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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다가오는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일본 작가들에게 잠식되어 있었던 많은 소설들이 프랑스 쪽으로 이어지는 기분이 든다. 사실은 한국 소설이 가슴속에 들어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어찌 어찌된 것 손에 잡히는 것은 외국 소설들이 다분하다. 작년이던가, 상당히 충격적인 프랑스 소설을 본 적이 있는데 그것이 <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였다. 제목 그대로 사람이 살아 있는 예술 작품으로 변형되는 이야기였다. 끔찍하기도 하고 상상하기도 벅찰 정도의 내용이었는데, 그 소설 작가인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가 이번에는 무대를 바그다드로 옮겨서 사드 사드라는 인물을 탄생시켰다. 그것이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이다.
주인공 사드 사드는 아랍어로는 ‘희망 희망’이고 영어로는 ‘슬픔 슬픔’이라는 뜻이라고 한다. 전쟁으로 인하여 자살 폭탄 테러나 각종 끔찍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서 사드 사드는 아버지를 잃는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가는 전쟁의 끝자락 속에서 그는 피할 곳을 찾아본다. 하지만 그가 가는 곳마다 아랍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테러집단 취급을 당하고, 불법 체류자가 된다. 그 정도라면 정말 죽고 싶을 만큼 힘들 것이라고 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을 놓지 않는다. 결코 영어로만 남게 두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라크 청년 사드의 모험담은 이렇게 떠돌면서 소설 곳곳에 측은함을 남긴다.
최근에 부쩍 ‘불법체류자’에 관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얼마 전에 읽었던 ‘리틀비’라는 소설도 그렇고 이 책도 그렇지만 또 곧 개봉하게 되는 영화 ‘웰컴’이라는 영화도 이와 동일한 주제이다. 이라크 출신의 한 소년이 몰래 애인을 만나기 위해 영국으로의 불법 체류를 시도하지만 프랑스에서 붙잡히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거의 이 책과 흡사한데다가 근래에 만난 것이라서 더욱 신기하기만 하다. 전세계적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불법 체류자에 관한 깊이 있는 성찰이 눈에 띈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에서도 수년간 누누이 이슈화가 되고 있기도 하다. 그래서 그냥 소설이라고 넘기기에는 그 무게가 참으로 크다. 긴 여정의 끝은 과연 어디일까. 그들에게는 고향도 타지도 모두 어렵기만 한 것일까. 대책은 없는 것일까. 복잡하고 미묘한 감정이 들게 만드는 문제 제기적 소설인 듯 보인다. 그래도 작가만의 스토리텔링이 어렵지 않아서 읽기에는 좋다. 게다가 흡입력도 좋아서 빨리 읽히는 편이다. 한번쯤 읽어보면 좋을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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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바그다드 출신의 청년 사드가 탈출의 길을 떠나 카이로, 몰타, 시칠리아, 나폴리를 거쳐 영국의 런던에 정착하기까지의 모험담이다. 특히 이 책의 저자 에릭 엠마누엘 슈미트는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에서 제목과 일부 에피소드를 따왔다. 고대 그리스의 시인 호메로스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대서사시 <오디세이아>는 그리스 신화에서 유명한 이야기로 그리스군의 트로이 공략 후의 오디세우스의 10년간에 걸친 해상표류의 모험과 귀국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내와 아이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오디세우스가 이 책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에서는 정착할 땅을 찾아 떠돌이 생활을 하는 바그다드 청년 사드 사드의 이야기로 그려진다. 