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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머 씨 이야기』는, 유년기의 거의 모든 시절을 나무 타기를 좋아해서 나무 위에서 보낸 한 소년의 성장기와 더불어 소년의 시선으로 바라본 '좀머 씨'의 이야기이다. '좀머 씨'는 작가 자신의 삶을 투영한 이야기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독특하다. 극중 '좀머 씨'는 일체의 아는 사람을 곁에 두려 하지 않는, 스스로 홀로 되기를 선언한 인물이다.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p37)에서 알 수 있듯, 상대의 배려에 도리어 화를 내는 고독하면서도 절망적인 인물로 표현된다. 시대적 배경은 2차 대전 후의 상황으로 쓰여진 것으로 미루어 어쩌면 좀머 씨는 전쟁 등 그가 겪은 참혹한 경험 때문에 그렇게 두려움 속에서 피해 다니는 도망자가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 옮긴이의 해석이다.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 역시 은둔자로 유명한데, 프랑스 남부에 위치한 오두막집에서 몇 겹의 잠금장치로 은둔생활을 하고 있다. 작품 관리는 일체 형에게 위탁하고 모든 문학상도 거부하며 자신의 신상을 발설한 사람과는 부모와 친구를 가리지 않고 절연한다. 그의 차림새나 외모 또한 좀머 씨를 떠올릴만큼 기이하다. 백만장자임에도 불구하고 구멍 난 옷을 입고, 고물장수로부터 구입한 타자기를 사용하며, 낡은 집만 옮겨다니며 텔레비전과 같은 일체의 소통 창구도 없이 혼자 틀어박혀 지낸다 하니, 그의 작품 세계와 그의 삶 모두가 마치 블랙 코미디 같지 않은가.
소년이 살고 있는 동네에 좀머 씨가 있었는데 사람들은 좀머 씨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좀머 씨 부인이 인형 만드는 일로 돈을 벌었고, 자식이나 친척은 없었으며 그들을 찾아오는 손님도 없었다. 이른 아침부터 저녁 늦게까지 좀머 씨는 그 근방을 잰 걸음으로 바삐 걸어다녔다. 멀리서 봐도 쉽게 식별이 가능한 그는 기이한 외양과 우스꽝스러운 모습을 드러냈는데 사시사철 길쭉한 지팡이와 텅 빈 배낭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 하루 열 여섯 시간 동안 근방을 왜 헤매고 다니는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상한 일은 그에게 아무런 볼일이 없다는 것이며, 모든 일은 부인에게 다 일임하였다. 묻는 말에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혼잣말에 가까웠으나 딱 한 번 명료한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사방으로 차갑고 사나운 우박이 난리를 치르던 날, 차로 이동중이던 소년과 소년의 아버지는 비에 흠뻑 젖어있는 좀머 씨를 향해 몇 번이고 차에 타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였다. 그러곤 뒤도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잰걸음으로 앞으로 계속 걷기만 했다. 그렇다면 좀머 씨는 왜 그토록 하루종일 걸어다니는 것일까? 소문처럼 방 안에 가만히 있으면 온몸에 경련이 일어나는 밀폐공포증이어서 걸어다니는 것일까? 소년처럼 즐거움을 느껴 나무를 기어 오르듯 좀머 씨도 걷는 것에 즐거움을 느끼는 게 아닐까? 아니다. 차창 밖에 빗물로 범벅이 된 좀머 씨는 전혀 기쁜 얼굴이 아니었다. 대체 무엇 때문이란 말인가? 그러한 와중에 소년에게 좋지 않은 날들이 찾아온다. 소년과 같은 반에 있는 '카롤리나 퀵켈만'이라는 여자 아이와 약속했던 완벽한 하루.. 그러나 그 뒤에 찾아온 허무한 약속.. 그리고 어머니가 준 커다란 자전거로 피아노를 배우러 가야 했던 소년의 비애.. 호젓한 길목에서 자신의 모습을 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않은 부끄러움이 읽혀서 안타까웠다. 