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란?
삶이란 어떤 것일까? ‘삶’, ‘Life’, ‘生’……. 다양한 언어로 표현하기는 쉬워도 정의(定義)하기는 어려운 단어다. 어쩌면 사람마다 자신만의 삶에 대한 정의가 있을지도 모른다. 각자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 느끼는 것이 다를 테니까.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선구자이자 러시아 국민 문학의 아버지로 유명한 알렉산드로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슬픈 날엔 참고 견디라 즐거운 날이 오고야 말리니, 왜 슬퍼하는가? 마음은 미래를 바라느니 현재는 한 없이 우울한 것 모든 것은 순식간에 지나가고 지나간 것은 훗날 소중하게 여겨지리라
라는 시(詩)를 남겼다. 어떤 삶이든 상관없이 삶에 순응하라는 의미로 읽혀진다. 하루하루가 고달픈 삶을 사는 이라면 이런 자세가 위로가 될 것이다. 에밀 아자르, 아니 로맹 가리(Romain Gary, 1914~1980)의 <자기 앞의 생>도 비슷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다. 1970년 이방인들이 밀집된 빈민지역인, 파리의 멜빌에 있는 아파트에서 창녀들의 아이들을 맡아 기르는 폴란드계 유대인 아줌마 로자의 손에서 아랍 소년 모하메드 카디르(이하 ‘모모’)가 성장해가는 모습을 그려가고 있다.
모모는
나는 영화에서 죽어가는 사람이 마지막 순간에 “여러분 각자 자기 일을 열심히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건 그가 생을 이해한다는 뜻이다. 감상에 젖어서 사람들을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쓸데없는 것이다. [p. 139]
라고 얘기한다. 이것만 보면, 저자가 모모의 입을 빌려 말하는 생(生)은 무척 건조할 것 같은데, 또 막상 소설 속에 그려지는 삶이 그렇지도 않은 것을 보면 묘(妙)하다.
생(生)을 긍정해야 버틸 수 있는
열네 살 모모의 주변에는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다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뒤 거리의 여자로 살아가다가 은퇴 후에는 주로 창녀의 자식을 맡아 키우게 된 폴란드 출신 유대인 로자 아줌마, 여자의 삶을 선택한 세네갈의 전직 권투선수 출신의 여장 남자 롤라, 첫사랑을 평생 잊지 못하는 알제리 출신 무슬림 노인 하밀, 나이지라아 출신의 멋쟁이 포주인 은다 아메데, 거리에서 묘기를 부리는 카메룬 출신의 청소부 흑인 왈룸바…….
로자 아줌마는 폴란드 태생 유태인이었지만, 수년간 모로코와 알제리에서 몸으로 벌어먹고 살았기 때문에 아랍어를 웬만큼 할 줄 알았다. 유태어도 알았기 때문에 우리는 곧잘 유태어로 이야기하곤 했다. [p. 13]
오층에 사는 롤라 아줌마는 여장 남자로, 볼로뉴 숲에서 일했다. 바다를 건너오기 전에는 세네갈에서 권투 챔피언이었다고 했다. [p. 18]
하밀 할아버지는 알제리에서 온 사람이었다. 삼십 년 전 알제리에서 메카로 순례를 떠났었다. [p. 48]
생 미셸 거리에서 불을 삼키는 묘기로 구경꾼을 끌어 모으던 왈룸바 씨도 찾아와 로자 아줌마 앞에서 자기 재주를 보여주었다. 왈룸바 씨는 카메룬 출신의 흑인으로 청소부 일을 하고 있었는데,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그는 여러 명의 아내와 자식들을 고향에 두고 왔다. 그의 불 삼키는 솜씨는 가히 올림픽 금메달 감이었고, 그는 여가시간을 모두 이 일에 바쳤다. [pp. 196~197]
이들은 모두 사회로부터 소외되어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지만, 서로에게 부족한 것을 채워주려고 노력한다. 거창하게 생각할 필요 없다. 그저 서로에게 관심을 갖고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에서 시작하면 된다. 한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여러 사람이 나눔으로써 그 무게를 줄이고 상황을 다소 누그러뜨리는 것처럼.