하루에도 몇 번씩 자살폭탄테러가 일어나고 끔찍한 폭력과 질병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되어 있는 평범한 민간인들이 미래는 커녕 죽음만을 기다리고 있는 이라크 바그다드의 상황은 지금 현재 이라크에서 실제로 벌어지고 있는 일이자 이 책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에서 사드가 겪는 일이기도 하다.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함으로써 자국민 보호와 세계평화에 이바지한다는 대외명분을 내세워 2003년 3월 20일부터 4월 14일까지 미국과 영국 등 연합군이 이라크를 상대로 전쟁을 벌였다. 수많은 군인들이 죽거나 부상을 당했으며 상당수의 민간들이 희생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이 끔찍한 전쟁의 소용돌이는 이라크에서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라크를 장악하기에 이라크 정부의 힘은 너무나 약하며 미군 등에 반발하는 세력의 테러는 여전히 맹공을 휘두르고 있다. 이라크, 파키스탄 등과 같은 나라들이 테러의 배후로 지목되면서 아랍인들에 대한 세계의 눈초리는 차갑기만 하다. 바로 이런 상황속에서 이 책의 주인공 사드는 탈출을 감행한다. 희망과 꿈, 조그만 빛을 찾아 바그다드를 탈출하지만 어느 누구도 사드를 환영해주지 않는다. 그는 여전히 바그다드에 있을때처럼 암흑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남아있는 가족과 미래를 위해 목숨 걸고 모험을 펼치지만 세상은 그에게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 돌아 올 뿐이다. 예전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미국으로 밀입국을 하는 멕시코인을 다룬 영화를 본적이 있다. 조그만 마약 봉지를 삼켜 외국으로 밀반입을 시키다가 잘못해서 봉지가 뱃속에서 터져 죽음을 당하는 어린 소년들의 이야기가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렇게 어렵게 밀입국을 해도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인생은 당국의 추적을 피해 하루하루 살얼음을 밟듯이 아슬아슬 위험할 뿐이다. 불법체류자 사드의 인생 또한 암담할 뿐이다. 하지만 그는 끝까지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집념의 사나이이다. 이 어둡고 슬픈 이 책의 배경이 많은 사람들이 실제로 현실에서 겪고 있는 상황이기에 더 안타깝고 가슴 아프게 다가온다. 사드는 결국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그가 전하는 희망을 메시지를 많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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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차례나 전직 미국 대통령의 방북을 성사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국제정치학자 박한식 교수는 중국에서 태어나 국공내전과 혁명을 피해 북으로 갔다가 다시 터진 6·25전쟁으로 미국으로 건너가게 된다. 전쟁이라면 너무나 지긋지긋했던 그는, 흡사 그를 따라다니는 것처럼 느꼈던 전쟁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하지만 박 교수는 말한다. “전쟁이 싫어 갔던 미국이 알고 보니 모든 전쟁의 근원이자, 전쟁 제조국가였다. 그래서 느꼈다. 전쟁을 피하지만 말고 전쟁 자체가 발생하지 않도록 내가 노력해야겠다고” 그렇다. 미국은 건국부터 전쟁으로 시작해 지금까지 인류 역사 대부분의 전쟁을 도맡아왔다. 경찰국가라는 이름아래 말이다. 때문에 미국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피비린내는 미국의 어쩔 수 없는 숙명과도 같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럼 이라크란 단어를 떠올려보자. 무엇이 떠오르는가. 사담 후세인의 장기독재, 이란과의 오랜 전쟁, 걸프전쟁 그리고 부시, 미국, 9·11 테러. 온갖 부정적인 단어만 튀어나온다.