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혁명가 열전(列傳)을 읽다 보면 역사상 진정으로 승리한(또는 완결된) 혁명이 있었던가 생각해보게 된다. 기존의 관습·체제·이념 따위를 근본적으로 급격하게 바꾸는 일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대단히 불성실해 보인다. 단순히 기존의 ''낡은'' 지배체제가 ''새로운'' 억압체제로 바뀌는 것 자체로 혁명이 완수되었다고 볼 수 있을까. 그 시작을 위하여 몇몇 이상주의자들의 헌신와 순수한 희생양을 요구한 혁명은, 그 피[血]의 과실(果實)을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던져준단 말인가. 과연 "''모든'' 억압받는 ''대중''이 함께 잘살게 되는 이상향을 달성했는가" 라는 혁명의 합목적성이 충족된 역사적 사실이 단 한번이라도 존재했었던가, 새삼 회의를 느낄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어느 혁명가의 회상"이라는 원제목이 붙어 있지만, 현대 아나키즘 사상을 집대성한 이 위대한 사상가를 두고 단순히 ''혁명가''란 세속적인 명칭을 부여하기에 조금 망설여지는 것이다. 역사는 빈틈없는 행동가이자 조직의 대가인 레닌과 그의 냉혹한 후계자 스탈린의 손을 들어 주었으나, 진정으로 러시아 인민을 이해하고 깊이 사랑한 이는 단연 문필가로서의 톨스토이와 이 이상주의 혁명가 표트르 알렉세예비치 크로포트킨이다. 79세(1921년)까지 생존하여 러시아 혁명의 온갖 추악한 면모와 자신이 일생을 바친 아나키즘의 몰락을 목도하며 쓸쓸하게 생을 마친 크로포트킨은, 57세가 되던 해에 생애를 되돌아볼 기회를 얻어 이 놀라운 자서전을 후세에 남길 수 있었다. 대영지를 소유한 모스코바의 유서 깊은 귀족의 자제로 태어나 유복한 유년생활을 누렸으며, 상트페터스부르크의 근위학교를 최우수성적으로 졸업 후 황제 알렉산드르 2세의 최측근이 될 기회가 주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극도로 타락한 지배 체제에 염증을 느낀 이 고귀한 영혼은 유형지와 다름 없는 시베리아에서 군인으로서의 경력을 시작한다. 이곳에서 유라시아 대륙의 형성과정에 대한 독창적인 사유를 완성하여 지리학자로 명망을 얻기도 하였지만, 인간의 문제에 더 천착(穿鑿)하였던 그는 30대에 서유럽을 둘러보고, 특히 스위스에서 아나키즘의 이상을 실천하고 있던 바쿠닌에 경도(傾倒)되어 노동자와 피억압 대중을 위해 삶을 바치고자 결심하게 된다. 귀국하여 정력적인 활동을 펼치던 중 진보세력에 미친 대대적인 탄압의 여파로 검거되어 악명 높은 페테르-파블로프스키 요새에 투옥당하고 만다. 2년간의 수형생활 끝에 친구들의 도움으로 소설 같은 탈옥을 감행한 대목은 - 이 사건은 그의 인생에서도 특별하게 여겨졌던 듯 별도의 장(chapter)으로 독립·상술되어 있다 -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긴박감이 있다. 이후 서유럽에 망명하여 펼친 저술활동을 담담하게 그리고 있다. 물론 단순하게 한 혁명가의 삶의 궤적만 따라가는 것은 아니다. 그가 바라본 역사적인 현실, 비참한 농노[노동자]들의 삶, 진보의 방향에 대한 자신의 관찰과 견해를 밝힘과 아울러,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에게 - 지금도 마찮가지지만 - 오해받고 있던 아나키즘 사상에 관하여 상세한 해석을 적절히 덧붙이고 있다. 요즘은 전혀 인기 없는 이데올로기라서 나 자신조차 그냥 ''모험주의적 테러집단''의 행동강령 쯤으로 인식하고 있던 아나키즘에 이처럼 심오한 뜻이 있을 줄이야(아! 용감한 무식함이여~)..... 일체의 국가 지배와 중앙집권적 체제를 부정하는 아나키즘은 여러 직업집단군(群)이 네트워크적 상호관계를 맺은 느슨한 연합을 목표로 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더욱 인간적이고 혁명의 합목적성에 부합하지만, 왜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과 상극이 될 수 밖에 없는가 - 레닌은 반혁명의 백군(白軍)보다 아나키스트들을 더 철저히 박멸하였다 - 짐작이 가는 부분이다. 아우구스티누스·루소·괴테·안데르센의 자서전과 함께 세계 5대 자서전이라고 한다. 물론 3대 걸작이니 5대 작품이니 하는 범주 자체가 범인(凡人)들의 어리석은 구분임은 분명하지만, 적어도 이 저작은 그 솔직담백함이나 간결한 문체의 아름다움(모국어가 아닌 영어로 쓰여졌다!), 담겨있는 사상의 심오함에 있어서 가히 최고의 자서전 중에 하나라고 손꼽기에 이런 영예가 부끄럽지 않다. 