10분 지각으로 끊임없이 쏟아진 꼬부랑 늙은 백발 '미스 마리아 루이제 풍켈' 피아노 선생님의 폭풍같은 분노와 모욕을 들으면서 소년이 겪었을, 어쩌면 부당한 처사로 인한 낭패감에 심히 안쓰러운 마음까지 들었다. 오죽하면 삶과 작별할 생각까지 했을까. 제일 커다란 고목 나무 꼭대기에서 떨어질 생각까지 한 순간, 소년이 떨어지는 위치에 좀머 씨가 있엇다는 것은 하늘의 도움이었을까? 세상에 대한 복수로 소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자살 뿐이었는데 좀머 씨를 보는 순간, 그 생각은 자기도 모르게 떨쳐버리게 된다. 그리고 한참의 세월이 흐른 뒤에 소년이 목격한 좀머 씨는 호숫가에서였다. 그가 서서히 호수 중앙으로 모습을 감추기까지를 목격하게 된다. 하지만 소년은 누구에게도 이 사실을 발설하지 않는다. 그리고 좀머 씨의 이름은 죽은 뒤에야 알려진다. '막시밀리안 에른스트 애기디우스 좀머'. 죽음으로부터의 끝없는 도피가 결국 죽음을 재촉했고 결국은 죽음만이 피난처가 된 셈이었을까. 살기 위해 죽음을 서둘렀던 그의 삶은 어쩌면 삶 자체가 죽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좀머 씨의 행적이 소년의 성장 과정에 있어 기여도 내지는 연관성 조차 애초에 부재였다고 본다. 몽환적인 이 이야기의 교훈 역시 난 잘 모르겠다. 삶 또한 죽음처럼 허무하다는 것을 에둘러 표현하고 싶었던 것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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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스무 살을 지날 때 세상은 우리 또래를 보고 X세대 혹은 오렌지족이라고 불렀다.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던 뭐 그런 때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던 그 당시에도 정치범으로 지명 수배를 당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문민정부가 이미 들어섰고, 모두가 GNP 1만불 시대의 도래를 축하하며 소비와 향락에 빠져 있을 그 때에도 말이다. 그 때 ‘학원 침탈’이라 부르던 것이 있었는데, 그게 뭐냐면 대학 관할서 백골단이나 전투경찰들이 지명수배자 검거를 빌미로 학교에 일방적으로 들어와 중요 문건 등을 압수해가거나 피신 중이던 지명수배자를 체포해가는 것을 일컫는 말이었다. 그래서 관할서에서 “뜰 것 같다”는 정보가 있으면, 중요문건들이며 사회과학 서적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를 시키곤 하던 그런 시대였다. 1990년대 초반만 해도 그랬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도 ‘설마, 그럴 리가’ 할 수도 있겠지만. 1995년의 어느 날이었다. 봄이었는지 여름이었는지 가을이었는지 겨울이었는지는 모르겠고, 밖에 트럭에 채소를 싣고 다니는 채소 장수의 소리와 골목길에서 뛰어다니던 아이들의 소리가 들리던, 한낮이었다. 친구네 집에 갔는데, 친구 방에 사회과학 서적이 100여 권 정도 쌓여 있었다. 단번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 수 있었기 때문에 어찌된 사연인지 굳이 물어보지도 않고 책등에 적힌 책이름들만 빠르게 훑었다. 그런데 그 수많은 책들 중에서 너무 생뚱맞은 책이 하나 끼어 있는 거다. 이름도 생경한 ‘좀머 씨 이야기.’ 이건 뭔가 싶어 책을 끄집어 냈다. ‘얘네는 별 걸 다 읽네.’는 생각과 ‘굳이 이런 책이라면 숨기지 않아도 될텐데.'라는 생각을 동시에 해가며. 매우 얇은 책이었고, 그림도 있는 책이었다. 한낮, 바깥보다 어두운 방 안에서 배를 깔고 책을 읽었다. 스무 살 이후 거의 처음 읽는 소설이었다. 이게 무슨 큰 사건이라고 이렇게 생생히 기억하는가 싶을 수도 있지만, 내 인생 전체를 두고 보자면 매우 큰 일이었다. 사실 스물 이후엔 ‘소설’이라는 걸 읽어본 적이 없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대학은 남성 중심의 사회였고, 그들은 ‘소설 나부랑이나 읽는 여자들’을 매우 한심한 족속으로 여겼기 때문에. 