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는 역사적 도시, 풍부한 석유 매장량, 순박하지만 자존심 강한 민족에 대한 이미지는 어느 새 CNN의 전쟁 생중계 속에서 사라져갔다. 1차 걸프전 이후 미국은 금수조치를 단행했다. 흡사 지금 MB가 미국 등 큰 형님들의 힘을 빌어 북에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는 것과 비슷하다. 약 10년간의 경제제재로 이라크는 수많은 아이들을 굶주림과 하찮은 질병으로 묻어야 했다. 노약자, 임산부 등은 말할 것도 없다. 수백만의 아이들이 단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사실만으로 죽어나가야 했다. 물론 당시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후세인은 벌을 받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를 정당화했지만, 정작 후세인은 미국의 2003년 이라크 침공으로 인해 2006년 사형 당했다. 그는 결코 굶주리지 않았으며 질병으로 고통스러워하지 않았다. 다만 아이들이 그를 대신해 죽어야 했던 것이다. 소설은 프랑스의 극작가이자 철학자인 저자가 밝히는 제국주의의 비판서이자, 노마드로 교묘히 위장되는 디아스포라 문제 제기다. 자신이 스스로 여유를 가지고 떠나는 여행, 이민이 아닌 그야말로 처절한 생존을 위해 국경을 넘어야 하는 이들의 고통을 다룬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주제임에도 유머와 위트가 살아있다. 블랙 유머라고도 느껴질 만큼 그의 문장은 뼈아픈 웃음을 준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아버지를 사살한 미군. 미군은 후세인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주인공 ‘사드 사드’는 후세인을 무찌른 미군이 정작 이라크 국민들은 안중에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꿈을 위해, 그리고 ‘살기 위해’영국으로 향한다. 이라크에서 영국으로 이어지는 여정에서 그는 몇 번이나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어느 새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게 된다. 난민도 뭐도 아닌 ‘불법체류자’인 자신을. 책은 말한다. 과연 인류의 진보는 어디까지 왔는지, 그리고 그 진보가 평등적 진보인지, 선별적 진보인지. 단지 이라크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착취당해야 하는 주인공의 삶은 수많은 불법체류자, 제3세계 국민들을 대신해 묻고 있다. 과연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 말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생활력이 강한 당신들보다 제 밥벌이도 못하는 멍청이들을 돌보는 게 더 낫다고 여기죠. 매일 눈물과 피땀을 흘리며 사는 당신들보다 될 대로 되라 식으로 사는 자국민들을 더 보호해야 할 가치가 있다고 여기죠. 당신 같은 사람들은 눈에 거슬리니까 차라리 없는 셈 치는 거예요. 당신네들은 가만히 내버려두어도 알아서 잘들 사는데 뭐 하러 도와야 하냐고 빈정대기 일쑤죠. 아무리 힘들어도 제 나라보다 나으니까 머물러 있는 것 아니냐며 간단하게들 치부하죠. 당신들이 안 보이는 데서 죽은 듯 조용히 사니까 존재 자체를 깡그리 잊어버리는 거예요. 일종의 집단적 무관심인데, 인간에게 무관심보다 심한 모욕은 없잖아요. 그들은 당신들을 없는 사람 취급하고, 아무리 추워도 끄떡없고, 아무리 때려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사람들이라 여기죠. 이런 게 바로 야만이 아니고 뭐겠어요. 타인을 나와 동일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순간, 나보다 열등한 인간으로 취급하는 순간, 인간을 그 자체로 보지 않고 우열을 나누는 순간, 인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순간, 미개한 사회가 되는 거라고 봐요. 난 항상 문명을 선택했어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은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사회는 미개한 사회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이 일을 하다가 잡히면 징역 오 년이지만 상관하지 않아요. 