그래서 모모의 아버지 유세프 카디르가 자기 아들을 찾으러 왔다가, 아랍인[모하메드]이 아닌 유대인[모세]으로 키워졌다는 오해에 충격을 받아 죽은 다음에 로자 아줌마와 모모의 모습을 그린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우리는 좀 전에 일어난 일에 대해 서로 말하지 않으려 애썼다. 머리만 복잡해질 것이 뻔했다. 나는 그녀의 발치에 있는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서, 그녀가 나를 지키기 위해 해준 일들에 감사하며 그녀의 손을 잡아주었다. 우리가 세상에서 가진 것이라고는 우리 둘뿐이었다. 그리고 그것만은 지켜야 했다. 아주 못생긴 사람과 살다 보면 그가 못생겼기 때문에 사랑하게 되는 것 같다. 정말로 못생긴 사람들은 무언가 결핍 상태에 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장점이 된다. [p. 232]
이 부분은 아무리 힘들어 버거운 삶도, 혼자가 아닌 ‘함께’라면 살만하다고 얘기가 아닐까?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역설적으로 각자가 자기 앞에 놓인 생(生)을 긍정하고 버티기 때문에 가능한 것일지도 모른다. |
'사랑해야한다'는 문장으로 끝나는 이 슬프고 아름다운 책을 덮는 순간 독자들은 이 명령을 따라야만할것 같아서 초조해진다. 그래서 일단 이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준 작가를 사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마침 에밀 아자르 - 로맹가리의 이야기는 소설만큼이나 드라마틱해서 더더욱 작가를 사랑하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 역시 자기 앞의 생을 읽고 나서 로맹가리의 팬이 되어 국내에 출간된 로맹가리 책은 다 사모았다. 유럽의 교육도 좋아하고, 연도, 하늘의 뿌리도, ..페루..., 새벽의 약속도 다 조금씩은 사랑하지만 여전히 가장 사랑하는 책은 <자기 앞의 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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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참 의미를 만나다에밀 아자르 장편소설 『자기 앞의 生』 (문학동네, 2022)을 읽고
지구가 멸망해서 단 한 권의 책만 남겨 둬야 한다면 어떤 책을 남겨 두고 싶은가? 어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진행자가 말했을 때, 그 작가는 서슴없이 말했다. “당연히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 이지요.” 그 이유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사랑을 실천했는가를 말해주는 책이기 때문이라고.
오래전부터 책상에서 대기하고 있던 이 책을 며칠 내린 비와 눈 덕분에 오롯이 빠져들어 읽을 수 있었다. 서사를 따라가며 소설을 읽으면서도 마치, 잠언집을 읽는 것처럼 마음에 닿아 숙연해지고, 고개가 끄덕여지고, 눈물짓게 해서 밑줄 긋게 만드는 문장의 연속이었다.
로맹 가리가 『하늘의 뿌리』로 콩쿠르상을 받은 이후, 가명으로 발표한 『자기 앞의 生』으로 콩쿠르상을 또 받아 사상 최초로 한 사람이 두 번 받았다고 한다. 로맹 가리는 「에밀 아자르의 삶과 죽음」에서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힌다. “젊은 시절, 초창기, 첫 소설에 대한 향수, 다시 시작하고 싶은 욕구 같은 것에 시달렸다. 새로 시작하는 것, 다른 존재로 사는 것이 내 존재에 큰 유혹으로 다가왔다.”라고 말했다. 그는 틀에 박힌 고정관념을 거부한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다. 이 책은 로맹 가리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다.
『자기 앞의 生』은 열네 살 모모가 서술자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 집에서 자란다. 로자 아줌마는 젊었을 때는 창녀 일을 했다. 애인이라는 남자가 재산을 모두 빼앗고, 유태인이라고 경찰에 신고한 후부터 삶이 더 어렵게 되었다. 새벽에 경찰이 잡으러 와서 유태인 집단수용소로 끌려가 죽기 직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던 로자 아줌마는 새벽 초인종 소리와 경찰을 극도로 무서워한다.
50대부터 창녀들이 맡기는 아이들을 키워주는 일을 한다. 늘 살림이 가난했기 때문에 엘리베이터도 없는 7층 아파트에서 여러 명의 아이들을 키운다. 프랑스의 벨빌 지역에는 유태인과 아랍인, 흑인들이 많이 살았다. 합법적인 일은 아니라서 가짜 서류를 만들어 대항책을 갖고 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그 아이들은 집단보호소로 가게 되기 때문이다.