나는 그들보다 더 남성적이고, 더 이성적이고, 더 논리적이고, 더 지적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것 같다. 그래야 그들 사이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사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꼭 그렇게까지 했어야 했는지 이해할 수 없지만, 적어도 그때는 그랬다. 나는 내 속에 있는 모든 여성성을 거세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데 1995년 어느 계절의 한낮에 읽었던 파트리크 쥐스킨트가 그런 견고함에 작은 균열을 일으킨 것이다. 그 뒤로 내 삶은 어떻게 변했던가? 밀란 쿤데라와 보르헤스, 마르케스 등의 작품들을 찾아 읽기 시작했다. 적어도 ‘소설이나 읽는 한심한…’이라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남들 앞에서 소설책을 들고 다니거나 읽는 일을 주저하지 않게 되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든, 그것이 내 지성이나 내 의식에 위배되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그리고 ‘소설 나부랭이’라고 문학을 인식하는 천박하고 한심한 수준의 사람이라면 굳이 그런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고 노력할 필요는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비로소 나는 내 스스로부터 자유로워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소설 읽기는 서른이 지난 후에야 할 수 있었지만, 어쨌든 돌아보면 스물 두 살에 접했던 쥐스킨트가 그 모든 변화의 시작이자 결정적 계기가 되어줬던 것이다. 사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무렵의 내 생활은 그런 비슷한 일들로 인한 갈등의 점철이었던 것도 같다. 언제나 어떤 것은 반드시 해야만 하거나, 도리상 해야 되거나, 하지 말아야 된다거나, 차라리 이렇게 했더라면 더 나았을 것이라든가...... . 언제나 나는 뭔가를 해야 된다는 강요를 받았고, 지시를 받았으며, 기대를 저버리지 말아야만 했다. 이것 해! 저것 해! 그것 하는 것 잊어버리면 안 돼! 이것 끝냈니? 저기는 갔다 왔니? 왜 이제서야 오니? ...... . 항상 압박감과 조바심, 언제나 시간이 부족했고, 무슨 일이든지 항상 끝마쳐야 되는 시간이 미리 정해져 있었다. 그래서 아주 가끔씩만 편안한 시간을 누릴 수 있었다(108쪽). [덧붙임] 작은 보라색 꽃들이 핀 로즈마리 위에 책을 올려 놓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책에 로즈마리 향이 배었다. 기분 좋을 정도로 은은하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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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접할수 있었던 것은 '개미'1,2,3권이 신문광고란에 난 것을 보고서 주인공 이름을 알수 있었고, 우연찮게 책을 접할수 있었다. 책의 두께가 일단 얇아서 좋았고, 그래서 사 보게 되었다. 처음에는 이해할수 없는 주인공의 행동으로 인하여, 앞장으로 다시 넘어 오곤 했었는데, 중간부분쯤 가니까, 주인공의 삶의 한 방면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이웃과의 단절된 생활에서 언제나 그는 홀로 조용히 살기를 원했던것 같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하는 외침속에서 타인의 관심이나, 지시 그리고, 철저한 단절의 생활을 원했던것 같다. 그러나, 주인공이 은둔의 생활을 하므로서, 발전해 가는 사회에 대한 반저항적인 행동들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어쩌면 인간은 태어나면서 처절하리만치 홀로서야 하는 날들이 많음을 인식한다면, 그 삶 또한 행복할 것 같다. 자기에 대한 일말의 관심이 있는자라면, 대화를 단절할 수 있다는 결심이 대단한것 같다.