미개인들한테 아무리 날 가둬보라고 해봐요. 아무도 날 막을 수 없어요. 아무리 날 가둬도 감옥에서 나오는 순간 이 일을 다시 시작할 테니까. 나와 다른 사람을 모자라거나 개화 대상으로 치부하는 사회는 문명사회가 아니죠. 그런 사회는 보존할 가치가 없어요.” 불법체류자를 돕는 프랑스 운동가의 말을 빌어 저자는 말한다. 프랑스가 과연 문명사회인지. 그럼 난 되묻는다. 한국은? 외국인 노동자들은커녕 자국민들마저도 오로지 착취의 대상으로 여기는 한국 사회는 문명사회인가? 주인공 사드 사드의 이름은 아랍어로 ‘희망 희망’이고, 영어는 ‘슬픔 슬픔’이다. 그의 이름이 말해주듯, 아랍인을 버리고 온갖 자유와 인권이 살아 숨 쉬는 서구 사회로 들어가려 했던 주인공은 처절한 슬픔을 겪어야 했다. 오직 자기들만의 인권, 자기들만의 자유를 찬양하는 서구 사회와 그들에게 외면당하면서도 노동 착취를 당하는 비서구인들.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과 얼마나 차이가 날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관심이 과거에 비해 상당히 높아졌다. 다문화 가정이라는 단어가 더 이상 어색하지 않고,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도 자주 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평등과 자유가 그 아이들에게, 그 아이들의 부모들에게 주어졌는지, 곰곰이 생각해 볼 문제다. “인간에게 이방인은 비인간일 뿐”이라는 말이 무참해지는 사회는 더 이상 존재할 가치가 없다.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회는 보존해야 할 이유가 없다. G20 정상회의를 하든지, GDP가 몇 만 달러를 넘든지 그딴 것은 중요하지 않다. 이곳이 진정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라는 믿음을 이 안에 살고 있는 모두에게 주어야 한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다. 한 번 생기면 절대 떨어지지 않는 티눈을 주인공의 아버지는 부정적 이름을 붙여 떼어내라고 말한다. 티눈에 부정적인 이름을 붙이면 쉽게 떨어져 나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끝내 주인공 사드 사드는 그 티눈에 ‘희망’이란 이름을 붙인다. 자신의 이름과도 같은 단어. 희망. 희망이 다시 살아날 수 있는 세상을 그린다. 그런데 내가 티눈이 생기면 무어라 이름을 붙일까. 이미 짐작한 이들도 있으리라. 극비다. 2년 후에 공개하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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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은 샤드샤드-아랍어로는 "희망희망"이지만, 영어로는 "슬픔슬픔"이란 뜻이다.
언제부터였을까...샤드샤드에게 불행의 그늘이 드리워진 것은.... 부시는 이라크 바드다드에서 도대체 무얼 찾을려고 그리 무모한 짓을 한걸까. 나오는 것이라곤 석유밖에 없구, 그래도 그 속에서 자급자족하며 행복이라는 단어를 되뇌이면서 행복을 찾아가고 있던 바그다드에 살고 있는 샤드샤드에게 그의 절실한 장래까지도 생각했던, 그래서 소중하게 아끼고 숨겨두었던 그 친구가 수니파들에게서 해방되었다고 환호하던 그 때에 그 집에 폭탄이 떨어져서 산산조각이 나다니... 오랜동안의 자유스럽지 못한 생활에서 미국이라는 나라가 통치를 해준다니 마음을 놓고 희망을 가졌는데.. 매형과 아버지 가족들 모두가 하나 둘 스러져 가면서 이젠 바그다드가 더 이상 예전의 바그다드가 아니었다. 살기 위해서 집에 있는 모든 것을 팔아도 입에 풀칠한다는 것이 호사로만 생각되기 시작하자 샤드샤드는 결심한다. 돌아가신 아버지도 다시 샤드와 엄마의 행동에서 움직이며 동조하고, 샤드샤드가 드디어 희망을 찾아 떠난것에 같이 동행을 해주니. 샤드샤드의 앞길에 희망만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랬었다. 하지만 샤드샤드에게는 미국인과 이라크를 벗어나면 다 될 것 같았던 모든 것들이 결코 이방인에게는 아무것도 허락되지 않은 것이었음을 처절히 깨우쳐야 했다. 샤드샤드의 삶은 이라크 모든 국민의 삶이요. 예전 6.25를 끝내고 살아가야 했던 우리 선조들의 삶이기도 했다. 모든 삶이 망가진다고 해도 결코 포기해서는 안될 그것은 희망이었으니. 그 희망을 찾아 결코, 포기하지 않는 샤드샤드의 기나긴 여정이 가느다란 끄나풀처럼 나의 눈을 끌고 있었음이다.
