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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흥도서관에서 빌린 책이다.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이라는 이름에서 신뢰를 느끼고 빌렸는데, 집에 온 순간 '아차!' 싶었다. 나는 니체의 책을 두 권을 읽었는데, 두 권 모두 힘겹게 책장을 넘겼고, 완독한 뒤에도 무엇을 읽었는지 남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날이 너무 더운 탓에 내가 실수를 했나 보다. 그래도 지금까지 서울대 선정 인문고전을 읽으면서 후회를 한 적이 없었고, 만화로 되어 있으니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기대를 해보았다. 그런 인연으로 만난 책을 읽으면서 무엇을 느꼈는지 몇 가지만 적어보겠다.
첫째, 니체에 얽힌 추억이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니체의 책을 처음 만난 것은 고교 시절이었다. 학교 도서관에 이 책이 있기에 빌렸는데, 그때는 니체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제목이 매력적이라서 대출을 받았다. 너무도 많은 시일이 지났으므로 기억이 흐릿하지만, 읽는 내내 답답했다. 전체적으로 주인공인 차라투스트라가 이곳저곳을 다니면서 여러 사람을 만나는 내용인데, 소설이라고 할 수도 없고, 무슨 말을 하는지 잘 이해도 안 갔다. 그야말로 기를 쓰면서 책장을 넘겼지만, 머리에 남는 것은 거의 없었다.
두 번째로 만난 것이 2013년에 서평단에서 받은 『우울할 땐 니체』였다. 책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황이고, 니체라는 사람이 좀 어렵게 느껴졌지만,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아마도 우울할 때 이 책을 읽으면 마음이 편안해지는가 보다, 라고 기대를 했다. 그러나 정말 힘겹게 책장을 넘겼다. 그 책을 읽고 쓴 나의 리뷰의 일부이다.
"내가 깨달은 것은 제목 정도이다. '우울할 땐 니체'를 읽으면 그 뜻을 생각하느라고 우울함을 잊을 지도 모른다는 것……. 아무튼 저자는 니체를 이해했으니 이 책을 썼을 테고, 역자는 뜻을 파악했으니 책을 옮겼을 것이다. 출판사 역시 그 의미를 짚었기에 이 책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니체를 이해를 한 사람은 이 책을 통해 우울함에서 벗어날지도 모르지만, 나는 더욱 마음이 무거워지는 듯했다. 이 책이 뜻있는 독자를 많이 만나서 이 땅의 인문학을 한 차원 높이는 디딤돌이 되었으면 좋겠다."
그 책의 독서는 책을 읽었다기보다 책장을 넘기는 수준이었을 것이다. 문장 하나하나는 어렵지 않고, 가끔 가슴을 울리는 명문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연결이 안 되니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런데 이 리뷰가 예스24에서 우수 리뷰로 뽑혀서 어리둥절한 추억이 있다. 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솔직하게 쓴 마음을 격려하기 위해서였을까?
학창 시절에 읽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도 그런 느낌이었던 듯하다. 수십 개의 이야기들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나오는 대화가 좋게 말하면 선문답이고, 나쁘게 말하면 횡설수설처럼 들렸다. 요즘은 몸이 고단해서 개인적으로 독서 실적이 아주 저조한데 하필이면 그런 추억이 있는 이 책을 빌렸을까, 내가 책을 고를 때 정신이 없었나 보다, 라고 생각하면서 책장을 넘겼다.
둘째, 니체에 대해 인간적인 친근감을 느꼈다. 개인적으로 니체를 좋아하지 않았다. 철학이라는 학문이 어렵기도 하지만, 특히 니체의 저서나 그에 관한 책을 읽으면서 두 번이나 진땀을 흘렸으므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의 대표적인 말이 '신은 죽었다'인데, 가톨릭 신자인 나로서는 인정하기 힘든 말이기도 했다.
이 책은 모두 11장으로 짜여 있는데 1장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어떤 책인지 설명하고 있고, 2장은 니체가 어떤 사람인지 들려주고 있으며, 3장은 '신은 죽었다'의 의미가 무엇인지 풀이하고 있다. 즉 이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만화로 꾸민 것이 아니라, 니체와 그의 사상과 책에 대해 알려주는 책인 것이다.
이 책에 대해 친밀감을 느낀 첫 번째 이유는 저자는 몇 번이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포함해서 니체의 책들이 읽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이다. 니체에 대해서 두 번째 읽은 『우울할 땐 니체』처럼 책을 읽으면 우울한 마음이 사라질 듯 독자를 유혹한 뒤 오히려 더욱 답답하게 하는 제목보다는 쉽지 않은 책이라는 것을 여러 번 강조하는 것이 오히려 부담을 덜어준 것이다. 주사를 맞을 때도 그냥 주사를 놓는 것보다 '따끔할 거예요.'라고 예고를 하면 미리 긴장을 하므로 덜 아픈 것과 같은 이치다.
니체의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대를 이어서 목사였고, 외할아버지도 목사였다고 한다. 니체도 어린 시절에는 목사를 꿈꾸었다고 하는데, 그런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한 이유가 무엇일까?