그러나, 난 이웃을 사랑하고, 같은 숨결을 쉬고 있는 가족을 사랑하기에, 이러한 주인공의 행동은 나만의 내면의 시간을 찾을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질때만 부러워해야 될 것 같다. "좀머 씨 이야기" 자체를 사랑하고, 부러워해 보지만, 현실의 내 생활은 너무 동떨어진 감이 있었다. [인상깊은구절] 좀머 아저씨는 가끔씩 사람들 눈에 띄기는 하였지만 사람들의 의식 속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는 사람들의 표현을 빌자면 세월 다 보낸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았다! 나는 세월의 흐름에 맞춰 성장해 나갔다. (중략) 물론 내 인생의 그 시기에는 내 삶을 씁쓸하게 만드는 일이 있기는 하였다. 특히 따져 보자면, 첫째 초단파로 송신되는 라디오 수신기를 마음대로 들을 수 없었기 때문에 (중략) 그리고 둘째, 우리집에 텔레비전 수강기가 없다는 점이었다. (중략) 왜냐하면 테레비젼은 집에서 음악을 연주하는 습성을 망쳐 놓고, 눈을 나쁘게 만들기도 하고, 가족 생활을 마비시킬 뿐만 아니라 사람을 전반적으로 멍청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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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책이다. 읽지도 않았는데 읽은것 같은 책이었다.
영화로 나온 "향수"때문에 작가의 작품이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래서 책을 두권 빌렸다. [사랑을 생각하다]....[좀머 씨 이야기]
좀머아저씨가 그렇게 슬픈 사람일지는 책 제목만 보고서는 몰랐다. 책을 읽었던 사람들에게서조차 좀머아저씨가 그처럼 불쌍한 사람이란 소린 듣지 못했다.
2차세계대전 직후가 배경인 것으로 볼때 좀머씨는 전쟁을 겪은 비운의 세대였을것이다. 또한 묘사되고 있진 않지만 분명 전쟁을 통해 끔찍한 고통을 겪었으리라 사료된다. 그 고통이 절절이 느껴졌다. 나 역시도 감당하기 힘든 일을 접했을때 길을 걷는다. 왜? 정말 아무 생각도 하기 싫기 때문에!
나만 그럴까...여러분들중에도 그런분들이 계실것이다. 사라졌지만...아무도 슬퍼해주지 않는 존재... 나만 이 책을 읽고 이렇게 슬펐을까... 동화인척했으나 동화가 결코 아닌 책이라 생각된다. 생각할수록 슬픔이 배가되어 밀려오는....책...이...다 |
◎ 다시, 좀머 씨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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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와 세계가 손을 잡는 순간 비로소 인생은 살만하다고, 팍팍해도 견딜만한 것이라고 스스로에게 위로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것 같다. 손을 잡는 그 순간은 개인마다 다르며 굳이 손을 잡지 않더라도 어떤 방법으로든 세상에 덩그라니 '놓여진'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때가 분명히 오기 마련이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좀머씨 이야기』의 주인공 ‘나’는 어린 시절 여러 에피소드를 통해 그렇게 자신을 들여다본다. 그러나 '나'는 그러한 에피소드가 자신이 어른이 되기까지 겪는 '성장통'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는 것 같다. 싱싱하게 나무를 올라타던 앳땐 시절도, 카톨리나를 짝사랑했던 기억도, 미스 풍켈의 앙칼진 히스테리도. 『좀머씨 이야기』의 '나'는 수채화 풍경 속에 펼쳐진 자신의 유년 시절을 너무도 잘 기억한다. 