이라크의 현실을 소설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주고 했을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님의 그 용기에 박수를 보낸다. 아직까지도 그 무언가에 대해 결단을 내리고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은 일일진대, 소설로 바그다드의 샤드샤드를 통해서 미국의 허황된꿈으로 인해 이라크의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힘들게 살아가는지 더 많은 사람들이 알아야 한다. 인간폭탄도 스스럼 없이 행하는 그들에겐 어떤 종교적인 힘으로 그런일들을 할까. 그들은 나라를 지키고자 하는 맘으로 그리 행동을 한다는 것에는 면죄부가 주어질 리 없겠지만, 아직도 수 많은 사람들의 외면속에서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삶을 살고 있는 그들에게 '희망'-'샤드샤드'는 영원히 존재했으면 한다. 그들의 마음속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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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 하면 떠오르는 것은 영화 '바그다드카페' 의 음악이다. 영화의 내용은 떠오르지 않는데, 이상하게도 그 음악만 떠오르며 마음 속에 먹먹하게 울려 퍼진다. 사실 '바그다드' 하면 다른 것도 떠올라야 할 것인데, 나는 어쩌면 나와 직접 연관이 없다는 이유 또는 골치 아프다는 이유로 떠올리지 않고 있나보다. '정치', '전쟁', '불법체류'......이런 단어들은 무겁고 복잡하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지냈는데, 이렇게 프랑스 소설을 읽으며 자연스레 접하게 되는 시간을 가졌다. 내 이름은 사드 사드. 아랍어로는 '희망 희망', 영어로는 '슬픔 슬픔' 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내 진실은 한 달 사이에, 때로는 한 시간 사이에, 심지어는 일 초 사이에 아랍어가 되고 영어가 되기도 한다. 낙관적일 때는 희망의 사드, 비관적일 때는 슬픔의 사드인 것이다. (7p) 이 책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한다. 이라크 청년 '사드 사드' 그의 이름은 이렇게 이중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그의 삶이 잔잔하고 고요하게 진행되는 것이 아니라, 희망과 슬픔을 넘나들며 요동치는 파도를 탈 것이라는 짐작을 하며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네 명의 누나 뒤로 보석처럼 얻은 아들인데, 그래서 태어나자마자 잔치도 벌이고 축복받은 왕자처럼 키워지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다가온 '사드' '슬픔' 그것은 그곳에 머물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신호탄 같은 것이었고, 그곳에서 더이상 희망을 볼 수 없는 좌절감이었을 것이다. "개인범죄만 있다면 그야말로 맘 편한 세상이 아닐까? 고도의 지능범이 정교하고 섬세한 테크닉을 발휘하는 범죄라면 봐줄만 하지 않아? 독재자 치하에서 약육강식의 법칙에 따라 유린당하는 우리보다야 백배 낫지." (44p) '사드 사드' 의 앞에 놓인 일들은 개인적인 것만이 아니다. 개인이 어떻게 할 수 없는 사회적인 문제, 그로인한 개인의 고통, 불법체류자로 떠돌아다닐 수밖에 없는 아픔, 그냥 이곳에서 일상적으로 지내다보면 알 수 없는 일을 책을 통해서 보게 된 느낌이다. 무거운 짐 하나 마음 속에 얹어놓은 느낌에 마음이 무거워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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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 주인공의 이름은 사드사드. 아랍어로는 희망 희망 이지만 영어로는 슬픔 슬픔이라는 뜻을 가진다. 그래서 주인공 사드사드는 때로는 희망이지만 때로는 슬픔이 된다. 진정한 자유라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인으로 태어나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적어도 우리에게는 죽음과는 거리가 먼 국가에서 살고 있기 때문이다. 풍요롭고 아름다운 나라이다. 그런데 우리 주인공 사드사드가 사는 이라크 바그다드는 어떠한 곳인가? 