니체가 5세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고, 6세 때에 남동생마저 병사했다. 그 후 니체의 가족은 할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함께 사는 가족은 할머니, 어머니, 두 명의 고모, 여동생까지 여섯 명 중에 남자는 니체뿐이었다. 이 책에서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았지만, 할머니와 어머니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듯하고 노처녀인 두 명의 고모와 어머니 사이에 그랬을 것을 암시하고 있다. 여동생에게 있어서 니체는 아버지이자 오빠면서 숭배의 대상이기도 했다. 집안의 모든 여성들이 니체에게 집착했고, 어린 니체는 그것이 힘겨웠을 것이다. 특히 경쟁적으로 니체에게 집착하는 어머니와 여동생은 큰 부담이었다. 니체는 어린 시절부터 위장 장애, 극심한 두통, 눈의 통증 등으로 고통을 겪었는데 가족으로 인한 스트레스가 상당한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여동생은 성장한 이후에도 니체를 괴롭혔다. 니체가 사랑한 여성인 살로메에게 질투를 느낀 나머니 둘을 이간질해서 갈라서게 했고, 니체에 관한 악소문(나치주의자, 인종 차별주의자, 반유태주의자 등)의 상당수는 니체 사후에 사람들의 관심을 끌기 위한 여동생의 모함 또는 과장에서 나왔다고 한다. 끝내 정신병 진단을 받은 니체는 혼미한 상태에서 여동생의 간호를 받으며 살았는데, 그 기간이 니체에게는 감옥 같은 나날이었으리라고 본다.
문득 허클베리 핀이 생각났다. 그는 톰 소여와 함께 인디안 조가 숨겨둔 보물을 발견한 뒤에 더글라스 부인에게 양육이 맡겨졌다. 핀은 안락하지만 규칙적인 생활을 포기하고 부인에게서 탈출을 하면서 『허클베리 핀의 모험』이 전개 된다.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행복한 결말이 되면서 셀리 부인의 양자가 되지만…….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핀이 거기서도 탈출을 할 것임을 암시하고 있다.
니체가 『허클베리 핀의 모험』을 읽었다면, 그래서 좀 더 일찍 어머니와 여동생의 그늘에서 탈출을 했다면 만년의 고통은 없었을지 모른다. 물론 그런 고통이 있었기에 니체의 세계적인 명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가 나올 수 있었고, 허클베리 핀은 자유로운 영혼은 얻었을지 모르지만 책을 쓰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런저런 번민 속에 살아간 니체에게 인간적인 친밀감을 느끼면서 이 책에 애정을 지니고 읽을 수 있었다.
셋째, '신은 죽었다'의 의미를 짐작하게 되었다. 이 말로 인해서 니체는 기독교인들의 공적이 되다시피 했을 것이다. 그러나 니체의 진의는 신의 죽음이 아니라 신을 죽게 한 인간의 욕심을 꾸짖는 것이다. 니체는 신을 떠난 것이 아니라 보다 영원한 신의 사랑을 추구한 것이라고 느껴졌다.
"신은 죽었다'는 차라투스트라(영어식 표기로는 조로아스터)가 세상에 나오면서 (니체의 책 속에서 설정한 가상 현실) 처음 만난 성자에게 한 말이다. 이 대목을 몇 번은 읽었지만 사실 완벽하게 이해가 안 된다. 다만 이런 뜻이 아닌가 싶다.
불완전한 존재인 사람은 완전한 존재와 완전한 세계를 바라는데,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신과 천국이라는 것이다. 애초부터 신과 천국이 있는 것이 아니고, 불완전하고 나약한 존재인 인간의 관념 속에서 만들어진 것이니, 그 신은 존재하지 않은 허구, 그러니 죽었다는 것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완전한 신이 있다면 그는 살해당했고, 살인범은 인간이라고 했다. 불완전하고 나약한 인간은 자신의 모든 것을 알고 연민을 지니고 있는 신의 존재를 견딜 수 없다고 했다. 누군가 자신을 동정하는 것만큼 자신을 초라하게 하는 것도 없고, 추악한 인간은 자신을 불쌍히 여기는 신을 증오하게 되었고, 결국 신은 떠났다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를 고발하고, 로마 법정에서 예수를 죽인 것은 인간이 신을 죽인 것이 아니겠는가? 신은 추악한 인간들에 의해 수없이 죽었다는 것이다.
니체는 기독교와 사제들도 신을 죽인 공범이라고 비판했다.
"니체가 보기에 기독교의 사제들과 그들이 세운 교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전했던 가르침을 왜곡하고 오히려 예수가 그토록 비판했던 가치들로 무장해 있었어. 그래서 니체는 교회를 예수의 무덤이라고 불렀단다. (이 책 63쪽)"
니체가 교회와 사제들을 신의 살해자로 지목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예수를 너무나 위대한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신이 죽었다'는 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음으로써 인류를 구원했듯이, 더 큰 부활과 구원을 제시한 것이 아닌가 싶다.