험담보다 무관심이 더 무섭다고, 마을 사람 그 누구도 좀처럼 관심을 주지 않던 '좀머씨'에 대한 기억조차도 그에겐 선명하다. '나'는 좀머씨에 대해 아무런 감정이 없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미워하지도 않는다. 그저 '씩씩'거리면서 세 발로 -지팡이까지 포함해서- 경보를 하는 좀머씨의 일상이 궁금할 뿐이다. '나'는 학교에 다녀오기도 하고 피아노 레슨을 받기도 하는데, 좀머씨는 하루종일 뭐하면서 지내는지 궁금해 한다. 그치만 너무 궁금해 옴싹달짝하는 정도는 아닌 것 같다. 다만 '나'의 시야에 포착되는 순간, 고도의 집중력으로 그를 관찰할 뿐이다. 좀머씨를 가까이서 만나게 된 기회는 우연히 세 번이나 생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일까. 첫번째 만남은 포도송이만한 비가 우박으로 바뀌던 짖궂은 날씨 속에서 좀머씨를 만난 하루다. 좀머씨는 '나'의 아버지의 호의에 거듭 거절하면서, "그러니 나를 좀 제발 그냥 놔두시오!" 라고 그들에게 무안을 주며 우박비 사이로 사라진다. 그리고 시간이 한참 흐른 뒤, '나'가 미스 풍켈의 히스테리에 못 이겨 '자살'을 결심한 그 순간, "셋!"을 외친 후 눈을 감고 뛰어내릴까 눈을 뜨고 뛰어내릴까 고민하던 그 순간, 좀머씨는 어디선가 나타나 '나'에게 생(生)의 소중함을 보여주고는 다시 배낭을 메고 제 갈길을 간다. 그때 좀머씨는 '나'의 허튼짓거리로 이리저리 고민하던 그 모습을 알고 있었을까. 어느덧 '나'는 미스 풍켈의 집까지 13분 30초를 12분 55초로 끊는 신기록을 세울 정도로 신체적으로 많이 성장했다. 여느때와 다름 없이 자전거를 타고 귀가 하던 중 '나'는 좀머씨와 마지막으로 마주친다. 미스 풍켈의 미운 소리가 싫어, 내 몸의 두배만한 큰 자전거를 사준 어머니가 미워서, 엉성한 자전거 타는 '나'의 모습에 킥킥대던 형누이가 미워서 세상을 등지려 하던 '나'를 구원해준 그가 땅이 아닌 호수 속을 걷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나'는 그가 삶을 포기하는 그 순간을 함께 보내게 된다.'나'는 어떠한 외침없이 묵묵히 지켜본다. 임종의 순간을 함께 보내는 '가족'의 심정으로. 그래요. 당신은 미스 풍켈의 히스테리보다 더 한 누군가의 날카로움이 있었겠지요. 허름한 배낭에 꾀죄죄한 옷을 입은 당신을 보고 킥킥대던 누군가가 있었겠지요. 그리고 당신의 사랑하는 아내가 보고싶었겠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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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 듣는것을 무척이나 좋아하던 시절. 그때의 나는 겁 많고, 무지 했으며 또한, 한없이 순수하던 작디 작은 꼬맹이었다. 어느날 문득, 즐겨 듣던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던 책 광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낯선 외국작가의 책이었다. 오래된 라디오 광고 속의 책을 지금까지도 기억하는 까닭은 광고 속 성우의 말 한마디가 오래토록 기억에 남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광고의 영향이었는지 몰라도 당시의 나는 그 책을 구입 했었고, 지금도 내 방 책장 한 구석에 얌전히 꽂혀있던 그 책... '좀머 씨 이야기'를 수년이 흐른 뒤, 다시 꺼내보게 되었다.
이름조차 거론되지 않는 한 남자의 유년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골자로 전개되는 이 책은 세상 풍파에 잠시 잊고 지냈음직한 우리네 유년시절을 회상하게끔 해준다. 추억속에서만 생동하는 우리의 과거는 애틋하고, 어쩐지 그립다. 한없이 나약했으며, 촌스러웠고, 겁쟁이었으며 게다가 어리석기까지 했던 그때가 그토록 그리워 지는건, 지금은 그때만큼 행복하지 않기 때문이 아닐까? 세상에 대해 너무 많이 알아버린 대신 사회의 묵은 때 가득한 시선으로 희뿌연 세상을 바라보며 내면의 오물을 쏟아내고 마는 현재의 우리는 비록, 무지했으나 티없이 순수하던 꼬맹이 시절이 그립다.