사담 후세인의 독재정치로 모든 것이 정지되어 버린 나라이다. 엄청난 석유 매장량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국민의 대다수가 가난에 몰려져 있다. 옛 페르시아 제국의 느부갓네살 시대의 영광을 찾아보기란 힘이든다. 혹독하고 매정한 독재의 나라에서 자국민들에게 자유라는 것은 없다. 종교적 이념을 무기로 모든 국민을 옭아매는 후세인. 그 속에서 살아가는 청년 사드사드를 만나게 된다.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 사드사드는 참 파란만장한 삶을 살아간다. 제 2차 걸프전쟁으로 온 나라가 전운에 덮여져 간다. 사드가 살고 있는 바그다드는 전쟁의 한가운데에 있다. 항상 긍정적이면 진보적인 아버지의 사상을 물려받은 사드사드.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여자 친구 레일라에게 걸프전쟁 시작과 함께 사랑 고백을 하지만 미사일 오인 사격으로 레일라가 살고 있던 집은 산산조각이 나버린다. 또한 극우파의 폭탄 테러로 둘 매형을 잃어버리고 그 와중에 미군의 오인 사격으로 아버지와 이별하게 된다. 미국의 금수 조치로 모든 경제가 마비되어져 버린 이라크를 떠나기 위해 테러단체에 가입하게 되고, 드디어 첫 임무를 위해 길을 떠난다. 그리고 이집트에서 탈출한 사드의 세계여행 모험이 시작된다. 불법체류자 신분으로 갖은 고초와 어려움을 겪어야 했던 사드. 수차례 죽을 고비와 주권을 잃어버린 나라에 원망함만이 존재하는 사드. 우여곡절 속에 도착한 시칠리아 섬에서 사드는 오디세우스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전쟁에 휘감긴 나라의 국민. 불법체류자로 살아야 하는 심정. 그 속에서도 결코 희망을 잃지 않는 인내와 용기. 이 모든 소재들이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를 만나서 최고의 소설이 된다.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강대국 미국의 욕심이 한 개인과 나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 가슴 어리게 느낄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아무런 상관없는 그들만의 욕심이 아버지와 친척들 그리고 친구와 사랑하는 여자까지 한 순간에 빼앗아 가버리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을 초래하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희망을 버리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일어 설수 있다. 슬픔의 사드가 희망의 사드가 되듯이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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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첫머리에 자신의 이름에대한 설명을 한다. 사드 사드, 아랍어로는 희망이란다. 그런데 영어로 표현하면 슬픔이라니 이름하나로 이렇게 극명한 표현이 가능할까 참 아이러니 한다. 사드가 태어난 날은 후세인의 몸에 있어서는 안되는건 발견된 날이다. 그게 뭐냐면 흰털 특히 이라크인들은 남자의 그곳에 흰털이나면 노쇄했다는 증거란다. 그래서 사드의 부모는 독재자의 노쇄를 확인한걸 기쁘게 생각했고 딸만 넷인 짐에 아들이 태어남을 기뻐한 날이다.
사드가 태어난 이라크는 독재정권이 국민을 탄앞하고 있다.후세인은 국민을 탄압하는 수단으로 죄가 있고 없고를 떠나 본보기로 아부나 잡아들여 죄를 추궁하고 고문하고 방면한다. 그런 과정속에 국민들은 공포속에 움츠려들게된다. 후세인은 미국과 전쟁을시작하고 국민들은 경제봉쇄로 생필품이 바닥나고 질병과 기아에 허덕인다. 어느정부나 그러하듯이 국민의 불만을 밖으로 돌리는건 이라크도 마찬가지다 전쟁의 원인이 어디에 있느냐보다는 현재의 고통이 누구때문에 발생했느냐에 집중적인 홍보로 국민들은 경재봉쇄를 한 미국에대하여 모든 불만을 떠넘기게된다.
이라크나 아랍은 우나라와 비슷하게 남존여비가 강한 문화다. 사드는 유일한 아들로 가족의 떠받듬속에서 성장한다. 특히 아버지는 사드에게 자신의 비밀공간인 금서를 보여주고 그곳에서 많은 책을 볼수있게 한다. 행복한 어린시절이 지나 현실을 알게되는 사드는 이라크에서 희망을 찾지못하고 그곳을 떠나게된다. 그가택한것은 정치적망명 하지만 미국과 전쟁중인 이라크정치상황은 정치적망명이 될수가 없다 독재시절이라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다. 차선으로 그는 난민이 되어 영국을 향에 떠난다.