모모는 로자 아줌마와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예닐곱 살에 자신을 그토록 사랑하는 로자 아줌마가 누군가가 보내준 돈을 받고 자신을 키워주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 종일 운다. 그렇지만 뚱뚱하고 소리도 잘 지르고 거친 로자 아줌마를 미워할 수는 없다. 어떤 보모들은 시끄럽고 고약하게 구는 아이들에게 신경안정제를 먹이는데 로자 아줌마는 거꾸로 자신이 신경안정제를 먹고 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편하게 미소 짓고 지켜보았다고 한다.
송금이 끊긴 모모에게 친절할 이유가 없었는데도 계속 돌보았으며, 친부모에 대해 자세히 알려주지 않았다. 친부모는 알려주지 않을 사정이 있지만. 모모는 꼭 만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로자 아줌마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에.
모모는 학교에 가려고 해도 학교에서 받아주지 않는다. 나이보다 조숙해 보이고, 걸맞지 않은 말을 하는 등 정신적인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판단에서였다. 나이보다 조숙했던 것은 로자 아줌마가 모모가 자라면 떠나게 될까 봐서 네 살이나 속였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알게 된 모모로서도 로자 아줌마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하나 더 늘었을 뿐이었다.
모모는 젊은 날 양탄자 행상을 하며 세상을 두루 다녀 보았고, 항상 빅토르 위고의 책을 끼고 다니는 하밀 할아버지를 좋아한다. 하밀 할아버지는 모르는 것이 없어서 모모는 “내가 아는 모든 것은 하밀 할아버지가 가르쳐준 것이다.”(p126)라고 고백한다.
로자 아줌마는 60세가 넘어 늙어가고 심한 비만으로 7층 계단을 오르내리기 힘들어 외출도 어려운 지경이 된다. 지병이 많아 심장과 뇌의 문제가 심각해진다. 병원으로 옮겨서 장기 치료를 해야 하는데 로자 아줌마는 병원에서 식물인간으로 연명하는 삶보다 안락사를 원한다. 그렇지만 프랑스에서 안락사는 허용되지 않는 큰 범법행위다.
맡아 기르던 아이들은 하나둘 독립하거나 입양시키고 모모만 남게 된다. 늙고 병든 로자 아줌마를 주변의 사람들이 힘을 합해 돕는다. 심장이 약한 의사 카츠 선생님을 업어 나르는 지움 씨네 형제들 덕분에 로자 아줌마는 정기적인 검진을 받을 수 있다.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로자 아줌마를 위해 밤새도록 북춤을 추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 주는 ‘왕룸바 일행’ 그래도 시끄럽다는 민원이 단 한 번도, 단 한 명도 없었다. 여장 남자인 룰라 아줌마는 돌볼 아이도 없고, 지원이 끊긴 늙고 아픈 로자 아줌마와 어린 모모만 사는 집을 돌봐주고 먹을 것을 가져다주는 천사 같은 사람이다.
“죽음은 사람에게 중요성을 부여해 주고, 사람들은 죽음이 다가온 사람을 더 존경하게 되기 때문이다.”(p234)
열네 살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부축해 운동시키고, 음악도 틀어주며, 기저귀를 갈아주고 씻기는 등 병시중을 한다. 병원으로 가기 싫어하는 로자 아줌마와 끝까지 지켜주고 싶은 모모. 7층의 집에서도 머물 수 없게 된 모모는 로자 아줌마를 지하실로 옮긴다. 로자 아줌마가 비밀 동굴로 만들어 놓은 곳이다. 낡은 침대와 먼지투성이인 곳이었지만 로자 아줌마의 안식처였다. 로자 아줌마가 죽고 3주일이나 함께 잠자고, 함께 죽고 싶어하다 발견된다.
로맹 가리의 『새벽의 약속』을 읽었을 때와 비슷한 정서나 은유에 빛나는 문장들, 위트가 느껴졌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生』이 발표되었을 때 어떤 비평가도 알아내지 못했다는 것이 의아했다. 내가 익히 알고 책을 읽었기 때문에 그렇게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 앞의 生』에는 제국주의인 프랑스의 법과 경찰, 의료법에 대한 비판들이 곳곳에 나온다. 콩쿠르상을 주는 심사위원들이 그런 내용에 치우치지 않고 작품의 문학적 성과와 내용을 높이 평가하여 상을 주었다는 부분이 역시 프랑스라는 감탄을 갖게 했다.