추억을 회상하는 한 남자의 기억에는 '좀머 아저씨'가 있었고, 유별났던 그의 행적에는 오직 그 둘만 아는 비밀을 간직한 지금의 내가 있다.
오늘도 라디오 스피커를 통해 들려오던 성우의 목소리... "나를 제발 좀 내버려 두시오!"가 생생히 기억나는 까닭은 세상을 등진채 지팡이와 두 다리에 몸을 맡기고는 정처없이 방랑하던 '좀머 아저씨'와 같은 어른이 되어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추억속의 과거를 그리워하고, 순수함에 목말라하는 어른 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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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년만에 다시 꺼내든 책.
헌책방에서 책을 다시 만나게 되었다. 주인을 만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많이 보이는 상처를 감싸며 책을 집으로 데려왔다. 고등학교 때 처음 이 책을 읽었다. 밀폐공포증과 "그러니 나를 좀 제발 놔주시오!", 그리고 죽음의 강으로 멈추지 않고 돌진하는 그의 모습 등, 그의 기행에 매료되었다. 속박에서 자유롭고, 결국 벗어날 수 없지만, 끊임없이 어디론가 이동하길 원하는 고등학생의 답답함에 섞여 짧지만 강한 여운에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10년이 지났다. 다시 이 책을 만났다. 다시 만난 좀머씨 이야기에서는 쥐스킨트 못지 않게 유명한 장 자크 상페의 그림을 눈여겨 보게 되었고, 화자의 어린 시절에 조금 더 빠져들었다. 좀머씨와 비슷한 삶을 사는것처럼 보이는 작가의 기벽에도 조금 더 마음이 쓰였다. 다시 10년이 지나면, 난 어떤 화두로 이 책을 만나게 될까? 10년 전의 경악과, 현재의 감탄, 10년후의 내 모습을 잠시 그려보았다. 10년이 지난 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 쥐스킨트의 글과 짝을 이루는 상페의 멋진 그림들..
책의 내용도 좋았지만, 상페의 그림들에 흠뻑 빠져들었다. 글은 상상의 붓으로 뇌를 자극해서 풍경을 만들어 내지만, 그림은 색감으로 많은 걸 이야기한다. 마치 상페가 그림이 먼저 그려지고, 쥐스킨트가 그것에 영감을 받아 글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 만큼, 그림과 책 내용은 잘 연결되며 이해를 더 빠르게 한다. '하늘을' 날거라 굳게 믿었던 화자의 생각에 갸우뚱 하다가도,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은 언덕 내리막을 달리는 그림을 보게 되면 '그래, 정말 하늘을 날 수 있다고 믿었을 꺼야' 라고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좋은 글은 그 자체로 많은 자극을 준다. 고등학교에 읽었을 땐 책만 읽고도 작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좋은 글에 걸맞은 그림이 함께 담겨있다면, 'Win-Win'이라고 할까? 기쁨이 두 배로 늘어나게 된다. 좋아하는 사람의 또 다른 매력을 발견한 느낌이다.
# 유년시절의 추억을 살피다.
밀폐공포즘, 단절, 관계 등 어려운 주제로 고민했던 10년전과는 달리, 조금 더 유연하게 화자의 일상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무 위에서 다른 이와 달리 자기만의 세계를 꿈꾸는 유년시절과, 세상의 규칙과 다른 나만의 상상력이 가득찬 순수했던 마음, 짝사랑하는 아이와의 데이트 코스를 정하는 설레임과 그것이 어긋났을 때의 상실감, 세상 모든 것이 내 중심으로 돌아갈 것 같았던 유년시절의 많은 모습들이, 여과없이 담겨있어 좋았다. 유년시절의 철없고 풋풋하고 순수했던 모습들을 다시 보게 된 느낌, 다시 돌아올 수 없기에 애틋했다.