이글의 작가는 프랑스인이다. 미국인도아니고 이라크인도 아니다 그런 제삼자의 눈에 비춰지는 이라크라고 생각한다. 나또한 그들이 아니기때문에 그들의 고통을 다 이해할수는 없다. 그렇지만 냉정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우리의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에릭 엠마뉴에 슈미트의 작품은 이번이 두번째다. 처음 그의 작품을 접한건 내가 예술작품이었을때 작가는 인간의 자유에관해 많은 관심을 갖고 있는것같다 첫음본 작품도 한남자의 자유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이번에 읽은 사드또한 그런내용인걸 보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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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빠, 누가 야만인일까요? 사람이 분명한데도 사람 취급을 안 하는 저 사람들일까요? 아니면 사람이면서 사람 취급을 못 받는 우리들일까요? " (231쪽)
'불법체류자'를 소재로 한 이야기라 마음이 동요를 일으켰다. 작가 '에릭 엠마뉴엘 슈미트'의-서점에서 훌렁훌렁 넘기면서 호기심을 가졌던 <내가 예술작품이었을 때>의 저자였기에- 낯선듯 친숙한 느낌이 전해지면서 표지 한 귀퉁이를 장식하고 있는 투박하면서 익살스러운 조각상같은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그런데, 책을 모두 읽고 나니, 비로소 표지의 그림이 더욱 애잔하게 다가온다. 철조망에 갇힌 주인공 '사드'의 자유를 향한 열망과 좌절이 눈물 한 방울과 나로서는 결코 형용할 수 없는 무수한 감정들이 표출되는 모습에서 생생하게 전해지고 있다.
"거미 한 마리가 지치지도 않고 창살과 벽 모서리 사이에 거미줄을 치고 있었다. ....... 거미는 제 다리가 연약한 것을 잘 아는 듯 우아하고 조심스레 다리를 뻗어가며 집을 완성해가고 있었다. 모기와 파리, 날벌레 등 촘촘한 그물망에 잡힌 먹잇감이 많았지만 거미는 확보된 식략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집짓기에 여념이 없었다. ...... 난 왜 저 거미처럼 적응하며 살아가지 못할까? 거미는 어디서나 둥지를 트는데 내겐 왜 이곳이 감옥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거미에게 집을 직기에 더 나은 환경이란 없어보였다. 거미는 발 딛은 곳을 터전 삼아 군말 없이 새 삶을 시작했다" (166쪽)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는 일단 독특하면서도 흥미진진하다. 자신의 이름이 '사드 사드'라고 밝히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런데 아랍어로는 '희망 희망'이고 영어로는 '슬픔 슬픔'의 뜻이라고 일러준다. 그렇다. 주인공 사드의 삶은 희망과 슬픔의 연속이었다. 자신이 '이라크'란 땅에서 태어난 선택할 수 없었는 운명 앞에, 희망을 향해 무조건 달리고 있는 한 청년을 만날 수 있었다. 그리곤 발바닥에 생긴 티눈에 '희망'이란 이름을 붙여주면서 이야기를 끝을 맺는다.
'불법체류자'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다. 어쩌면 영상 속에 비치는 그 처절함에 몸서리치면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그들도 '인간'인 것이다. 누구나 누려야 할 기본 정신, 인간이기에 존엄받는 삶 속에 '불법체류자'란 존재는 없는 것이었다. 이렇듯 책 첫 페이지를 장식한 "인간에게 이방인은 비인간뿐이다"라는 '장 지로두'의 말이 뇌에 꽂힌다.
