이하는 경우도 있겠습니다. 또 이런 과정에서 이른바 지속가능한(sustainable) 성장 같은 가치가 그야말로 국적 불문 모든 의식 있는 개인과 단체들의 전폭적인 지지와 공감을 얻기도 합니다. 환경 보존, 기후재난 방지, 해양생태계 보호, 전쟁 반대, 기아 구호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겪는 고통은 개인적인 게 있고 사회적 요인에서 비롯한 게 있습니다. 후자를 사회적 고통이라고도 부르는데, 이는 주로 "정치적, 경제적, 제도적 권력이 인간(개인)에 미치는 영향력(p76)" 때문이라고 합니다. 원인이 사회에서 시작했으니 그 구제도 사회와 공동체 단위에서 마련해야 원칙이겠습니다. 빈곤, 질병 등이 특히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고통이겠는데, 특히 책에서는 청년 세대에게 심대한 좌절을 안기는 빈곤이야말로 사회를 직접 위협하는, 높은 우선순위로 그 해결책이 마련되어야 할 정책 타겟입니다.

19세기 독점자본주의가 발달하며 체제 자체가 모순을 노정하였고 20세기 들어 양대 초강대국 사이 냉전이 지속되면서 자본주의, (현실)사회주의는 공멸을 피하기 위해 어느 정도 상호 모방을 통해 수렴점을 마련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소련 내 비효율이 임계점을 넘어 체제가 붕괴하면서 신자유주의, 세계화 물결이 지구를 휩쓸고 "역사의 종언"을 논하는 입장마저 등장했습니다. 현재도 세계를 주도하는 경향은 여전히 신자유주의라 평가되지만 특유의 모순도 여전히 비치유 상태로 방치, 심화되는데 책에서는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1) 완벽한 자기조정 시장은 현실적으로도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
2) 시장기구는 독점과 사회 파괴를 동반하면서 스스로 존립기반을 약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3) 신자유주의 체제 하의 패권국은 불순응자에 지나치게 가혹한 제재를 가한다. (p114. 김윤철)

특히 2) 같은 것은 마르크스의 분석으로부터 직접 영향을 받은 결론이죠. p120의 표도 함께 참조하면 좋습니다. 칼 마르크스(의 유령)가 21세기에도 여전히 그 나름의 포스를 뿜으며 유럽, 아니 지구 전 표면을 배회한다고 평가해야 하겠습니다.

전쟁의 지양이야말로 세계 시민 사상의 핵심적인 효용이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세계의 시민이라는 인식이 확산되면 각자의 기치(국기) 하에 종류가 다른 총을 쥐고 서로에게 발포할 이유가 없습니다. 이현휘 교수는 p141 이하에서 전쟁의 본질에 대해 검토합니다. 19세기 초 군인이자 사상가였던 폰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일단 발생하면 극한으로 치닫는 경향이 있다"고 했는데 물론 당시로는 타당한 지적이나 현대전에서는 꼭 그대로 진행되지 않는 예도 흔합니다. 즉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절대전쟁"이 아니라 "마찰(friction)"에 그치거나, 마찰로 전쟁을 대체하며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려 드는 경우도 많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외교 패턴 중 상당수는 마키아벨리가 이론적으로 정립한 게 있고, "당대의 정치 풍조를 전형적으로 수용하면서 자신의 사상을 숙성(p172)"시켰다고 이현휘 교수는 정리하는데(故 루이스 존 니그로 주니어 박사의 2012년 논문에서 인용), 이때 epitomize라는 건 가장 좋은 점들만을 압축하여 갖춘다는 뜻이죠. 동 박사는 당시 이탈리아 반도가 유럽 정세의 축소판이었기에 도시 국가의 책사였던 그가 이런 업적을 남길 만한 경험을 쌓는 게 가능했다고 말합니다.

왜 미국은 월남전에서 실패했을까요? Harry G. Summers 교수는 세 가지 원인을 꼽았다고 합니다. 첫째 전략적 목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했다, 둘째 conventional war였던 월남전을, counterinsurgency로 오해하여 대응했다(베트콩이 아닌 북베트남에 초점을 두었어야 했다), 셋째 미국 국민의 동의를 충분히 구하여 국가 역량을 적절히 동원하는 데 실패했다. 그런데 둘째 요인에 대해서는, 만약 17도 선 이북을 공격했다면 소련과의 전면전을 불사해야 했겠으므로 어쩔 수 없이 제한전으로 간 것이죠.  

유럽은 사민주의 대세 하에 하나의 합중국으로 통합되어 간다고 생각하지만 여전히  프랑스에는 NF 같은 극우 정당이 있고 심지어 독일에도 AFD가 등장하여 심상치 않은 흐름을 예고합니다. 이는 다분히 기존 정당들이 타성에 젖어 풀뿌리 민심을 제때 수렴하지 못한 잘못이 큽니다. 선민사상과 엘리트주의에 빠져 초심을 잃은 운동가, 직업정치인 들이 먼저 환골탈태하여 연대와 상생의 가치에 다시 주목할 시점입니다. 

v*****7 2023.06.17. 신고 공감 0 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