말미에 실려 있는 부록, 이문창 님의 "크로포트킨과 그의 시대"라는 60쪽의 논설은 이 혁명가의 사상과 베일에 싸여있던 자서전 이후 20여년간의 인생을 간결하게 요약한 가치있는 해제이다. 번역도 흠잡을 데 없이 깔금하고, 혁명가의 초상이 전면을 장식한 품위있는 표제가 돋보이는 바, 훌륭한 소장용 도서로도 부족함이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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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와 혁명, 한때 청년들의 가슴을 뜨겁게 달궜던 이 단어들은 어느덧 케케묵은 낡은 의미가 돼버렸다. 혼신의 힘을 바쳐 조금 더 살 만한 세상, 모두가 평등하게 삶을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겠다는 열정은 이제 불가능한 공상이 돼버렸다. 물론 자신이 진보주의자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진보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얘기일 뿐 대중의 가슴을 파고들지 못한다. 역사는 승리한 자의 것이라고 했던가. 사회주의 소련과 자본주의 미국이 전세계를 양분했을 때 어느 곳에서도 권력을 잡지 못한 아나키즘이 외면을 받은 것은 역사의 필연이었을까. 양 세력의 틈바구니에 끼었던 이들은 양쪽에 의해 왜곡되고, 외면 받을 수밖에 없었을 터. 그러나, 중앙권력을 혐오하고, 국가기구 자체를 부정하는 아나키스트 세력들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스스로 역사의 패배자가 되기를 원한 것은 아닐까. 흔히 '무정부주의'나 '테러리즘'으로만 알려진 아나키즘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책이 나왔으니, 바로 <크로포트킨 자서전>이다. 보로딘이라는 필명으로도 활동했던 크로포트킨은 1842년에서부터 1922년까지 활동한 아나키즘 사상가다. 러시아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그는 러시아 황실 경호를 책임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근위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장교 출신이면서, 독일의 저명한 지리학자 홈볼트의 오류를 교정하고 북극해 군도의 존재를 예측한 지리학자였다. 또한 아나키즘 사상가로 '빵의 정복' '상호부조론' '근대과학과 아나키즘' '윤리학' 등의 저서를 남긴 인물이다. 이 책은 귀족과 노동자, 황제의 시위, 문인, 학생, 관료, 과학자, 탐험가, 행정관, 혁명가로서 다양한 삶을 산 그를 통해 목가적이면서도 비극적이고, 낭만적인 한 시대를 보여준다. 충성스런 하인들과 선한 농노들의 모습, 봉건적인 가정생활, 공화정과 왕정이 교차되던 가운데 벌어지던 왕실내의 암투, 황제나 귀공작 같은 러시아 최상류층의 화려한 생활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아우구스티누스의 '참회록', 루소의 '고백록', 괴테의 '시와 진실', 안데르센의 '내 생애의 이야기'와 함께 세계 5대 자서전 중의 하나로 추천되는 것도 유려하면서 낭만적인 필체에서 비롯된다. 크로포트킨이 자서전에서 기록하는 시대는 그런 점에서 우리 시대와 맞닿아 있다. 우리에게 ‘계란으로 바위 치기’라는 속담이 있다면, 그 당시 러시아에는 ‘자기 이마로 돌담을 부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속담이 널리 퍼져 있었다. 사회의 모순을 목격하고도 눈을 돌리는 지식인들이 대다수였다. 그나마 비판적인 지식인들도 자신들을 따르라고 외칠 뿐 대중 속에서 그들과 함께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 이런 시대에서 크로포트킨은 러시아 명문 귀족의 작위와 젊은 나이에 쌓은 지리학자로서의 명성을 포기하고 혁명가의 길로 나섰다. “내가 이 고상한 정서의 세계에서 생활하기 위하여 소비하는 모든 것은 바로 땀 흘려 농사지어도 자식들에게 빵 한 조각 배불리 먹일 수 없는 농민들에게서 빼앗은 것이 아닌가”라는 물음은 크로포트킨을 투옥과 망명 생활로 이끌었다. 러시아혁명이 성공하고 사회주의 정부가 수립된 뒤에도 크로포트킨은 억압을 겪으며 혁명가로 살아야 했다. 크로포트킨이 걸었던 길은 마르크스레닌주의로 대표되던 사회주의의 길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크로포트킨이 신뢰했던 것은 과학적인 이론이나 혁명조직이 아니라 대중이었다. 