이라크 바그다드 태생인 주인공 '사드'의 삶이 처음부터 불행하고 절망의 구렁텅이는 아니었다. 사서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네 명의 누나들 밑에서 귀여움을 독차지하는 아이였다. 그리고 책을 즐기는 아버지, 은유를 좋아하시는 아버지와의 대화는 아버지의 죽음 이후-자살폭탄 테러로 정신없이 도움을 요청하던 중에 미군의 총에 맞아 돌아가신다-에도 지속된다. 사담 후세인의 독재 치하에서 금기시 된 책을 지하창고에 몰래 보관하시다, 어느날 사드에게 책을 읽히시는 아버지, 그럼으로써 현실의 부조리를 뼈저리게 인식하게 되는 과정, '레일라'를 통해 사랑에 눈을 뜨고, 이별의 고통-폭격으로 레일라-에 신음하기도 하고, 가족의 죽음과 굶주림에 이라크를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그의 말할 수 없는 고통-때론 마약운반, 제비생활, 수용소 생활 등등의 불법체류자 신분으로서의 삶-이 연속이요, 시작일 뿐이었다.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그 속에서 '붑(부바카), 비토리아, 레오폴드, 이탈리아의 어느 공무원, 막스, 쇨셔, 폴린'과의 인연들은 이야기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고, 카이로, 몰타, 시칠리아, 나폴리, 그리고 영국 런던으로 이어지는 그의 모험은 <오디세이아>와 절묘하게 엮어지면서, 또다른 재미와 감동을 선사한다.
결말에 일으면서는 결코 예상하지 못한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때론 머릿속에 폭죽이 터지는 환희는 맛보다가도, 때론 사드의 절망 속에, 불면의 시간을 보내야 했다. 만약 내가 '사드'였다면? 이란 질문을 끊임없이 하다보니, 머릿 속이 새하얘지면서 혼란스럽다. 특히, 레오폴드, 어느 검문소 공무원, 폴린과의 대화를 통해, 국경, 전쟁 등으로 인한 불공평하고 모순된 세상을 신랄하게 고발하면서 '인류애'적 관점에서 '불법체류자' 문제를 다루고 있다. 또한 이라크의 현대사-특히 사담 후세인의 독재와 이라크 전쟁-를 생생하게 목격하고, 세계 정세의 흐름을 어느 정도 읽을 수 있었다. 이것은 또한 '황석영'의 <바리데기>를 떠올리게 하면서, 장면 장면이 여러번 오버랩되기도 하였다. 다시 한 번 '인간의 존엄성'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었다.
세계 각지를 떠돌게 되는 '사드'의 모험은 그의 절망과 혼란 속에서도 담담하면서도 익살스럽게 펼쳐진다. 때론 나사가 하나 풀린 듯한 어리버리함이 느껴지고, 그 어떤 굴욕과 같은 환경 속에서도 체념하기보다는 끊임없이 '희망'과 '사랑'을 가슴에 품고 있으니, 너무도 사랑스러운 주인공이 아닌가! 책 속으로 뛰어들어, 그와 대면하고 싶다. 아니, 어딘가에 분명 존재하고 있을 '사드'와의 만남을 꿈꿔보면서, 사드와의 짧은 만남의 순간들이 아쉬움을 달래본다. 또한 '불법체류자'를 다룬 문제 인식에서 부족한 나의 논리에 허우적거리며, 잠을 쫓게 되었다. 분명한 사실은 이 책에 대해 한 마디로 정리하기가 너무도 힘에 부친다는 것이다. 하지만 삶이 버겁다 느껴질 때, 우울의 온 몸을 휘감을 때, 한 번쯤 <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를 손에 쥐고, '사드'를 만나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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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다드의 오디세우스>의 표지를 보았을때 익살스러운것 같으면서도 사드, 사드. 책의 첫 머리에 주인공인 사드가 독백했듯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기며 사는 일상적인 것들이 소설이지만 끝내 사드는 바라던 곳 자유의 땅에 도착하고 나는 난민도, 불법체류자도 아니지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