넷째, 문득 이상(김해경)의 작품들이 떠올랐다. 학창 시절에 그의 작품들인 「날개」와 「오감도」들을 배울 때, 국어선생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상은 시대를 앞서 간 천재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이 잘 이해가 안 갈 수가 있다."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났지만, 나는 아직도 이상의 작품들이 어렵다. 얼마나 많은 세월을 앞서갔다는 것인가? 니체의 작품이나 사상 역시 그렇다. 처음 만났던 학창 시절이나 두 번째 만났던 10여 년 전이나 세 번째로 만난 지금이나 여전히 어렵다. 책장을 덮고서도 나의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 니체의 사상을 제대로 이해한 것인지 잘 모르겠다. 한 구절 한 구절은 어려울 것이 없고, 한 대목 한 대목은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전체적으로는 종합이 되지 않는다.
내가 이해력이 떨어지는 것일까? 긴 세월 동안 국어교사로 생활했고, 읽고 리뷰를 쓴 책만 해도 2천여 권인 나다. 그런 내가 어려움을 느낀다면, 니체는 도대체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글을 쓴 것일까? 100년 후의 독자들에게도 이상의 작품은 난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니체 역시 그렇지 않을까 싶다.
다섯째, 니체에 대한 책 중에서 가장 친밀감이 느껴진 책이다. 지금까지 읽은 3권 중에서 이 책이 가장 흥미 있었다. 그나마 몰입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이다. 책장을 덮고 났을 때는 무엇을 읽었는지 흐릿하게 느껴졌지만, 읽을 당시에는 이해가 되는 듯 느껴졌다. 아마도 최대한 독자의 입장에서 글을 꾸민 편자들의 노력 때문이 아닌가 싶다.
이 책을 누구에게 권할까? 잘 모르겠다. 초등학생은 물론이고, 고등학생 이상이라도 니체의 사상을 이해할 수 있을까 싶다. 그러나 니체에 대하여 알고 싶은 독자는 이 책을 가장 먼저 읽었으면 좋을 듯하다. 책장을 덮으면서 느낀 마음을 한 세 번쯤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니체에게 친근감과 매력을 느끼게 하는 책이라는 의미이다. 확실한 것은 니체의 글은 독자의 교양을 한 차원 높여준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 아닌가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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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없는 것은 유통기한도 없다. 잘 만든 모조 음식물은 썩지도 않지만 먹을 수도 없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는 그림의 떡같은 고전의 레시피를 깊게 이해하여 현재의 재료를 찾아내어 먹을 수 있는 음식물로 만든 책처럼 느껴진다.
만화로 이루어진 책에 삽입된 에피소드와 그림들은 한국어 문화권내에서 최근에 창작되거나 일어난 영화나 사건들을 차용하여 신선하다.
차라투스트라의 관념적 세상에서 탈피하여 현실을 직면하는 자세는 한국의 실학정신과 샤르트르의 실존주의를 떠올리게 하며 그리스인 조르바나 양귀자작가의 숨은 꽃에 등장하는 목수나 황석영 작가가 TV프로그램에서 발언한 [오늘을 살라]라는 문장의 선조 DNA를 느끼게 해준다.
고전은 그 자체로도 세상을 보는 시각을 지탱하는 뻣뻣해진 목을 유연하게도 해주지만 그로인해 문학작품 뒷편의 배경또한 바라볼 수 있는 디딤돌같은 역할도 해준다.
그러한 고전을 그림의 떡이 아닌 신선한 메뉴로 되살려낸 주니어 김영사의 [만화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생의 발전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는 부모와 아이들에게 좋은 선물이 되리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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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도 귀엽고 만화 그리시는 분이 유머 간간히 넣어서 재밌어요 제가 짜라투스타라를 읽다니!! 좋은 시대에 태어나서 너므나 감사합니다 !!!! 에머모호한 표현이 많은 책을 액기스를 뽑아서 설명해 줘서 너므 감사하구여 우와 요즘 학생들은 진짜 공부할만 나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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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은 죽었다!”고 외쳤던 철학자 니체의 책. 어렸을 적, 남들도 다 보았다기에 펼쳐 보고는 채 몇 장을 넘기지 못하고 포기했었던 바로 그 책이다. 이번에는 쉬운 만화로 도전했으나 어렵기는 매 마찬가지. 그래도 완독했으니 성공. 관념론이나 형이상학을 거부하고 오로지 현재 인간이 발딛고 있는 대지만이 진실이라며 여기에서 출발해 ‘위버멘쉬’를 향한 끝없는 투쟁을 강조하는 그의 주장은 자못 충격적이다.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개념이 이 투쟁에 역행하는 게으른 자들의 악습이라는 이야기는 한편 위험해 보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과거 신에게 종속되었던 봉건제를 극복하고 인간 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르네상스라 하며 극찬하고는 하는데 정신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본격적인 르네상스를 맞이한 것은 니체 이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만큼 혁명적 주장. 아니 니체가 아무리 부르짖어도 그들은 아직도 신에게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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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회귀의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방법? |