대중이 스스로 자신의 욕구와 목소리를 내고 서로 학습하며 시민으로 성장하는 공화국, 그것이 크로포트킨의 이상이었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제도보다 선하다”고 믿었던 크로포트킨에게는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이념이나 제도보다 서로 보살피고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사회를 발전시키는 힘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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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은 분명 게바라보다 훨씬 앞서 태어난 사람이었으나,
저는 케바라의 전기를 읽은 후에 이 책을 읽게 되었습니다.
사실 자서전은 처음입니다.
읽을 기회는 있었으되, 망설였던 이유가 글을 쓰는 일 자체가 자신을 홀딱 벗겨 사람들 앞에 내세우는 거와 비슷하다던데 자신의 삶을 글로 옮기는 일은 더더욱 창피할 것이므로 자서전을 쓴 사람들의 화두는 삶을 객관화 해야 하고, 동시대인들에게 '나의 삶'이 어떻다고 말할 만큼 살았는지 감히 평가할 수 없을꺼란 생각에서 였습니다.
하지만 크로포트킨의 글은 자서전으로써 뿐만 아니라, 전기로써, 19세기 후반 민중운동의 역사서, 아나키즘의 철학서로써 더할나위 없이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어린 시절에서 군 복무시절까지의 글은 마치 작가가 제3자의 이야기를 소설로 옮긴듯이 거부감이 없습니다.(사실 모든 전기를 보면 신화적인 내용이 많이 있지요. 심지어 게바라의 빨간책에도...)
저는 이 책을 보는 내내 이 책이 100년전 사람의 글이라는 걸 잊어버리곤 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생각해 보니깐, 인간의 삶에는 시대를 초월하는 무언가가 존재하기 때문인거 같습니다. 참과 거짓을 직관할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의 글은 시간의 파괴성을 뛰어넘을 수 있는 것이지요. 저는 비록사회주의와 공산주의조차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지만 이 책을 통해서 계급사회에 대한 부조리나, 평등한 사회에 대한 열망이란 한 시대의 산물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란 걸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그의 사상에서 가장 나를 사로잡는 부분은 인간의 기저를 성선설에 두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윈의 진화론이나 맑스의 자본론은 인간의 욕구와 경쟁은 인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욕망에 가까운 것으로 규정한데 비해서, 그의 상호부조론은 인간의 욕구는 불평등과 부족함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그것이 해걸되면 과다한 욕망과 경쟁은 사라지리라고 보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책을 읽고 가장 크게 깨달은게 있다면, 아나키즘에 대해 올바른 시각을 갖게 된것입니다. 영화나 다른 소설책에서 보여지는 아나키즘이란 기존 체제를 전복하려는 테러리스트에 가깝게 묘사하였습니다만 그건 올바른 해석이 아니었습니다.
체게바라의 전기는 이론보다는 그의 삶의 괘적과 행동적인 전기에 많은 지면을 할애 했다면 크로포트킨은 자서전은 중간중간에 자신이 어떻게 아나키스트가 되어 가는지를 독자에게 설득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끝으로
이 책을 읽는 분중에서 19세기의 시대상이나 아나키즘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다면, 역자가 책의 끝부분에 자세히 소개한 부분을 미리 읽고 책을 보시는 것도 좋은 방법 같습니다.
[인상깊은구절] 기억이 자세히 않나지만, '혁명의 목표는 기존 정권의 붕괘가 아니라, 언제나 노동자의 평등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 목표를 잃었을때 혁명이라 할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