책에서 어려운 상황이 묘사될 때는 하밀 할아버지의 말을 빌려서 말하곤 하는데 그 모든 말들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꼭 알아야 할 내용들이라 저절로 수긍하게 된다. 늙고 병든 하밀 할아버지나 로자 아줌마를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와 마음이 감동스러웠다. 어른을 존경하는 마음이 동양사상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늙고 힘없는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바로 돈과 찾아오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이 인상 깊었다.
생이 우리에게 어떤 시련을 준다고 해도 원망하지 않고 이겨내는 힘은 무엇일까를 생각하게 했다.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아이들을 맡아서 키운 사람 역시 가난한 로자 아줌마였다. 로자 아줌마가 늙고 병들어 아무것도 없을 때, 그를 도와준 사람들도 힘없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누구보다 먼저 달려와 병자를 씻겼고, 음식을 나눴으며, 로자 아줌마를 7층 계단을 오르내릴 수 있도록 도왔다.
로자 아줌마의 생에, 모모의 생에 닥친 고난들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많이 났고, 그 어려운 상황을 오직 사랑으로 헤쳐나가는 사람들이 감동이었다. 내게 닥친 생의 고난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구나. 아니, 너무나도 감사한 것이었구나. 한 권의 책이 이토록 사람의 마음을 휘감을 수 있다는 것이 감사하고 놀라웠다. |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p.256) '살아갈 능력도 살고 싶지도 않은 사람의 목구멍에 억지로 생을 처넣는 것보다 더 구역질나는 일은 없다고 생각한다'(p.300) 책을 읽다가 이 두 문장 위에 잠시 생각이 머문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므로 소중한 것일텐데 억지로라고 한들 생을 연장하는것이 구역질나는 것일수 있을까? 얼핏 모순처럼 느껴지는 두 문장에 한참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스스로 생을 마감한 작가의 삶에 한발짝 더 다가선 후에야 고개를 끄덕일수 있었다. 죽음도 생의 일부다. 삶과 죽음이란 이항대립적 세상속에서 우리는 각자 자기앞의 생을 살아가며 죽음을 마주할 수 밖에 없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수는 없으므로.. 그러면 작가가 책으로 또 자신의 삶으로 말하고자 했던 자기 앞의 생이란 무엇일까? 그건 죽음까지 포함한 생일 것이다. 죽음의 자기결정권 자신이 선택할 수 없는 죽음이라면 그건 온전한 자신의 생이라고 할 수 없다. 소중한 생인 만큼 생을 마감하는 방식도 자신이 선택할 수 있어야한다. 그렇기에 주인공 모모는 끝까지 목구멍에 생을 처넣으려는 자들로부터 로자 아줌마의 죽음을 지키려했던 것이 아닐까? 지금껏 힘든 삶을 스스로 지켜왔는데 마지막 죽음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너무나 슬픈일이었을 테니까 최소한 살아갈 능력도 살아갈 의지도 없다면 죽음은 선택될 수 있어야 한다. 슬프지만 해피엔딩이다. 그래서 나는 작가에 대하여 불행하게도 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는 표현 또한 적절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스스로의 선택으로 행복하게 생을 마감한 것이리라. 죽음도 생을 사랑하는 또다른 방식이었으리라. 작가의 유서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고한다. "나는 마침내 완전히 나를 표현했다" . 어두운 이야기속에 작가의 생에대한 사유의 흔적들이 새겨져있다. 부족하지만 짤막한 한줄평으로 그 흔적들을 더듬어 본다. 《우리는 생을 사랑하여야 한다. 죽음까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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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독서모임 pick
에밀 아자르의 장편소설 <자기 앞의 생>이다.
<자기 앞의 생>은 단편소설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로 우리에게도 유명한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발표했던 소설로 1975년 공쿠르상을 받은 작품이다.