서툰 자전거와 매정한 노처녀 피아노선생님의 핍박 하나에 마음에 상처를 입었던 그 마음과 내가 죽으면 그때서야 다들 후회하고 말꺼야 하고 상상하는 마음 등 그리고 어설픈 행위들까지 여린 마음이 조금씩 성장하는 모습도 느낄 수 있었다. 잊고 있던 유년시절들이 다시 떠올랐다. 어린 마음과 대면하는 느낌,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 진정한 '관심'은 무엇일까?
10년후 다시 만난 좀머씨를 만나 받은 생각의 열매 안에는 '진지한 관심'이라는 씨앗이 담겨있었다. 소문이 아닌, 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노력이라 할까. 마음을 주지 않을거면, 이야기도 하지 말 것이지.. 그냥 그를 단순한 소문거리로 대했던 사람들이였기에 그를 쉽게 잊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지났다고, 보이지 않는다고 잊어버리는 건 멀어진 것이 아니라, 그를 호기심으로 대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내용은 짧고 이해하기 편하다. 아직 책을 다 이해했다고 느껴지지 않는다. 10년 뒤 다시 꺼내어 읽어봐야 겠다. |
| 좀머 씨 이야기에 관해 말하기 전에 우선 파트리크 쥐스킨트라는 작가에 대해 말해보자. 그는 수많은 매체의 관심에도 지극히 자신이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은둔자이며 세상에 공개된 단 한장의 사진 속에서 그는 연약하여 금방 부숴져 버릴 것 같은 어린 소년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데 이런 그의 모습은 "향수","비둘기","깊이에의 강요","콘트라 베이스","로시니 혹은 누가 누구와 잤는가 하는 잔인한 문제"에 이르기까지 국내에 출판된 그의 책들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와 어울리지 못하고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있는 모습과 닮아있다. 이런 배경에 기인하여 좀머 씨 이야기에 나오는 유명한 "그러니 나를 좀 제발 놔두시오!"라는 말은 쥐스킨트 자신이 삶을 대변하고 있다고 화자되곤 한다. 그런데 난 좀머 씨 이야기는 무엇보다 소설의 서술자가 좀머 씨가 아니라 밝고 순진한 어린 소년이라는 점과 그 소년이 주인공이며 제 3자로써 좀머 씨를 바라보고 있다는 점에서 좀머 씨 이야기가 그 동안 쓴 그의 글과는 조금 다른 노선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소설은 사실 좀머 씨가 나오는 부분을 빼 버린다면 기분 좋은 성장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마음만 먹으면 날 수 있을 것 같았던 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카롤리나 퀵켈만의 "월요일에 너랑 같이 갈게"라는 말에 설레이며 어떻게 월요일을 보낼지 연습하고 상상하는 가슴 떨리는 추억, 미스 풍켈 선생님의 꾸지람을 듣고 세상에 불공정함을 깨닫게 되는 일, 또 자전거를 잘 탈 수 있게 되면서 사실 별 쓸모없는 기교에 자신을 고취시키고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까지 그 모든 일들이 유년 시절을 지나 온 사람이라면 마치 자신의 이야기라고 생각할 만큼 정감있게 그려져 있다. 그런 소년의 모습이 너무 밝고 아름답게 그려져 있어 어둡고 쓸쓸한 좀머 씨의 이야기가 왜 첨부되어 있는지 오히려 이상하게 여겨질 정도며 나도 그런 궁금증을 갖고 왜 좀머 씨의 이야기가 등장하는 걸까?하고,한참을 생각하다 책의 서술자로 나오는 소년은 쥐스킨트 자신의 어린 시절이며 좀머 씨는 그의 현재의 모습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세상에 대해 아무런 거부감도 없이 받아들이는 어린 시절의 자신이 세상에 찌들고 지쳐서 세상 어디에도 안주하지 못하고 항상 떠 돌아 다닐수 밖에 없는 현재의 자신을 바라보면서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쥐스킨트 자신은 어린 시절의 눈으로 현재의 자신을 돌아보고 싶었던 것이고 그 과정에서 태어난 소설이 바로 "좀머 씨 이야기"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