부모에게 버림받은 열네 살 소년 모모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아우슈비츠에 강제로 끌려갔다 온 로자 아줌마 인종차별을 받는 아랍인 하밀 할아버지 생활을 위해 몸으로 벌어먹고 사는 창녀들 그리고 버림받은 창녀의 자식들 가족도 친구도 없는 노인들 작가는 어린 모모의 눈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소년의 눈에 비친 세상은 각박하고 모질기만 하다. 매순간을 그저 '살아내야' 하는 곳이다. 가난하고 병들고 소외된 사람들의 이야기가 책장을 가득 메운다.
모모가 만나고 사랑하는 그들은 세상의 중심에서 비껴나 밑바닥 인생을 살아가지만, 절망에 지쳐 주저앉거나 포기해버리지 않는다. 모모와 창녀에게 버림받은 아이를 맡아 키워주는 창녀 출신의 유태인 로자 아줌마뿐 아니라 주변의 모든 이들이 모모의 스승이다. 모모는 이들을 통해 슬픔과 절망을 딛고 살아가는 법, 삶을 껴안고 그 안의 상처를 보듬는 법을 배운다.
“내가 이렇게 할아버지를 부른 것은 그를 사랑하고 그의 이름을 아는 사람이 아직 있다는 것, 그리고 그에게 그런 이름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주기 위해서였다.”
“생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더 이상 기웃거리지 않고 곧장 집으로 향했다. 내게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로자 아줌마 곁에 앉아 있다고 싶다는 것. 적어도 그녀와 나는 같은 부류의, 똥 같은 사람들이었으니까.”
모모와 로자 아줌마 사이에 오가는 소중한 사랑은, 인종과 나이, 성별을 초월한 따뜻한 것이다. “사랑해야 한다.” 작가는 소설의 마지막 문장에 소년의 목소리를 빌어 '사랑해야 한다'라는 진리를 전달한다.
가진 것 없이 세상에 내쳐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삶에 내재한 신비롭고 경이로운 비밀을 이야기하는 소설 <자기 앞의 생>이다. |
자기 앞의 생 - 에밀 아자르 이런류는 사실 읽어도읽어도 집중이 안되는 편인데, 오히려 저같은 사람이 읽기엔 좋은 책이라고 추천받아서 읽게 되었어요. 한페이지도 넘기기 어려워하는 편인데 흥미롭기도 하고 어린 모모에 대해서 이해하기도 하면서 읽었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연상되고 머리속으로 그려지는 책 속 풍경들이 지금도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많은 분들이 인생책으로 꼽는 이유를 알게 되었어요. |
삶에 대한 고민을 하는, 성실하고 참한 사람들에게 권유하거나 한권 사주고 싶은 책. 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한번 읽어보시게들.
주변에 글 좋아하는 이들이 한번쯤은 권유해 본 책이 바로 이 책이다. '자기 앞의 생'. 근데 생각해보니, 이 책 제목 자체가 벌써 많은 걸 암시해준다. 뿌리 뽑힐 듯 고통스러운 20대와 30대 시절이 끝나니, 드디어 이 책을 읽어보고 싶었다. 내 마음이 안 내키면, 죽어도 시도 안하는 내 성격상. 거의 수년을 제목만 읽다가 드디어 책장을 넘겼다. 성실한 사람들이 읽으면 분명, 내면에 용기를 주는 책이다. 올 여름, 휴가 징징거리는 아이들 돌보느라 지쳤을 때, 다시 읽으면 분노를 삭히고, 달관의 1인자가 되어보리오다. 이상. |
주위에 추천을 받아 구입해 본 책입니다. 그 후 소장하고 싶고 선물 하고 싶어 몇 권 더 구입하기도 했습니다. 삶이 답답하고 힘들때마다 꺼내 읽고 싶어지는 책. 모모 이야기를 읽으며 스스로를 다독이게 됩니다. 자기 앞의 생 추천 하고 싶네요. 작가의 다른 책도 찾아 읽어보고싶어요.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자기 앞의 생 |
워낙 평들이 좋고 인생작이었다는 사람들이 많아서 별 고민 없이 샀던 책입니다. 그런데 읽어보니 글쎄...무엇때문에 좋다는 건지 저는 잘 모르겠네요ㅠ 이런 것도 사랑의 단면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내용인 것 같은데 제가 너무 거창한 걸 생각하고 선택했나봅니다. 할아버지가 말한,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이것도 그다지 공감되지 않고요. 사랑에 냉소적인 저같은 사람한테는 썩 와닿지 않는 책이었던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